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장: 유적무기 개발 중기 (1961~1974)
1961년은 격동의 해였다. 1월, 미국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4월에는 CIA를 통하여 쿠바에 반격을 먹이기 위해 용병을 모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사건에서 철저하게 체면을 구겼다. 그러나 쿠바에서의 실패는 워싱턴을 막을 수 없었다. 5월에는 특수부대를 남베트남에 투입하고 야심만만하게 아폴로 계획 (달 착륙 계획) 을 추진하였으며, 6월에는 비엔나에서 소련과 만족스럽지 못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백치의 깜짝 등장은 크렘린 측의 비장의 패였다. 그러나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가장 극적인 때를 딱 맞춰서 패를 공개해야만 했다. 7월의 짧은 휴식기 이후 8월에 연이어 터진 3차 베를린 위기와 핵실험 재개 후, 흐루시초프는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성대하게 열린 10월혁명 기념 열병식에서 백치를 공개한 것이다. 이것은 워싱턴의 한껏 들뜬 분위기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었다. 바로 다음날 케네디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의 폐기를 선언하고 그 예산을 유적문명 탐사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미국의 편이 아니었다.
1962년 6월 22일, 3진법 제어 버스의 프로토타입인 예멜리아-1 (Емеля-1) 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크렘린이 게임의 필승 카드를 손에 넣은 것이다. 카스트로와의 회담 후 소련은 쿠바에 대공 미사일과 신형 전투기, 그리고 테스트를 막 끝낸 백치를 배치하였다. 이어진 쿠바 백치 위기에서 유적기술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던 미 정부는 유럽에서의 핵미사일 철수와 쿠바의 백치 철수를 교환하자는 압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몇 년 후 북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군사기구를 조직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처참한 굴욕을 맛본 워싱턴은 정규군 예산을 삭감하고 모든 칩을 유적기술에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도박으로 미국 측의 유적무기 개발은 단기간 내에 무시무시한 도약에 성공하였다. 소련 측이 개발한 유적과 달리 북미에 위치한 유적에는 수많은 종류의 기계류 잔해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그 유명한 스컹크 웍스로 보내어졌다. 그곳에서 미국 기술자들은 잔해의 측량과 역설계를 통하여 항공우주 동력기관에 대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을 얻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인들은 붕괴액의 직접적인 전장 투입을 추진하였다. 1967년 11월, D-9 베타-주마 유적에서 붕괴액을 발견한 후 ARPA는 곧바로 붕괴액을 가지고 9개월에 이르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붕괴액의 위험한 특성을 확인한 펜타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대통령에게 베트남 전쟁에 붕괴액을 사용하라고 유혹하였다. 쿠바 백치 위기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 했던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붕괴액 폭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동안, 소련 측은 백치의 심층 연구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유적기술 개발은 이미 그 성장세가 둔화되어 가고 있었다. 60년대 후반, 국립대학은 백치 연구에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크렘린은 점점 불만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받아들 수 있었다. 1971년, 타바샤르-B 불가사리에서 백치의 안정화에 성공하고 드디어 백치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해 냈다. 삼진법 제어 버스 개량형 예멜리아 (Емеля-М) 의 표준화 성공에 발맞추어 소련은 각 백치 개체를 예멜리아와 결합하여 제식화하였고, '스피라에나 (Шука)' 라는 코드명을 붙여 전략병기로 소련군 편제에 정식 도입하였다.
소련이 유적의 산물을 직접 무기로 사용하려 한 것에 비하여 미국은 유적기술의 2차적 응용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1964년 스컹크 웍스는 잔해 측량을 통해 J58의 성능을 압도하는 신형 엔진을 개발하고, 1965년 완성된 엔진에 J64라는 코드명을 붙였다. 1967년 해당 엔진을 이용한 SR-71A의 시험비행 성공으로 미국은 소련에 고고도 고속 정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들의 야심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고고도 고속 폭격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프로젝트는 곧 시작되었다.
