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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란 가압장치

운영자 2020.04.20 11:27:26
조회 152 추천 4 댓글 0
나는 여러 번 재판정에 섰다. 변호사가 아니라 피고로서였다. 한 오십대 여성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사건을 맡겼었다. 사건을 진행하다가 보니까 맡아서는 안 될 사건 같았다. 의뢰인인 여성이 악(惡)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변호사 부인인 그는 밤에 남편의 사무실로 들어가 모든 재판기록을 차에 싣고 가서 들판에서 태워버렸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그건 아니었다. 변호사의 재판기록 봉투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많은 사람의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한밤중에 날카로운 식칼을 들고 남편을 찌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그녀는 진실을 뒤엎고 남편이 자기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을 알아가던 나는 그녀의 영혼이 이미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걸 알았다. 도저히 변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불러 그만두겠다고 말을 할 때였다.

“도중에 변호사가 바뀌면 재판부에서 나를 나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변호사를 그만둔다는 사임계를 법정에 제출하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변호를 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가 애원하는 표정으로 내게 간청했다. 차마 그것까지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그녀는 법의 낭떠러지에서 나무뿌리를 잡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의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이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법원에서 나를 피고로 한 소장이 날아들었다. 원고는 그녀였다. 내용을 살펴보았다.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는 불성실이 손해배상의 원인으로 적혀 있었다. 기가 막혔다. 법정의 기록에는 내가 계속 변호사로 있었다. 그리고 내가 출석하지 않은 것도 법정 기록상 명확했다.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거짓말이 들끓는 법정에서 판사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나 기록 이외에는 믿지 않았다. 나의 동정을 그녀는 이용한 것이다.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억울하고 핍박받는 사람들도 오지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도 종종 들리곤 했다. 그녀의 악마성을 감지하고 일찍 사건에서 손을 뗐는데 마무리를 단호하게 하지 못해 나는 당하고 만 것이다. 살다 보면 그렇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곤 했다. 내가 그녀의 돈을 탐한 것도 아니었다. 변호사의 직감으로 도중에 위험을 감지하고 빠져나오려고 행동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쳐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것이다. 순간적인 동정이 그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인가 하나님에게 따져보기도 했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정신적인 고뇌가 대단했다. 법정에서 냉소를 짓는 그녀를 마주하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살인을 했다. 법정에 갈 때마다 신경과에서 처방해 준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재판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상습적으로 다른 사람을 무고한 죄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다. 나는 악마의 발톱에서 간신히 풀려나왔다. 무엇이 그녀의 영혼을 그렇게 일그러뜨리고 악령이 들게 했는지 의문이었다. 몇 년 후 변호사를 하는 그녀 남편의 사무실을 찾아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 남편은 내가 보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런닝셔츠를 걷어 올려 그가 칼에 찔린 흉터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제가 하숙생 시절 그 집 딸이었던 아내와 연애를 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 생활을 했어요. 다만 판사의 부인으로 함부로 청탁을 받지 말고 모든 행동에 조심하라고 했죠. 그게 견디기 힘들었나 봐요. 어느 날부터인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끝 간 데 없이 그렇게 되더라구요. 더 이상 판사를 할 수가 없어 변호사 개업을 했죠. 그랬더니 어느날 밤중에 사무실에 가서 기록을 가져다가 모두 불태워버린 거예요. 그리고 밤중에 자는 데 저를 칼로 찔렀어요. 아내에게 저는 증오 자체가 된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자문제가 있거나 아내를 학대하거나 무시해서 상처를 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호사를 해서 번 모든 재산을 다 아내에게 주고 속옷 몇 벌만 가방에 챙겨가지고 나와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정신적 고뇌가 없어지고 저 역시 지금 훨훨 날아갈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의 집안도 그 내부를 보면 원인 모를 고난과 정신적 고뇌가 가득 들어찬 경우가 있다. 내 나름대로 그런 고난을 받을 때 위로하는 논리가 있다. 인간에겐 고난이란 가압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압력이 없으면 파멸된다. 그와 똑같이 정신적 고뇌라는 압력이 없으면 파괴된다. 그래서 가압장치가 필요하다. 그게 그토록 벗어버리고 싶은 것들을 운명처럼 짊어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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