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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41 - 잡혀가던 날

운영자 2019.11.25 11:16:16
조회 124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141


잡혀가던 날


죽은 김연수(金秊洙) 회장은 더 이상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집안에는 60여 년 전의 어떤 자료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변호해야 하는 위치였다.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조사 자료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당시 조사관이나 검사·판사들은 일제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이었다. 한문투로 직접 쓴 조악(粗惡)한 조서는 거의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외국어를 해석해 나가듯 그 자료들을 해석해 나갔다. 그리고 해석한 것들을 조합함으로써 조사받고 재판정에 있는 김연수 회장의 모습을 살려 낼 수밖에 없었다. 김연수 회장의 영혼이 내게 씌워 내가 대신 글을 쓰고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연수 회장이 잡혀 감옥에 가던 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



1949년 1월21일 밤 0시20분 찬바람이 면도날같이 날카로웠다. 반민특위 검찰부의 서상열(徐相烈) 조사관은 김연수의 집을 덮쳤다. 집에 있던 김연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체포에 응했다. 반민특위는 남대문에 있는 삼양사의 본사 사무실을 대대적으로 압수 수색했다. 

김연수는 바로 서울형무소로 끌려갔다. 간수가 그의 옷을 벗기고 홋겹 죄수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는 간수를 따라 형무소 감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쇠막대가 끼워진 조그만 창문이 있는 두꺼운 나무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신음소리도 흘러나오고 외마디 소리들도 들렸다. 그는 구석에 있는 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감방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철컹’ 하는 금속음이 비정하게 들렸다. 구석의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복도를 흐릿하게 비추는 낮은 촉광의 알전구 불빛이 쇠창살을 한 작은 문을 통해 엷게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퇴색한 벽이 희미하게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곧추세우고 양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꼈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빈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의 적막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제 곧 처단이 되겠지? 징역을 산다면 얼마를 살까? 5년? 10년?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공민권이 제한된다고 했지? 이렇게 되나? 이러자고 여태 악착스럽게 살아왔나? 감옥의 복도가 울림통이 되어 악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친일파로 잡혀온 사람들이 절규하는 소리 같았다. 암흑 속에서 찰칵찰칵 시간이 가는 메마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면의 깊은 우물 속에서 냉기 같은 공포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감방의 천장 쪽에 매미같이 붙어 있는 손바닥만한 창으로 하늘이 희부윰해지는 것 같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콩밥과 소금국이 문 아래 식구(食口) 통을 통해 들어왔다. 콩밥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모든 게 운명 같았다.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가 있다. 살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는 다가오는 운명을, 팔을 벌리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묵상(默想)을 시작했다. 감옥 안이지만 약해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콩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집어 넣었다.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위가 약한 그는 오래 씹는 게 버릇이기도 했다. 콩에서 나는 비릿한 역겨운 냄새가 입안 가득히 번졌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그의 숟가락질은 계속됐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밖에 내놓았다. 

반민특위는 그를 방치하듯 그대로 감방에 두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흘렀다. 그는 체념을 하고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뎌 나갔다. 오후가 되면 잠시 바닥에 비치던 손바닥만한 햇볕이 금세 사라졌다. 쇠창살 사이로 어둠이 밀려오면 촉수 낮은 백열등 서너 개가 감방 복도에 켜지곤 했다. 밤은 춥고 길었다. 교도관이 있는 감방 복도 끝에 난로 하나가 달랑 있을 뿐이었다. 붉은 벽돌을 타고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냉기가 방안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수감될 때 받은 담요 두 장을 겹쳐서 바닥에 깔았다. 그러나 마룻바닥 틈에서 올라오는 얼음 같은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엉덩이부터 감각이 마비되어 왔다. 코 끝이 시렸다. 손가락이 뻣뻣했다. 머리마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얼어죽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서서히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깼다. 불길한 꿈을 꾼 것 같았다. 해방 직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일주일이 되는 날 오전 간수들은 그를 차에 태워 반민특위로 데려갔다. 거리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전신주에 붙은 삐라가 보였다. 그 안에 ‘민족반역자 김연수를 처단하라’는 붉은 글씨가 있었다. 

조사실의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를 체포하러 온 서상열(徐相烈)이라는 조사관이었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강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조서를 앞에 놓고 인적사항부터 묻기 시작했다.

