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얻은 루프트바페의 교훈 요약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콘돌 군단의 스페인 내전 개입은 독일의 재군비의 보조를 빠르게 했다. 에드워드 홈즈(Esward Homes)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은 "제국의 지도력을 강화하여 전체 생산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새 장비의 도입 속도가 빨라졌으며 막대한 비용 상승의 결과가 되었다. 1938년의 오스트리아 및 체코 위기와 결합한 스페인 내전은 또한 재군비를 늦추자고 주장한 보수파의 반대의 마지막 흔적마저 없애버렸다."
1938년 늦여름 스페인에서의 군사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콘돌 군단은 40대의 하인켈 He111, 3대의 융커 Ju87, 45대의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Bf109, 5대의 도르니에(Dornier) Do17, 4대의 He45, 8대의 He59와 8개의 경 및 중(heavy) 대공포대를 보유했다. 그에 더해서, 그 시기의 국가주의자 공군 부대는 146대의 스페인기와 134대의 이탈리아 비행기들을 포함하였다. 1939년 5월에 독일로 돌아온 콘돌 군단은 281명의 장교와, 4,383명의 사병, 412명의 민간 기술자를 헤아렸다. 전체적으로는 약 19,000명의 독일인들이 스페인에서 복무했다. 군단은 386대의 적기를 격추했으며, 그중 59대는 대공포의 전과였다. 독일은 72대의 항공기를 접적 행동에서 상실하였고 사고로 160기를 잃었다. 인명 손실면에서는, 스페인의 복무중 298명이 사망하였다; 그중 131명이 전사하였고 167명은 병과 차량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적에 의한 부상자는 모두 139명이었다. 루프트바페가 얻기를 기대했던 바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대가를 지불하였지만, 초기의 공군이 규모가 작았고 항공기 생산에 있어서 독일의 경제와 군산 복합체에 의한 군수상의 제약 때문에 독일의 손해는 상당하였다.
일상 작전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스페인 전쟁은 지식의 주된 원천 - 비록 이 지식이 때때로 잘못 적용되기는 하였지만 - 을 제공하였다. 콘돌 군단 조종사들이 대부분 독일에서 조종 훈련 학교의 교관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전투 경험은 특히 귀중했다. 조종사들은 또한 정밀 지도의 중요성, 신속함의 이점, 표적 확인, 적절한 무선 교신의 필요성 등을 배웠다. 기술 개발을 위한 촉매로서, 전투는 기상 예보, 무선 지향 시스템(즉 니케바인), 조명 항공기, 효과적인 야간 작전을 위한 조명탄의 가치가 강조되었다. 스페인은 기종에 상관 없이 매우 도움이 되는 시험장이자 보육기였다. He51 복엽기는 소련의 단엽기와 대적할 때 전투기로서는 낡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근접 지상 지원 임무의 일부로 역할이 돌려졌다. Ju52는 매우 믿음직한 수송기이지만 폭격기로서는 한계가 있어, 지나치게 능력 이상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1937년 동안에 Bf109 전투기, Ju87 스투카 급강하 폭격기, He111과 Do17 폭격기들이 스페인에 투입되어 전투용 항공기로서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나타난 성공보다도 실수가, 드물고 특이한 전투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 국가주의자들이 공중 우세를 장악한 후에는 군단 폭격기 대대들이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He111 고속 폭격기의 도입으로 인하여, 폭격기들에는 경장갑과 약한 전투기 엄호만이 요구된다고 잘못 건의되었다. 수뇌부는 폭격기가 적의 방어를 뚫는데 자체 속도에 의지할 수 있다고 잘못 확신하였다. 베를린은 고성능의 잘 무장된 폭격기의 밀집 대형이라고 할지라도 단호한 전투기의 저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이 실수는 루프트바페가 전투기와 폭격기 개발의 조정을 게을리 하는 원인이 되었다. 폭격기에게 전투기 엄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루프트바페 사령부는 자신들의 전투기가 임무중 폭격기를 엄호하기에는 행동반경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슷한 근시안적 해석으로 전략과 전술 작전용의 다목적 항공기 개념이 인가되었다. 사실은, 히틀러는 전략 폭격과 급강하 폭격 능력이 모두 있는 다발 엔진의 중(heavy)폭격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혼혈 항공기의 산물인 Ju88은 두 임무 중 어떤 것도 적절히 수행해내지 못했다. 스페인에서의 88mm 고사포의 성공으로 고사포가 최고의 방공 무기라고 생각되었으며, 그 결과 독일 방어하기 위한 전투기 방어 체계에 대한 투자의 필요성에는 주의가 별로 취해지지 않았다. 미공군과 영국 공군 폭격기에 의해 독일에 부과된 무서운 손실이 이 믿음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스페인의 실습장에서 얻은 가장 가치 있는 교훈은 전투 작전 교리의 전술적 개념이었다. 스페인의 경험은 루프트바페 내부에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이 독일 공군의 현저하고 주요한 과업이라는 믿음을 확립시켰다. 이 믿음은 루프트바페의 폴란드에서의 가장 눈부신 성공과 이후의 3제국의 철저한 패배 모두를 야기했다.
폴란드 전역(1939년 9월 1일 - 9월 27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폴란드 전역은 스페인에서 개발되고 열거된 원칙들을 정당화시켰다. 이 원칙들 중 첫 번 째 것은 하나의 과업에 모든 가용한 노력을 동시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원칙은 지상 부대의 기동을 방해할만한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독일 공군 참모부는 폴란드에 대한 군사 작전인 백색 계획(Fall Weiß)을 계획했으며, 이러한 원칙들에 크게 입각하여 작전은 눈부신 성공으로 보답되었다.
