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중일전쟁의대해서

나다 2005.09.09 03:13:49
조회 1047 추천 0 댓글 5


사진 : 중국 국민정부의 장제스와 부인, 그리고 미국 사령관 조셉 스틸웰 아시아의 전운 만주사변 유조구의 폭음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의 황량한 들판을 가르며 북쪽으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 장춘에서 떠난 이 만철선 열차는 하오 10시 30분에 봉천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 열차는 자신의 앞에 닥칠 운명과 그것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모른채 기적 소리를 울리며 계속 달리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열차는 봉천 근교에 있는 유조구 북방 500m 지점에 이르렀다. 돌연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리고 흙덩이와 철로 침목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열차가 정지할 틈도 없었다. "철도 폭파다!" 승객들의 비명과 고함소리 속에 열차는 달리던 여세에 밀려 폭파 현장을 무사히 통과했다. 바로 그때 철로 연변에 있는 벽돌공장 뒤로 괴한 몇 명이 허리를 숙인 채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장학량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저놈들이 범인이다! 저 놈들을 잡아라!" "범인은 중국인이다. 저 놈을 놓치지 마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본말로 이런 고함소리를 지르며 괴한들의 뒤를 쫓는 다른 한 패가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승객들에겐 아무 피해가 없었고 열차도 큰 피해 없이 계속 달려 예정 시간에 봉천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시작이었던 것이다. 철로 폭파가 있은 지 1시간 후에 현장 남방에서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기관총과 소총소리가 밤하늘을 진동했다. 일본 관동군의 봉천 독립수비대대가 북대영의 중국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그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장학량 예하의 동북군 제 7여는 기습에 놀라 허둥지둥 길림방면으로 철수해버리고 말았고 여장인 왕이철도 농민으로 변장하여 북경행 열차를 타고 말았다. 관동군은 다시 이날 밤 안으로 봉천을 공격하여 장춘에서 대련에 이르는 만철선 전역에 걸쳐 대규모의 무력행동을 개시했다. 19일 아침에는 봉천성을 완전 점령하고 이튿날과 그 다음날에는 만철선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23일에는 길림까지 진출했다. 한편 21일에는 조선군의 1개 여단이 군사령관인 하야시대장의 독단으로 한만국경을 넘어 만주에 침공하여 전선은 확대일로를 걸어 급기야 일본군은 전 만주를 석권했다. 이리하여 유조구사건은 만주사변으로 번져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에 이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일본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유조구의 진실 실은 이날 밤 파괴된 선로의 길이는 불과 79㎝에 지나지 않았다. 이 증거는 대전 후에 밝혀진 바와 같이 관동군의 음모자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폭파계획을 꾸몄는지 증명해주고 있다. 이들은 이 폭파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꾸며 무력행동의 구실로 만드는 것이 목적일 뿐 장작림 폭살때와 같이 만철선을 대규모로 폭파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열차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정한 길이를 폭파시킬 수 있도록 계산하여 폭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관동군 참모였던 이다가끼, 이시하라, 하나야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중앙의 확대금지명령을 위반하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이들의 하나인 가와모도중위가 기병용 폭약으로 철로를 폭파하고 역시 이미 내통해 있던 가와시마의 중대가 북대영을 공격하기로 미리 계획을 짜 놓았던 것이다. 관동군의 병력 9.18 사건당시의 관동군 병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2사단(병력 약 5,000명) - 보병 2개 여단, 기병 1개 연대, 포병 1개 연대, 공병 1개 중대 독립수비대(병력 약 6,000명) 여순 중포병 대대 관동군 헌병대 해군 - 요동반도와 화북방면에 제 2파견함대가 있어 양자강 이북의 중국과 요동반도 연안을 순시 중국측의 병력 한편 이 무렵 동북지방의 중국군은 동북변방군 사령 장학량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방군과 성방군, 부정규군(공안국 순경, 공안대)등으로 구별되고 있었다. 이들중 동북군의 주력은 국방군으로서  `여`를 편성의 단위로 하고 동북 3성을 통해 일련번호를 붙이고 있고 국방의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성방군은 주로 독립 여를 편성 단위로 하고 성내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흑룡강성과 봉천성에만 있었다. 이외에 통신, 항공부대등 특종부대가 있었고 군관훈련소와 보급기관이 있었고 해군병력으로는 해안경비함정(11척)과 송화강 경비함정(8척)을 가지고 있었다. 