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체제정비를 하며 부족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발전해나가고 있었던 신라는 진흥왕( 540~576 )대 체제정비와 더불어 한강 및 낙동강 옛 가야지역의 병합으로 영토를 확대하고 드디어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웅비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또다른 시련과 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점차 삼국의 무대에서 부상해나가는 신라는 그 직후 고구려와 백제와의 견제와 항쟁에 직면하였으며 더욱이 신라의 일방적인 나제동맹의 결렬로 인하여 고구려로부터 탈환한지 얼마 안되어 또다시 고토인 한강 하류를 탈취당하고 게다가 이를 회복하기 위한 관산성의 전투( 554 )에서도 참패하여 국왕까지 전사해버렸던 백제의 격분은 극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대국이자 이전의 종주국이었던 고구려에 이어 예전의 동맹자였던 백제까지 적대관계로 전변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관산성전투의 승리로 인한 성왕( 523∼554 )의 전사에 뒤이은 위덕왕( 554∼598 ), 혜왕( 598~599 ), 법왕( 599∼600 ) 시기 백제 정국의 혼미로 신라는 잠시 동안 안정상태를 취할 수 있었으나 백제의 혼미 탈출과 국력 회복으로 신라와 백제는 다시금 격렬한 투쟁의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신라는 법흥왕, 진흥왕대에 체제정비와 영토확장으로 도약하였으나 이에 수반된 옛 가야지역 등의 이질적인 영토의 통합과 진지왕계, 진평왕계의 왕권계승문제 등으로 곤란를 겪고 있었으며 이러한 대내정세와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비록 약간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삼국 중의 최강자인 고토회복을 기도하는 대국 고구려와 또한 표면적으로는 신라에 비해 작지만 여전히 풍부한 물산의 산지인 한반도 서남부를 보유하고 있으며 무왕( 600∼641 )대에 급속도로 회복된 왕권을 바탕으로 역시 고토회복뿐만 아니라 이제는 불공대천의 원수까지 맺힌 또다른 강대한 세력인 백제와 상대하여야만 하였다. 진평왕( 579~632 ), 선덕왕( 632~647 ), 진덕왕( 647~654 ), 태종 무렬왕( 654~661 )의 시기는 신라 최고 위기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지배층 분렬의 위기를, 밖으로는 고구려, 백제와 이들이 끌어들인 말갈, 왜 등의 결맹으로 외교적으로 거의 완전한 고립상태에 빠져 그들의 파멸적인 군사적 공세의 위기 속에서 전력을 쏟아 대응하여야만 했다. 그 중에서 최대의 위협은 바로 백제였으니 무왕과 의자왕( 641~660 )의 시기에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에 대하여 대규모 공세를 벌여 백제의 신라 공격의 말기에 다다른 의자왕의 시대에는 완전한 여제동맹이 성립되어 예전까지는 그나마 백제의 신라 공세를 약간이나마 억제해 줄 수 있었던 당마저 무시된채 당항성을 공격( 642 )함으로써 옛 한강지역을 함락 직전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옛 가야지역의 중심지인 대야성을 함락( 642 )하여 신라의 국경을 낙동강 동쪽으로 대대적으로 후퇴시켜 신라는 팽창 이전의 강역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공전의 국난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라 역시 외교적으로는 김춘추( 金春秋 )를 필두로 비록 실패하였지만 고구려와 왜와의 화친을 시도하고 당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중지를 요청하는 거중조정을 부탁하는 데에서 진전하여 당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김유신( 金庾信 )을 수장으로 전전하며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여 고군분투하며 영역을 사수하였으며 또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신라의 내정을 혁신해 나갔다. 6세기와 7세기의 삼국시대 말기. 삼국이 할거하고 있던 한반도는 격심한 난세의 시대였다. \' 강대한 세력( 삼국사기 김유신전 ) \'인 백제와 왜가 고토를 되찾으려고 쳐들어오던 그 시대에, \' 대국( " " ) \' 고구려와 말갈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 시대에, 삼국 중에서 가장 \' 작은 나라( " " ) \'이자 \' 작은 힘( " " ) \'였던 그들은 그 적수조차도 \'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 父兄 )과 같이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 없습니다.( " " ) \'라고 인정하였던 것처럼 실로 \'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 인심( 人心 )을 잃지 않은( " " ) \' \' 작은 나라이지만......업수이 여길 수 없다.( " " ) \'는 나라를 만들고 지켜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 충신( 忠臣 )으로 존재( 存在 )하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하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롭게( " " ) \' 되는 시국 속에서 유일하게 반도의 희망으로 생존하여 삼한을 통일하고 한민족의 원형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다름아닌 바로 신라, 그리고 신라인이었다.
