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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259-1337)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8.07 10:32:46
조회 1428 추천 13 댓글 1

1. 가스코뉴의 주권 (1259~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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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크고도 좋은 사무실은 궁전 북벽에 특별한 출입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여기에서 처리되는 까다로운 업무들이 고도의 평온함과 완벽한 칩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등법원 판사들이라고 부르는 언제나 깨어있는 노련한 인사들이 그들의 법정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법과 관습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들로 노련하고도 관대하게 소송들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적 선고를 벼락같이 내리친다. 이 선고들은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배석자들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신과 법에 대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백한 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함에 비례하여 고난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

-장 드 장덩 저, 홍용진 역, '파리 예찬', 1322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Kenneth Alan Fowler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직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봉건제'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이전까지는 카페 왕조의 권위가 일드프랑스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나 리처드 1세에게 감히 신하로서 신서를 하거나 부조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00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신서를 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대가로 2만 마르크를 바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 뒤 존 왕이 대륙 영토를 한방에 다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1259년 파리 조약으로 헨리 3세는 가스코뉴의 영토를 보장받는 대신 신서를 다시 시작했고, 그렇게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 땅의 영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몰수당했지만 가스코뉴의 일부 영토와 함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었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북쪽의 푸아투에 비하면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지만, 존 왕이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전부 잃은 뒤로 잉글랜드의 와인 수요를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다섯 개의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제하는 최요충지에 위치한 보르도 시는 바다를 통한 곡물 수입과 와인 수출에 의존하는 내륙 도시들의 목숨줄을 대놓고 쥐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들은 보르도 시민들의 충성심만 유지해도 지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면적은 100년 사이 3배까지 늘어났으며 가스코뉴에서 왕실이 얻은 수입은 1307년 17000파운드, 1324년 13000파운드로, 평시에 13000파운드 정도였던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과 비슷했다.


그러나 13세기와 14세기초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가스코뉴의 영지는 단지 평생에 한두 번 자존심을 굽히고 프랑스 왕에게 찾아가서 신서를 하는 것 이상의 가혹한 대가를 잉글랜드 왕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1270년대에 확립된 파리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가스코뉴인들은 프랑스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공작들(에드워드 1세는 전쟁을 제외하면 2년 머물렀고, 후대의 왕들은 백년전쟁에서 패배하고 가스코뉴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는 것도 아니라서 기회만 있으면 파리고등법원에 찔렀다. 프랑스 왕의 대관들이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될 때마다 보르도에 있는 공작의 정부는 마비되었고 권위에 손상을 입었으며 재정적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293년 보르도와 바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고, 프롱삭에서는 국왕의 세관원 4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한다.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에 대관들을 파견해서 폭동에 책임이 있는 도시 유력자들의 신병을 양도하라고 명령했고, 에드워드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파리로 소환했다.


에드워드가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자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완벽하게 속은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당연히 에드워드가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가스코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반란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주둔군을 쫓아냈는데,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 없이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03년 5월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이 전쟁에서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소모한 전비는 총 40만 파운드로, 공작 정부의 10년치 수입을 훨씬 상회했다. 필리프는 비록 에드워드를 상대로는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과 파리고등법원 관료들의 선전과 달리 프랑스군은 무적이 아니며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후대의 왕들에게 불안 요소를 남겨두었다.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중 누구도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가스코뉴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리고등법원이 항소를 수리하고 대관을 파견하고 반프랑스파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갔고 시간은 프랑스 편이었다. 1313년 보르도의 파산한 공작 정부는 필리프 4세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키텐의 '폭력, 약탈, 무정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323년 10월에는 내륙 개척지의 작은 마을인 생사르도스가 프랑스 왕의 특허를 받고 이주민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노동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 레몽 베르나르가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고 프랑스 왕의 대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리적 의심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모두 보르도의 공작 정부를 배후로 지목했고 샤를 4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책임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에드워드와 그의 무능한 정부 고문들이 외교적 대응이건 전쟁 준비건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1324년 7월 공작위 몰수 선언과 함께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아키텐 공작의 영토는 가스코뉴 서부 해안의 얇은 면으로 축소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결국 항복하고 1325년 8월 이자벨 왕비와 열두 살 된 어린 아들 에드워드를 파리로 보내서 샤를 4세에게 신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 왕비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애인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프랑스에서 모집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잇따른 실정으로 런던시를 포함해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던 에드워드 2세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퇴위당한 뒤 1327년 9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한다.