위에 설명한 두 가지 원칙을 이용하여 폴란드에서 적용된 전략과 전술은 콘돌 군단의 스페인에서의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루프트바페는 진로상의 장애물을 개척하고 공중우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여, 보병과 기계화 부대를 지원했다. 폴란드 전역은 스페인에서 얻은 교훈인 근접 지상 지원 전술, 공중 수송, 급강하 폭격의 효능을 입증했다. 폴란드 전역에서는 또한 육군과 루프트바페의 전체 전력이 연합하는 최초의 기회가 제공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전투로 이름지어진 전격전(Blitzkrieg)은, 전술 공군과 지상 기계화 부대간의 근접 협동으로 전진을 깊숙하고 신속하게 침투하는 것이었다. 전격전의 기본 요소는 스페인에서 개발되었었다. 폴란드에서는 최초로 완전히 운용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전에, 루프트바페는 세 개의 별도의 사단에 소속된 370,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공군만으로는 208,000명이었고, 그중 20,000명은 승무원, 1,500명은 공수부대원이었다. 고사포 부대는 107,000명, 항공 통신부대가 58,000명이었다. 루프트바페는 백색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2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비축하였으며, 이는 폴란드 공군의 대부분 낡은 500대의 전투기를 크게 초과하는 숫자였다. 독일 항공기중 1,000대는 폭격기, 1,050대는 전투기였다. 스페인 내전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는 폴란드나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전역의 착수를 준비하지 못했다. 1939년 9월에 루프트바페는 단지 3주분의 폭탄과 6주분의 탄약만을 비축하고 있었다. 게다가, 루프트바페에는 장거리 전략 폭격기, 적당한 야간 폭격기, 천파운드를 넘는 폭탄, 항공기 투하 어뢰, 현대식 기뢰, 현대식 무장, 적당한 폭격 조준기가 없었다. 폭격기와 호위 전투기는 여전히 서로간의 교신수단이 부족했다. 다행하게도 폴란드 전역은 짧았으며, 독일의 잠재적인 재고와 보급의 약점이 드러나거나 여전히 준비가 미흡한 루프트바페의 제한된 능력을 완전히 시험할 만큼 길지 않았다.
전체적인 독일의 군사 전략인 백색 계획의 정황하에서 루프트바페의 우선적이고 주요한 목표는 공중 우세를 달성하기 위한 폴란드 공군의 격멸이었다. 루프트바페는 공중 우세의 달성만으로도 육군에 대한 자유로운 지원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 목표의 일환으로서 루프트바페는 전체 폴란드 공군의 지원과 보급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고 폴란드 항공기 생산을 붕괴시켰다. 또한 보조적으로 거점, 포대, 지상부대 집결지들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여 폴란드 육군을 격멸하는데 공헌하였다. 전역의 진행상황이 말해주듯, 항공기와 육군의 지상 기계화부대간의 협동은 다대한 성공을 가져왔다.
독일은 1939년 9월 1일 오전 4:45분에 폴란드를 공격했다. 안개와 낮은 구름이 오전의 항공 작전을 지연시켰지만, 오후에 루프트바페는 맹렬하게 교전했다. 루프트바페의 주된 표적은 폴란드 비행장이었다. 카토비츠(Kattowitz), 크라코브(Krakow), 르보브(Lwow), 루블린(Lublin), 빌나(Wilna), 카이다(Kida), 글로노(Glodno), 기타 장소들이 철저히 난타당했다. 겨우 이륙한 구식의 폴란드 P.Z.L. P.11 전투기들은 Bf109와 Bf110들에게 쉽게 요격되고 격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조종사들은 공중에서 대단한 용기와 결단력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독일은 이륙하여 그들과 조우한 폴란드의 비행기들이 거짓 전투행동을 취하는 미끼라는 것을 몰랐다. 루프트바페는 모든 폴란드의 비행기들을 지상에서 포착하고자 했으나, 폴란드 정보부는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발견했으며, 폴란드 공군은 대부분의 작전용 항공기를 위장된 비상 활주로로 옮겼다. 독일은 당연히 폴란드의 잘 알려진 상설 활주로만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즉시 사용할 수 없는 낡은 전투기들과 다수의 훈련기들을 파괴하는데만 성공하였다. 폴란드 공군의 대부분은 탈출하여 폴란드 공군 사령부가 바르샤바(Warsaw) 방어 계획을 급조할 시간을 제공했다.
폴란드 공군이 소멸했다는 가정하에, 루프트바페는 1939년 9월 3일에 노력의 일부를 보조 표적과 육군 지원 작전으로 전환했다. 이 작전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계획 개요에 입각하였다. 루프트바페는 거점, 포대, 부대 대형들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적의 보급 조직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폭격기는 공장, 병영, 탄약고, 창고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적 전선 후방에서는 기차역, 교량, 도로, 교차로를 공격하여 통신을 붕괴시키고 폴란드 증원군의 이동을 방해하였다.
주로 볼프람 폰 리흐토펜의 덕분에 공군과 육군의 협동은 매우 훌륭했다.
