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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잇팔 선배, 이거 현상관리부 근무 태만으로 윗선에 찔러야 하는 거 아님까? 우리가 어딜, 왜 들어갑니까?”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은 준우가 소리치자, 서류를 훑고 있던 정 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준우 차장, 회사 내부에서 호칭을 정확히 해라. 그리고… 나도 잘 모르겠다. 관리부에서 우리한테 직통으로 들어온 일이다. 부탁이란다.”
“예? 좃병신 부장이 뭔 일이랍니까? 우릴 뭐 천민으로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정 부장이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조병식 부장이다. 하여튼, 그 양반이 우리한테 부탁한거 맞다. 너한테 미안했다고까지 적혀있던데? 어지간히 해결하고 싶은가 보다.”
“아니 부장님, 제가 그 양반 때문에 “잠에 들면 나갈 수 있는 방”에서 죽을 뻔 했다 아닙니까? 그때도 뭔, 활로 찾을 생각은 안하고 다른 데 정신 팔려있다가 민간인 몰살할 뻔한 양반이 뭐 이리 뻔뻔하게 부탁이래?”
“죽었다. 부탁은 유서에 쓰여 있었고.”
“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슨 소리인지 뇌에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조 부장이 죽었다고?
“아니 뭐, 자신의 삶이라도 비관하면서 옥상에서 떨어졌답니까? 그 양반이 이상 현상에 들어갔을 리도…”
“들어갔다. 일명 “탈출할 수 있는 방”이라는 이상 현상 이던데. 일단 들어가야 하니까 서류부터 봐라.”
정 부장이 아무렇게나 던진 서류를 완벽하게 받아낸 준우는 앞 페이지를 넘기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음… 어… 엥? 이거 개별형 이상 현상인데요? 둘이서 못 들어가는거 아닙니까?”
인류안보국이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이상 현상” 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에 따라 필드형 이상 현상, 조건형 이상 현상, 개별형 이상 현상으로 나뉜다. 서류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은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개별형 이상 현상” 이라 수식되어 있었다.
정 부장이 하얀 액체가 들어있는 주사기를 들어 보이며 준우의 의문에 대답했다.
“그거 해결하려고 조 부장이 들어갔다 죽은 거랜다. 이거 맞으면 조건형으로 두 명까지 동시에 진입할 수 있단다.”
이 양반, 어지간히도 탈출할 수 있는 방에 악감정이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뭔 소리냐고? 분명 조 부장은 몇 달 전만 해도 인류안보국의 무결점 에이스였다. 그가 이상해진 건 겨우 두 달 전부터. 갑자기 “탈출할 수 있는 방”에 꽂히더니 기어코 “잠에 들면 나갈 수 있는 방”의 수칙을 다른 수칙과 섞어 놔서 내가 겨우 복구해 놓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래서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서류에 적힌 것들 말고 다른 특이 사항 있습니까?”
“첫 스물여섯의 희생자의 이름은 이상 현상의 의지로 박제되어 있다. 하나는 세상에 의해 지워졌고…”
정 부장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아마도 [R. 조X수(33세, 남)]. 이 희생자, 관리부 신입이었던 영수 같다.”
영수라고? 고된 일을 버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낸 것이 아니었나? 준우의 생각이 이어지려는 찰나 정 부장의 목소리가 그 간극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영수… 조 부장 아들이다.”
“하… 하하 선배, 실없는 소리 마십쇼. 그 안전 주의 조 부장이 자기 아들을 이상 현상에 보냈다고요? 농담이 과합니다. 하하…하…?”
억지로 웃던 준우는 미동조차 없는 정 부장의 표정을 보곤 급히 멈추었다.
관리부 대리 조영수. 어딘가 비실비실한 몸과 대비되는 빠릿빠릿함을 가지고 있던 신입. 분명 두 달 전부터 안보이기 시작해서 그냥 사직서를 낸 줄 알았다. 근데 죽었다고? 심지어 조 부장의 혈육이라니…
“아니 말이 됩니까? 그 조 부장 이에요 조 부장. 요새 좀 메롱 한 상태였다지만 역대 이론 관찰자 중 최고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뭐라 못한 거 아닙니까. 극 단계의 이상 현상 중 절반을 혼자 책임진 그 조 부장이 자기 아들을 이상 현상 안으로 보내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한 정 부장이 다시 설명했다.
