
1942년, 오스왈드 모즐리의 리비아 침공 계획 중 미노타우로스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제 1단계는
연합군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 방어선은 튀니지 국경선에 마주하고 있던 리비아 왕국 해안의 주와라에 있는 방어진지로부터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의 제1양시칠리아 왕립 여단이 지키는 전초기지 바드르까지 뻗어 있었다.
이 마을에는 7개의 진지가 있었는데, 각각 보병여단들이 대포와 철조망, 지뢰밭을 다음 진지까지 쳐 놓고 방어했다.
후방에는 롬멜 장군이 기갑예비대를 배치해 역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어떻게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빠른 시일 내에 점령할 생각이었다.
트리폴리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가뜩이나 기름도 부족한 코뮌군의 작전능력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될 터였다.
...(중략) 5월 27일 새벽, 바드르의 남서쪽에 위치한 날루트를 지키고 있던 오스만 제국군 제26 차량화여단이
코뮌군 프랑스 르끌레르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소개령을 마친 바드르에서 외롭게 진지를 지키고 있던 가리볼디 장군의 제1양시칠리아 여단은
밤새 사막에 울려퍼지는 전차 엔진 소리를 들으며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정찰대가 적이 이미 주둔지의 뒤에 있으며 보급선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했다.
가리볼디 장군의 휘하 병력 약 5천 명 중 절반은 프랑스 국민당의 함락 당시 탈출한 자유 프랑스군이였으며,
나머지는 식민지 병사 2개 대대와 해병대로 이뤄져 있었다.
코뮌군의 르끌레르 사단 전차들은 오스만군 차량화 여단을 궤멸시킨 여세를 몰아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의 제 1양시칠리아 여단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시칠리아 포병들이 프랑스제 75mm야전포와 88mm 대공포로 전차 32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단 6대만이 겨우 철조망과 지뢰밭을 통과했지만, 자유 프랑스군들은 버벅거리고 있는 코뮌군 전차 위에 기어올라
좁은 틈이나 해치를 통해 전차 안에 총을 쏘아 제압해버렸다.
코뮌군 전차부대의 공격이 어리석게도 보병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자유 프랑스군은 용맹하게 싸워 적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연대장을 포함한 91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한 브리튼 연방군 제 81경보병사단과도 소규모 교전 끝에 물러가게 했다.
드골은 "알제리 국민당 망명정부의 항복 이후, 처음으로 빨갱이 놈들에 한 방 먹여줬다."고 이날의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몽고메리의 과감한 계획은 기대했던 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바르드에 있는 시칠리아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리라는 몽고메리의 기대와 전혀 달리, 시칠리아군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이제 몽고메리는 크게 고심하게 되었고, 참모장은 아프리카 기갑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작전은 대규모 위력정찰에 지나지 않았다고 브리튼 연방군 총사령부에 보고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코뮌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는데, 연합군 역시 전차를 충분히 모아 코뮌군을 역습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중략)브리튼군은 '프라이팬 놀이', 오스만군은 '리비아 모래케밥'이라 부르며 서로 치를 떨었던 전투가 5월 31일까지 이어지는 동안,
몽고메리는 휘하 주력을 오스만군 150여단 쪽에 투입했다.
전차와 야포, 폭격기를 동원한 엄청난 맹공격이 가해졌다.
여단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며 브리튼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프랑스 코뮌군 지휘관들이 반격에 계속 실패하면서, 그들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
다시 기회를 잡은 몽고메리는, 남쪽으로부터 주와라 방어전선을 붕괴시키기 위해
바드르에 있는 시칠리아군을 격파할 것을 제81경사단과 프랑스 코뮌군 르끌레르 사단에 명령했다.

6월 3일, 가리불디의 양시칠리아 왕국군 1개 여단은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압도적인 적 2개 사단을 또다시 물리쳤다.
독일군도 구원군을 보냈지만, 스페인 공산군 제 21기갑사단과 충돌하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브리튼 공군은 그동안 그토록 무시하던 스페인 인민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똥꼬쇼 끝에
지중해 전역에서 가용한 사실상 모든 전투기와 폭격기를 긁어모아 전선에 쏟아부었다.
악에 받친 자유 프랑스 병사들은 낙하산을 타고 격추된 스핏파이어에서 탈출한 브리튼군 파일럿들을 잡는 족족 죽여버렸다.
산 채로 구워지는 듯한 더위와 숨막히는 먼지, 극에 달한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도
가라불디 장군의 자유 프랑스군 병사들과 양시칠리아 병사들은 묵묵히 참호를 더 깊게 파서 더 거센 공세에 대비할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서 오래 버틸수록, 오스만 제8군을 철수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끈질긴 반동분자들의 견고한 진지에 분노한 몽고메리가 마침내 스스로 진두지휘에 나섰다.
6월 8일, 코뮌 프랑스 포병대와 폭격기 편대가 바드르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전병원에 떨어진 폭탄 한 발에 부상병 17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2년 전과 달리 자유 프랑스군의 멘탈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느 장교는 한 포반의 최후의 생존자 부대원이
한쪽 손이 날아갔는데도 이를 악물고 75mm포탄을 피가 철철 흐르는 팔목으로 떠받치면서 재장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6월 10일에 마침내 바드르 진지가 무너졌을 때, 연합군 수비대는 모든 포탄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포위된 시칠리아군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을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대인 독일 제11기갑사단이 그날 밤 철수해야 했기에
가리볼디는 알아서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가리볼디는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병력들을 대부분 코뮌군 포위망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는데,
처음에는 들키지 않았지만 얼마 후 집중 포격을 당했다.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독일군 운전병 덕분에 가리볼디의 지휘차량은 무사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는 큰 피해에 발광한 오스왈드 모즐리가 포로로 잡은 부대원을 모두 학살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렸다.
물론 스페인 전선에서 이런 노골적인 학살명령은 샌드위치 먹고 홍차 마시듯 일상사에 불과했지만
대놓고 인민재판에 미쳐있던 살인마들인 스페인 공산군과 달리 '해방군'코스프레 정도는 하던 그 동안의 코뮌군에겐 아직 전례없는 일이었다.
모즐리의 기적의 논리인즉, 양시칠리아 장교은 인민의 반역자이니 당연히 죽어 마땅하고
자유 프랑스군 부대원들은 프랑스 코뮌에 반역한 반란군이니 역시 죽어 마땅하며
프랑스인도 이탈리아인도 아닌 나머지 부대원들은 자본주의에 찌든 돈에 팔린 용병들이니 어쨌든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오스왈드의 명령을 못 들은 척 혼성부대원들이 오스만군과 독일군의 포로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가리볼디와 그의 부대원들이 대부분 무사히 탈출하여 연합군과 합류에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독일군 참모총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에게 전해들은 드골은, 그날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드골이 훗날 회고하기를 "감동으로 가슴이 뛰고, 자랑스러움에 흐느끼며, 기쁨으로 눈물이 흐르는"
자기 자신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이 순간이 '프랑스 해방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 하인리히 뵐 "제 2차 세계대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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