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종전 이후 수십년간은 가히 로켓-미사일의 시대라고 불릴 만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 전인미답의 월면을 밟게 하여 소년들로 하여금 원대한 꿈을 갖게 하였고(덕분에 지구멸망... 버럭!)다른 한편으로는 두 강대국으로 하여금 언제 세계멸망의 전면핵전쟁이 벌어지게 할 지도 모르는 양면성을 갖게 했습니다.

허허 고놈 참 대물이네! (세계 최대규모 로켓 새턴 V와 세계 최대규모급 차량(한때 기네스기록 획득. 지금은 독일제 굴착기 차량 배거 288에게 기록 이양)'크롤러(Crawler)'. 참고로 저 크롤러는 제작비 1,400만 달러, 캐터필러 하나당 달린 트랙 조각 하나하나가 1톤, 높이 7m, 무게 2720t입니다. 로켓을 싣고 시속 1.6km로 기어다니고(그래서 크롤러)특수포장도로로 다님에도 불구하고 지나갈 때마다 도로지반이 5cm씩 내려앉는다는 물건입니다.

왜 끼웠는 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신기록 보유자인 배거 288. 뭐랄까 굴착기라기보단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만든 세계정복용 둠스데이 머신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연료에 알코올이 첨가되었는지 약간 돌아버린 양키제 잠수함발사탄도탄(SLBM) UGM-133A 트라이던트. 수출가 1발당 3천만 달러(단 쓰는 나라는 영국뿐).
뭐 이러저러한 물건들이 많이 나돌고 있긴 합니다만, 거국적으로 보았을 때의 조상은 하나로 수렴됩니다. 뭐 사실 이 녀석은 후손들과 전혀 닮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도 좀 다른 편으로 인식되고 있긴 합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독일군의 '비밀병기'중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보복병기 2호(Vergeltungswaffe 2), 통칭 A-4/V-2 로켓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27년 독일의 '우주비행협회'에서는 순수목적, 즉 대기권 돌파를 위해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의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이 협회엔 베르너 폰 브라운, 클라우스 리델, 헤르만 오베르스, 루돌프 네벨, 막스 발리어 등 로켓개발의 선구자가 된 수많은 수학자, 과학자,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V2의 아버지들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뭐 V-2 말고도 아는 사람이 많을 인물로, 미국 탄도탄의 선구자나 다름없습니다. 독일의 로켓개발 기술에 있어서 최고지휘자였고, 연구소 페네뮌데(Peenemünde)의 책임자였습니다. 종전 후 미국에 끌려가(?)미국 최초의 탄도탄인 레드스톤(Redstone)을 개발했고, 이후 주피터(Jupiter)시리즈와 단거리전술탄도탄 퍼싱 미사일, 스카이랩 프로젝트, 미국 최대의 탄도탄이자 로켓인 새턴 V(위의 저 大物)의 개발을 맡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2부에...
ps ; 사진은 1964년 5월 미국 앨라바마의 우주센터에 있는 그의 사무실입니다.

발터 도른베르거(Walter Dornberger). V-2 계획 이외에도 바세르팔(Wasserfal)대공미사일 계획에도 참여하는 등 독일 로켓 개발의 대부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V-2 개발단계에서는 항상 총지휘를 해오다가 정작 실전단계에 이르러서는 지휘권을 SS가 잡아채는 덕분에(?)전후에 전범 혐의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 공군 유도미사일 개발과 X-20 '다이나소아(Dyna-Soar)' 우주왕복선 계획의 핵심 자문을 맡았습니다.

