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보모어의 갈매기가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2000년대까지 출시된 보모어에는 라벨에 갈매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너도 순례하러 왔구나?'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날씨가 실로 변덕스러운 아일라에서는 처음으로 쾌청한 날씨를 맞는 것 같다.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에는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이라는 가사가 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방 커튼을 활짝 열자마자 그 노래가 떠올랐다. 참고로 필자는 LG팬이 아니다.

숙소에는 아일라의 증류소와 관련된 책일 몇 권 비치되었는데, 그중 포트 앨런에 대한 책이 눈에 띄어 식사가 나오기 전 잠시 읽어보았다. 포트 앨런에 위치했던 이 전설의 증류소는 1983년 문을 닫았다가 최근 다시 재가동에 들어갔다. 여기도 철거가 된 지는 몰랐는데, 이렇게 사람의 손때가 묻은 증류소가 폐허가 된 것을 보니 영 마음이 좋진 않다. 이역만리의 이방인도 이런데, 여기가 고향인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차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2023년 재가동한 포트앨런 증류소는 2030년 최초의 제품이 출시된다고 하는데, 그때 나오는 술과 지금까지 출시된 포트 앨런의 술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테세우스의 배와 같다. 증류소 시설들의 외면은 동일하나 내면은 모두 달라진 상태에서, 거기에 나오는 생명의 물은 과연 동일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그 역시 하나의 '포트 앨런'이다. 아일라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모든 것을 체계화해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쿨일라, 게일어로 '아일라의 소리'라는 뜻을 지닌 이 증류소는 1846년에 지어진 오래된 증류소이지만 의외로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다. 1927년 디아지오의 전신인 DCL 예하 증류소가 된 이후, 부동의 1위인 조니워커 블렌딩을 위한 원액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2010년대 초중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싱글 몰트 위스키의 인기가 늘어나고 주류 제조사들은 싱글 몰트 제품군을 확충하며 조니 워커에서 탈리스커의 비중이 줄어들고, 라가불린은 키 몰트에서 빠진 후 쿨일라를 조니 워커의 브랜드 홈 중 하나로 선전하고 있다.
증류소 오픈 시간은 10시, 투어는 11시 30분부터 시작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인 보모어에서 쿨일라가 위치한 포트 아스케이그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 오후 1시에 출발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감스럽지만 증류소 공정은 패스하고 캐스크 원액을 시음할 수 있는 "SPIRIT OF SMOKE" 프로그래만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명 포트 아스케이크로 들어오는 순례객들도 있을 건데 다른 노선과 달리 왜 포트 아스케이크 - 보모어 노선만 유달리 없다. 쿨일라를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루는 쿨일라만 간다고 마음을 먹고 방문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앞서 증류소 안을 들어가 보면 그 증류소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보모어는 전형적 영국식 신사, 브룩라디는 실험실은 같은 그런 각자 고유의 컨셉트가 오롯이 전달된다. 그렇지만 쿨일라는... 잘 모르겠다. 쿨일라 병과 박스에는 선박 로고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의 비지터 센터는 해양적 요소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뭐랄까, 아울렛에 가면 있는 해외 의류 매장 코너 같은 느낌? 어떻게 보면 익숙해서 좋긴 한데, 또 어떻게 보면 나름 조니워커 키몰트인 곳의 이미지 브랜딩이 너무 형편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에 계시는 아주머니께서 내게 출신지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을 물어보시곤,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웰컴드링크 두 잔은 건네주셨다. 첫 잔은 영국의 고급 직물 브랜드로 유명한 '해리스 트위드'와 콜라보한 조니 워커였다. 글렌 엘긴의 비중이 높고 버번 캐스크 호그스헤드에서 피니쉬한 제품이라고 하는데, 조니 워커 블루에서 사과향이 직관적으로 많이 느껴지고 입에서 오일리한 느낌이 많이 감돌아 버번 캐스크를 사용했다는 것을 역산할 수 있었다. 맛과 향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피트감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쿨일라의 비중이 많이 낮은 것이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소비자가는 169파운드, 한화로는 근 30만 원을 넘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와서 이걸 사는 사람이 있다면 조니 워커 광신도거나, 아니면 돈이 남아도는 호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제품은 쿨일라 14년 - 스코틀랜드 포 코너스 컬렉션이다. 포 코너스(four corners)는 조니워커의 핵심 키 몰트를 담당하고 있는 카듀, 쿨일라, 클레이넬리쉬, 글렌킨치를 묶어 부르는 말이다. 쿨일라의 경우 리필과 챠링한 호그스헤드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포 코너스 중 한 증류소의 오크를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크리미한 내음과 쿨일라 특유의 풀내, 그리고 아일라 위스키에서 느낄 수 있는 캠프파이어향(짠내, 군불)과 함께 메틸릭한 흙내가 나는데,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도수는 53%, 가격은 199.99파운드였는데, 이 역시 맛은 있으나 결코 돈값은 못한다고 느낀 제품이었다. 처음부터 시작이 이렇다니... 뭔가 불길했다.