“영수가 상부로 보고한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그냥 자기 혼자서 들어간 거야. 이후 조 부장이 어떠한 경위로 그 사실을 알아냈고, 그 이후부터 나머지 이상 현상들도 등한시하고 “탈출할 수 있는 방”에 매달렸다… 라고 추측하고 있다."
준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하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직속상관한테, 아니 설마 자신의 아버지한테 마저 보고하지 않고 이상 현상에 들어가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두 명이나 연루되어 있다니… 그래서 언제 출발합니까?”
마음을 다잡은 준우를 본 정 부장이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내일. 서류 다 외운 뒤에 태워라.”
준우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좀 잘못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85페이지까지 있는데요?”
“응. 맞다. 85페이지. 내일까지 다 외워서 본사 지하 2층으로 와라.”
도대체 무슨 일인지. 85페이지의 서류를 줘 놓고선 하루 만에 전부 읽으라고?
“혹시 시간이 중요한 겁니까?”
잠자코 서류나 읽으라는 듯 정 부장은 서류를 가리켰다.
“읽어보면 알 거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라.”
이렇게 퇴근이라니. 적어도 이번 이상 현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위험도의 등급은 낮은 위험도에서 높은 위험도 까지, 차례대로 다섯 단계에 따라 나뉜다.
1단계 — 청(靑): 이상 현상은 존재하지만, ‘표면’에만 머무르고 있는 상태. 관측과 기록만으로 대응 가능.
2단계 — 영(影):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없으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왜곡이나 감각 이상이 보고됨. 신체보단 정신에 미세한 간섭을 가함.
3단계 — 괴(乖): 현실 질서를 부분적으로 비틀고, 이상한 행동/사고를 유발. 격리 또는 반복 관측을 통해 위험성 확인됨. 일부 대상은 집단 감염 유사 반응 보임.
4단계 — 금(禁): 관측자에게 중대한 해를 끼치며, 접근과 기록 자체가 통제됨. 존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응 현상이나 이상 반응 발생.
5단계 — 극(極): 전면적 현실 붕괴, 인지 파탄, 반복 감금 등 통제 불능의 특성을 가짐. 현재까지 이 등급의 이상현상에서 자력 생환한 사례는 총 6건. 그중 다섯은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였음.
가령 우리가 흔히 아는 옷장 안의 괴물은 청의 이상 현상이다. 어린아이들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보이며, 놀래키는 것 외에 다른 해로운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너무 놀랄 경우, 놀란 기억을 삭제시켜 어린아이를 안정시킨다.
반면 극의 이상 현상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 현상이다. 지금까지 총 여덟의 존재만이 보고되었고, 그중 여섯은 인류안보국의 관리하에 있으며, 하나는 봉인, 하나는 외부의 강림으로 소멸했다.
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냐고?
“씨발… 극의 이상 현상이라니…”
내가 가게 생겼으니까 그러지.
서류 첫 장은 늘 그렇듯 책임 회피 문구였다.
‘본 문건은 인류안보국 내부 등급 극(極) 이상 현상 제48-K호에 관한 내부 대응 매뉴얼이며, 귀환 실패 시 관련 책임은 진입 요원의 자율 판단에 따릅니다.’
“씨발, 시작부터 이런 말 박아 넣는 거 보소…”
준우는 혀를 차며 다음 장을 넘겼다. 두 번째 장에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이상 현상 48-K
통칭: 「탈출할 수 있는 방」
등급: 극(極)
구조: 개별형 (조건 충족 시 조건형 전환 가능)
영향권: 진입자 단독 / 단, 기록은 집적 축적됨
핵심 속성: 선택권 제공, 진입자 판단에 따른 도구 지급, 층위별 생존 시도
“그래, 여태 본 ‘극’ 등급 중에선 설명이 제일 간단하네. 대충 방 몇개 던져주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한다는거지?”