비행기와 함께 미국은 해군의 유적무기 개발에도 성과를 냈다. 1969년 D-51 유적에서 발견한 선박 추진기의 잔해를 분석하여 미국은 전자기 추진 액체의 기술병목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기술은 핵잠수함에 사용되어 기관부의 소음을 줄였고 구축함에 사용되어 소나의 탐색 범위를 크게 확대시켰다. 이로 인하여 미국 잠수함은 유령처럼 조용하게 대양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미국의 유적기술 개발은 점점 소련을 따라잡고 있었다. 워싱턴의 투자가 크렘린을 압도하는 수준이기도 했지만 서방의 합작 시스템은 KGB 단일 주도 방식보다 효율이 월등했다. 그러나 기술 수준과 다양성 면에서 미국이 소련을 따라잡기는 했어도, 무기의 수량 면에서는 여전히 소련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1972년 미국 국내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점점 거세지고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갈등이 점차 확대되자, 미국은 중국에 우호의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같은 해 5월에는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의 원만한 출구전략을 모색 중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미-중 공동 선언> 이 상하이에서 발표되었고 고등연구계획국 (ARPA) 은 국방고등연구계획국 (DARPA) 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품고 소련을 방문하였다. 크렘린이 보기에 이 모든 정세는 또다시 백치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1972년 10월 혁명 열병식에서 32구의 스피라에나가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렇게 많은 스피라에나를 요란스럽게 공개한 것에 서방이 받은 충격은 10년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전 ARPA의 평가에 따르면 소련은 무슨 일이 있어도 10년 안에 백치를 완전히 제어하고 유의미한 작전단위로 편성할 수 없을 거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모든 가정과 추정, 평가는 스피라에나의 공개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열병식 이후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973년 미국은 <베트남 평화 협정> 에 서명하고 미군을 철수시켰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미국은 미래 최중요 국방 목표를 소련과의 유적무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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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 명칭: <유적 가스를 사용한 폭격의 파괴력 평가>
분류: 군사평가보고
등급: 최고기밀
출처: [국방정보국]
비고: 1969년 7월 8일
7월 5일, 항모 엔터프라이즈의 토르 비행중대가 베트남에서 유적 기체 폭격 임무를 처음으로 수행하였다. 12시간 후 항모에서 이륙한 전술정찰기가 같은 지역에 신속 조사를 실시하였다. 본 보고서는 공중 정찰 영상과 사진을 분석한 것이다. 추가적인 파괴 효과 분석은 실지 조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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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고공 사진이다. 삼림 한가운데 나타난 반경 500미터의 새까만 지표면은 우리 폭격의 직접적인 효과이다. '유적 가스' 를 채운 탱크에 고폭 작약을 부착하여 300미터 상공에서 폭발시켰다. 저번 달에 찍은 사진과 비교했을 때 유적 가스 폭격은 최소 300헥타르의 진지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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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30초 분량의 저공 촬영 영상이다. 필름 상에 나타난 이 광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단순한 셔터의 빛샘 현상으로 인한 광점이 아니다. 광학영상 전문가에 따르면 이는 강렬한 전리방사선이 필름에 남긴 흔적이다. ARPA가 실시한 실험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광점이 나타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상공 2,000미터의 정찰기에까지 영향을 줄 만큼 현장은 강렬한 전리방사선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자료 삭제]
화면상의 이 삼림을 자세히 보라. 규칙적인 원반 모양으로 잿더미가 된 지면이 우리 가스 폭탄의 효과이다. 지표상에 흐릿하게 보이는 잔해에 주목하라. 이 차량의 뒤쪽, 짐칸에 있는 AK47 소총들은 차량에 탄 병사들이 미처 엄폐를 위해 차량 밖으로 뛰어나갈 시간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동일 위치에 대한 다른 항공 사진을 보면 AK47의 목제 개머리판과 총열덮개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유적 가스는 실험에서도 나타난 바 있듯이 유기물을 타겟으로 하여 침식성을 가지는 듯하다. 유기물에 대한 침식 외에도 유적 가스는 침식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고열을 발한다. 이 구부러진 총열을 보라. 총열이 이런 식으로 휘어지려면 1천 도가 넘는 고온이 필요하다. 비슷한 다른 사진이다. 지표상에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다. 1천 도가 넘는 고온이 있어야 땅 속의 광물 성분을 이렇게 반짝거리게 만들 수 있다.