시간이 되어 쿨일라 웨어하우스 투어가 시작되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날 투어를 신청한 사람은 필자 한 명밖에 없어서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투어를 담당하는 사람은 글래스고 출신 여성 매니저로, 자신은 위스키를 사랑해 여기까지 왔으며 쿨일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특히 쿨일라가 조니워커의 핵심 몰트인 점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쿨일라가 가지고 있는 클래식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투어를 진행하는 이 장소의 경우 보모어로 치면 NO.1 VAULT와 같은 곳으로, 현재 대부분의 쿨일라 몰트들은 다른 지역에서 숙성을 진행하고 있으나 조니워커 한정판이나 고숙성 원액과 같은 경우에는 이 공간에서 숙성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증류소의 웨어하우스와 비교했을 때 유달리 한기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늘 시음할 리스트. 쿨일라에서 시음할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리필 아메리칸 캐스크 17년 숙성 (도수: 56.1%, 통입: 06년 12월 03일)
2) 퍼스트필 버번 캐스크 13년 숙성 (도수: 55.5%, 통입: 10년 09월 22일)
3) 리필 아메리칸 캐스크 19년 숙성 (도수: 50.2%, 통입: 04년 04월 19일)
4) 헤빌리 챠링 캐스크 14년 숙성 (도수: 54.4%, 통입: 09년 12월 01일)
5) 버진 오크 캐스크 17년 숙성 (도수: 55.0%, 통입: 06년 09월 08일)
다른 증류소들과는 다르게 5종이나 원액을 시음할 수 있어 역시 디아지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5종 전부 아메리칸/버번캐잖아, 쉐리/와인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왜냐하면 독립병입으로 나오는 쿨일라 쉐리/와인캐스크들 중에서도 절품으로 인정받는 제품들도 있을뿐더러, 증류소를 방문하는 순례객들은 기존의 라인업들과는 새로운 향미를 찾아 방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납득이 되지 않아 가이드에게 왜 아메리칸/ 버번캐스크들만 있는지 물어보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조니워커 생산에 필요한 원액 공급과 동시에 싱글 몰트에 대한 수요 역시 급증하여 그에 맞춰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쿨일라로서는 선택과 집중을 하는 단계라고 하였다. 그에 대한 예시로 현재 있는 웨어하우스 역시 기본적인 캐스크 이외에는 와인캐스크만 비치해 있다고 한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단순 수요가 급증한다고 해서 시음 제공을 하는데 아메리칸/버번캐만 제공을 한다고? 거기다 가장 핵심군 중 하나인 곳에서 그런 연구도 진행하지 않는다고? 필자는 진심으로 이 가이드의 답변이 오류였기를 바랄 따름이다. 어쩌면 어리숙한 외국인처럼 보여서 무시당했거나.
앞서 말했듯이 1대 1로 투어를 진행하는지라 혹시 조금 더 받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대차게 거절당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는데 디아지오 주가가 왜 그렇게 바닥을 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1) 17YR REFILL AMERICAN
Nose:
1. 풀내음이 있긴 하나 상대적으로는 온화하다.
2. 담배향이 물씬 풍긴다.
3. 처음에는 포리지 않은 크리미한 느낌이 있었는데 점차 사라졌다. 무슨 느낌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4. 잔향에서 솔이나 민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Palate:
1. 전형적인 쿨일라의 부드러운 듯한 과일 느낌이 든다.
2. 향에서보다는 담뱃재 향이 좀 떨어졌긴 했지만, 어쨌든 한 대 태우고 난 이후 나는 뒷맛이 느껴진다.
3. 도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알콜감이 강하지 않고 상당히 오일리했다.
2) 13YR 1ST FILL BOURBON
Nose:
1. 버번답게 생크림 같은 매끄러운 향이 맴돈다.
2. 버터 팝콘 같은 향도 느껴진다.
3. 요거트의 눅진한 느낌이 살아있다.