2. 프랑스 왕위 계승권 (1328~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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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스스로 프랑스의 왕이라고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바빌론의 술탄이나 천국의 왕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로체스터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 (Historia Roffensis: BL, Cotton MS Faustina B.V, fol.88)


많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실제로 프랑스 왕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테일러가 말했듯, '왕위에 대한 주장은 백년전쟁 시기 동안 잉글랜드에게 부차적인 목표였으며, 본질은 대륙 영토의 확장과 그 땅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 종식을 위한 협상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Gwilym Dodd, 'English Politics and the Hundred Years War'



왕위 계승권 문제는 1328년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직계 없이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샤를의 뒤를 이을 후보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살리카법은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에드워드의 계승권이 높다고 볼 수 있었지만, 굳이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귀족들이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외국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30년 가까이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과 대립했고 프랑스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거나 점령하기도 했다. 어머니인 이자벨은 왕족이지만 특유의 성격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인망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악명만 넘쳤다.


반면에 발루아의 필리프는 프랑스의 대귀족으로서 프랑스 귀족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으며, 카페 왕조 말기의 위기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했던 리더로써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 샤를의 후광을 입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발루아의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고, 샤를 4세의 유복자를 임신한 왕비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즉시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이자벨 왕대비가 보낸 사절단은 프랑스에 발을 딛자마자 잉글랜드로 쫓겨났으며, 그녀와 달리 프랑스에서의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1329년 9월 프랑스를 방문해 아키텐 공작으로서 필리프에게 신서를 함으로써 그를 프랑스 왕으로는 인정했지만,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그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이자벨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한 이 어설픈 반항에 대해 필리프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필리프는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이번에는 진짜로 가스코뉴를 완전히 상실할 위험에 처한다. 결국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고 모후 이자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멈추기 위해 이듬해 4월 신서를 다시 함으로써 필리프를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필리프는 에드워드의 아버지(2세)는 명백히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과거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올해 초의 군사원정으로 에드워드가 입은 피해는 배상하겠다고 관대하게 제안했으며,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이듬해 호아나 2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태어나면서 에드워드의 계승권은 법적으로도 근거가 미약해졌다. 그렇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문제는 해결되는 듯 보였다.




3. 스코틀랜드 침공 (1332~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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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경이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민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아브로스 선언, 1320년



이런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331년부터 십자군을 준비한다. 목적지인 레반트의 도시들에 첩자들이 파견되었고, 왕실 기술자는 공성무기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출항일이 1336년 8월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1332년 8월 11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주장자 에드워드 발리올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다섯 배가 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9월 24일 스콘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못 가서 발리올은 휴전 조약을 맺고 방심한 틈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를 끝장낼 기회로 여기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발리올과 그의 동맹인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로우랜드를 장악하자 어린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한편 필리프의 매제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부터 아르투아 백작위를 빼앗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는데, 에드워드는 1334년 봄에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활한 음모가인 로베르가 어린 에드워드를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가설은 나중에 잉글랜드로도 건너와 후대의 잉글랜드 작가들에게 수용된다.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주요 동맹국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인 잉글랜드 왕을 뒤에 남겨두고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는 생사르도스 전쟁으로 몰수된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다는, 스코틀랜드만 제외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왕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거부한다. 그는 아직 십자군 왕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에게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고 영불해협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의 활동을 허가하는 등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의 지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1334년 8월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발리올이 또다시 쫓겨났다. 에드워드도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는 시테 왕궁에 모인 관료들 앞에서 선대 왕들이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 조약을 언급하며 스코틀랜드에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6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어쩌면 스코틀랜드가 다시 침공당한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가 중병에 걸려 쓰러진 일을 신이 내린 벌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8월에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필리프가 누구의 편인지는 분명해졌고, 정부의 지령을 받는 잉글랜드의 교구 사제들은 미사 시간마다 '스코틀랜드의 배후에 있는 외국 동맹군'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공동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지만,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필리프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 2세는 결국 발리올과 에드워드 3세 측이 제안한 모든 협상안을 거부했고, 1336년 4월 에드워드는 휴전 기간이 끝나는 즉시 스코틀랜드를 재침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파견한 중재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교황은 필리프에게 십자군을 취소할 것을 제안했다.