각 성에는 동북변방군 부사령을 두고 그 성내의 주둔 군대를 통할 지휘하도록 하고 있었으나 다만 봉천성 주둔군만은 장학량 자신이 그 사령이 되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1930년 4월 이래 중국 본토에서는 서북파인 풍옥상, 염석산이 장개석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장학량은 이 기회를 타서 정전권고의 명목으로 관내 출동을 결정하여 약 7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진지방으로 진주하여 그곳의 요지를 무혈점령했다. 그후 장학량은 북경에 머물러서 중화민국 육해군 부사령의 지위에 올랐고 1931년부터는 관내의 병력을 더욱 증가시켜 9.18직전까지 약 11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관동군의 거짓보고 만주에서의 이변이 일본 육군 중앙부에 알려진 것은 9월 19일 상오 1시였다. 그러나 관동군의 보고전문은 처음부터 복선이 깔린 것이었으며 그것을 받아본 육군 중앙부는 그 진상을 가릴 길이 없었다. "18일 밤 10시경, 봉천 북방 북대영 쪽에서 중국군이 만철선을 파괴하고 우리 수비병을 습격하여 수비대의 일부와 충돌을 일으켰음. 보고에 의하면 봉천 독립수비 제 2대대는 현지를 향해 출동중임." 이어 제 2보가 상오 2시에 날아들었다. "북대영의 중국군은 만철선을 폭파했음. 그 병력은 3∼4중대 정도임. 호석대 중대는 11시경 북대영에 있는 적군 5∼600명과 교전중 그 일각을 점령했으나 적군은 기관총 과 대포를 증가시키고 있음. 중대는 목하 교전중. 노다중위 중상을 입었음." 이상으로 관동군은 사건을 중국측이 일으킨 것으로 허위보고하고 일본군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자위행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동시에 형세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는 암시를 주어 앞으로의 병력 증가 요구에 대한 복선을 깔고 있었다. 이어 3시에 날아든 제 3보에는 그 후의 작전행동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상의 상황에 따라 이다가끼참모는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할 것임. ①독립수비 제 2대대로 하여금 북대영의 적을 소탕케 한다. ②보병 제 29연대로 하여금 봉천성을 공격케 한다. ③독립수비 제 5대대로 하여금 북대영을 북쪽에서 공격케 한다. ④제 2사단에 대하여 그 주력을 가지고 증원토록 요구한다." 잇따른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육군참모본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전과의 11명의 부원은 곧 각자의 임무를 분담하고 19일 아침부터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작전방침을 세우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침입 9.18 사건 이후 육군 중앙부와 현지군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 조선군(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독단 월경 문제였다. 조선군 1개 여단(병력 4,000)이 군 최고통수권자인 일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사령관 하야시대장의 독단으로 관동군을 지원하려던 문제였다. 이 사건은 19일 아침 8시 30분, 육군참모본부에 조선군 사령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이 들어옴으로써 표면화되었다. "본 조선군은 봉천 방면의 사태에 비추어 비행 제 6연대(평양)에서 전투기와 정찰기 각 1개 중대씩을 오늘 아침 관동군 지원을 위해 평양을 출발시켰고 동시에 제 20사단(용산)의 혼성 1개 여단도 출동 준비중에 있음. 또한 제 19사단(나남)에게는 되도록 많은 병력으로 출동할 수 있도록 현지에 준비를 갖추도록 조치했음." 이 전문을 받은 육군참모본부는 당황했다. 현지군이 행동을 일으키는 일은 각의의 경비지출 승인을 받아야 하며 더구나 일왕의 통수권이 발동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을 터인 조선군 사령관이 월권행위를 감행하려 하는 것이다. 상오 10시 15분, 다시 조선군 사령관으로부터 전문이 들어왔다. "본 조선군은 봉천 부군의 정세와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혼성 1개 여단을 봉천 부근에 파견하여 관동군을 증원토록 할 것임. 이 여단은 19일 상오 10시부터 현 주둔지를 출발하여 철도 수송으로 압록강을 건넌 후 관동군 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임. 비행대는 오늘 이른 아침 출동하여 동 사령관의 지휘에 들도록 되어 있음." 여기에서 육군 중앙부는 조선군이 비행대뿐만 아니라 혼성 여단까지 독단 월경시키려는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육군 중앙부에서는 조선군의 행동에 대한 조처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의 과격파들의 증원 허용 주장에도 불구하고 불확대방침을 받아들여 조선군의 월경을 제지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3통의 전문이 발신되었다. 조선군 사령관에게는 일왕의 재가가 있을 때까지 병력파견을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평양의 제 39여단장에게는 출발하지 말 것이며 만일 출발한 부대가 있으면 결코 국경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으로 신의주수비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비행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의 월경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군 사령관은 계속 증원허용을 요청했고 참모본부는 조선군 사령관을 설득하다시피하는 전문을 보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으나 비행대는 이미 현지로 향한 뒤였다. 