리흐토펜은 육군에서 원하는 바를 공군이 제공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며, 10군을 지휘하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er von Reichenau) 장군에게 전선 6마일 후방의 손발트(Schonwald) 성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와 지휘소를 나누어 쓰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바람직한 합의였으며, 리흐토펜의 지상 공격 대형들이 진로를 강타하면 라이헤나우의 기갑부대가 폴란드 방어선에 구멍을 뚫도록 시간표가 짜여졌다. 이것이 리흐토펜이 스페인에서 프랑코의 몇몇 장군들과 행동하면서 가치를 배운 가장 밀접한 군간의 협조였다.
리흐토펜은 또한 가급적 전선에 가깝게 위치해서 실시간 지상 상황을 접했다. 가능하면 언제든 자신의 피에슬러(Fiesler) 스토르히(Storch) 전용기로 적진을 너머 비행하여 직접 정찰을 수행했다. 실제로, 그는 공격 첫날 대공화기에 격추되었지만, 불시착하여 무사히 귀환했다. 자신의 정찰 비행은 제쳐두더라도, 리흐토펜은 자신에게 적시에 정보 자료를 공급해주기 위한 특별 장비의 통신 부대와 정찰 비행대대를 휘하에 가졌다.
9월 9일-18일의 쿠트노(Kutno) 부근 전투는 루프트바페가 폴란드에서 보여준 효과의 좋은 예이다. 포즈난(Poznan) 군(Army) 지휘관인 쿠츠레바(Kutzreba) 장군의 지휘아래 폴란드군은 쿠트노 주변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기습을 개시했다. 폴란드군의 이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루프트바페는 공격을 둔화시키도록 요청받았다. 30대의 헨셀(Henschel) Hs123기들이 포즈난군 상공에 저공으로 몰려와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이용하여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였고 적 부대를 대체로 분열시켰다. 스투카, 도르니에, 하인켈기들이 Hs123기의 뒤를 따랐다. 이 공격은 폴란드군 일부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칠 만큼 혼비백산케 했다. 9월 18일에 50,000명의 폴란드군이 항복하였고, 다음날 105,000명이 추가로 저항을 멈추었다. 허버트 멀로이 메이슨 2세(Herbert Molloy Mason Jr.)가 폴란드군 벌어진 아비규환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거의 전원이 이전에 공중 공격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쿠즈레바의 병사들에게는, 다음 20분은 지옥 속의 악몽과도 같았다. 기관총이 병사와 말들의 대열을 줄줄이 넘어뜨렸다; 수백 발의 경량 유산탄이 타오르고 폭발했다; 더 강력한 110파운드 폭탄의 폭발은 대지를 갈가리 찢었고, 나무들은 찢어졌으며, 날카로운 금속 파편이 인마에게 휘몰아쳤다. 다양한 무기들의 마지막 발이 투하된 이후에조차도, 123기들은 저공 공격을 마치지 않았다. 조종사들은 BMW엔진이 1800RPM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알았고, 삼엽 프로펠러의 효과로 가변 피치 프로펠러는 표적이 된 병사의 내부와 외부에 귀청을 찢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산출했다. 강건한 병사들조차도 무기력해졌으며,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말들은 간단히 미쳐버렸다.
바르샤바 방어에 사용하도록 기습 이전에 교묘히 이동한 폴란드 비행기들은 루프트바페의 압도적인 수량에 결코 대응하지 못했다. 수도 상공에서 폴란드의 P.Z.L. P.11 전투기들은 BF109에 대응하여 날아 올랐으나, 더 빠르고 기동성 있는 독일기들에게 화력이 밀렸다. 이따금 대단한 결단력의 폴란드 조종사들은 적 전투기나 폭격기들을 격추했지만, 대부분의 폴란드 전투기들은 루프트바페 전투기 전력의 더 많은 수, 더 뛰어난 화력, 더 현대적인 장비에 직면하여 압도당하였다.
폴란드 수도를 폭격하기 전에 루프트바페는 도시의 항복을 요구하는 수천장의 전단을 살포하였다. 요구가 거절되자,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이 행동에 들어갔다. 그 후, 루프트바페가 도시를 폭격함에 따라 독일기들은 바르샤바 상공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작전은 몇천 피트씩 분리되어 집단으로 대기하며 질서 정연하게 연속적으로 급강하를 하는 스투카의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급강하 폭격기의 뒤를 이어 응급히 폭격기로 개조된 Ju52 수송기들이 승무원들이 말 그대로 소이탄을 적재구로 밀어 떨어뜨려서 도시를 폭격했다. 도시나 시민들 모두 파괴적인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으며, 1939년 9월 27일에 폴란드 정부는 수도를 넘겨주었다.
루프트바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빠르고 압도적인 독일의 승리의 원인은 육군이었다. 육군의 신속한 전진은 폴란드의 조기 경보 시스템과 전방 기지들을 초월하였으며, 폴란드 전투기의 통합된 지휘를 방해하였다. 육군의 전진은 또한 병참 창고와 집적소를 삼켜버렸으며, 남아있는 작전 가능한 폴란드 항공기들에 대한 여분의 보급을 차단했다. 9월 14일이 되어서야 루프트바페는 후트닉(Hutnicki) 부근의 비행장에 있는 대부분의 폴란드 폭격기를 기습하는데 성공했다. 폴란드 공군은 주로 외부 압력이 아니라 내부적 붕괴에 의해 파괴되었다. 루프트바페의 주된 기여는 낡은 폴란드 공군 격멸보다는 효과적인 지상 부대 지원과 폴란드 육군의 격멸이었다.