4. 가스코뉴 침공과 영독동맹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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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불태우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와 그의 동맹인 저지대 군주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 저지대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13세기부터 이미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해 있었다. 직물 산업이 발전한 브라반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전부 넓은 영토에 비해 생산력은 낮고 인구도 적은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했으므로 감히 프랑스 왕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었고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다른 공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적인 동기 외에도 독일의 귀족들 중에는 필리프 6세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훗날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처럼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의 궁정 문화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


브라반트 공국은 1278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아키텐 공작위 몰수로 시작된 전쟁이 필리프 4세의 판정승으로 끝나자 1303년부터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켰다. 에노 백작 기욤은 심지어 에드워드 3세의 장인이었지만 1328년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카셀 전투에도 참전했다. 캉브레 주교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아 주교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1330년대 초부터 저지대 지역 전체가 왕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상서성(Chancery) 관료들의 급발진은 프랑스에 호의적인 군주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1337년 2월 필리프가 프랑스와 저지대 공국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하자 불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명목상 봉신인 캉브레 주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주교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저지대의 군주들은 필리프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공국에 간섭할 빌미를 주기는 싫었으므로 대신 프랑스 왕의 맹렬한 적이자 에노 백작의 사위인 잉글랜드 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편 에드워드는 1337년 초까지만 해도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할 계획이었지만, 의회는 언제라도 잉글랜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그렇게 멀리 떠나있으면 위급할 때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렇게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1337년 8월 발랑시엔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된 사절단이 저지대 군주들과 독일 황제가 동맹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왕의 고문들은 과거 에드워드 1세가 독일인들에게 당한 배신을 상기하며 그들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에드워드는 무시했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며 곧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에 상륙해서 11월 30일까지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전비 조달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지연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기는 했지만 당장 영불해협을 넘나드는 함대를 어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에게 20만 파운드를 바치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이 지연되면서 12월부터는 에드워드가 독일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27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해 의회에서 승인된 약 5만 파운드의 전쟁세는 전부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에드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양모에 부과된 관세뿐이었다. 양모 관세 수입은 평시에는 13000파운드였지만 에드워드 1세 시절에 이미 의회의 승인을 받고 6배까지 늘린 전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완벽한 계획이 준비돼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 전역에서 양모 3만 자루를 최저 가격으로 징발한 뒤, 작년의 수출금지령으로 가격이 폭등한 양모를 왕실과 계약을 맺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지대 도시들에 가져가 비싸게 팔아넘기며, 그 수익의 절반을 챙기는 대가로 20만 파운드가 마련되는 즉시 왕에게 대출한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간편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잉글랜드 농촌의 소작농들과 지주들은 조금 낮은 가격이지만 양모값을 받고, 무역상들은 큰 이익을 얻으며, 외국인들만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민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 양모 징발과 운송이 지연되자, 조급해진 왕실 관료들은 저지대에 양모 1만 자루가 도착한 즉시 모든 양모를 거둬서 현지 상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당장 필요한 27만 파운드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대부분 그저 행정 실무를 익힌 법학자나 신학자들이라 상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호구만 잡히고 4만 파운드밖에 못 벌었다. 수출금지령 이전 저지대에서 잉글랜드 양모 시세는 자루당 6에서 10파운드 사이였으니 최젓값도 못 받은 것이다.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면서 남은 2만 자루를 받지도 못하게 됐고 정부의 신용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필리프는 독일에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이나 프랑스 북부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했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최신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337년 9월 프랑스 정부 고문들은 11월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라 확신했고, 분노한 왕과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군사를 소집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7월부터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이제야 간신히 보르도 포위전을 시작한 프랑스 남부군은 북부 전선에서 왕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군한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대담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에드워드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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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백년전쟁 관련 다큐나 교양프로들 보는데

하나같이 그냥 깊이가 얕은 수준이 아니라 정말 너무할 정도로 맞는 말이 하나도 없어서 씀.


과장 안 하고 개론서 목차만 읽고 키워드에서 떠오르는 인상만으로 상상해서 배경과 사건의 맥락을 짜맞추는 느낌임.


가스코뉴 수입이 잉글랜드 전체 조세 수입보다 많았다는 얘긴 검색해보니까 뭔 와인 역사 칼럼이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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