신정권 수립안 유조구폭파 다음날인 19일 밤,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이다가끼. 이시하라 두 참모와 하나야소좌, 가다꾸라대위가 참석해 있었다. 이들과 논쟁을 벌이는 대상은 때마침 비밀임무를 띠고 봉천에 출장온 육군 참모본부 제 1부장 다데까와소장이었다. 사령관과 참모장이 얼굴을 나타내지 않은 이 모임은 말 그대로 음모의 현장이었다. 논쟁의 대상은 만주사변의 금후의 진로에 대한 것으로서 진로를 제 1단계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제 3단계로 비약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시하라는 이번 기회에 만몽지방을 점령하여 영유화하는 제 3단계 안을 주장했고 이다가끼등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다데까와는 본국 정부의 방침과 국제적 시선을 고려하여 제 1단계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사행동의 범위는 길림, 장춘, 조남 연선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쟁은 끝내 결론을 보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서로의 의견이 상당히 근접했었다는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무력행동을 확대하고는 있었지만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어떤 결정도 보지 못한 채 다시 며칠이 지났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 혼쇼오의 의향에 따라 9월 22일 상오 8시부터 심양관 1호실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가 시작되었다. 이날 협의에는 특히 도히하라대좌가 참석하여 일본인을 맹주로 하는 `5족 공화국`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다가끼, 이시하라등의 반론으로 좌절되었지만 결국 이 모임에서 관동군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부의)를 끌어내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 결정은 바로 괴뢰 만주국 성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장학량의 대응 9.18 사건 당시 장학량은 티푸스의 치료를 받기 위해 북경의 미국계 협화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북경에 들어간 것은 원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서북파와 장개석의 싸움에서 장개석을 편들기로 결정한 장학량이 7만 병력을 이끌고 화북의 요지를 장악하고 그 뒤로 북경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병석에 누워있던 장학량은 9.18사건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것은 일본의 전면적 무력도발행위로 단정했다. 이러한 그의 의견에 외국인 군사고문 도널드도 동의하고 이를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자고 제안했다. 이 의견은 장학량의 동의를 얻어 채택되었다. 9월 27일, 만주에서 철수해 온 왕이철을 비롯하여 우학충, 왕우상등이 북경에 도착하자 일련의 막료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훗날 친일괴뢰로 전락한 탕이화도 참석해 있었다. 장학량이 주재하는 이 회의에서 왕이철이 제안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이상 우리는 제 2, 3의 대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 즉, 금주에 병력을 집결시켜 일본군에 대한 저항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 점령지대에 잠입시키기로 하자." 이 제안은 장학량의 동의를 얻었다. 이 회의의 결과 금주에 동북변방군 사령관 행정공서와 요녕성정부행정서(이하 금주정권)를 설치하고 장작상을 동북변방군 사령관 대리로 임명하는 한편으로 동북군 참모장 영진등의 요인을 금주에 주둔하도록 하는 동시에 만주 일대의 봉천군을 이곳에 집결시키기로 했다. 이때 거리에서는 중국 민중의 반일, 동북군지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모태 솔로도 구제해 줄 것 같은 연애 고수 스타는? 운영자 25/07/21 - -
72192 2차세계대전에 공수부대가 필요한 이유가 뭐임? 글구 그 역할은?????? [29] 졸리(218.144) 10.08.08 110 0
72188 2차대전中 알제리,리비아,이집트,터키,스페인,폴란드,노르웨이의 인구좀요 [1] 병구이(218.101) 10.08.08 26 0
72187 제국의 등 뒤에 칼을 꽂은 반역자들 [16] qwer(222.106) 10.08.08 157 0
72186 그러고보니 생각난 롬멜휘하에서 싸웠던 병사에 대한 이야기 [25] 샌디빠미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8 120 0
72185 프랑스가 빛의 속도로 밀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14] (121.55) 10.08.08 121 0
72182 근데 횽들, 독일군이 이길수도 있지 않았나? [35] 배나무(61.106) 10.08.08 93 0
72181 2차대전 영화 추천좀 해줘. [5] ㅁㅁ(221.161) 10.08.08 37 0
72177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 미국 [2] 일본해병대(222.239) 10.08.08 27 0
