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쟁에는 미나마르만 모르고 있는 비밀이 있어

실은 미나마르도 알고는 있지만

기를 쓰며 외면하려 애쓰는 사실이겠지

지구인들은 프리크키에 맞서 인류 연방을 지원했어

지구인들은 인류 연방에 맞서 나비들을 도와줬지

지구인들은 위대한 칸에 맞서 은하 공동체를 지켰어

이제 은하 전체가 지구 국제 연합이 어떤 존재이며

주변국의 위기 앞에 무엇을 했었는지 알아!

지구는 문화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항상 은하의 주요 사건들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었고

그 명성은 오늘날 은하 전체에 널리 알려졌어

인류 연방이 그 강한 군사력과 호전성으로

은하 공동체에 영향력을 과시한다면

지국련은 문화와 외교를 통해

은하 공동체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야!

몇 번의 함대전으로

지구 국제 연합 함대를 괴멸시킬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쟁이 ‘끝까지’ 가면?

지구의 인간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면

나비와 블로르그의 마음이 대단히 아플 거야

심지어 최근 지국련과 마찰을 빚는 인류 연방도

인간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상황을 외면할 순 없겠지

즉 지구 국제 연합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권위주의 연합이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는 거야

제헤트마와 오르비스 친은 재빨리

이 사실을 직시했어

지국련 참전 소식 이후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거대한 승리보다는 피해를 줄이는 것이 되었지

지국련이 할 일은 이미 마음이 꺾인 상대에게

몸을 돌릴 명분을 속삭이는 것뿐이었어

*

"그래서, 참전 안 한다고?"

나비제국의 알현실

지구 제독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손톱을 다듬고 있다

물론 깔끔하게 다듬어진 상태라 추가 손질은 필요 없지만

무심한 듯한 태도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려는 수작이다

지구 제독의 맞은편에 앉은 나비제국의 재무관은

못마땅한 표정에 입이 댓발 나온 표정이다

눈앞에 있는 지구 제독이 극도로 거북했기 때문이다

친밀한 상대의 요청은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그 상대가 여러 번 전쟁을 함께한 혈맹이면 더욱 그렇다

강한 상대의 요구는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그 상대가 은하의 전쟁마다 기어 나오는 슈퍼스타며

켈-아잔과 지국련의 주력 함대를 닥닥 긁어모아

나비제국의 수도까지 들이닥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지구 제독의 요구는 간단하다

'권위주의 연맹과의 전쟁에서 지국련을 지원할 것'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외계인 선호와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나비제국은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은하 전체에 적대 국가가 없었고

그 친근함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다

그런데 직접 이해관계가 얽히지도 않은 사안에

군대를 동원해 개입한다면

나비제국을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며

그동안 은하 곳곳에 쌓아둔 외교관계가 파탄 날 수도 있다

여제가 곁에 있다면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지구 제독의 제안을 상큼하게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지구 제독은 여제의 입에 꿀을 물려줌으로써

여제의 시선을 꿀단지로 돌린 상태였다

(그 웬수같은 동생은 고작 꿀단지 하나를 받고

언니가 질질 끌려가는 상황을 묵인했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던 재무관은 결단을 내렸다

"제독에겐 유감이지만 힘들 것 같아"

재무관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여전히 지구 제독은 손톱을 다듬고 있다

주구장창 다듬는걸 보니

손톱을 닳아 없앨 계획인가보다

재무관은 꿀밤을 때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결국 권위주의와 평등주의 사이의 파벌 싸움이야

양쪽과 상관없는 나비제국에겐 참전 명분이 없어

우방인 너희가 참전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입할 수는 없지"

순간 지구 제독이 손톱 손질을 멈췄다

행동을 멈춘 채 침묵을 유지하는 인간의 모습에

재무관은 더더욱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모든 감각이 인간의 행동으로 집중된 덕에

재무관은 이어지는 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참전 안 하는 대신 너희 이름 팔아도 되지?"

처음 던지는 제안은 미끼

다음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게 하기 위한 함정

그러니 아마 이것이 애초에 계획한 바일 것이다

나비제국의 재무관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구 제독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이름 팔아서 권위주의 애들 꼬셔보려고!

나비도 황제 국가라 권위주의 국가들 사이에선

이름값이 좀 있잖아"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렇게 가벼울 내용일 리가 없다

참전을 미끼로 던진 것을 기억하자

아마 지구 국제 연합에게 큰 이익을 가져오는 행동일 것이다

'이름을 판다'의 의미가 확실해질 때까지 속단은 금물이다

재무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한데?

제독, 우리가 참전하지 못하는 건 미안하지만”

“맞다 저 아이 왠지 위대한 칸이랑 닮았더라?”

“응! 당연히 우리 이름 열심히 팔아도 돼! 헐값이야!

우리는 은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우방이니까!”

제독은 그럴 줄 알았다며 손뼉을 치고 까르륵 웃었다

재무관도 티 없이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덕분에 재무관의 입에서 슬며시 나온 짧은 속삭임은

아무도 모르게 공기 중으로 흩어질 수 있었다

‘씨발’

*

“아 글쎄 지구 제독 고것이 나를 쥐잡듯이 잡았다니깐?!

지가 대통령이야 뭐야? 아주 그냥 무서워 죽겠어”

“그건 좀 아니다

너도 일개 제독한테 끌려다닐 자리는 아닌데”

“이제 보니까 인간만큼 무서운 게 없어!

연방이랑은 다를 줄 알았는데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닌다니까?

이럴수록 우리 평화주의 국가들이 정신 차려야 해!”