백색 계획은 루프트바페에게는 희생이 큰 전역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전역중에 전사한 10,761명의 독일군중에서, 189명이 조종사와 승무원이었다. 모든 종류를 합해 261대의 항공기 - 루프트바페 전력의 7.6퍼센트 - 를 거의 대부분 근접 지상 지원 작전중 대공 방어에 상실하였다. 이 261대중 47대(전력의 5.6%)는 Bf109였다. 폭격기가 81대(전력의 6.5%)였고 근접 지원 항공기는 50대(전력의 13.2%)였다. 폴란드에서 루프트바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은 아닐지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폴란드 전역은 스페인에서 얻은 교훈의 가치를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 Ju52는 독일국방군(Wehrmacht)의 전차(Panzer)와 기계화 부대를 보급하고 BF109 대대에 개별 부품, 탄약, 항공 연료를 공급하는 수송기로서의 유용성을 입증했다. 이따금 60대의 He111기로 크라코브(Krakow) 비행장에서 실시했던 바와 같은 융단 폭격이 시험되었다. 폴란드에서 그 가치를 결정적으로 증명한 Ju87 급강하 폭격기가 He111기의 뒤를 따랐다. 크라코브에서는 30대의 Ju87기들이 비행장으로 급강하하여 격납고, 주기한 항공기, 활주로에 3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폴란드 공군이 약간의 저항만을 보였기 때문에 Ju87기들은 놀라운 결과를 이루었다. 스투카는 효과적인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급강하 공격 고유의 매우 높은 정확성을 이용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사이렌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었다. 스투카의 성공으로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서 항공기는 주로 지상 지원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화되었다.
폴란드 전역의 전반적인 결과는 공군이 매우 강력한 무기라는 견해를 지휘계통 내에 견고하게 굳혔다. 그러한 견해의 대부분은 루프트바페가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과 공군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전격전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출판물과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백색 계획의 성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폴란드 공군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구식이었으며, 겨우 이륙한 비행기들은 거의 4대1로 독일군에게 수적으로 밀렸다. 폴란드 전역은 루프트바페의 능력에 관한 광적인 주장을 이끌었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선언은 루프트바페 단독으로 전투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덩커르크(Dunkirk)에서의 괴링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에 의하면,
루프트바페는 다른 모든 병과들보다도, 공간 기동력의 장점으로 인하여 이전의 전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과업을 달성하였다...폴란드 전역은 독일 공군의 잠재력의 시초였으며, 특별한 의미의 견습기간이었다. 루프트바페는 전투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그리고 다음의 더욱 격렬하고 결정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1940년 4월 7일 - 5월 10일)
백색 계획 이후에, 교전국가들은 "Phony war"라고 알려지게 되는 기간에 들어갔다. 군사 교전은 드물게 일어났다. 이 기간동안, 폴란드 캠페인에 참가한 루프트바페의 부대들은 독일의 기지로 복귀했다. 항공기는 수리, 점검, 개량되었으며, 서부에서의 봄의 전투를 대비하여 공군력의 확장이 계속되었다. 루프트바페의 작전 활동은 최소로 감소하였고, 가끔씩의 함선 폭격이나 정찰 비행으로 제한되었다. 전투기 부대들, 특히 세부적으로 정찰된 프랑스의 마지노선 근처에 주둔한 부대들은 전투의 유혹을 피했다. 루프트바페는 폴란드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1940년 봄에 Phony War가 갑자기 끝났다. 독일은 서부로의 진격 대신에 스칸디나비아를 향해 북방으로의 기습을 개시하였다. 공격은 스칸디나비아를 군사 기지로서 지키고 스웨덴에서 수입하는 귀한 철광석을 방어하려는 영국의 계획을 선점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독일은 미래의 영국에 대한 공중 및 해상 공격을 위한 전략기지로서 스칸디나비아를 얻고자 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전역의 암호명인 "베서 훈련(Weserubung)"에서의 루프트바페의 전략은 폴란드에서의 작전 진행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두 가지 원칙에 기초하였다. 독일 최북방의 슐레스빅-홀슈타인 지방과 국경을 맞댄 덴마크는 노르웨이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는 영국 해군(Royal Navy)이 접근하기 쉽게 해주는 긴 해안선을 가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결과, 독일은 완전한 기습으로 은밀히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이 기습의 일환을 달성하기 위해 현대전에서는 최초로 공수부대가 이용되었다. 약간의 전술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의 최초 목표는 여전히 공중 우세를 장악하고 그 후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 루프트바페는 지상과 차량화 부대에 대한 보급과 증원, 해안 정찰, 영국 해군력 공격, 노르웨이 계곡에서 작전하는 부대 지원, 점령지역의 전투기와 대공포 방어 등의 2차적인 임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공격은 1940년 4월 7일에 개시되었다. Ju52기들이 덴마크 주변 지역과 앨버그(Alberg)의 두 개의 비행장에 공수부대를 투하했다. 해상 수송부대가 덴마크의 해안 도서에 상륙함과 동시에 지상부대는 덴마크 국경을 넘었다. 몇 시간 내로 국왕 크리스챤 10세(Christian X)는 밀집 대형의 He111과 Do17기들의 코펜하겐 상공의 위력 비행에 위압되어 휘하의 부대들에게 사격 중지를 명령하였다. 독일은 불과 20명의 사상자만으로 덴마크를 점령하였다.