561(562)년( 신라 진흥왕 22(23)년, 백제 위덕왕 8(9)년 ) 7월 백제가 신라 국경을 침략하다가 패하여 신라가 1,000여 명을 살획함.
577년( 신라 진지왕 2년, 백제 위덕왕 24년 ) 10월 백제가 신라 서쪽 변방의 주군( 州郡 )을 침범하여 이찬 세종( 世宗 )이 일선( 一善: 현 선산 ) 북쪽에서 격파하고 3,700명을 참획함.
578년( 신라 진지왕 3년, 백제 위덕왕 25년 ) 7월 신라가 백제의 알야산성( 閼也山城: 현 전북 여산 )을 침공함.
602년( 신라 진평왕 24년, 백제 무왕 3년 ) 8월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 阿莫城, 혹은 아모성(阿暮城): 현 남원군 운봉면 )을 공격하여 신라 장군 파진찬 건품( 乾品 ), 무리굴( 武梨屈 ), 이리벌( 伊梨伐 ), 급찬 무은( 武殷 ), 비리야( 比梨耶 ) 및 경기병 수천 명으로 응전하여 회군. 이어 신라가 백제의 국경을 침범하매 백제 좌평 해수( 解? )가 보기병 4,0000명으로 소타성( 小陀城 ), 외석성( 畏石城 ), 천산성( 泉山城 ), 옹잠성( 甕岑城 )을 진공하여 거전함. 해수가 불리하여 천산 대택( 大澤 )에 매복하고 기습하였다가 신라의 귀산( 貴山 )과 추항( ?項 )의 분투 전사로 분발한 신라군에게 대패 전멸하여 해수가 단기로 귀환함.
605년( 신라 진평왕 27년, 백제 무왕 6년 ) 8월 신라가 백제를 공격함.
611년( 신라 진평왕 33년, 백제 무왕 12년 ) 10월 백제가 신라의 가잠성( ?岑城: 현 거창 )을 100일 간 포위하여 신라가 상주( 上州: 현 상주 ), 하주( 下州: 현 창녕 ), 신주( 新州: 현 한산주 광주 )의 군을 거느리고 구원케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회군. 현령 찬덕( 讚德 )은 고수 역전하다가 패사하고 성도 함락됨.
616년( 신라 진평왕 38년, 백제 무왕 17년 ) 10월 백제 달솔 백기( ?奇 )가 8,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 母山城: 현 운봉 )을 공격함.
618년( 신라 진평왕 40년, 백제 무왕 19년 ) 신라의 북한산주( 北漢山州 ) 군주 변품( 邊品 )이 가잠성을 공격하여 회복하매 찬덕의 아들 해론( 奚論 )이 역전하다 전사.
623년( 신라 진평왕 45년, 백제 무왕 24년 ) 백제가 신라의 늑노현( 勒弩縣 )을 습격함.
624년( 신라 진평왕 46년, 백제 무왕 25년 ) 10월 백제가 대거 기병하여 신라의 속함성( 速含城 ), 앵잠성( 櫻岑城 ), 기잠성( ?暫城 ), 봉잠성( 烽岑城 ), 기현성( 旗縣城 ), 혈책성( 穴柵城, 혹은 용책성(冗柵城) ) 등 6성을 포위하매 신라는 상주, 하주와 5군으로 구원케 하였으나 실패하고 귀환. 이어 3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 급찬 눌최( 訥催 )가 봉잠성, 앵잠성, 기현성의 세 성 군사와 합하여 고수하다 패사.
