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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6)

유희자(118.43) 2017.07.21 23:56:04
조회 588 추천 18 댓글 3






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5)






유난히 푸르스름한 달이 하늘에 걸리고 어둠이 바다를 잠식했다. 바닷바람은 출렁이는 파도를 피해 서던의 영토인 베리온 섬까지 밀려왔다. 이윽고 등대가 반짝 눈을 떠 바다를 응시했다.
해적들에게 습격당해 일부가 부서진 요새는 멀끔하게 고쳐져 있었지만 수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전보다 더 많은 인원이 경계태세를 서고 있었다. 한스가 이끄는 특무대와 서던 본궁의 시종장 그레이엄,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함대가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악명 높은 네버랜드의 해적들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귀순 혹은 투항-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 대립이 있다-을 한다고 하지만 상대는 해적들이었다. 1차 협상을 끝냈다지만 그들이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건방진 해적놈.”



시종장, 그레이엄은 처음 엘사 J. 후크와 대면했을 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약 7년 전쯤, 울프릭 태자의 심복인 그는 명령을 받고 해적들을 회유하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레이엄은 일이 순조롭게 성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낱 해적들이니 군함 몇 척의 무력을 행사하면 바로 복종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씻을 수 없는 모욕까지 당했다.


- 이걸 놔라! 감히 내가 누구인줄 알고!
- 서던의 딸랑딸랑이라며?


그레이엄과 그의 수하들은 밧줄로 묶여 해적 선장 앞에 무릎을 꿇렸다. 이들을 사로잡은 쪽은 당연하다는 듯 굴었지만, 사로잡힌 쪽은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서던은 섬나라인 만큼 해군의 힘만큼은 타국에 비해 강한 편이다. 그런 서던의 군함이 낡아 빠진 해적선에게 밀려버린 것이다.
그레이엄이 수치심을 느끼든 말든, 부상자 한 명 없이 네버랜드의 침입자들을 사로잡은 해적 선장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 지엄하신 서던의 폐하니 태자전하니... 흥, 외왕내제를 하려면 똑바로 하라고. 여긴 네버랜드다. 왕도 황제도 없어


해적 선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똘마니로 보이는 해적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해적 선장이 눈짓을 해보였다. 질문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 외왕내제가 뭡니까, 선장님?


그의 물음에 해적 선장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 약해 빠졌는데 세다고 우기는 거
- 아아. 허세부리는 거요? 근데 왜 우리한테 그러는 거죠?
- 우릴 얕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 흐흐, 우릴 얕본다구요? 저 허여멀건 한 놈들이?


흐흐. 크크큭. 낄낄낄. 음침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하나 둘 늘어났다. 이내 해적선에 있던 해적들이 갑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대를 쓴 해적, 다리 하나가 없는 해적, 덩치 큰 해적, 귀가 찢어진 해적, 아직 솜털밖에 안 난 해적, 코가 빨간 해적, 앞니가 하나 없는 해적, 총을 휙휙 돌리며 위협을 가하는 해적....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이들을 통솔하는 캡틴 훅은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듯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인질들을 덮쳤다.


- 아렌델에 조공무역이나 하는 나라주제에 서던의 폐하 어쩌고 운운하면서 무릎을 꿇고 복종하라고 하는 게 참으로 오만방자하군


캡틴 훅은 자신이 쓰고 있던 삼각모를 벗어던졌다. 모자 밖으로 나온 몇 가닥의 백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인질들은 캡틴 훅의 얼굴에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머저리 왕자가 떠들던 환상의 섬 네버랜드, 그리고 네버랜드 해를 지배하는 해적 캡틴 훅. 엘사 J. 후크. 요정보다도 요사스럽고 괴물보다 잔인한 여 선장.


- 하, 한낱 해적주제에! 아렌델 따위의 망국을 들먹이면서 서던을 모욕해?!


