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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사 출신의 한국인 독립운동가
일본 육사 출신의 대다수 한국인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지만몇 명은 독립운동을 하여 제외되었다.1. 노백린 (11기)일본 육사 11기로 졸업했다.일본 육사 11기는 한국인이 21명이나 졸업을 하여 졸업자가 가장 많은 기수이기도 하다.11기는 김홍집 내각 시절에 수립된 정책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아관파천 이후에 냉대를 받았다.노백린, 윤치성, 임재덕, 어담, 김성은, 김규복 6명이 먼저 귀국하여 청원을 냈다.민영환이 고종에게 이들을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채용하자고 하여 취직에 성공한다.(일본에 잔류했던 11기 15명은 쿠데타 음모인 혁명일심회 사건을 일으켰다.)노백린은 11기에서 성격이 가장 괄괄하여무관학교에서 선배 장교들과 가장 많이 충돌했고 무관학도(생도)들에겐 호랑이 교관으로 기억되었다.당시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교육을 받은 교관들과일본 유학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교장인 이학균은 친러파(프랑스와도 밀접했다)로 분류되었음에도 일본 육사 출신들이 무관학교를 일본 스타일로 바꾸는 걸 허용해주었다.러시아군사고문단의 교육기간이 짧고 러시아 사관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한 것도 아니라서,아무래도 교육 시스템의 깊이가 얕을 수 밖에 없어서 일본 유학파들을 등용한 것으로 보인다.후일담) 이학균은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의 체포대상이었고 프랑스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용익, 현상건과 함께 활동하다가 1909년에 상해 일본인 감옥에서 죽었다.이후 노백린은 쾌속 진급해서 보병 정령까지 도달했다.동기 중에 보병은 노백린, 포병은 어담이 가장 빨랐다. (김성은이 1906년에 죽지 않았다면 공병 정령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노백린은 군대 해산 이후에도 군부에 잔존했지만1907년 군대 해산으로 1400명에 육박하던 장교단이 90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현실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1908년에 제대했다.(1909년에 3차 군축으로 군부가 친위부로 축소되면서 장교단은 40명대로 줄었다)이때 아래의 이갑, 유동열과 함께 민간에서 사업이나 정치 활동을 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2. 이갑 (15기)일본 육사 15기는 8명이 졸업했다.이갑은 1907년 고종 퇴위 당시에 군부대신 이병무(7기)와 대립하여 임재덕(15기), 이희두(8기) 등과 면직되었다.하지만 일본 육사에서 공부했다는 배경 때문에 일본 쪽의 군맥도 상당히 있었다.이병무 혼자만 일본 쪽에 라인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그래서 이들은 사면되어 복직하였고 군대 해산에서도 빠졌다.이 과정에서 이희두는 친일로 전향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고, 임재덕은 뭔가 정황은 있는데 상충되는 기록들이 있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이갑은 위의 노백린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전역하여 사업도 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무관학교 학도였던 이응준(26기, 뒤의 한국 초대 육참총장)을 챙겨줬고, 이응준은 그래서 이갑의 딸과 결혼하였다.사위라곤 하지만 이응준은 1890년생, 이갑은 1877년생으로 13살 차이 밖에 안 난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3. 유동열 (15기)이갑과 같은 15기로 기병 장교였다.러일전쟁에 일본군으로 참전했다.노백린을 따라 비슷한 시기에 군문을 나섰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광복 후에 미군정의 통위부장(국방부장관)을 지내며 광복군 출신의 입대를 독려했다.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의 엘리트였던 유동열과새롭게 형성된 육군 초급 장교 사이엔 인식 차이가 커서 봉건적인 인물로 회고되곤 한다.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가던 중에 죽었다.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4. 김경천 (23기)23기는 한국인 졸업자가 김경천 혼자 밖에 없다.11기와 15기에서 대거 입학한 뒤 육군무관학교가 돌아가면서 굳이 일본에 유학을 보낼 수요가 줄어들었다.(육군무관학교에서 나온 장교가 600명에 달했다)김경천은 아버지가 군기창장인 김정우(공병 부령)로 그런 상황에 일본 관비 유학 기회를 잡게 되었다.큰형인 김성은은 일본 육사 11기로 유학했다.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빠 찬스가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하지만 교련병대나 연무공원 같은 근대 군부대도 그렇고 일본 육사 유학생들도 보면 대체로 무관이나 관료들의 추천제로 돌아가는 곳이 많아 김경천이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김경천은 일본군 장교로 임관한 뒤에 후배인 지청천과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유동열이나 지청천이 중국 지역에서 계속 지낸 것과 달리 러시아 지역에 있었고,스탈린의 대숙청 등을 겪으며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소련이 붕괴하면서 드디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간 후손들과 연락이 닿으면서 연구가 진전되었다.