하지만 간단한 건 개요뿐이었다
세 번째 장부터는 1페이지당 단 한 명의 진입자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검열되었지만, 나이와 성별, 요청한 물품, 지급된 결과, 생존 시간, 사인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과다 출혈, 쇼크사, 과다 출혈… HE-02도 요청하면 주나 보네, 인류안보국 내부의 HE-02가 어디론가 빼돌려졌을 리는 없고… 현실 조작인가.”
준우는 주석을 확인했다.
※ HE-02: 안보국 내에서의 수량 변화 감지된 적 없음.
※ 4층 체류 기간이 30일을 초과할 경우 자동으로 실패 처리 됨.
기록은 계속됐다.
어떤 이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원했고, 지급된 건 ‘추상 관념’이었다.
즉사.
어떤 이는 ‘3층에 바칠 제물’을 원했고, 염소가 두 쌍 지급되었다.
분사(粉死).
“민간인들은 살아남기 힘든… 아니 애초에 극의 이상 현상이면 누구든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
그렇게 서류를 넘기던 준우는 어느새 눈이 뜨겁다는 걸 느꼈다. 익숙한 이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R. 조X수 (33세, 남)
요청 물품: 화염방사기
지급 결과: K사의 화염방사기
생존 시간: 143일 6시간 6분
사인: 분사
“영수…”
왜 들어갔을까? 해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준우는 머리를 털어내듯 흔들고 다시 집중에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Y. 김X원 (21세, 여)
요청 물품: 지워짐 지워짐 지워짐 지워짐
지금 결과: 지워짐 지워짐 지워짐
생존 시간: 지워짐
사인: 지워짐 지워짐
Z: 이X현(23세, 남)
요청 물품: 제 머리로는 도무지 왜 김X원 님의 기록만 지워졌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일단 저는 이X늘 님 루트 따라서 가보겠습니다.
지급 결과: 요청을 이해하지 못함
생존 시간: 229일 7시간 46분
사인: HE-02 복용
※ 이 이후 도전자들의 요청들은 기록되지 않음. 아마도 밸런스 조절의 개념이라고 사료됨.
“총 스물여섯의 기록과 하나의 지워진 흔적…”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이 이번 이상 현상을 클리어할 열쇠일 것이다.
여름의 새벽은 지나칠 정도로 더웠다. 금방이라도 샤워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더위를 무시하며 안보국 정문에서 기다리기를 십여 분, 정 부장이 늘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과 함께 올라왔다.
“그래서, 이번 이상 현상은 어떻게 들어갑니까?”
정 부장이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 정 부장이 보여줬던 하얀 액체가 들어있는 주사기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사용한 듯, 내부가 비어 있었다.
“인류안보국 현상감시부에 따르면 이번 이상 현상은 실체가 있되 없는 이상 현상이다. 즉, 현실에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으며, 상호작용도 불가능하다.”
정 부장이 주사기가 들어있는 통을 서류 가방에서 꺼냈다.
“지금까지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전부 무작위로 이 이상 현상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그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다.”
정 부장이 말끝을 흐리며 주사기 두 개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놨다. 조심스럽다는 건 그 물건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절차로 보였다.
“이건 인위적인 진입. 그러니까 내부의 ‘인식’이 우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끔 강제로 자격을 부여하는 거다.”
준우는 조용히 주사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액체는 탁했고, 흔들릴수록 안쪽에서 무언가가 두 겹으로 겹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부장님은 이미 맞으신 거죠?”
“어젯밤.”
“부작용은?”
“그 공간에서 자꾸 나를 부른다.”
준우가 멈칫했다.
정 부장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목소리는 아니고. 그냥, 꿈에 반복적으로 나와. 말하진 않고.”
“……그게 더 싫은데요.”
“그러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준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사기를 들이댔다.
“이제 진짜 들어가는 겁니까?”
“응. 준비됐으면 지금 해. 인식이 부정되기 전에.”
주사기 바늘이 팔 안쪽 피부에 들어가는 순간, 준우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통증도 없었고, 마취 감도 없었다. 단지…
방금까지 들리고 있던 여름 새벽의 소음. 도심의 간헐적인 자동차 소리, 멀리서 들리던 새소리, 건물 옥상에 부딪히는 바람.