그나마 정신력이 강한 그레이엄이 결박당한 것도 잊은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남들의 눈에는 국가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물론 그레이엄의 허세에 넘어갈 해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곧이어 캡틴 훅의 부하가 그의 몸을 발로 찼다. 반항이 뚝 그쳤다. 부하는 잘 했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선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웃을 수 없었다. 캡틴 훅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해적들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서있었다.


- 망국. 맞아. 아렌델은 망국이 되었지.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마치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 아주 머나먼 옛 일을 말하듯 공허하게 들렸다. 캡틴 훅에게서 일시에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 거북한 침묵이 졸리 로저 호를 감싸고돌았다.


- 그래.... 그래! 그래! 그 한낱 해적한테 진짜 모욕이라도 당하고 싶나보지, 딸랑딸랑?


한참을 침묵하던 캡틴 훅은 갑자기 쾌활하게 소리를 높였다. 섬뜩한 조롱이었다.
무자비한데다가 미치기까지 했구나. 그레이엄은 멋대로 납득해버렸다. 미친놈들에게 붙잡혔으니 제 목숨은 이제 바람 앞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 간단하게 목을 자를까, 상어 밥으로 던져 줄까?


목이 잘리건, 상어 밥이 되건, 제 목숨은.


- 일단 그 건방진 털부터 태워볼까!


목숨은 깔끔하게 털과 거래되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은 털만도 못한 놈, 이었다.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그레이엄이 제 가발을 만지며 온갖 욕지거리를 쏟아 부었다.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마 엘사 J. 후크!!!”









같은 시각.
한스는 추위도 잊은 채, 멍하니 네버랜드 해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뒤틀리고 꽉 막힌 것처럼 정체된 공기가 흐르던 바다와 섬은 실체를 가진 환상이었다. 지금이라도 배를 타면 네버랜드는 한스의 출입을 허락해 줄 것이다. 차라리 닿을 수 없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한스를 허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네버랜드 섬에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해줬다. 필사적으로 뻗댄 손에 네버랜드를 한 움큼 쥐어주기도 했다.
자그마치 10년 동안을 환상에 목매게 했다.


‘피터 팬을...’


저 대신 칼렙 형을 데려간 걸 원망했다. 슬펐다. 불행한 자신이 아닌 행복에 겨운 형을 데려갔다. 저를 못살게 굴고 심하게 괴롭힌 형을 데려갔다. 간절히 구원을 바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는데.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어’


형의 비참한 최후는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칼렙은 높은 곳에서 추락해 쓰레기장에 파묻혀 죽었다. 왕궁은 발칵 뒤집혔고, 진상조사라는 명목 하에 많은 이들이 죄 없이 죽었다. 그날, 칼렙의 침소에서 울다가 잠이 든 한스에게도 물론 혐의가 씌었지만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왕자라는 이유와 어리다는 이유, 그리고 돌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화 속 피터 팬이 나타나 칼렙을 데려가 죽였다”라는 정신 나간 말을 믿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는 거짓말쟁이에 머저리 왕자라는 불명예를 얻음과 동시에 쫓겨나듯 브라이튼 제국으로 가야 했다.


‘아무도!’


브라이튼 제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볼모 왕자를 신경 써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한스는 외로움을 달래려 ‘환상’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는 갈수록 동화, 고대신화, 요정 등에 집착했다. 이러니 제국 측은 오컬트와 관련된 일로 사고를 치는 한스를 더는 볼모로 두고 싶지 않아 했다. 볼모 기간이 끝나고 성년이 된 한스는 바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는 왕자의 권한 몇 개를 맞바꿔 특무대를 만들었다.


‘난 아직도 피터 팬을 원망하고 있어.’


쉬이 낫지 않을 상처를 진 아이는 그대로 성장해 멍청한 왕자 소리를 들으며 여태껏 네버랜드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런데 그게 끝...?’


상념에 잠긴 한스를 깨운 건 뜨뜻한 외투였다. 온기가 차가워진 한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놀란 한스는 몸을 움츠리며 뒤돌아섰다.



“바람이 찹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렉... 아니 린베르크 경. 몸은 이제 괜찮은가? 다른 대원들은?”