“성명과 나이, 직업, 주소.”

“이름은 김연수. 나이 54세. 주거는 동대문구 성북동 41번지입니다.”

“가족은 몇 명인가?”

“스물한 명입니다.”

“재산은 얼마나 되지?”

“재산총액은 300만 원가량입니다. 매월 생활비가 30만 원 정도 될 겁니다.”

대충의 개인적인 사항을 적은 후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이 제정됐는데 그 법에 대한 김연수 사장의 의견은 어떤가?”

“역사적 과정으로 보아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민족정기로 보아서나 민족을 교육시키는 의미에서라도 반민법(反民法) 실시는 타당합니다.”

“왜정 하에서 창씨개명은 뭘로 했지? 일본이름이 뭔가?”

“창씨는 하지 않았습니다.”

“도의원으로 임명된 적이 있지?”

“있습니다.”

“도 평의원 회의에 몇 번이나 참석을 했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는?”

“그 당시의 관보나 기록을 보시면 알 겁니다.”

“일제 말 총력연맹(總力聯盟) 후생부장으로 되어 있던데 거기 회의에는 몇 번이나 참석했지?”

“두세 번 정도 있을 겁니다.”

“발언은?”

“발언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름은 자기들 멋대로 걸었으나 회의에 참석도 않았고 발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제에 협조하는 간부가 됐나?”

“전쟁이 심해지자 무엇이나 강제적이어서 그저 부득이 회의에 몇 번 얼굴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후생부장 임명 후 두 달쯤 됐을 때 건강이 안좋다고 하면서 일체 명예직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일본인회사, 조선인회사, 은행 등 큰 회사에는 대부분 중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전부 20여 군데나 될 것입니다. 

중추원 참의나 만주 명예총영사 등은 그대로 사표만 보낼 수 없어서 제가 사표를 지참하고, 총독부의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을 직접 만나러 갔었습니다. 이유를 말하고, 사표를 수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름이나 걸어놓고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하면서 사표수리를 거절했습니다. 총독부에서 나와 다시 총력연맹으로 갔었습니다. 총력연맹에서는 정식으로 후생부장 사임에 대한 사표를 수리해 줬습니다.”

“명예직 전부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증거는?”

“아마 이영준이나 나용균을 조사하시면 알 겁니다.”

“전시(戰時) 순회강연은 몇 번이나 나갔었나?”

“순회 강연할 자격도 없었고 가서 한 일도 없습니다.”

“강연을 들은 사람이 있다는 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서상열 조사관이 몰아쳤다.

“절대 없습니다. 말을 한 사람이 없는데 들은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김포비행장을 공사해서 일본군대에 바쳤다면서?”

“그건 처음 듣는 일입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전시(戰時)에 비행기 세대나 헌납했다면서?”

“비행기 헌납한 일 없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까지 발표가 됐다는데?”

“그런 신문이 있다면 저를 보여 주십쇼.”

“국방헌금을 수백만 원 했다면서?”

“개인적으로 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회사 이름으로는 다소 있을 겁니다. 그러나 수백만 원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성방직에서 일본의 전쟁에 제일 크게 협력했다는데?”

“회사 이름으로 국방헌금을 다소 했으니 그런 말을 만들어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 경성방직으로서는 헌금을 안 하고는 못 견딘다는 걸 그 시대를 산 조사관님도 아시고 누구나 잘 알 겁니다.”

“조선 비행기 회사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게 언제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화신백화점을 하는 박흥식(朴興植)이 성북동 집에 찾아와서 자기가 경영하는 비행기 회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비행기 회사 주식 1만 주를 사달라는 겁니다. 계속 거절하다가 부득이 1000주 정도 인수하겠다고 승낙했죠. 그 이삼일 후 일본군 사령부 참모장이 호출을 해서 군사령부로 들어갔었습니다. 일본군 참모장은 제게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주식 1만 주를 무조건 사라고 강요했습니다. 저는 현금이 없어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김연수는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反민족이라는 죄명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과 하나인 경성방직의 모토가 민족주의였다. 수많은 광고를 통해 민족주의를 강조했었다. 확신이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반민특위에 잡혀오니 맥이 쭉 빠졌다. 그동안의 모든 게 허무해졌다. 그들에게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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