“하긴 은하 공동체의 균형이 인간들 쪽으로 쏠리긴 했지

특히 요즘 지국련은 연방의 악명을 은폐시키려 들기도 하고”

재무관이 흥분하며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그니깐 권위주의 연맹 같은 같잖은 소리 말고

사티렐리안 끼고 우리 셋끼리 평화주의 연대를 만들자니까?

지국련이랑 정면승부는 안되는 거 알잖아?”

제헤트마의 국왕 하라그마는 망설였다

“그렇지만 평등주의 파벌이 위협적이긴 한데”

재무관은 답답해하며 가슴을 쾅쾅 두드린다

“야, 내가 평등주의 파벌 관리법을 아는데

권력만 잡으면 분열하는 게 걔들 특징이야!

왕가의 권한 일부를 넘겨주고 물러나면

그 권력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충돌하기 시작할걸?”

“오 천천히 말해봐 메모 좀 하자”

“그러다가 권력투쟁이 격해지면 밀려나는 애들이

결국 왕실의 힘을 빌리러 접근하기 마련이야

이 때가 중요한데 대립 중인 가운데 캐스팅 보트 역할을-”

“너 제헤트 프라임 와서 특강할 생각 없니?”

물론 하라그마 역시 알고 있었던 간단한 전략이다

제헤트마 자치령은 오랜 옛날부터

왕족 중 가장 현명한 군주들을 선출하는 철인 군주정을 이어왔다

이번 대의 국왕인 하라그마 역시 뛰어난 지혜로 이름 높았다

하지만

이 분야의 권위자인 재무관의 충고를 듣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나비제국은 수많은 이민자로 인해 파벌들이 난립한다)

그리고 화가 잔뜩 난 나비제국의 실질적 지도자를 달래야하기에,

게다가 평화주의 연대 제안은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기에,

하라그마는 재무관을 칭찬하며 설명을 부추겼다

화가 어느정도 풀린 재무관은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유익하지? 너 이런 강의 다른 데서 못 듣는다?

그니까 이번 전쟁은 적당히 시늉만 하고 빠지렴

우리끼리 평화주의 모임 만들 준비나 하자고!”

*

“미나마르가 망하면 걔들이 독점하던

나비제국의 핵심 무역망은 누구 차지가 될까?"

지구 제독은 단도직입적으로

상대가 가장 관심있을 미끼를 던졌다

"그 요충지들을 하즈부잔한테 줄 수는 없고

괜찮은 무역 파트너가 있을텐데... 그렇지?”

제독의 말을 듣던 파충류는 별다른 표정 변화없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지국련이 어떻게

나비제국 무역망에 대한 접근 권한을 보장한단 말이죠?”

제독은 환하게 웃으며 재무관의 서신을 꺼냈다

“어머 그런 섭한 말을!

나비제국과 지구 국제 연합은

은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우방인걸?”

서신에 첨부된 미나마르의 핵심 지사 자료를 훑어본

오르비스의 CEO 쉐스 로르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뭐 계산기를 두드려볼 필요도 없군요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제독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근사한 새 집을 지으려면 헌 집을 허물어야 하지 않겠니?

벽돌 하나 남김없이”

*

“네 목적은 저번 전쟁에서 잃은 노동력 확충 맞지?”

“그렇다”

“위대한 칸 전쟁으로 친 제국에서 피난 온 난민들을

최대한 빠르게 귀환할 수 있도록 지원할게

싫다는 애들을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지만

귀환한다는 난민들 대상으로 여러 지원책을 보장하지”

“그래서?”

“록 반란국 보다는 미나마르 대도시 인구가 훨씬 많아

록은 독립 직후 전쟁 중이라 대부분 노동력이 군대에 집중되었지

반면 미나마르엔 다양한 직종들이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어”

“그렇군”

지아'주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그림자가 지구 제독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제는 날카로운 이빨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뛰어난 전사로 유명하다

전장에서 만나길 고대했는데 아쉽게 되었군 제독”

제독은 눈앞의 파충류를 노려보며 말했다

“보채지 마

계속 암시장에서 노예를 거래하면

조만간 전장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

"무슨 일입니까 나비핥기?"

"욘다림"

"...예?"

"욘다림"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욘다림 병신아 욘다림"

지구 제독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

연방의 대사는 이를 악물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화를 가라앉히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욘다림의 최정예 함대가 원정을 떠난 뒤

연방 내부에서도 욘다림 침공 계획이 나오곤 있었지만

이런 무례한 일을 겪고 나면

심사가 뒤틀리기 마련이다

대사는 연방의 욘다림 침공에 결사반대를 다짐했다

제일 기분 나쁜 건 인류 연방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지구 제독의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다는 점이다

'지국련이 인류 연방의 대사와 욘다림에 대해 논의함'

이 한 줄의 헤드라인을 은하 신문에 띄우는 것일테니

둥지에 가해진 위협에 다급해진 조류들은

최대한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하려 할 것이다

*

보시다시피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던 세키가하라 전투의 흐름엔

이런 내막이 자리 잡고 있었단다 응애!

"참전해서 멍때리다니 뭐 하는 거야!"

= 정부 체제 보장돼서 싸울 이유가 없어짐

"전장에서 배신하다니 비겁해!"

= 미나마르 멸망 시 모든 무역망을 넘겨받을 예정

"참전국들 의중도 모르는데 왜 성급하게 싸우니?"

= 배후 위협으로 단기 결전을 강요받음

"동맹을 약탈하다니 제정신이니?"

=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보가 시급

권위주의 군대의 행동이 어이가 없다고?

응애 별린이 나비제국 이야기

‘파벌싸움’ 편

끝이야!

함께해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