덴마크 공격과 동시에 시작된 노르웨이 공격은 빠르게 대규모의 군사 행동의 초점이 되었다. 독일군은 베르겐(Bergen), 트론하임(Trondheim), 나르빅(Narvik) 시들을 점령하였으나, 노르웨이군의 단호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오슬로(Oslo)에 낙하한 공수부대는 피요르드로 진입한 독일의 중(heavy) 순양함 블뤼쳐(Blucher)를 격침시킨 항구 요새를 제압하였다.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은 독일 해군(Kriegsmarine)이 부대를 상륙시킬 수 있도록 항구 입구를 방어하는 크리스챤샌드(Christiansand)의 요새를 난타하였다. 다수의 Ju52기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포네부(Fornebu; 오슬로 외곽)와 솔라(Sola; 스타방겔[Stavanger] 부근)의 비행장들에 공수부대를 투하하였다. 장거리 쌍발 Bf110전투기들이 육중한 Ju52기들을 호위했으나, 저항은 적었다. 매우 낡은 소규모의 노르웨이 전투기 전력의 대부분은 공수부대 낙하에 앞선 비행장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독일은 비행장을 곧 점령하고 추가 증원군이 하늘로부터 쇄도했다.
작전은 저항없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독일군이 점령한 해안 도시들에 영국 해군이 압력을 높였다. 나르빅에서는 에듀발트 디틀(Eduard Dietl) 장군 휘하의 독일군이 포위되어 공중에서 보급과 증원을 해야 했다. 영국군은 4월 15-17일에 걸쳐 나르빅, 남소스(Namsos), 안달네스(Andalsnes)에 상륙하였다. 루프트바페는 영국군의 상륙, 해공 수송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해군을 호위하도록 노력의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수평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부대들이 지속적인 출격에 착수했다. 이들은 대수롭지 않은 공중 저항에 직면하였고, 영국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성공적인 기습 공격의 결과는 영국 상륙군이 퇴각할 정도로 결정적이었다. 실제로, 영국군은 함대가 공중공격에 처했기 때문에 트론하임 지역의 직접적인 해상 공격에서 손을 떼야 했다. RAF는 상당수의 공중 파견군을 유지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노르웨이에 전투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루프트바페의 정찰기들은 얼어붙은 호수에서 RAF가 구형의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전투기들로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을 알아냈다. 곧 독일 폭격기들이 도착했고, 폭탄을 투하하여 얼음을 부수고 착륙장을 파괴했다. 전역의 말기에 약간의 허리케인(Hurricane)기들이 출현하였으나, 전투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노르웨이의 루프트바페(제10 항공 군단)가 최대 전력일 때는, 360대의 장거리 폭격기(He111과 Ju88), 50대의 급강하 폭격기(Ju87), 50대의 단발 전투기(Bf109), 70대의 쌍발 전투기(Bf110), 60대의 정찰기(Do17), 12대의 연안용 항공기(He115, He59, Do18) 등 700대 이상의 항공기로 구성되었다. 이 항공기들에 추가하여, 소수의 4발 Ju90기와 포케불프(Focke Wolf) Fw200 콘돌(Condor)기들로 증강된 500대의 Ju52기들이 수송 가능한 상태였다.
"베서 훈련"을 통해 독일은 부대를 이동, 보급, 증원하기 위한 공중 수송을 이용하였다. 실제로, 스칸디나비아 점령시 루프트바페의 주된 역할은 수송 임무였다. 독일 원정군 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스트(Nikolaus von Falkenhorst) 장군은 우호적인 침입을 원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공중 수송 임무로서의 루프트바페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독일 공중 수송 이론은 완전하고 성공적으로 시험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전역동안의 다른 교훈으로는 전투기로 방어되는 표적을 폭격하는 폭격기에 대한 전투기 호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독일이 고립 지역과 또는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에 부대를 우선 투입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공중 우세가 결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트론하임 상륙 시도를 보호하는 영국 해군 함선들에 파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심즈(Sims)가 기록 한 바와 같이, "공군력이 적절히 배치되고 운용되어 해상의 가장 강력한 함선과 함대들조차도 공중 폭격 범위를 피할 수 없었다. 오슬로와 스타방겔과 같은 도시의 기습 점령은 공수부대와 공중 수송부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넓게 걸쳐 광범위하게 실시된 공중 정찰로 도로가 미비한 지역에서의 통신이 쉬워졌다. 정찰을 통해 영국 해군의 위치를 또한 정확하게 탐지하여 루프트바페와 독일 해군이 영국 수송선과 전함들을 격침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루프트바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다섯 가지 교훈을 얻었다. 공수부대와 공정작전은 기습을 쉽게 해주어, 적 부대 사이의 혼란을 유발하고 공격하는 독일군에게 선제권을 부여하였다; 공군력은 반도의 거친 지형에서의 지상 전투에 효과적으로 개입하였다; 정찰기는 고립된 보병 포위망 사이의 통신을 촉진하고 정확한 적 집결지 정보를 제공하였다; 공중 수송은 공중에서 부대를 투입, 보급, 유지하는데 매우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군력은 공중 엄호가 없는 해상의 선박에 다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교훈들의 대부분은 저지대 국가들과 프랑스를 공격하는 다음번의 독일의 이동 계획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서부 전역 (1940년 5월 10일 - 6월 26일)
독일의 네덜란드(Holland), 벨기에(Belgium), 프랑스(France)에 대한 공격은 1940년 5월 10일에 개시되었다. 루프트바페는 연합군의 1,700대에 대해 4,000대 이상의 비행기를 포진시켰으며, 그 심각한 불균형은 전투의 양상을 암시하였다. 1,680대의 폭격기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영국은 830대의 전투기만을 모을 수 있었으나, 루프트바페는 폭격기를 호위하기 위해 800대 이상의 Bf109를 하늘로 올려 보낼 수 있었다. 공격에 가용한 전체 독일기는 1,300대의 장거리 폭격기, 380대의 급강하 폭격기, 860대의 단발 전투기, 350대의 쌍발 전투기, 640대의 정찰기, 475대의 수송기, 45대의 강습 글라이더였다.