렉이라는 가명을 쓰고 루헤임 해적단의 부선장 노릇을 했지만, 그는 어엿한 작위를 가진 서던의 기사이다. 젊고 실력 있는 기사 린베르크는 창창한 앞길을 다 뿌리치고, 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모두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스 본인도 린베르크를 울프릭 태자의 끄나풀로 여기고 멀리하기까지 했었다. 오해가 풀리자마자 진심어린 사과를 하긴 했지만 한스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두고 줄곧 걸려했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더 쉬어야 하는데...”



한스는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그의 말에 린베르크는 반사적으로 며칠 동안 네버랜드 해에서 표류당한 일, 그 뒤에 해적들에게 발견되어 곤욕을 치룬 일 등을 떠올렸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지만, 그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만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다.
하지만 그는 한스의 앞이라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저흰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린베르크는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제 주군인 한스는 열흘 전, 엘사 J. 후크와 비밀 회담을 가진 후로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우두커니 네버랜드 해를 응시한다든지, 뭐라고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든지, 식사를 거른다든지, 함선 안에 콕 박혀있는 등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 한스를 본 특무대원들은 해적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둥, 요상한 술수를 써서 그의 머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둥 여러 말을 떠들어댔다. 그러나 말만 이럴 뿐이다.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생고생을 겪은 특무대원은 한스를 몹시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린베르크도 한스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들어가봐야.... 도통 잠이 오지 않네. 계속 이상한 꿈만 꾸고.”
“예전에 말씀하신, 기억을 잃는 꿈을 계속 꾸고 계신 겁니까? 혹, 어디 아프신 거라면 의사를-”
“됐네. 괜찮아. 고작 꿈 가지고.”



한스가 손사래를 쳤다.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린베르크를 보아하니, 나머지 특무대원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강 눈에 보였다.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정말 괜찮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나.”
“엘사 J. 후크가 정말 이곳에 올까요?”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거든. 한스는 겸연쩍게 웃었다.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 싶진 않았으나 린베르크 앞에서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많은 대화를 나누고, 진솔한 답변이 오갔었다. 어째 일방적으로 한스 쪽에서 마음 속 말을 내뱉은 것 같은 기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던 건 대부분 풀린 셈이었다.
한스의 대답을 들은 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저흰 어떤 일이 생겨도 왕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왕자라고 하지 말게. 난 특무대 부대장으로 여기에 와있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부대장님.”



린베르크가 덮어준 외투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엘사가 손 대신에 차고 있던 쇠갈고리는 차가웠다. 그 온도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서로 다른 두 손은 한스의 손을 잡았다. 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를 택했다.
밤바다. 따뜻한 외투. 일렁였던 촛불. 뜨뜻했던 찻물. 날카로운 쇠갈고리. 위스키 한잔. 그리고 엘사의 말.


‘난...’


한스는 돌연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많은 동료들이 피터 팬과 해적들 손에 죽어갔다. 경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이루어져야할 대 전제는 용서라는 이름의 묵인이다. 지금은 눈을 감더라도 최후의 최후까지 달라붙어 제 자신을 갉아먹을 게 분명했다. 상관으로서 모든 책임을 진다고 할지라도, 아니, 모든 게 순탄하게 넘어가려면 이제껏 했던 것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한다. 또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해적들이 귀순을 해오면 그들은 더 이상 적이 아니게 된다. 더군다나 나와 특무대는 해적들의 보증인이 되어 그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동료 아닌 동료가 된다. 죽일 수도 복수를 할 수도 없게 돼. 이 상황이 원망스러운가?”
“부대장님...”
“자네의 의견이 듣고 싶네. 뭐든 좋으니 솔직히 말해주게.”



‘뮈든 좋으니’가 ‘제발 부탁이니’로 들렸다. 한스는 줄곧 미뤄왔던 선택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망스러움과는 별개로, 이 일을 매듭짓게 되어 기쁩니다.”



린베르크가 한스와 같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다를 응시했다.