종합하자면, 유적 가스의 실전 성능은 ARPA의 추론에 부합한다. 이 가스의 유기물 침식과 고열 방출 능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하다. 현재 엔터프라이즈 호에는 약 200 세제곱미터의 유적 가스가 적재되어 있다. 펜타곤에 해당 가스의 재보급을 강력하게 건의한다. 현재의 적재량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폭격을 3~4회밖에 진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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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장: 유적무기 개발 후기 (1974~1981)
1974년에는 미국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1년 전 시험비행에 성공한 후로 아주 순조롭게 양산에 들어간 고고도 고속 전략폭격기 '오로라' 가, 캐나다 유콘에서 이륙하여 소련 전역을 횡단 후 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1일 오전 9시 모스크바 상공을 통과한 것이다. 이 일로 미국은 2년 전의 치욕을 완벽하게 되갚아 주었다. 이 '철의 장막 횡단' 에 화답하여 크렘린은 간단히 북베트남 정권에 연락하여 그들의 남베트남 총공격을 지원하고, 동시에 백치에 대한 추가적인 개량을 진행하였다. 미-소 양국의 유적무기 경쟁이 한층 더 가열되려는 찰나, 베트남에서의 예상을 벗어난 전쟁 양상이 유적무기 개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이 남쪽으로의 진격을 개시하자 남베트남 군대와 정권은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남베트남은 본래 동남아시아에서도 최강의 병력과 장비를 갖춘 국가로 북베트남과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 붕괴와 지휘 실패로 그들은 항상 뿔뿔이 흩어져서 싸웠고 북베트남은 이들을 손쉽게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의 허무한 패전은 미-소 양국에 교훈을 남겼다. 아무리 강력한 유적무기를 보유하더라도 한 번의 지휘실패나 사기 붕괴로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1975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정보화와 지휘 네트워크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미국에서는 ARPA가 구축한 아파넷에 자원이 투입되었다. 아파넷은 분산형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핵심 호스트가 존재하지 않고 중앙통제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든 데이터 통신과 정보 패킷을 네트워크 노드 간의 송수신에 의지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구조의 장점은 네트워크상의 각 단말기나 노드가 공격을 받더라도 나머지 노드와 단말기는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75년 이후 아파넷의 관리관할은 미 국방부 통신국으로 넘겨졌다. 1981년 미-소 양국이 <유적무기 제한 조약>에 서명하기까지 DARPA는 아파넷에 기반한 오로라 전략폭격기의 자동제어 시스템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소련의 전략은 완전히 달랐다. 크렘린은 한결같이 빅토르 글루쉬코프가 주도한 국가자동화시스템 (OGAS) 에 기대를 걸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이후 그들은 이 네트워크의 건설을 가속화하였다. OGAS 시스템의 트리형 구조에서는 최상위 호스트가 각 하위 호스트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함과 동시에 직접 통신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권한부여 시스템의 존재는 중앙통제 네트워크의 노드가 가진 부분적인 단점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 자체가 상위 호스트에 종속된 것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호스트 노드가 공격을 받는다면 하위 네트워크의 통제권을 회수할 방법이 없었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지휘통신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1975년 이후 국립대학의 주 목표는 OGAS 네트워크에 기반한 스피라에나의 지휘체계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유적무기 개발 후기 시대의 중심은 유적무기의 지휘체계 개발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적무기 자체에 대한 개발이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1978년 전자 추진 시스템을 갖춘 신형 잠수함의 시험 항해에 성공하였고 2년 후 총 3척을 건조하여 배치하였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스피라에나의 실전 운용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미쳐 돌아가던 유적무기 개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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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 번호: ■■■■
문건 출처: KGB 16국 기밀보관처
열람 전용 - 복사 엄금 - 열람 후 즉시 파쇄
유효기간 - 25년
기밀해제 - 2050년
문건 제목: 카이베르 산어귀 '스피라에나' 배치 효과 기록
문건 일시: 1981년 1월 7일, 작성자: 기술자문 - 보리킨
1980년 12월 5일, 소비에트 연방군 총참모부는 마침내 아프가니스탄 전역 사령부에 카이베르 산어귀 부근의 반동분자 훈련 캠프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작전의 주목적은 794 근위공병연대에 의한 스피라에나의 실전 성능 테스트였다. 본 보고서는 스피라에나의 전체 작전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파괴 효과의 평가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근거리 조사를 필요로 한다.
크리스마스 전, Mi-6 헬기로 4구의 스피라에나가 타지키스탄 철도 허브로부터 카불 교외의 국가보안위원회 기지로 운반되었다. 짧은 휴식기 이후 1월 2일, 스피라에나를 담당한 근위 794 공병연대는 헬기에 올라 스피라에나의 마지막 조정을 위해 잘랄라바드로 이동하였다. 목표는 70킬로미터 거리의, 국경선 반대편에 있는 랜디 코탈이었다. CIA는 그곳에 커다란 훈련 캠프를 차리고 천 명 가량의 무장세력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스피라에나 공수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피라에나를 운송하려면 '통조림'에 수납해야 했고 덕분에 Mi-6은 한계중량 아슬아슬하게 부담을 져야 했다. 위태위태한 여정 끝에 근위 794 공병연대는 스피라에나를 무사히 잘랄라바드 외곽의 임시 작전 센터로 운송하는 데 성공하였다.