4. 누룩을 사용한 전통 증류식 소주의 진함에 느껴진다. 민속주 안동소주에서 비슷함을 느꼈던 것 같다.
Palate:
1. 솔트 캬라멜의 자극적인 단짠이 느껴진다.
2. 오렌지 같은 시트러스함이 느껴진다.
3. 쿨일라에서는 느끼기 힘든 라무네 같은 소다류의 맛이 잘 살아있다.
3) 19YR REFILL AMERICAN
Nose:
1. 숙성연수가 높아서 그런지 꿀, 특히 주류박람회 때 먹었던 미드의 달콤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2. 레몬, 사과와 같이 산미가 적절히 살아있는 과일류의 단내도 느껴졌다.
Palate:
1. 풋멜론, 참외와 같이 아메리카 오크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맛이 잘 살아있다.
2. 바나나 등의 열대과일도 잘 나타난다. 매우 좋은 오크를 썼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3. 묘하게 뉴슈가를 넣고 찐 옥수숫대의 단물 빨아먹는 뒷맛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가지 중 얘가 가장 나았다.
4) 14YR HEAVILY CHARRED(11YR REFILL BOURBON + 3YR HEAVILY MUSCATEL WINE)
Nose:
1. 라가불린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군불의 느낌이 지배적이다.
2. 포도주의 느낌도 지니고 있는데, 편의점에서 오랫동안 상온에서 보관한 상태의 포도주 느낌이다. 그렇게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Palate:
1. 시리얼이나 피자 도우와 같은 고소한 느낌이 입을 꽉 채워주고 있다.
2. 헤빌리 챠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시나몬의 느낌도 가지고 있다.
3. 시간이 지나니 쌀젤라또의 느낌도 난다.
4. 왠지는 잘 모르겠으나 찌개의 느낌이 갈수록 강해진다고 적어놨다.
5. 잔향이 상당히 플로럴 했다.
5) 17YR VIRGIN OAK(13YR REFILL + 4YR VIRGIN & STR CASK)
Nose:
1. 첫 향에서 오렌지를 필두로 쥬시한 과일향이 엄청 느껴졌다.
2. 약간 고로쇠 수액에서 날 뻔한 그런 옅은 단향이 느껴진다.
Palate:
1. 이 친구 역시 시리얼의 느낌이 강했다.
2. 백후추의 느낌이 강했다.
3. 처음에는 피트감이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묘하게 피트가 느껴졌다.
4. 향에서와 동일하게 뭔가 시럽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투어를 진행했던 관계로 가이드에게 쿨일라에 관련 여러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우선, 증류소 공정 투어를 하지 못한 관계로 발효조에 관하여 물어보았는데 현재 8개의 목조 발효조와 2개의 스테인리스 발효조를 사용하고 있지만, 본인이 생각했을 때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또한 이제 언피티드도 단종되었는데 어떻게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냐고 물으니, 현재로선 쿨일라 12년과 조니워커 원액 생산에만 전념할 예정이라고 한다. 덧붙여 곧 있으면 쿨일라 18년은 정말 여기서만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생산 확장은 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뭐랄까, 생각 이상으로 너무 좆소식 운영을 하고 있어 놀라웠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조니워커의 키몰트가 라가불린에서 쿨일라로 옮겨지면서,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작 방문해 보니 그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정체성 없는 비지터 센터와 부정확한 사실을 말하는 가이드. 주류박람회에서 전통주 부스들이 욕먹는 이유 중 하나가 제대로 된 설명과 정체성 없는 모습 때문이라는데 쿨일라가 딱 그러한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부동의 위스키 1위의 키몰트이라는 점. 아일라, 특히 쿨일라를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단순 이러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보모어나, 같은 디아지오 계열사인 라가불린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솔직히 말해서 매우 불쾌할 따름이었다.
쿨일라를 보며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했던 닭갈비집이 연상되었다. 전혀 관리하지 않으면서 닭갈비 양념이 어땠니 막국수 육수이 어땠니 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건물주, 3개월에 한 번씩 바뀌는 점장, 의욕이 없는 점원들, 건물주 직영 음식점임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비싼 가격까지. 무엇보다 식당이든 증류소이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점에서 그 어떤 곳보다도 심적으로 크게 와닿았다. 이 식당에서 약 1년 정도 일하면서 정말 시트콤적인 일들이 많았는데, 조만간 드라마 대본 투고를 해볼 생각이다.