많은 전역에서와 같이, 네 번째로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에 대한 전투시의 루프트바페의 역할은 주로 지원과 수송이었다. 우선, 루프트바페는 제공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나서, 적 비행장에 대한 강력한 공격으로 공정작전의 진로를 소탕했다. 공중 공격과 함께, Ju52기들은 공수부대를 목적지로 수송하였다. 이 목표들의 성공에 이어, 루프트바페는 서쪽을 향한 독일군 기갑부대의 돌진을 지원하였다. 마지막으로, 루프트바페는 전진하는 기계화 부대와 도보 부대들을 보급하여 타군과의 이동과 사령부 접촉을 유지하였다. 히틀러는, 아마도 불필요하게, "공군은 우리 육군에 대한 영불 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전진을 직접 지원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사항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저지대 지방에 대한 꼼꼼하게 준비하고 잘 통합된 독일 육군과 공군의 공격은 압도적이었다. 루프트바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군의 비행장을 폭격하고 기총소사했으며, 이 나라들이 보유한 불충분하고 낡은 장비들을 파괴했다. 루프트바페의 공수부대들은 교량과 교차로를 점거하였고, 글라이더 부대들은 벨기에 요새인 에방 에마엘(Eban Emael) 요새를 강습했다. 1,200명의 벨기에군 병사들이 배치되고 난공불락이라고 이름난 지하 요새인 이곳은 5월 11일에 독일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85명의 독일 강습 공병에 의해 포위공격을 당하여, 수비대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기습의 일부는 콜로뉴(Cologne)에서부터 Ju52로 견인되어 요새의 15마일 밖인 아헨(Achen) 상공에서 놓여진 글라이더로 달성되었다. 헤이그(Hague)에서는 공수부대가 세 개의 주 비행장을 점령하고 로테르담(Rotterdam) 부근의 중요한 모에딕(Moerdijk) 교량을 탈취하였다. 그렇지만, 네덜란드의 왕족과 정부를 포획하려는 계획은 실패했다. 뮤즈(Meuse)강에 걸쳐있는 로테르담 중심부의 윌렘스(Willems) 교량은 He59 수상비행기로 강에 착륙한 부대들에 의한 특이한 공격으로 점거되었다. 네덜란드는 5월 15일에 항복하였고 벨기에군은 13일 후에 무기를 놓았다.
그 후에 전투의 초점은 프랑스와 가장 중요한 뮤즈 강 도하로 바뀌었다. 뮤즈 강 서안은 전진하는 독일군과 너머의 프랑스 지방 사이의 마지막 현저한 자연 경계이자 장애물인 강을 방어하도록 강력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5월 13일 오후 4시에 루프트바페는 강 서안의 프랑스 진지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루프트바페는 움직이는 포대로 행동하여, 지상부대를 위한 강력하고 직접적인 공중 지원을 제공하였다. 신형 항공기로 교체중이던 프랑스 공군은 루프트바페와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프랑스 육군 항공대 비행 대대들의 작전 준비율은 40 퍼센트 이하였다. 독일 정찰기들은 수뇌부에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구체적인 상황을 제공했다. 어둠이 지기 전 몇 시간동안 루프트바페는 급강하 폭격기와 수평 폭격기를 500소티 이상 출격시켰다. 리흐토펜이 자신의 사령부를 육군의 라이헤나우 장군과 함께 써서 군간 협조를 촉진했던 폴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은 제2 항공군단장인 브루노 뢰쩨르(Bruno Loerzer) 장군과 함께 공격을 협조하도록 사전에 주의깊게 계획을 수립하였다. 두명은 루프트바페가 지상부대의 기동에 최대한 기여하도록 계속적인 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계속적인 급강하 폭격으로 프랑스 포병들이 뮤즈 강을 도하하는 독일 보병들에게 사격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저녁무렵 부대는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루프트바페가 가한 황폐함의 예가 뮤즈 강둑에 있는 세당(Sedan) 시에서 벌어졌다. 5월 13일에 He111기를 동반한 Do17기들이 4시간 이상 시에 폭탄을 투하하여 전화선, 도로, 철로, 많은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수평 폭격기의 뒤를 이어 일련의 스투카들이 도합 5시간을 넘게 급강하 폭격을 하여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하여 강화된 벙커를 관통하고, 포병을 분쇄하고, 병영을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Bf109와 Bf110기들이 폭격기들을 효과적으로 호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전투기들을 방어했다.
다음날, 전차들이 뮤즈 강 도하를 준비하는 동안, Bf109기들은 강에 부설되고 있는 부교에 대하여 공격을 시도한 프랑스 폭격기의 절반을 격추했다. 아서 배럿 경(Sir Arthur Barratt) 휘하의 71대의 블렌하임(Blenheims) 과 배틀(Battles)기들로 구성된 RAF의 공격 편대들, 그리고 250대의 모레인(Moranes), 커티스(Curtisses), 드와땡(Dewoitine) 전투기들의 집단이 이 두 번째로 공격을 시도하여,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대공포와 전투기 방어망을 뚫고 40대의 폭격기를 격추한 Bf109들에 의해 공격은 몰살되었다. 공중전에서 50대의 연합군 전투기가 또한 손실되었다. "RAF가 수행한 유사한 규모의 작전에서 이보다 더 높은 손실은 없었다.". 전진하는 독일 전차부대는 프랑스군 사단들에게 퇴각을 강요하였고 강을 따르는 저항은 없어졌다.