한스 프리드리히 칼 프란츠 캄러(Hans Friedrich Karl Franz Kammler;;). 발터 도른베르거가 맡아오던 V-2 개발 및 지휘권을 가져간 SS의 장교이자 공학박사입니다. V-2 개발을 맡기 이전에는 유대인들을 굽는(!)데 쓰는 가스실과 소각로 시설 디자인을 맡고 있었습니다. V-2 이외에도 Me262등 각종 비밀병기 개발에 사용된 시설 건설의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페네뮌데가 연합군의 폭격을 받자 V-2 개발시설을 악명높은 지하수용소 공장 미텔베르크(Mittelwerk)로 옮긴 장본인입니다. 독일의 핵병기 시설인 요나스탈이나 리젠게비르게 등의 설계도 한 참 이상한 인물입니다. 1945년 4월 갑자기 사라져서 통설에는 '연합군에게 로켓 개발의 상세한 내용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던 힘러가 제거했다'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만, 요즈음에는 미군의 '페이퍼클립 작전(대전후 독일의 발달된 기술과 병기를 수집, 본국으로 보내 자국산화하는 작전)'에 걸려들어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끌려가 무중력장치(!)나 다발엔진 장거리비행기 설계에 투입되었다는 설이 대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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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루돌프(Arthur Rudolph). 지하공장 미텔베르크에서 기술 및 생산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종전후 미국에서 레드스톤과 새턴 V의 기술책임자를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1984년, 대전기간동안 미텔베르크에서 혹사당한 포로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미국 시민권을 반납, 독일로 귀국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클라우스 리델(Klaus Riedel). 폰 브라운의 권유로 독일 로켓개발팀에서 일했으며, 페네뮌데에서 V-2의 이동발사시스템등을 개발해낸 인물입니다. 그러나 44년 37번째 생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로켓개발에의 업적을 인정받아(라기보다는 이동형 탄도탄에 대한 답례가 아닐런가 하지만)달의 크레이터 중에 이 사람의 이름이 붙은 놈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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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오베르스(Hermann Oberth). 로버트 고다드,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함께 로켓과 우주비행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폰 브라운의 로켓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V-2 설계개념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종전 후 미국의 컨베어사에서 ICBM 아틀라스 개발에 참여했고 이외에도 제트기류를 이용한 풍력발전기 개발 등 여러 업적이 있었습니다. 여담인데, 유명한 미국의 SF TV시리즈물 스타트렉(Star Trek)III 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오베르스급 우주선이 등장합니다;;
ps ; 사진은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참가한 ABMA(Army Ballistic Missile Agency ; 육군 탄도탄 개발국)때의 사진입니다. 가장 아래쪽이 헤르만 오베르스. 오른쪽 중간에 베르너 폰 브라운이 보이는군요.

올백이 아름다우신 발터 티엘(Walter Thiel). V-2의 로켓 연료와 연소실 개발자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가압탱크식 로켓의 추진력인 3,000파운드보다 거의 20배 가량 강력한 56,000파운드의 추력을 가진 터보펌프식 로켓엔진을 개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1943년 8월 영국 공군이 페네뮌데를 공습하였을 때 가족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티엘이 설계를 맡은 A-4의 연소실. 당시의 후진적 로켓에 비해 A-4가 독보적일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귀X컷의 압박)

루돌프 네벨(Rudolf Nebel). 개발그룹의 대변인격 인물로 각종 금융지원과 물자지원을 이끌어내고 우주비행협회의 실험장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초기 로켓 개발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로켓의 순수성을 위해 군용화를 반대, V-2 계획에는 참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뒷날 그를 꼭 필요로 한 폰 브라운이 그를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SS에서 그를 믿을 수 없는 자라고 판단,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전후 독일 로켓 개발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으며 대중에 로켓에 대한 많은 강연을 했습니다. (또 여담. 이 사람의 성인 '네벨(Nebel)'은 독일어로 안개나 연기를 뜻하는데, 이것 때문에 전후 독일의 다연장 로켓병기 네벨베르퍼의 개발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실상은 연합군 정보부를 속이기 위해 연막탄 투사기로 위장한 것이지만...)
1932년 이들의 연구를 주목한 독일 군부는 어쩌면 이 연구의 산물을 장거리포에 응용해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V-2 계획에서 폰 브라운과 함께 가장 유명한 인물인 발터 도른베르거 소장이 이끄는 팀이 이곳에서 제작된 로켓 시연을 참관했습니다. 이때의 로켓은 지금 보면 시시한 수준이긴 했습니다만,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의 로켓이 앞으로 큰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군에 합류하도록 권유합니다.
군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로켓은 A라는 시리즈명이 붙었고(A는 Aggregat으로 집합체나 동력기관 등을 의미)최초로 제작한 A-1은 디자인상 너무 불안정하여 비행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A-2가 제작되는데, 방향 조절기능이 달려있지 않은 추진실험용 로켓이었습니다. 1934년 12월 19일 오전 11시 15분 '막스'라고 이름붙은 최초의 A-2 로켓이 발사되고, 성공적으로 실험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맘때쯤 우주비행협회에 남아 있던 동료 몇이 합류하는데, 여기에 꽤 재미있는 여담이 있습니다. 원래 우주비행협회는 베를린 근교 라이니켄돌프라는 곳의 부지를 살짝 얻어서 로켓 실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부지 어딘가에서 수도관이 새고 있었던 겁니다. 덕분에 꽤 오래 사용했더니 베를린 수도국에서 '수도료를 내든가 꺼져라'라고 요구했고, 민간연구단체인 우주비행협회는 그 돈을 지불하기 힘들어 결국 떠나야만 했던 겁니다.