끝으로 이 증류소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원액은 어떤 건지 물어보았다. 시음을 진행한 웨어하우스에 있는 것들 중에서는 1991년 통입분이 가장 오래되고, 증류소 전체로 확대하면 더 오래된 원액이 있긴 한데 몇 년에 담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타입의 오크통을 썼는지는 자기도 잘 모른단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답변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을 사랑하지 않고, 하다못해 알아가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이지 않은 곳은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었는 경험이었다. 앞서 가이드가 보였던 열의는 단순 하나의 위선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보다 역겨울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11월에 개최된 우리 술대축제였다. 어떤 와이너리에서 비매품으로 포도 증류주 시음을 제공하여 어떤 포도를 가지고 만들었는지, 어떤 증류 방식을 사용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시음을 제공한 사람(아마 알바인 것으로 보인다)은 모르는 눈치였고, 옆에 있던 사람(아마 실무자였을 것이다) 인상을 팍 찡그린 채 그런 건 대외비라고 했다. 주정을 섞은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캥켜서 사람을 그렇게 내쫓듯이 했을까? 반면 포도주의 원산지인 그루지야 와인 시음회를 가보면 어떻게든 한 제품이라도 더 알리려는 사람들의 열의가 보인다. 덕분에 필자는 비매품인 그루지야 브랜디까지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난이 성장하긴 위해 요소는 적당한 물과 햇빛, 영양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이다.
쿨일라의 웨어하우스, 실제 숙성 창고였을 때와 비교하면 크기가 10배나 축소되었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비지터센터에는 멀리까지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증류소에서 숙성하고 있는 캐스크 중 가장 내놓기 적절한 '슈거 캐스크'를 직접 뽑아 들고 갈 수 있게 하는 핸드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환율이 박살 나지 않았던 때라 하더라도, 130파운드(18만 원)에 10년 숙성은 솔직히 스크루지도 불알을 탁 치고 갈 상술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 전혀 인간적인 감성을 느낄 수 없는 기계식 펌프 장치까지. 누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아일라에서 물어본다면, 고개를 들어 쿨일라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사람은 미워하되 그 사람이 만든 요리는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정도 선에서 순례객들에게 싸가도록 고심 끝에(?) 내놓은 캐스크인 만큼, 맛은 나무랄 데가 없다. 불에 그을린 레몬, 바닐라의 향에 사과와 파인애플 같은 산미가 있는 과일의 맛이 입안을 꽈 채워 준다. 그래, 어쩌겠는가. 내가 이 맛 때문에 쿨일라를 사랑하는데. 맨날 헐뜯는데도 모임에서는 가장 손은 잡은 부부의 마인드로, 한 병을 채워 넣었다. 참고로 내가 봤을 때는 700ml보다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증류소 직원이 그냥 넣었다. 덕분에 병목보다 조금 덜 채워졌다. 이 정도까지 수전노 같이 행동하는 증류소는 처음 봤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렇게 분개하냐고? 그렇게 말하는 분들께서는 꼭 닭곰탕 뜰 때 닭목만 받아가길 바란다.
(좌) 쿨일라 핸드필, 라가불린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몇 안 되는 아일라 섬의 화창한 날씨다. 탁 트인 경치 속 증류소와 자연환경을 보니 여기서 계속 살기만 하더라도 1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 부나하벤에서 본 바다 풍경은 뭔가 이계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오늘 쿨일라에서 본 바다 풍경은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느낌이 들었다. 포트 아스케이크의 푸른 바닷속에서는 김환기 화백의 <우주>가 보인다. 고요하면서 각각의 레이어에 행렬을 갖추며 유유자적 진을 치는, 바다의 우주를 여기서는 볼 수가 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 팟 스틸이 위치한 증류실 내부에서 저 전망을 보면 얼마나 좋았을까이다. 당시 최대 크기의 증류기를 넣기 위해 일부러 통유리창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투어 일정은 맞출 수가 없어 볼 수 없었다. 다만 웨어하우스 투어가 그 모양인 걸 보면 외려 증류소 투어는 하지 않는 것이 전화위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쿨일라에 대한 내 마지막 애정마저 떠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쿨일라의 몇 안 되는 옛 모습. 증류소를 나오는 길에 매우 빛바랜 벽돌 건물이 보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50년 이상은 된 건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1846년 설립된 쿨일라 증류소는 아일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증류소로, 계속해서 시설이 바뀌어지고 있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예전부터 증류소가 있었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사람들의 시야에 띄지 않는 저 벽돌 귀퉁이만이 쿨일라라는 증류소가 지난 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따름이다.