그 전부가,
일제히 멈췄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서 있었다.
넘어지지도 않았고, 일어나는 과정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일어선 상태였다.
“…부장님?”
“…여긴 안전지대 같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또렷해졌다. 빛에 잠긴 것 같은 하얀 공간. 벽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곡면이 수평선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중앙에는 단 하나의 테이블. 그 위에는 하나의 책자와 두 장의 종이, 펜 두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책자에는 A부터 Z까지, 이미 확인한 스물여섯… 아니 스물다섯인가? 하여튼 그동안의 기록이 적혀있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모아놨군.”
책자를 대충 훑어 본 준우의 눈이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종이를 향했다.
종이는 A4보다 약간 작았다. 격자무늬가 아닌 흰 종이.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해당 문서에 원하는 물품을 하나만 적어 주세요.
방 왼편의 창고 안에 영구적으로 보존 및 갱신될 것입니다.
축적된 물품들을 활용하여 건물을 탈출하세요.
행운을 빕니다.
추가) 더 이상 물품들은 추가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물품들과 여러분이 선택한 물건으로 이곳을 해쳐 나가 보세요!
추가) 이제부터 새로운 참가자가 생길 때마다 리셋됩니다!
악취미다. 탈출의 희망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것이 매우 악의적이다.
문득,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가 떠올랐다.
“부장님, 그래서 이 이상 현상 생환율이랑 희생자 수는 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이상 현상은 아닌 거 같은데요.”
준우의 질문에 정 부장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서류 마지막 장이 비어 있는 건 보통 두 가지 경우지. 생환이 목적인 탐사가 아니거나, 읽어봤자 의미가 없거나.”
앞에 있는 책자를 들어 다시금 한번 읽어보다 다시 입을 뗀다.
“통칭 “탈출할 수 있는 방”, 이 이 이상 현상의 희생자는 확인된 정보로 약 28500여명. … 생환율은 0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지. 눈알이 뒤룩뒤룩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최대한 저 문장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보고된 지 두 달 정도 된 이상 현상이, 아니 아무리 극 단계라고 해도 그렇지, 거의 도시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것도 모자라 전부 다 죽었다고요? 윗선이 잘못 관측한 거 아닙니까?”
정 부장은 조용히 책자를 고이 접어 다시 하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적인 정적은 왜인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현상 관측부 이 부장이 조 부장의 부탁으로 기록한 거다. 내가 내 돈을 전부 걸 수 있다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에 걸 것 같군.”
“뭐, 이 부장님은 인외시니까… 그럼 진짜로 생환율 0이라고요? 사상 최초 아닙니까?”
정 부장은 준우의 어깨를 툭 툭 치고는 옆에 있는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읽어봤자 의미 없는 정보고, 그러니 마지막 장이 비어 있던 거지. 창고나 가보자.”
창고 쪽으로 걸어가는 정 부장의 뒤는 어쩐지 잔뜩 긴장감을 지니고 있었다.
창고를 걸어가며 정 부장은 다시금 서류에 있던 내용들을 상기시켰다.
“다시 한번 말해주지만, 우리가 현재 있는 공간은 4층, 안전지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우리의 목표는 한층 한층 내려가며 결국 1층에 있는 탈출구에 도달하는 것. 그와 동시에 이 이상현상을 없애는 것. 이상이다.”
서류에서 묘사된 이 이상 현상은 총 4층. 4층에서부터 내려가 1층의 출구로 나오는 구조이며, 각 층마다 시련이 적어도 하나씩 존재하고 있다. 여러 희생자의 결과를 토대로 짐작한 결과, 3층의 마지막 통로에는 재단이 있으며 2층에는 여러 적대적 개체가, 1층에는 창고가 있으며 그 안에 들어가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정 부장은 익숙하다는 듯 창고 한편에 놓여있는 K2 소총과 탄약을 집어 들었다.
“이곳에서 충분히 대비한 후 가지.”