A-2 로켓 단면도. SLBM같은 모양이군요.
이야기는 샛길로 새어서 1935년 1월, 루프트바페의 폰 리히트호펜 소령(그 사람은 아닙니다만)이 개발연구소이던 쿠멜스도르프에 찾아와 로켓비행기 개발을 의뢰했습니다. 연구팀은 루프트바페의 기술자들과 합작, 순식간에 하인켈 He112라는 전투기를 제작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로켓비행기입니다. 성능시험에서는 최강 Bf109를 제치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 했지요(그러나 프로토타입인 He112V2가 테스트비행중 폭발해서 결국 생산버전 He112에는 로켓은 사용되지 않았고, 2차대전에서 독일이 사용한 전투기 중 가장 저열한 모델 중 하나라는 불명예만 안게 됩니다. 덕분에 최초의 실용 로켓전투기의 명예는 익히 알려진 Me163에 돌아갑니다). 루프트바페는 로켓 연구팀의 능력을 높이 사 '연구예산을 줄 테니 우리쪽으로 오라'라고 살살 꼬셨고, 격분한 육군은 당장 대량의 연구자금을 지원해주며 실험장을 좁은 쿠멜스도르프에서 널찍한 페네뮌데로 옮겨주기까지 합니다.

불쌍한 He112. 사실 대전기간 사용된 전투기 중 가장 덜 알려진 모델로도 유명(?)합니다. 일본에 약간 수출될 수도 있었지만, 일본 테스트 파일럿들이 성능은 훨씬 구려도 조종하기 편한 미쓰비시 A5M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결국 주문은 취소됩니다. 만약 들어갔다면 제로전의 상위기종으로 택해질 예정이었지만...
다시 로켓 이야기. A-2의 성공과 넓직한 실험장에 고무된 개발팀은 방향조절기능이 달린 A-3의 개발에 착수하고, 3발의 A-3를 만들어 실험했으나 3기 모두 발사 직후 균형을 잃고 추락합니다. 방향타 부분의 설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아낸 개발팀은 개량형 A-5를 제작(왜 A-4가 아닌가는 일단 묻지 마시고), 이 물건은 성공합니다.
1939년 3월 23일, 폰 브라운의 27세 생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페네뮌데를 방문합니다. 여기서는 A-5의 지상추진 테스트 시연과 모형 설명 등이 행해졌지만 히틀러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고, 별로 호응해 주진 않았습니다. 도른베르거와 폰 브라운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서 예산을 더 받고자 하였지만 별 성과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알려진 것과는 약간 다르죠.

A-4의 엔진부. 대단히 심각하게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군요... ( -,.-)a
6개월 후 1939년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개발팀도 준비해 왔던 병기로서의 로켓을 제작하기 위해 A-4형의 제작에 착수합니다(A-4 없이 A-5로 넘어갔던 이유는 A-4는 계획단계부터 병기용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개발로켓에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어서...였습니다). 기존의 A-5는 끽해야 6m 정도 높이의 로켓이었지만, 병기로서 대형의 탄두를 싣게 하려면 훨씬 대형화되어야 했기 때문에 작업량이 대폭 증가, 41년까지는 지상시험만으로 때워야 했습니다. 42년 10월, 모든 개량을 거친 최초의 A-4가 비행에 성공하고, 독일 육군은 이 물건에 보복병기 2호(Vergeltungswaffe 2)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V-2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말로, 더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정식명칭은 A-4입니다.

A-4/V-2의 단면도.

유도용 자이로입니다. 이것 덕분에 V-2의 로켓이냐 미사일이냐의 구별이 모호해지지만, 어쨌든 관성유도밖에 안 되니 거의 대부분 로켓이라고 생각중.
스펙
동력: 액체연료 로켓모터
에틸알코올(75%): 3,710kg
액체산소: 4,900kg
탄두: 738kg 폭발물(고폭탄이 아니었는데, 비행 중 마찰열로 온도가 650도 이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고폭탄을 적재하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사중량: 13,000kg
과산화수소: 129kg
과망간산나트륨: 15.8kg
질소: 13kg(질소는 여러가지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알코올 탱크의 압력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륙시 추력: 25,000kg
초당 연료소모량: 130kg
연소시간: 65초
유도: 자이로에 의한 관성유도
최대 속력: 5,400km/h
최대 고도: 96km
길이: 14m
동체 직경: 1.651m
사정거리: 320km

시험발사에 들어간 A-4/V-2.
43년 7월 7일, 폰 브라운과 도른베르거는 비행에 성공한 V-2의 필름과 모형을 히틀러의 지하대본영으로 가지고 갑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병기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 V-2를 본 히틀러는 크게 감명받고, 당장 대량생산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정밀한 가공을 필요로 했던 V-2는 테스트모델과 실 생산모델에 꽤 차이가 있었고, 양산은 1944년에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전, 히틀러와의 만남 한 달 후에 개발팀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집니다.