626년( 신라 진평왕 48년, 백제 무왕 27년 ) 8월 백제가 신라의 주재성( 主在城, 혹은 왕재성(王在城) )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 東所 )가 거전하다가 패사.
627년( 신라 진평왕 49년, 백제 무왕 28년 ) 7월 백제 장군 사걸( 沙乞 )이 신라 서쪽 변방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생포. 이어 고토회복을 위하여 대거 기병하여 웅진( 熊津: 현 공주 )에 주둔하였다가 신라가 당에게 위급을 고하여 중지함.
628년( 신라 진평왕 50년, 백제 무왕 29년 ) 2월 백제가 신라의 가잠성( 혹은 가봉성(?峯城) )을 포위하매 신라가 공격하여 격파함.
632년( 신라 선덕왕 1년, 백제 무왕 33년 ) 7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633년( 신라 선덕왕 2년, 백제 무왕 34년 ) 8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침범하여 서곡성( 西谷城 )을 공격, 13일 만에 함락함.
633년~647년( " " ", " " "~" " " ) 신라가 백성군( 白城郡 )에서 출병하여 백제의 변경을 공격. 백제가 정병을 출동시켜 급히 공격하여 신라가 퇴각하다가 심나( 沈那 )의 활약으로 백제를 패주시킴.
636년( 신라 선덕왕 5년, 백제 무왕 37년 ) 5월 백제 장군 우소( 于召 )가 신라의 독산성( 獨山城 ) 습격을 기도하여 500명을 이끌고 옥문곡( 玉門谷 )에 이르러 숨어있다가 선덕왕의 예지로 발각되어 파견된 장군 알천( 閼川 )과 필탄( 弼呑 )에게 엄습당해 전멸하고 우소는 거전하다 생포됨.
642년( 신라 선덕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 ) 7월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 서쪽 미후성( ??城 ) 등 40여 성을 함락함.
"(643)( " " "(12), " " "(3) ) 8월 백제가 고구려와 공모하여 신라의 당항성( 黨項城: 현 화성군 남양면 ) 탈취와 대당외교 단절을 기도하다가 신라가 당에 청병하매 군사를 파함. 이어 백제 장군 윤충( 允忠 )이 신라의 대야성( 大耶城: 현 합천 )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도독 이찬 품석( 品釋 )과 그의 처 김춘추( 金春秋 )의 딸 고타소랑( 古陀炤郞 ), 사지( 舍知 ) 죽죽( 竹竹 ), 용석( 龍石 ) 등을 피살당하였으며 남녀 1,000여 명을 생포.
644년( 신라 선덕왕 13년, 백제 의지왕 4년 ) 9월 신라가 대장군( 혹은 상장군 ) 김유신( 金庾信 )을 파견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대승하고 백제의 가혜성( 加兮城: 현 거창? ), 성열성( 省熱城 ), 동화성( 同火城 ) 등 7성을 함락시키며 가혜진( 加兮津 )을 개통.
645년( 신라 선덕왕 14년 ) 1월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 못한 때에 백제의 대군이 또 신라의 변경을 노략질하고 매리포성( 買利浦城 )을 공격하여 왕명으로 김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하고 막게 하매 김유신은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백제를 요격하여 패주시키고 2,000명을 참수함.
"( " " ", " " " ) 3월 신라의 김유신이 전투후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할 즈음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하여 대거 기병하려 하매 김유신은 또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출진하여 백제군이 퇴각함.
"( " " ", " " " ) 5월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신라가 30,000명으로 당을 원조하자 백제가 그 틈을 타서 신라 서쪽 7개 성을 습격하매 신라는 김유신을 파견하여 내침함.