그렇게 지도를 외우고 꼼꼼히 희생자들의 유산을 챙긴 뒤, 우리는 드디어 4층에서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준우를 한번 흘깃 쳐다본 정 부장이 창고 밖으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우리가 현재 머무는 이상 현상은 극 단계의 이상 현상이며, 그렇기에 정상적인 루트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정 부장의 손이 4층과 3층을 이어주는 문을 부드럽게 민다.
“우리는 물품을 적지 않는다. 종이는 가방 안에 넣고 따라오도록.”
문은 생각보다 쉽게 밀렸다. 하나의 층과 층 사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긴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공기는 축축했지만 서늘했다.
10분 정도를 하염없이 걷다 보니 3층이 나왔다. 벽과 천장은 콘크리트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발밑엔 금속 계단이 이어져 있다.
정 부장이 쓰고 있던 안경을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뒤에는 이준우 차장이 검은색 가방을 메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상 현상은 대체로 예측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는 개별형 이상 현상을 강제적으로, 조건형으로 만든 후 진입하였으니 더더욱 조심하도록.”
“옙 알겠슴다, 선배. 일단 주변 파악부터 하겠습니다.”
준우가 빠르게 주변을 파악하러 건물 지도를 꺼냈다. 각 층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지도를 펼쳐 공간을 대조해 본다. 정 부장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여기 버튼을 누르면…”
문이 ‘칙’ 소리를 내며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정 부장의 얼굴을 스쳤다.
3층 복도는 아무도 밟지 않은 듯 깨끗했지만, 바닥의 금속 타일들은 오래된 기름 자국으로 미끄러웠다.
준우는 한 발짝 앞서 나섰다.
“여기가 기계실이죠?”
정 부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재단 구역 옆 기계실, 이쪽이 통로다.”
지도에는 3층 평면도가 붉은 선으로 강조돼 있었고, 군데군데 ‘위험 구역’이라 쓰인 붉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여긴… ‘기계실’ 구역은 그냥 지나가는 구간 같은데요. 이 ‘재단 구역’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 부장은 등을 곧게 펴고 계단 난간 쪽을 바라보았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길고 검은 통로 끝에는 희미한 불빛이 하나 깜박이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부터는 소리를 최소화하며 가지.”
두 사람은 발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었다.
양옆 벽에는 금속 파이프와 배터리 팩이 무심히 매달려 있었고, 가끔 스위치를 건드릴 때마다 “클릭” 소리가 기계음처럼 반사되었다.
준우의 몸이 잔뜩 긴장된 것이 보인다. 통로의 중간쯤, 이제는 주변은 온통 암흑만이 가득하고 통로 끝의 불빛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준우의 뒤에는 정 부장이 사선으로 총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걷는다.
아니 사실 어느 순간부터 정 부장은 걷지 않았다.
준우의 등에 걸린 가방끈이 삐걱거리자, 정 부장은 사선으로 총을 들고 천천히 멈춰 섰다.
총열이 천천히 가늠자에 맞춰지는 동안, 공기마저 정지한 듯했다.
준우의 등을 향해 겨눈다.
타—앙!
총열이 뜨거워짐과 거의 동시에 총알이 발사된다. 작은 불꽃과 함께 준우의 몸이 앞으로 크게 젖혀졌다.
핏물이 플랫폼 위로 좍 흘러내리고, 준우의 무겁게 내려앉은 시체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준우 차장은 절대 임무 중 나를 선배라 부르지 않는다.”
정 부장은 물처럼 녹아내리는 준우의 시체를 뒤로하고 통로의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 끝에 다다르자, 정 부장의 시야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준우가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진짜 정 부장님 맞습니까? 혹시… 도플갱어 같은 건 아니죠?”
정 부장이 피식 웃으며 손으로 총열의 방향을 바꿨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준우를 뒤로하고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재단으로 향했다.
“어린양은?”
준우 차장은 납작해진 어깨를 부여잡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뭐… 재단 구역에 들어오니 4층과 이어지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왜인지 머쓱해진 준우가 삐걱거리며 4층으로 올라갔다.