작전계획에 따르면 작전부대는 무선 제어판으로 예멜리아 제어 버스를 지휘하여, 스피라에나를 랜디 코탈의 훈련 센터에 곧바로 돌격시킬 계획이었다. 목표물의 2천 미터 밖에서 시동을 건 스피라에나는 '포식' 모드에 들어가 적을 전부 삼켜버릴 것이었다. 1월 4일 밤, 근위 794 공병연대는 스피라에나의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최종 안전장치를 해제하였다. 1월 5일 0시, 예정된 시각에 작전이 개시되었다. 스피라에나의 흔적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작전부대는 야습을 선택했고 등화관제를 지켰다. 아프가니스탄이 끝없이 날려 대는 스팅어 미사일 때문에 근위 794 공병연대의 대다수는 잘랄라바드의 작전 센터에서 스피라에나의 청소가 끝나길 기다렸다. 다른 작전 인원들은 차량에 탑승하여 스피라에나의 뒤를 따랐다. 1월 5일 아침 7시 14분, 스피라에나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에 도착했다. 작전부대는 고지에서 랜디 코탈 훈련 센터의 위치를 확인한 후 예멜리아 제어 버스에 공격 지령을 하달하였다.
7시 30분, 4구의 스피라에나가 아프가니스탄 측 산봉우리에서 돌진해 내려가, 시속 32킬로미터의 속력으로 구릉을 타고 올라간 뒤, 산 사이의 하천을 통과하여 곧바로 6킬로미터 밖의 랜디 코탈로 진격.
7시 45분, 랜디 코탈 수비병이 스피라에나의 흔적을 발견, 사이렌 작동. 스피라에나, 포식 모드 돌입.
7시 55분, 스피라에나 1호·2호, 북쪽 도로로부터 랜디 코탈 돌입.
8시 03분, 스피라에나 3호·4호, 서쪽 산맥으로부터 랜디 코탈 돌입.
8시 05분, 랜디 코탈 돌입 후 무반동총과 중기관총 공격 조우. 피해 없음.
8시 10분, 스피라에나 1호·2호, 랜디 코탈 북부 방어선 돌파.
8시 11분, 스피라에나 3호·4호, 랜디 코탈 북부 방어선 돌파. (역주: 서부의 오타인듯?)
8시 15분, 국경 인근 적 무장병력, 랜디 코탈 중요 지대로 집결.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스피라에나의 저지 시도.
8시 22분, 스피라에나 1호·2호, 도로를 따라 남하 중 105밀리 포의 집중포격 조우. 피해 없음.
8시 23분, 스피라에나 3호·4호, 다각도에서 대전차로켓 공격 조우. 피해 없음.
8시 24분, 스피라에나, 적 무장세력의 방어선 돌파. 랜디 코탈 중요 지대의 미군 군사고문단 주둔지로 진격.
8시 28분, 스피라에나, 다각도에서 대전차로켓, 60밀리 및 80밀리 박격포 공격 조우. 피해 없음.
8시 30분, 스피라에나, 랜디 코탈 중요 지대 돌파, 적 무장세력 도주 시작.
8시 31분, 복귀 명령 하달.
8시 40분, 스피라에나 1·2·3·4호기, 출발지점에 복귀.
8시 51분, 스피라에나 1·2·3·4호기, '통조림' 에 수납. Mi-6 헬기로 잘랄라바드에 귀환.
9시 25분, 잘랄라바드의 794 근위공병연대, 스피라에나 복귀 후 신속하게 제염 작업 전개. 붕괴액 오염 제거 및 붕괴액 누출 유무 검사.
스피라에나를 회수한 후, 칸다하르에서 이륙한 정찰형 Mig-25가 랜디 코탈에 수차례 조사를 실시하여 귀중한 진단 자료를 획득하였다. 사진상의 반으로 잘려나간 건물은, 스피라에나가 타바샤르-B의 실험데이터와 마찬가지로 눈앞의 모든 물체를 단원자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다른 사진에 촬영된 새까맣게 타버린 흔적은, 스피라에나가 작동시 남긴 최대 폭 8미터에 이르는 궤적이다. 궤적 중간중간 반짝이는 것들은 스피라에나가 작동시 1천 도 이상의 고열을 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양 속의 광물 성분을 이렇게 반짝거리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고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타바샤르-B의 실험 결과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상으로 낼 수 있는 결론은, 스피라에나는 위험한 무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붕괴액을 이용하여 물질을 분해하는 역장을 형성하고 이 과정에서 대량의 열을 방출한다. 또한 스피라에나의 운송 과정에서 누출된 붕괴액이 주변 환경을 오염시켰는데, 이는 타바샤르-B의 ELID Infected 사례와 동일한 현상을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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