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육군무관학교의 1907, 1908년 입학자들이 1910년에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에서 찍은 사진)육군무관학교는 1900년 2회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1907년까지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1900년대 초중반에 참위가 수백 명이 나오면서 장교 과잉 공급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아마도 장차 징병제 전환 가능성에 대비해 초급 장교단을 예비했을 가능성도 있는데,1904년 러일전쟁 후에 일본이 원수부를 폐지하고 군제의정소를 설치하여1905년에 1차 군축을 하면서 친위대가 폐지되고 진위대가 16개 대대(서류상 18개 대대)에서 7개 대대로 축소되었다.무관학교는 다시 입학생을 모집하여 군대 해산이 일어나는 1907년에 25명,다음 해인 1908년에 25명을 받아들였다.1909년에 무관학교가 폐지되면서 이들은 일본에 위탁 교육을 보냈다.2학년이 일본 육사 26기, 1학년이 일본 육사 27기로 입학하게 되었다.아래는 그 26기와 27기 독립운동가들이다.5. 지청천 (26기)지청천은 26기로 졸업했고, 1차 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칭다오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26기의 한국인 졸업자는 13명이다.3.1 운동 뒤에 위의 선배인 김경천과 함께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광복군 총사령을 지냈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무임소장관, 1,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6. 조철호 (26기)무관학교와 일본 육사 26기를 거쳤다.한국 보이스카우트의 초기 중요 인물이기도 하다.지청천이나 김경천 보다 먼저 망명을 시도했다가 체포되었다가 일본 육사 은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이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등 활동했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7. 이종혁 (27기)190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고 일본으로 가서 육사 27기로 임관했다.27기의 한국인 졸업자는 20명이다.일본의 시베리아 침공 당시에 일본군 장교로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친구인 유봉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 한국인 게릴라를 처형하는 임무를 하달받았는데, 이 게릴라에게 조선인이 왜놈 군복을 입고 그러고 있냐고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이 사건이 충격이 되었는지 망명하여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28년에 봉천 지역에서 한국인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일본군으로 유공자였기 때문에 일본 쪽에서 전향을 제안했으나 거절하였고출옥 후에 후유증으로 1년만에 죽었다.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8. 이동훈 (27기)이종혁과 마찬가지로 27기이다. 1919년에 3.1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1920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일본군 위관급 이상의 장교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기본 수록이다)뒤늦게 독립운동을 한 게 알려져 삭제되었다.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번외1) 김희선 (11기)노백린과 일본 육사 11기 동기이다.병과는 기병이었다.11기의 쿠데타 음모인 혁명일심회 사건과 관련되었다.러일전쟁 후에 사면되었고 그래서 계급은 노백린, 어담 등에 비해 낮았다.군대해산 당시에 정위였다. 이후 군문을 나와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귀국하여 친일로 전향해 군수 등을 지냈다.그러다 3.1 운동 이후에 다시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군무처장을 지냈다.이 공로로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는데,그 뒤에 다시 친일로 전향했단 게 확인되어 1996년에 취소되었다.번외2) 임재덕 (11기)[사진 없음]위의 노백린, 김희선과 같은 11기로 고종 퇴위 당시에 이병무의 헌병에 맞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 뒤 체포되었는데, 일본 육사 출신이랑 배경 덕분에 이희두, 이갑 등과 함께 다시 복직되었다.1908년부터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 상대로 심리전을 펼치는 경찰로 나타나 전향한 것으로 추정된다.근데 1910년대에 무장 독립 투쟁에 참여했단 일본 연구자의 자료도 있고 그렇다.1931년에 국내에서 만몽 지역의 조선인 동포를 후원하는 관변 모임 등에 위원으로 참여한 걸로 볼 때친일파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이지만 친일인명사전엔 이름이 없다.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적도 없다.
작성자 : 미화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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