3층은 도플갱어였나. 혼자서 떨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이질감을 쉽게 느꼈겠군. 오히려 두 명이 와서 죽을 뻔했나…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담력이야. 그런 일을 겪고도 총구를 그냥 손으로 밀어버린다고? 분명 만능 해결사라고 불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간이 두어 번 정도는 떨어진 듯한 감정은 뒤로하고 준우는 4층에서 어린 양 두 마리를 데려왔다.
“일단 데려왔습니다.”
눈앞에 어설프게 서 있는 두 마리 새끼 양을 훑어본 뒤, 정 부장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2층으로 내려간다. ”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몇 걸음 옮겼을까, 툭툭 바닥에 쌓인 잿더미가 발밑을 맴돌았다. 벽면의 덜커덕거리는 전등 하나가 순간 흔들리며 깜빡였다.
정 부장은 한 손으로 소총을 교체하며 숨을 고르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 전력에 손실은 없다.’
“여기서 시작한다.”
좁은 복도에 들어서자, 벽에 매달린 센서들이 ‘지직’거리며 붉은빛을 흘렸다. 돌연 뒤에서 기계음이 울리자, 정 부장은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텅—텅—
한 발, 두 발. 개체 셋이 벽을 타고 튀어나왔지만, 이미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무너졌다.
잠시 뒤, 연막탄을 던져 회랑을 흰 안개로 가득 채웠다.
“연막!”
시야가 좁아지는 순간, 정 부장은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나이프를 쥐고 돌진했다.
칙—
차가운 금속이 살을 그으며, CA-2 한 마리가 절단됐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낸 뒤, 정 부장은 두 번째 소총을 빠르게 교체했다.
홀로 펼쳐진 넓은 공간. 중앙의 전력 탑이 ‘쿵’하고 울리고, 금속 파편이 흩날렸다.
펑—펑—
둘이 동시에 쓰러지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또 다른 개체가 기막힌 속도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정 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류가 흐르는 배선 옆을 비집고, 거친 숨을 내쉬며 칼을 휘둘렀다.
전기 스파크가 튀었고, 왼팔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화상…’
피를 털어내며 세 번째 소총을 집어 든 그는, 전력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네온 사인 아래 케이블 다발이 얽힌 전력실 내부. 소총 한 발로 메인 스위치를 겨냥했다.
전력이 순식간에 반감되며, 적들의 움직임이 뚝 끊겼다.
깜깜해진 통로에서, 머리가 고장난 것 같은 개체들이 기괴한 비명을 냈다.
정 부장은 네 번째 소총으로 빠르게 사격해 보안 램프를 껐다.
막판 볼트를 끊어낸 순간, 탑이 크게 흔들리며 전류가 사라졌다. 홀은 이내 어둠에 잠겼지만, 정 부장은 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어깨엔 피와 화상이 남았지만, 표정엔 만족이 떠올랐다.
“2층 클리어.”
정 부장의 마지막 말에 준우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살면서 살점이 비처럼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지금 준우 앞에 벌어진 광경은 ‘살점의 비’라고 표현되기에 손색없는 장면이었다.
정 부장의 손에서 또 하나의 K2소총이 떨어진다. 총구가 휘는 걸 방지하기 위해 K2 소총 6개를 번갈아 가며 쓰고 있는 정 부장의 손끝에선 또 하나의 생명의 죽음이 선포되었다.
아마도 몇 천 혹은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무덤이 되었을 2층이 손쉽게 돌파되어 간다.
괴 급 이상 현상으로 여겨지는 개체들이 스러지는 상황에 준우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최대한 주변을 살폈다.
‘저건 CA-2, 저기 죽어있는 건 CX-8이고… 방금, 아니 칼도 던지신 건가? 저기 벽에 꽃혀 있는 건 CF-43…’
가만히 서 있는 정 부장은 뭔가 다가가기조차 두려운 아우라를 풍겼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숨 고르듯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1층이다.”
옛말에, 괴물이랑 싸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닌가? 뭐, 어쨌든, 방금 준우가 본 광경을 직접 목격한 다른 이가 있었더라면 정 부장과 절대 싸우려 들지 않으리라.
1층은 고요했다. 준우는 4층에서 가져온 시계, 사과 2알, 타이어와 전력 케이블이 담긴 상자를 가방 안에서 꺼냈다.
