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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박사의 격려

운영자 2022.10.10 10:10:52
조회 124 추천 3 댓글 0

삼십년 전 나는 분노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사회에 고발하려고 했다. 어떤 언론도 받아주지 않았다. 허영심에 들뜬 변호사의 해프닝으로 매도하고 찬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소위 ‘대도’라는 별명으로 그 무렵 언론의 관심을 받는 사람을 증인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한 유명한 시사프로그램에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그가 겪고 보았던 인권유린이 들어가야 한다는 취지를 분명히 밝혔다. 석방된 그가 그날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카메라와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누워 자는 장면을 찍었다. 그런데 그게 피디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계속 반복이 되고 있었다. 영화감독중 단역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듯 피디의 태도가 그런 것 같이 느껴졌다. 피디는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군림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촬영방향도 달랐다. 나와 의뢰인은 인권 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방송에 협조한 것이다. 방송국측은 시청률만이 목적인 것 같이 느껴졌다. 피디의 뇌리에 인권 문제는 희박하거나 명분 정도인 것 같아 보였다. 이틀째 촬영에 응하면서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화가 났다. 나는 피디에게서 작품에 대한 열정을 넘어 오만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촬영을 중단시켰다. 제작진이 황당해 했다. 작가는 내게 전화를 걸어 저주까지 퍼부었다. 그들은 사랑이나 정의보다 시청률 높은 방송 한 꼭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 얼마 후 나의 사무실로 유명한 인기 연예인이 찾아왔다. 그는 내 요구를 들어 줄테니 출소한 내 의뢰인을 데리고 생방송에 출연해 달라고 했다. 정의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방송하는 날 스튜디오 옆의 대기실로 갔다. 이상했다. 방송내용을 기획한 ‘큐시트’를 내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보지 못하도록 덮어놓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 옆에 거꾸로 꽂혀있는 큐시트를 슬쩍 빼 보았다. 그걸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출연 인물을 희화화 시키고 우스개소리나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생방송인데 방송 직전에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황당해 했다. 그들에겐 방송이 중요하겠지만 나 역시 그 이상 중요한 게 있어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진행자인 연예인은 일단 출연하고 도중에 알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나를 달랬다. 방송이 시작됐다. 진행자 옆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김동길 박사가 있었다. 우리부부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결혼초 아내는 내가 김동길박사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적도 있었다. 나의 생방송 출연 시간은 십오분 가량이었다. 카메라에 빨간불이 켜지자 진행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십분이 지났는데도 진행자는 계속 흥미성 질문만 계속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머지 몇분을 넘기고 퇴장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진행자가 하고 싶은 말은 질문에 상관없이 도중에 하라는 말도 떠올랐다. 그 다음 진행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내가 말했다.​

“이제 오늘 하기로 약속한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데리고 나온 석방된 사람의 입을 통해 인권유린의 진실들을 말하게 했다. 스튜디오의 카메라 뒤에서 술렁거림이 보였다. 그들에게 대형 방송사고가 터진 것 같았다. 다음번 출연진을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제작진에서 먼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다. 뒤의 출연진을 무시하고 계속 그 생방송 시간을 사용해서 내가 계획했던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다.​

생방송이라 스텝진이 나를 끌어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방송국 직원 한 사람이 커다란 판에 글씨를 써서 카메라 뒤에서 버쩍 치켜들었다. 판에는 매직으로 이렇게 크게 적혀 있었다.​

‘항의 전화가 벌써 몇 천통이 왔습니다. 대형 방송사고입니다. 제발 중단해 주십시오’​

방송이 끝났다. 진행자가 기운이 빠진 핼쓱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요”​

방송내내 옆에서 듣고 있던 김동길 박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

“아닙니다. 잘했어요. 괜찮아요.”​

다음날 아침 신문에 방송사고에 대한 기사가 크게 났다. 처음 촬영을 맡았던 고발프로그램을 하는 교양국과 나중에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예능국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 보도도 보았다. 그들은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근본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교양국에서 섭외한 인물을 예능국에 뺏겼다는 것 같았다. 그 생방송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그때의 방송자료들이 근거가 됐는지는 확실히 몰라도 나의 고발은 김대중 정권에서 효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새로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내가 고발한 인권문제들이 진실로 공식적인 확인을 해 주었다. ​

김동길 교수는 그 후 나를 초청해서 집에서 만든 평양냉면을 주면서 여러 가지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 김동길교수가 돌아가셨다는 보도를 보았다. 대단한 인물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성경 속의 이런 문장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 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김동길 박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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