독일이 시험한 기동전의 기본인 부대와 장비의 신속한 전개는 Ju52 수송기에 의해서 가능했다. 뮤즈 강의 교량 횡단이 때로 정체되었기 때문에 연료, 수리부품, 탄약, 지상 병력들이 목적지로 공중 수송되었다. 그 후, 기계화된 전차 군단이 진격을 함에 따라 보급선은 위험스러울만큼 늘어났다. Ju52들은 또다시 모든 필요한 보급을 수송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송기 자신들도 매일 전방의 새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 독일의 신속한 전진은 전투의 경과를 암시하였으며, 연합군은 패주했다.
독일군이 200마일 밖의 영불해협을 향해 북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전투기 엄호를 받는 장거리 폭격기들은 철도 조차장에서부터 연합국 육군의 모든 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적들을 공격하였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기습과 정확성을 달성하기 위해 통상 저공으로 수행되는 끊임없는 폭격기와 전투기의 공격에 처했다. Bf109와 Bf110기들은 적 부대들에 기관총과 기관포의 탄우를 쏟아부었다. 폭격기는 지상 폭발로부터 안전하도록 수 초의 지연 신관을 가진 폭탄을 가지고 가깝게 뒤를 뒤따랐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덩커르크항을 향해 퇴각했다. 괴링은 루프트바페가 연합군을 격멸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히틀러에게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승인하였고, 구데리안 장군의 전차들에게 덩커르크 외곽에서 정지를 명했다. 다음에 따른 것은 2차대전 중 루프트바페의 최초의 좌절이었다. 독일 비행기에 비해 기지와 가까이에서 작전하는 영국 전투기들은 Bf109와 Ju87기들보다 덩커르크 해안 상공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들은 주먹코의 109기들과 대등하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그 결과 루프트바페는 공중우세 달성에 실패하였다. 5월 26일부터 6월 3일 사이의 9일 동안, 루프트바페는 RAF에게 24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악천후로 인하여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성공의 기본인 장기간의 공격 집중을 달성하는 것이 또한 방해되었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대등한 영국 전투기들에 의해 좌절된 루프트바페는 해안 폭격이 효과가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110파운드와 550파운드 폭탄을 부드러운 모래에 투하하는 것은 폭죽을 톱밥 속에 파묻는 것과 같았다." 주간의 루프트바페의 시계의 여유를 차단하기 위해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어둠의 장막 속으로 피했다. 거의 매 순간에 저항을 받은 루프트바페는, 영불해협을 건너 연합군을 수송하는 선박에 집중했다. 덩커르크 탈출을 수행하던 861척 중 243척이 독일 폭격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합군 - 338,226명 - 이 탈출을 하였고, 독일은 연합군이 다수의 장비를 뒤에 남긴 것에 만족해야 했다.
프랑스가 1940년 6월 26일에 항복하기는 했지만, 덩커르크 상공에서의 루프트바페의 실패는 앞으로의 영국에 대한 공중공격에서의 불길한 징조를 품었다. 여하튼, 지난 1940년의 대륙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적용한 항공 교리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46일간의 전투에 걸친 공중 지원은 기본적으로 스페인에서 학습되고 폴란드에서 증명된 교훈을 대규모로 적용한 것이었다. 이 교훈들이 무엇이었건간에, 그 효력은 강화되었다. 루프트바페는 덩커르크까지는 성공적으로 공중 우세를 획득했고, 제공권이 지상부대의 성공의 기초 요소라는 것을 입증했다. 루프트바페는 구원, 지원, 보급, 공수부대와 보병을 증원하여 기계화된 지상 부대와의 근접 지원을 끝까지 완수했다. 놀라운 정확성으로 적의 참호, 요새, 토치카, 전차를 파괴함으로써 스투카의 평판은 전투기간중에 더욱 향상되었다. 육군의 신속한 전진이 야기한 잠재적인 병참상의 문제는 믿음직한 Ju52 수송기들에 의해 방지되었다.
서부에서의 루프트바페의 실패는, 호위받지 않는 폭격기들은 덩커르크 상공의 영국공군의 집결과 같이 잘 장비되고 결연한 전투기의 저항에 직면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독일에게 가르쳤다. Do17기가 영국 전투기만큼 빠르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근접전에서의 적당한 성공의 기회에 홀린 독일 폭격기 승무원들은 빠르게 좌절했다. 또한 독일 전투기 승무원들은 쌍발의 BF110기들이 영국의 단발 전투기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프트바페는 덩커르크에서 냉정한 교훈을 얻었었다. 이 교훈 뒤로 영국 상공에서의 훨씬 더 비참한 패배가 곧 뒤따르게 되었다.
결론
덩커르크 해안 상공에서의 루프트바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에서 콘돌군단이 얻은 교훈은 값어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덩커르크 상공의 공중 전투는 결국 루프트바페가 스페인 전쟁에서 얻은 교훈의 일부가 잘못 해석되고 적용되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루프트바페의 공중 전투 교리는 루프트바페 근무 규칙 16: 항공전의 수행에 요약되었다.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저지대, 프랑스 전역의 진행을 통하여 루프트바페는 세 가지의 기본 공중 전투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 첫째는 적 공군력 제압과 공중 우세 획득이었다. 두 번째는 육군과 해군 지원(특히 육군)이었다. 세 번째는 적의 산업 기반 파괴와 전쟁 유지 수단 붕괴였다.