“먼저 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몹시 슬픕니다. 제 자신의 무력함이 저주스럽습니다. 눈을 감으면 죽어간 동료들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을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멈춰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못다 한 일을 대신 수행해야 하는 건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끝이 나면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시작이, 내게도 있을까.”



많은 게 바뀌었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또 다른 시작이 있을까.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닐까.
피터 팬을 버릴 수 있을까.



“있습니다. 반드시.”



기정사실을 말하듯, 린베르크가 힘주어 말했다. 한스는 고개를 숙이고 치솟는 눈물을 참아내었다.



“피터 팬에 관한 자료를 다 태워버리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익숙지 않은 아픔이 느껴졌다. 안나는 눈을 떴다. 처음에는 팅커 벨이 장난삼아 제 눈에 안대를 씌워놓은 줄 알았다. 그래서 화를 내려고 손을 내저었는데 몸의 감각이 이상했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마냥 몸이 무거웠다.



“뿌르-?”



안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 제 입 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걸 막았다. 물속이었다. 그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검은 물속. 안나는 호기심 강한 아이답게 모험을 즐겼다. 횟수로 치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이상한 버섯들이 춤추는 땅속이나 구름이 깔린 시냇가나 황금해골이 있는 외딴섬 등등. 그런 안나도 검은 물속은 난생 처음이었다.


‘난 왜 여기 있더라...’


머리를 굴려도 떨어지는 건 돌가루다. 애초에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인 안나로서는 계속 누워있는 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잡히는 건 없었다. 적어도 머리를 찧을 일은 없을 것 같아 구긴 몸을 쭉 핀다. 물속이라 날 수는 없어 움직이려면 헤엄을 쳐야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발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몸을 가눌 수 있다면 수영보다는 차라리 걷는 게 낫다.


‘수영은 질렸어. 음. 어라, 왜 질렸더라? 한참 헤엄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없는데. 안나는 습관처럼 제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왜 기억이 없지?’


어디 부딪힌 적도 없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상함을 하나 둘 느끼니 위화감투성이인 이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게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안나는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히면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되고, 누굴 만나면 출구를 물어보면 된다. 가만히 있는 건 도움이 안 된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누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벨이랑 만났었나? 아냐. 근데 그 반짝이는 건 요정이었는데. 반짝반짝거리는 거...’


기억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 불쾌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화를 참고 계속 생각을 했다.


‘기억을 찾아야 해’


툭툭툭. 툭툭. 기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 요정들은 기억을 빼앗아


목소리는 뚝 끊겼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아무것도 안 보여서 미치겠네’


안나는 팅커 벨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주머니에 든 요정 가루를 꺼냈다. 어둠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가루이니 빛 대용으로 쓸 요량이었다. 한줌의 요정 가루를 쥔 손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물에 녹지 않았다. 안나는 혹시나 싶어서 요정 가루를 앞쪽으로 흩뿌렸다. 요정 가루는 찬찬히 물속에 퍼졌다. 밤하늘에 별을 뿌려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요정 가루는 저마다 빛을 내면서 더 큰 빛을 만들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주변이 보였다. 검은 물에는 크고 작은 기포들이 가득했다. 안나는 무심코 가까이에 있던 기포 하나를 건드리려 손가락을 폈다.



바로 그 순간, 아지랑이처럼 흐린 모습을 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 멍청이가! 이쪽이 아니라고 했잖아!”



여자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백금발을 삼각모로 가린 다음, 있는 힘껏 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여서 딱딱한 오른손이었다. 여자는 거칠게 안나를 끌어 당겼다. 그러자 안나의 손끝에서 쑤욱, 또 하나의 안나가 빠져나왔다. 또 다른 안나는 여자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못된 해적 선장!”
“성가시게 굴지 마. 너만 없었으면 이딴 곳, 오지도 않았어!”
“뭐? 누가 여기 오라고 부탁이라도 했어? 멍청이!”
“...다른 건 다 모르겠지만 너한테만큼은 멍청이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둘은 옥신각신 말다툼을 멈추지 않으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바보 멍청이 똥개 등 유치한 말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안나는 화들짝 놀라 두 사람을 쫓아갔다.