2,3층은 엄청 긴박했는데… 정작 1층에 발을 들이자, 허전할 만큼 적막했다. 이미 이 물건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전부 확인한 상태이고, 조금이라도 곤경에 빠트릴만한 함정들은 옆에 있는 날이 벼려진 인간병기가 대신 해체하며 걸어갔다.
적절한 장치를 만들어 창고로 통하는 숨겨진 길을 찾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 사과와 타이어의 고무, 전력 케이블을 적절히 조합하면 회로 스위치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한다. 사과를 통해 미세전류를 흘려낸다는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준우는 사과 두 알을 전력 케이블 양 끝에 고정하고, 시계를 돌려 전극을 접촉시켰다.
“작동하겠습니다.”
푸—, 벽 틈새에서 금속음이 흘러나왔다.
조명이 스르르 꺼지며 벽 한 면이 말끔히 열렸다. 그 너머로 1층 창고가 보였다.
“키 카드는?”
정 부장의 말에 준우가 창고의 키 카드를 정 부장에게 건넸다.
“…쉽다.”
준우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창고 안엔 더 이상 아무런 함정도, 움직이는 장치도 없었다.
창고 반대편, 탈출구가 보였다.
탈출구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평범한 탈출구였다.
정 부장도 이상하다는 듯 출구를 확인했다.
“이준우 차장, 이 이상 현상의 출구가 확실한가?”
준우가 팔 안에 심어둔 이상 현상 감지기를 사용해 포탈을 스캔했다. 정상적으로 현실과 이상 현상을 이어주는 포탈, 클리어 시 소멸하는 “탈출할 수 있는 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포탈이었다.
준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예 정 부장님, 정상적인 포탈입니다. 클리어… 한 겁니까?”
정 부장은 잠시 말없이 허탈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득 주변이 너무도 조용해진 게 우습게 느껴졌다.
“…끝났네.”
준우는 감지기를 주머니에 슬쩍 밀어 넣었다.
탈출구 너머로 보이는 새벽 공기가 적막 속에 더 쓸쓸하게 와닿았다.
“이상하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니.”
정 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결정적인 순간, 문은 고작 “칙” 소리 한 번만 남기고 열렸고, 그 뒤로는 특별한 기적도, 폭발도, 영웅담도 없었다.
준우는 가방에서 하얀색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이거나 적고 가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조 부장이 들어온 것부터, 이런 이상 현상이 극 등급으로 측정된 일까지.
“다 썼나?”
정 부장의 말에 준우는 손아귀에 쥐어진 검은색 수첩을 흔들었다.
“예, 쓰니까 바로 주어지는군요. 나갑시다.”
그렇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생기자마자, 탈출할 수 있는 방은 사라졌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조 부장의 죽음과 현저히 쉬운 극 단계의 이상 현상.
준우가 마지막에 요구한 건 “조 부장이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무언가.”
“이 작은 수첩이…”
준우는 심호흡한 후 수첩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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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파도의 높이는 오히려 주변에 존재하는 물에 의해 가려진다고 한다.
이 상황의 절망감은, 이미 분노에 뒤덮여 있던 나의 과거에 의해 가려져 너무 늦게 인지되었다.
나는 이상 현상이 싫었다.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천적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있었다.
내가 분석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아들이 이상 현상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미련한 놈.
영수의 죽음은 느낄 수 없기에 더욱 잔인했다.
도대체 왜 들어왔을까.
하루에 수백 번은 생각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 현상 분석에 능하지, 사람의 마음은 잘 모르니까.
아들의 뜻이 “탈출할 수 없는 방의 폐쇄”라고 믿고 이 이상 현상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모든 준비는 마쳤다.
이상 현상 또한 쉽게 돌파했다.
내가 이상함을 느낀 건 탈출구 뒤에 뚜렷하게 보이는, 빛에 잠긴 것 같은 하얀 공간을 맨눈으로 확인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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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흔들리듯 진동하고, 눈앞의 풍경이 마치 천천히 물감을 거둬내듯 서서히 지워졌다가, 다시 그 밝고 하얀 안전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4층이다.