영국 공군의 정찰기가 촬영한 페네뮌데의 항공사진. 로켓이 적재된 트레일러 등이 찍혀 있습니다.
페네뮌데에서 뭔가 자꾸 이상한 것이 불꽃을 끌며 날아오른다는 해군의 보고를 받은 영국군은 페네뮌데를 공중정찰하고, '독일 양배추놈들이 또 뭔가 쓸데없는 걸 만들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8월 17일, 무려 569기나 되는 영국의 중폭격기들이 페네뮌데 상공을 급습하여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을 투하합니다.

324대의 아브로 랭카스터(최강의 대형 중폭격기 중 하나로 대전기간 사용된 폭격기 중 10t이라는 최고의 폭장량을 자랑).

218기의 핸들리페이지 핼리팩스(5.8t의 폭장량의 4발 대형 중폭격기).

54기의 쇼트 스털링(6.3t 폭장량의 4발 대형 중폭격기).
이들은 끔찍하게 많은 양의 폭탄(대충 어림잡아 1,800t 이상. 85%는 고폭탄, 나머지는 기타 잡다한 소이탄류)을 페네뮌데 한 곳에 퍼부었고, 페네뮌데의 시설은 아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폭격은 RAF(영국 공군)에게는 꽤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먼저 독일군의 비밀병기 공장을 파괴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작은 목표에 대한 대규모 야간폭격의 실험 의미도 있었습니다. 공격목표는 3군데로 연구원 거주구와 로켓 공장, 실험장이었습니다.

떨어지는 폭탄의 불꽃에 불야성을 이루었던 1943년 8월 17일의 페네뮌데의 밤하늘, 3대의 랭카스터(원 안)가 폭탄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선도기(패스파인더)에 의한 목표지역까지의 유도는 별 어려움이 없었고, 고속전폭기인 모스키토 편대가 요격전투기의 대응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선도기가 엉뚱한 곳에 폭격유도를 하는 바람에 첫 폭격은 목표지역 남쪽 약 2.5km에 위치한 강제노동캠프에 실시되었습니다. 다행히도(?)곧 교정이 이루어져 560기에 달하는 폭격기들이 무사히 목표지역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이 폭격에서 40기의 폭격기가 추락했는데, 영국군은 성공적인 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약 180명의 독일인이 페네뮌데의 거주구에서 폭사했고, 최초의 오폭으로 인해 방공호도 없는 조잡한 나무 막사에서 자고 있던 600여명의 포로들(대부분 폴란드인으로 페네뮌데에서의 노역에 종사했음)이 노동캠프에서 죽었습니다. V-2 엔진 개발의 지휘자였던 발터 티엘과 그의 가족들도 이 때 희생되었습니다.

거의 소멸해버린 페네뮌데의 시설.
또 여담...으로, 독일군의 야간방공전투기에 장착된 신무기 '슈레게 무지크(Schrage Musik, 영어로는 Jazz를 뜻한다더군요)'가 이곳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40기 격추의 대부분이 이 무기에 의한 것으로, 전투기 후방에 장착된 2연장 20mm 기관포를 폭격기 배 부분에서 발사하면 폭격기가 갈가리 찢겨나간다는 가히 획기적인 구조...였습니다. 영국군 중폭격기 대부분이 후방에 강력한 방어총좌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전면에 장착한 기관포로 상대하려 했다가는 박살이 나기 일쑤였던지라 보통 배면에서 수직상승하면서 요격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게 좀 힘든 기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같은 효과를 바짝 붙기만 해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든 건데, 영국군에 있어서 최대의 공포 중 하나였습죠.

Me110 후면에 장착된 2연장 20mm 기관포. 사실 슈레게 무지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이렇게 캐노피 후방에 45도 각도로 장착된 기관포를 싸잡아 슈레게 무지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폭격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개발시설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개발시설을 페네뮌데에서 노르드하우젠 부근 콘스타인 산 지하의 미텔베르크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 곳의 수용소인 미텔바우-도라(Mittelbau-Dora)는 악명높은 강제노동 포로수용소중 하나로 기존에 존재하던 40여개의 포로수용소를 통합한 수용소였으며, 약 6만명이 수용되었었고 그 중 1만 2,000명이 열악한 조건으로 사망했습니다.

미텔바우-도라의 V-2 조립라인. 포로들이 조립을 맡고 있습니다. 이 곳은 지하였던지라 햇빛은 들지 않고 습기와 냉기가 많아서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고, 1943년 10월부터 1944년 3월까지 2,900명이 작업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나가기까지 했습니다. 포로의 대부분은 러시아인, 폴란드인, 프랑스인 등으로 전쟁포로도 섞여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강제노동에 밀어넣었습니다.

독일의 강제노동수용소라면 어디가나 빠지지 않는 소각로.
나리 밀겔에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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