647년( 신라 진덕왕 1년, 백제 의자왕 7년 ) 10월 백제 장군 의직( 義直 )이 보기병 3,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무산성( 茂山城: 현 무주군 무풍면 )에 진군 주둔하고 군을 나눠 감물성( 甘勿城: 금릉군 개녕면 ), 동잠성( 桐岑城 )의 세 성을 포위하여 신라는 김유신 휘하 보병과 기병 10,000만 명을 파견하여 방어. 고전하여 기운이 다할 때 신라의 비녕자( 丕寧子 )와 그의 아들 거진( 擧眞 )과 종 합절( 合節 )이 분투하다 전사하매 신라가 분전하여 백제군 3,000여 명을 참수 전멸시키고 의직은 필마로 귀환함.
"(648)( " " "(2), " " "(8) ) 신라가 대량주전투의 보복을 위하여 김유신을 파견하여 대량성( 大梁城: 현 합천 )으로 진군. 백제가 반격하매 신라는 옥문곡으로 거짓 퇴군하여 복병으로 전후로 대파하여 백제 장군 8명을 생포하고 1,000명을 참획함. 이어 백제로 쳐들어가 악성( 嶽城 ) 등 12성을 함락하고 2,0000명을 참수하며 9,000명을 생포함. 김유신이 재차 백제로 진공하여 진례성( 進禮城 ) 등 9성을 공격하여 9,000명을 참수하고 600명을 생포.
648년( 신라 진덕왕 2년, 백제 의자왕 8년 )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 腰車城: 현 상주 ) 등 10여 성을 함락함.
"( " " ", " " " ) 4월 백제의 의직이 옥문곡으로 진군하매 신라는 압독주도독 김유신에게 파견하여 의직이 대항하매 김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하여 패주시키고 추격하여 두차례 전투에서 백제군을 거의 전멸시킴.
649(648)년( 신라 진덕왕 3(2)년, 백제 의자왕 9(8)년 ) 8월 백제 장군 좌장 좌평 은상( 殷相 )이 정병 7,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 石吐城 ) 등 7개 성을 공함하매 신라는 김유신, 진춘( 陳春 ), 죽지( 竹旨 ), 천존( 天存 )을 파견하여 3군을 5길로 나눠 거전 공격. 전투가 승패로 10여 일을 경과하여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뜰 지경에 이르름. 신라가 도살성( 道薩城: 현 천안 )에 주둔하고 김유신의 계략으로 진격하여 백제를 대패시키니 살상자가 100명. 달솔 정중( 正仲 ) 및 100명을 생포하고 장군 은상, 달솔 자견( 自堅 ) 등 10여 명 및 8,980명을 참수하였으며 전투마 1,0000필, 갑주 1,800벌 및 병기물을 무수히 획득함. 이어 좌평 정복( 正福 ) 휘하 1,000명이 항복하여 방환함.
655년( 신라 태종무렬왕 2년, 백제 의자왕 15년 ) 1월( 혹은 8월 ) 고구려, 백제, 말갈이 연합하여 신라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3성을 함락시킴. "( " " ", " " " ) 9월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로 쳐들어가 도비천성( 刀比川城: 현 영동군 양산면 )을 공파함.
?( 신라 태종무렬왕, 백제 의자왕 ) 백제가 조천성( 助川城: 현 영동군 양산면 )을 공격하여 취도( 聚徒 )가 전사.
655년 이후( 신라 태종무렬왕 2년 이후, 백제 의자왕 15년 이후 ) 신라가 백제의 조천성을 진공하려다가 백제의 야습으로 낭당대감 김흠운( 金歆運 ), 대감 예파( 穢破 ), 소감 적득( 狄得 ), 보기당주 보용나( 寶容那 )가 전사.
659년( 신라 태종무렬왕 6년, 백제 의자왕 19년 ) 백제가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 桐岑城 )을 공격함. 합계 전투총합 관산성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 554~660 ) 106년 간 37차 전투로 약 3년에 한번 꼴로 전쟁이 벌어졌음. 백제: 37전 26공 11수 11승 15패 11무 신라: 37전 11공 26수 15승 11패 11무 추신: 신라와 고구려, 혹은 백제와 고구려와의 개별 공방전은 제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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