‘기억났다. 황금 해골이 있던 무인도에 갔을 때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볼 수 있는 거지?’


둘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검은 물은 주춤주춤 물러나고, 비워진 공간에는 새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따가운 햇볕, 바다의 찝찔한 냄새, 밀려오는 파도소리, 발이 푹푹 빠지는 무인도의 모래사장, 따뜻한 손... 모든 게 그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건 또 다른 안나였다. 자신은 ‘안나’ 혹은 ‘캡틴 훅’의 기억 속에 있는 셈이었다. 안나는 캡틴 훅을 쳐다봤다. 오른손이 멀쩡히 붙어있는 걸 보니, ‘그 일’이 있고난 후 일 것이다.


‘...그, 일?’


그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이 멋대로 움직였다.

졸지에 제 3자가 된 안나는 저 자신과 캡틴 훅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나 캡틴 훅이나 상대방을 죽이려는 기세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다투고 있으면서도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붙든 쪽이나 붙들린 쪽이나 손을 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때 있었던 일도... 잘 기억이 안 나... 어째서?’


슬프게도, 안나의 의문을 해소시켜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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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스쪽은 대강 마무리 됨. 작중에서 린베르크가 제일 어른임. 안나는 드디어 제 머리의 빵꾸를 알아차림


psps. 안나가 보고 있는 건 황금 해골 모험에 관한 얘기. 악어 동굴에서 팔 싹뚝 잘리기 전 엘선장님은 지금보다 덜 음침(음침인가 집착인가 무튼)하고 덜 침착함. 둘이서 손잡고 똥꼬발랄한 모험을 즐기는 얘기...일거야. 아마. 만약에 쓴다면 본편 다 쓰고 외전으로 나올 거임....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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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825 11월 개봉이었는데 티저가 2월에 나왔었잖아 ㅇㅇ(223.38) 07.01 28 0
1125823 종점의 파라다이스 풍광 설갤러(168.126) 07.01 35 4
1125822 현퀘종료 ㅇㅇ(223.38) 07.01 21 0
1125821 하반기 ㅎㅇ 설갤러(39.7) 07.01 25 0
1125820 막글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30 17 0
1125819 상반기 막글 [1] 설갤러(175.205) 06.30 40 0
1125818 일찍 잘게 [1] ㅇㅇ(223.38) 06.30 48 0
1125817 다른 애니를 봐도 엘산나 치환병 [1] ㅇㅇ(223.38) 06.30 59 0
1125816 다른 영화 보다가 엘사 생각나더라 [3] 설갤러(175.205) 06.29 80 0
1125815 2025년 하반기라고 [1] 설갤러(175.205) 06.29 54 0
1125814 2월도 아닌데 왜 벌써 인사한거야 [1] ㅇㅇ(223.38) 06.29 50 0
1125813 7월에도 잘 부탁쥼 [1] ㅇㅇ(223.38) 06.28 55 0
1125812 큰일났다 [5] 설갤러(175.205) 06.28 68 0
1125811 토요엘산나 ㅇㅇ(223.38) 06.28 20 0
1125810 뜨거운 금요일 이미 시작했다 ㅇㅇ(223.38) 06.27 25 0
1125809 금요제압해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27 20 0
1125808 금요점심해 ㅇㅇ(223.38) 06.27 20 0
1125807 연상안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26 55 0
1125806 오 약 2년 5개월 남은 프3 ㅇㅇ(223.38) 06.26 31 0
1125805 캭 오늘막글 ㅇㅇ(223.38) 06.25 21 0
1125804 엘사 오기 이틀 전 ㅇㅇ(223.38) 06.25 29 0
1125803 막글안돼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24 20 0
1125802 음 좋아 ㅇㅇ(223.38) 06.24 23 0
1125801 설설하하 엘엘산난나나하하이이 [2] ㅇㅇ(223.38) 06.24 62 0
뉴스 “군필 아니었어?” 조규성, 장발 ‘싹둑’…파격 변신에 ‘눈길’ 디시트렌드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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