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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토바이 배달 소년

운영자 2010.02.02 14:02:15
조회 426 추천 0 댓글 0

    나는 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약간 불쾌한 듯 고개를 아래로 내려뜨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타원형의 동그란 얼굴에 가는 눈썹이 여자 같은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그는 오토바리로 배달을 하다가 남의 물건인 컴퓨터와 프린터들을 팔아먹고 횡령죄로 구속이 된 것이다. 눈을 내리깔고 잠잠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변호사님한테까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 물건들을 판돈으로 밀린 방세를 물었단 말이에요.”


    그가 다시 한번 나에게 항변한다.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미성년자들이 남의 물건을 가져갔을 경우 대개의 동기는 흥청망청 놀기 위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잡히면 이구동성으로 집안이 어려워서 그랬다고 가정환경을 변명으로 늘어놓는다. 정직하지 못한 답변이 나오면 벌써 그에 대한 동정이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남의 물건을 가져간 이유가 뭐냐고 또 한번 다그쳤다. 솔직한 대답과 참회가 있을 때 변호할 힘이 더욱 솟아나기 때문이다.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인데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고 남의 물건을 배달하게 됐나?”


    나는 그의 가정환경을 파악해 나갔다. 소년은 대답 없이 내 눈치만 흘끔흘끔 봤다. 자기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 대부분 당당하다. 내 돈을 받았으니 언제 석방시켜 줄 수 있느냐는 태도가 많다. 자기가 진 죄는 실종이 되고 변호사에게 준 돈을 속죄금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돈 없는 사람을 변론하는 국선변호의 경우 상당수가 시큰둥하다. 오히려 구치소에 찾아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눈치를 보던 그 소년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소년에게는 70년대 사우디에 노동자로 나간 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해외로 나간 후 집에 돈도 부쳐주지 않고 어머니와 그 소년을 방치해 버렸다. 그 소년은 변두리의 작고 더러운 월세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라났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외국으로 가서 파출부라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하면서 해외로 나갔다. 나가서 돈을 벌어 매달 돈을 부쳐주겠다고 한 것이다. 외국으로 간 어머니한테서 방세와 약간의 돈이 보내져 왔다.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달부터인가 돈이 송금되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한다는 주소로 편지를 부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방세도 밀리기 시작하고 당장 먹고 살 길이 막연했다. 그는 마침내 1995년 가을 몇 달 동안 공주로 내려가 철탑을 세우는 공사장에서 잡역부 노릇을 했다. 철근을 나르려면 등뼈가 빠져 내려가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서도 어머니에게서도 버림받은 소년이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철근을 지고 나르다가 등에 진물이 흐를 때마다 그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했다. 그는 ‘책임지지 못할 거면 낳지나 말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몇 달 동안 노동을 한 대가로 그는 처음으로 손에 120만원을 쥐어 봤다. 거금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오토바이로 배달만 전문으로 해 주면 막노동보다 훨씬 힘이 덜 들고 사철 일거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 변두리의 한 용역회사와 간신히 연결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오토바이에 실을 수 있는 것의 몇 배를 실어 날라야만 겨우 하루 일당을 벌 수 있었다. 1996년 1월 19일 아침이었다. 그는 오토바이 뒤에 컴퓨터 프린터와 잉크 등 각종 용품을 싣고 반포대교를 간신히 건너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다리의 난간에 더러 쌓여 있었다. 일부는 지난  밤의 강추위에 얼음이 되어 있기도 했다. 뒤뚱거리며 힘겹게 몰던 오토바이가 얼어붙은 노면을 지나가다 옆으로 한바퀴 빙 돌더니 콰당하고 도로에 넘어져 버렸다. 오토바이의 속력으로 그는 다리의 난간에까지 튕겨져 나갔다. 날카롭고 찬 강바람이 혼미한 그를 깨웠다. 정신을 차리고 그는 기다시피 오토바이 있는 곳을 갔다. 낡은 오토바이는 앞바퀴가 찌그러져 덜덜거리며 돌고 그 사이로 오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길바닥에는 거무튀튀한 흙과 함께 눈덩이가 묻어난 컴퓨터 부품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그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오토바이에 싣고 다리 건너 조그만 수리상까지 갔다. 그는 배달하는 물건들에 붙어 있었던 영수증을 보았다. 400만원이 넘었다. 싣고 가던 물건이 상한 경우 배달하는 사람이 전부 변상하는 것이 그 세계의 원칙이었다. 이제 생계를 이어갈 오토바이도 없어졌다. 계약을 한 용역회사로 돌아가면 빚만 400만원이 넘게 생겼다. 방세는 밀리고 그는 앞이 캄캄해졌다. 이윽고 자포자기한 그는 400만원짜리 물품들을 등에 지고 용산전자상가에 가지고 가서 40만원에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밀린 방세를 주었다. 그리고 집에 누워 있다가 그를 잡으러 온 경찰관에 의해 구속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크기도 전에 삶에 찌든 애영감이었다.


    “변호사님, 내 말 전부 사실이에요. 살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그 상황이 되어 배달하다 보니까 남의 물건이더라도 욕심이 났고요. 아무리 자포자기 했다고 제가 말씀드리지만 욕심이 안 나고 그 짓했겠어요?”


    그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모든 걸 포기하는 데서 오는 진실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부모가 사준 차를 타고 화려한 압구정동을 휘파람 불며 질주하는 소년들도 있는데, 같은 시간 또 다른 사회의 어두운 골목에는 삶의 높은 벽에 부딪쳐 절망하는 이런 소년의 가슴도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그들은 서로를 외계인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하게 사는 것보다 힘이 들어도 참고 살아가는 생명이 한결 돋보이는 법이 아닌가. 나는 그 소년에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마지막에 나오는 ‘극도의 불행을 겪은 사람만이 가장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 소년이 감옥에서 나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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