생각해 보자.
4층이다.
아.
창고를 가본다. 내가 분명히 창고에서 꺼낸 사과와 타이어 등 물품들이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 있다.
지금 확인해 보니 분명 매고 있던 가방이 사라졌다.
리셋.
처음, 이 이상 현상에 들어 온 그 상황에 다시 직면했다.
처음 이상 현상에 진입하던 그 순간의 객기가, 이제는 나 자신을 삼키려 한다.
…
이 상황을 비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수첩을 요청했다. 그 어떤 물품과 달리, 리셋되지 않는 수첩.
그리고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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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 아들은 내 생각보다 더욱 똑똑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 현상의 마지막까지 가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런 위험성을 나보다 빠르게 눈치채고 자신이 해결하려 한 걸 수도 있다.
이 이상 현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어삼킬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아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다.
역시 내 아들이다.
…
…
아. 참고로 이제 네 번째 리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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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모르겠다.
솔직히 클리어의 횟수가 이 이상 현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클리어했다.
3층, 2층, 그리고 1층.
열다섯 번의 돌파와 열다섯 번의 절망,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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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냈다.
나는 이 이상 현상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왜 “스물여섯의 기록만이 남아있는지”가 궁금했다.
뭐, 단순히 영어 알파벳이 스물여섯 개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언어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걸 맞추려고 하겠는가?
방금 내가 알아낸 건, 이 이상 현상은 “클리어의 욕망을 없앨만한 것“ 혹은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Y의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탈출구의 밖에 4층이 있다는 정보이거나, 루프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정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물일곱 번째부터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내가 장담하는데, “생존 시간”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의 생존 시간은 10,000시간을 돌파했다.
당연히 이 모든 건 현실 시간과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지 않았다. 행동이 굼떠지지 않았다.
시간이 열쇠구나.
이제야 안개가 조금 걷힌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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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루프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과감히 멈췄다. 4층에 한 달 동안 체류하는 건 불가능하니 3층에서 계획을 세워본다.
내가 아는 정보가 무엇이 있는가?
영수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지?
이상 현상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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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다친 이후에 탈출구를 통과해 봤다.
밝고 하얀 지대는 빨간색 액체가 물들이지 못했다.
재생,
아니. 아니다.
진짜 뒤로 돌아간 것과 같다.
내가, 이 이상현상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상황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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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 무엇일지 생각하다가 참가자 K와 L의 사례가 기억났다.
K. 안X민(45세, 남)
원하는 물품: 바깥의 괴물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
지급된 물품: 추상관념
생존 시간: 7분
사인: 고위 관념 인지로 인한 영혼 붕괴
L. 박X수(52세, 남)
원하는 물품: 인간이 아무 문제 없이 다룰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무기
지급된 물품: ¤사의 만년필
생존 시간: 52일 17시간 8분
사인: 두개골 분쇄골절
어떤 개념일까?
왜 만년필이지?
“괴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오로지 3층의 도플갱어만? 2층의 괴물 무더기? 아니면…
이 이상 현상 자체도 괴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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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한 짝은 실험 도구로서 충분했다.
어차피 탈출구를 통해 4층으로 돌아가면 다시 몸은 회복된다.
4층에 팔을 잘라뒀다.
이젠 한 팔만으로도 충분히 괴물들을 돌파할 수 있다.
3층… 2층… 1층.
드디어 탈출구 앞.
여기까지 겨우 24일.
4층의 시간제한인 한 달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탈출구를 통해 4층을 본다.
빙고.
내 팔이 아직도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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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이론은 완성되었다.
탈출구 앞에 도착했다.
촉촉해진 종이 위에, 나는 마지막 붉은 획을 그었다. 이 한 줄이 없으면 다음 루프는 없다.
만년필로 “사건”을 적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에 넣는다.
화염방사기로 내 자신을 태운다.
연기야. 멀리멀리 퍼져라.
이상 현상을 이루는 개념에 오류를 심는다.
이제 “나” 는 다른 시간대에 동일한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정보는 동일 시간대에 다른 공간 속에 존재한다.
아.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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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조 부장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 잿더미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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