스페인에서는, 콘돌 군단은 앞의 두 가지 원칙만을 따랐다. 스페인에는 산업시설이 매우 적었으며, 내전의 특성상 스페인의 빈약한 산업 기반을 공격하는 것조차 배제되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원칙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며, 이 규칙의 범주 내에서 전술이 계획되고 결실을 맺었다.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은 볼프람 폰 리흐토펜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전투기 전술은 주로 베르너 묄더스의 지도와 인내 아래에서 발전하였다. 주간 폭격, 야간 폭격, 급강하 폭격, 대함 폭격이 시험되고 수정되었다. 콘돌 군단은 인원과 장비의 기동성과 신속한 전개에 의해 제공된 이점을 배우고 열중하였다. 콘돌 군단의 조직과 편제는 합리적이 되고 개선되었다. 1939년 3월에 콘돌 군단이 독일로 돌아왔을 때, 신설 루프트바페의 풋내기들은 배우고 단련된 숙련된 조종사가 되어 돌아왔다. 당연히, 콘돌 군단은 독일로 다음번의 루프트바페의 전투인 폴란드 침공에 대한 계획성을 키우게 된 전투 교훈과 야전 경험을 가져왔다.
폴란드 전역은 스페인에서의 교훈의 가치를 더 큰 규모에서 입증했다. 루프트바페는 스페인에서처럼 적 공군력의 파괴와 공중 우세 획득에 집중하였다. 이것을 달성하자, 루프트바페는 두 번째의 원칙인 육군 지원에 착수하였다. 폴란드에서 처음 쓰인 전격전에서, 기갑 부대와 공군력이 협동하여 폴란드군을 압도하였다. 독일의 전진의 신속성을 반영하여, 폴란드군은 4주 미만에 항복했고, 육군과 공군은 분쇄되었다. 루프트바페의 주된 기여는 근접 지상 지원 전술, 믿음직한 공중 수송, 정확한 급강하 폭격이었다. 루프트바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폴란드 전역이 짧았기 때문에 보급과 장비의 부족 상황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략과 전술은 눈부시게 성공적이라고 판명되었으며, 다음에 있을 전역 전에 손실을 회복할 시간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베서 훈련"은 폴란드에서 확립된 기본 형식을 따랐다. 루프트바페는 공중우세를 신속히 획득하였고 현대전 최초로 공수부대를 운용하여 완전한 기습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루프트바페는 정찰과 수송 임무로 독일 지상부대를 지원하여 육군의 강습을 보강하였다. 6월 10일에 전역이 끝날 때까지, 루프트바페는 전투기의 폭격기 호위의 중요성, 공중 폭격 범위 내에 있는 해상에서 함선들을 물리치는 공군력의 능력, 공중 정찰의 필요성, 공중 강습으로 실행하는 기습, 그리고 공중 수송이 제공하는 절대적인 가치 등을 배웠다. 이 교훈들은 독일의 대륙에서의 마지막 승리의 토대를 형성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 대하여 루프트바페는 잘 시험된 공중 전투 교리를 적용하였고, 또다시 성공을 달성하였다. 공수부대를 운반한 글라이더는 85명으로 에방 에마엘 요새를 점령할 수 있게 한 혁신이었다. 육군과 공군은 밀접히 협조하였으며, 연합군의 퇴각을 냉혹하게 강요했다. 폴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공군이 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공군도 루프트바페를 저지하는데 실패하였고 견딜 수 없는 가혹한 손실을 겪었다. 루프트바페는 덩커르크에서 마침내 수적 질적으로 대등한 영국 공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4년 이상에 걸쳐 루프트바페는 세계에서 아무도 능가하지 못하는 공군력을 보여주었다. 루프트바페의 전략의 기본은 공중 우세였다. 공중 우세가 없이는 부대들은 쉽게 수송되지 못했고, 지상 기계화 부대는 신속히 이동할 수 없었으며, 적 부대의 집결을 분쇄하지 못했고, 적의 요새와 통신을 파괴할 수 없었다. 덩커르크에서와 같이, 루프트바페가 공중 우세 획득에 실패하면, 승리에 실패했다. 스페인에서 얻은, 그리고 유럽 전역의 성공으로 확대되고 정교해진 교훈은 항상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충실히 적용되었다. 프랑스 함락 후에 루프트바페는 중(heavy)폭격, 장거리 전투기, 레이다를 소홀히 한 것이 스스로 명백해졌다. 영국은 루프트바페를 능가하는 생산을 시작했고, 러시아에서의 곤경으로 모든 비행대대들이 집어삼켜졌다. 스페인 내전이 루프트바페의 작전 교리 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처음에는 그 교리의 결과가 성공적이었고, 루프트바페가 독일의 적들을 이기는데 필수적인 지원을 하였다는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루프트바페의 믿을 수 없이 쉬운 승리로 인하여 패배의 씨앗이 감춰졌다. 이 패배가 장기간에 걸쳐 다가오기는 했지만, 빛나는 독일의 창안과 혁신에 의해 패배가 다가왔다는 것이 숨겨졌다. 공군력이 승리를 도운 것처럼, 루프트바페는 패배도 배웠다.
원문 출처: http://www.ihr.org/jhr/v07/v07p133_Oppenheimer.html#ftn117
* 이 논문의 저작권은 Institute for Historical Review의 소유이며, 본 번역물은 저작권자의 저작권공지를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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