쿨일라라는 위스키 역시 그러하다. 쿨일라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소리 없는 강자'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뽐내려 온갖 모습을 보이려는 아일라의 증류소들 사이에서 쿨일라는 묵묵히 조니워커의 키몰트만을 생산한다. 지난 세기에도 그랬고, 이번 세기에도 그러고, 다음 세기에도 그럴 거다. 쿨일라의 꾸준한 뚝심을 쳐다보면 이것저것 만지는 것이 얼마나 조잡한 행위인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실로 우리의 평범함은 당신의 비범함보다 아름답다고 나지막이 읊조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증류소이다.
\숙소로 돌아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손으로 원을 만들어 들여다보니 오아시스의 <WHATEVER> 앨범 재킷이 연상되는 비주얼이었다. 영국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더욱 그렇게도 느껴졌다. 그곳에서 정장 20분을 기다렸는데 자동차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옳다구나, 나는 나만의 일탈을 취해보기로 했다. 차선 직각으로 누운 다음,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사지를 쫙 펴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5분을 누워 있었다. 차만이 지나갈 수 있는 특권성, 타인의 시선 등을 탈피한 것이다. 그 5분이 어찌나 자유로우면서도 긴장스러웠던지... 담배 한 개비라도 들고 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아일라로 도착하기까지 느꼈던 모든 감정을 담아 이미 먼지가 낀 버스 정류장 유리 벽면에 'THANKS FOR ISLAY, 아일라는 좋은 곳이에요'라고 적어놨다. 이후 까맣게 잊고 살아왔는데, 작년 5월 어떤 한국 분께서 쿨일라를 방문하고 나서 한글 낙서를 보고 사진을 찍으셨다. 내가 쓴 글이었다. 아직까지도 이 글귀가 남아있었다니... 그 당시 촬영한 사진에서도 글자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글씨는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좋다. 술이라는 공통분모로 뜻하지 않은 인연들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깐. 비단 이 글귀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아일라를 애정하는 글을 쓰겠지. 쿨타임이 길더라도, 그 명부는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읽은 사람이 그것을 마주치게 된다면, 설령 버스 정류장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인연은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일라는 좋은 곳이다.
------------------------------------------------------------------------------------------------------
여담 1.
아일라에서 가장 많은 몰트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루치스 위스키 바에서 식사를 했다. 그날부터 달리려고 생각했으나, 그러면 알거지가 될 것 같아 간단한 식사만 즐겼다.

굴과 아일라 위스키의 궁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내겐 산지의 기네스가 더 우선이었다. 물론 더블린에서 먹는 기네스가 진또배기인 것을 알고 있으나, 그래도 한국의 기네스와 비교하면 그 신선도가 비교가 되겠는가? 기네스 한 모금을 하는 순간 재수 시설 국어 강사가 들려준 썰이 기억난다. 추석 전 벌초를 위해 팔공산(?)으로 갔는데 본인 삼촌이 자기더러 근처 탁주 양조장에 가서 땅 관련 뭐를 얘기 나누고 오란다. 얘기를 마치고 나서 양조장 사장님이 양조장이라서 뭐 줄 건 없고 갓 내린 탁주나 한 사발 맛보고 가라고 했는데, 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딱 한 잔만 마시겠다고 하고 입에 댄 순간, '오장육부 속으로 유산균이 촤르르~'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한 병 풀로 비우고, 말통으로 두 통으로 챙기고 내려가다가 단속에 걸려 딱지가 끊겼다고 한다(20년 전의 이야기다).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 역시 기네스를 마시는 순간 '오장육부 속으로 질소가 촤르르~'하고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기네스 생맥은 범부였던 것이다.
굴은 확실히 향과 조직감이 치밀하긴 한데, 솔직히 3알에 10,000원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괜히 외국인들이 한국이 굴 천국이라고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깐 어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께서는 제발 노로바이러스 생기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좀 써주셨으면 좋겠다.

무슨 요리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고기 다짐육을 베이컨에 감싸 구운 요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히 소스는 맛이 좋은데, 고기는 별로였다. 더 별로였던 것은 익힌 채소가 과도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채소를 생으로 주거나, 저거 대신 고기 한 점을 더 주지. 일제강점기 당시 소설을 보면 양식당에서는 더운 채소 모둠이 정찬에서 같이 곁들어 나와졌다고 하는데, 확실히 도태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