72175 영화 스탈린그라드 재밌나여? [8] ㅋㅋㅋㅋ(218.236) 10.08.07 66 0
72173 이화여대? ㅋ jpg. [23] as(175.198) 10.08.07 97 0
72172 폴란드가 독일한테 전쟁의빌미를 만들어줬음? [1] 한국인(122.46) 10.08.07 97 0
72171 독일 바르바롯사 작전 말인데 [5] asd(175.198) 10.08.07 65 0
72170 한국군 군가중에 간지나는거 없음 ? [5] 군가(116.42) 10.08.07 93 0
72167 낙진: 핵폭격 이후 라이프(211.173) 10.08.07 5669 0
72166 독일 공군의 최후의 공세 '보덴 플라테' 작전에 대해서 알수 있을까요?? [4] ㄱㄱㄱ(58.102) 10.08.07 169 0
72163 동쪽의 에덴 타키풍후 [4] qwer(59.12) 10.08.07 42 0
72161 대망의 연재 중일전쟁 3-1부 전선의 고착 [3] Geweh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265 0
72160 근데 왜 독일이 프로토스고, 소련(러시아)가 저그임?? [5] ㅇㄹㄴ(125.189) 10.08.07 232 0
72159 청산리 이후~해방까지 독립군 질문좀 (2차대전이야기 포함) [8] 개구리우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73 0
72158 me262의 위엄.jpg [28] F씨(210.91) 10.08.07 353 0
72157 영화 '로렐라이'어떠냐? [3] 임제독의결단(61.75) 10.08.07 74 0
72155 유틀란트 해전에 대해서 [17] xf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112 0
72149 패전의 아픔을 딛고선 독일의 국회 의사당....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19] ㄱㄱ(58.102) 10.08.07 104 0
72146 이게 대체 뭘 뜻하는건지 아시는분 있음? [8] 장제스(59.6) 10.08.07 111 0
72144 [한국근현대사] 무장 독립운동의 거목(巨木), 약산(若山) 김원봉... [11] 베르마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104 0
72143 2차대전 당시 FFI의 완장 형태 이하노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25 0
72142 파괴된 독일 국회의사당 [4] 이하노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66 0
72140 2대갤 1페이지가 괴랄하게 변한거 저뿐인가요? [7] 분필한다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49 0
72139 2차대전 소련군 필롯카 버젼별 이하노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1724 0
72138 쿨타임 차서 쓰는 일본 군함 까는 글 [6] 분필한다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66 0
72137 전격 롬멜에 대한 영 좋지 못할 것 같은 사설 [56] 라팔안다무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200 0
72135 근데 몇몇글은 그냥 닥치고 지워짐? 펩시를마시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33 0
72133 콜오브듀티2에서 소련군미션중 독일군들 [2] ㅇㅇ(116.37) 10.08.07 72 0
72132 Нам нужна одна победа-우리에게 필요한 하나의 승리 이하노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125 0
72130 광복절이 다가온다 [10] (221.154) 10.08.07 43 0
72129 히틀러의 평상시 말투가 상당히 저음이라는걸 알 수 있는 음원 ㄷㄷㄷㄷㄷㄷ [6] ㄱㄱ(58.102) 10.08.07 85 0
72128 극동군의 노래 이하노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190 0
72126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1] 히로시 중위(211.41) 10.08.07 89 0
72122 총검술을 익히는 중공군들 [9] 武運長久(116.42) 10.08.07 103 0
72120 일제시대 조선인들에 대한 탄광징용 방법           [3] qwer(59.12) 10.08.07 140 0
72119 이거 좀 웃기지 않냐? [9] 히로시 중위(211.41) 10.08.07 54 0
72117 이 3명중에서 실제 히틀러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누굴지????????? [13] ㅎㄷㄷ(58.102) 10.08.07 115 0
72116 ■ 이재오 "재수생들 공장이나 농촌에 보내 일 시키겠다" [12] 눈깔아(121.131) 10.08.07 58 0
72115 일제가 전국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거 그냥 도시전설이지? [40] 히로시 중위(211.41) 10.08.07 132 0
72114 청산리 대첩의 결과가 부풀려져있다는 설이 있던데 사실인가염? [8] 김좌진(211.41) 10.08.07 57 0
72109 일본이 국력이나 문화,경제 등 한국을 앞서나간게 언제부터냐? [7] 만델라(211.41) 10.08.07 54 0
72107 이 색히 입치료 맞죠?? [8] 上杉謙信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57 0
72105 티안무의 천황폐하 만세 드립글 [13] 179cm루저(125.129) 10.08.07 80 0
72104 반도의_역사교육_수준.swf [21] 베르마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07 93 0
72103 2차 세계 대전 장군들 중에서 유난히 롬멜만 유명해진 이유는 뭐임??? [19] ㅈㅈ(211.238) 10.08.07 218 0
뉴스 '유딱날' 박성웅, 배우 이수경에 "뭘 입어도 짜증나" 투어 도중 돌직구 왜? 디시트렌드 07.24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