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 전이다. 내가 퇴물 취급 받던 구닥다리 GTX 1070ti을 쓰던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용던에 가서 눈팅이나 할 생각이었다. 용산전자상가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MSI’라 쓰여 있는 조그마한 입간판을 놓고 그래픽카드를 깎아 파는 용팔이가 있었다. 마침 그래픽카드나 3080으로 바꿔 볼 생각에 하나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그래픽카드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아수스나 쓰시구랴."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거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용팔이는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박스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리뷰랍시고 껍데기만 보여 준다. 그러면서 내일 다시 오란다. 아직 물량이 부족하다나 뭐라나.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물건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용팔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용팔이는 태연히 허리를 펴고 용던 옥상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전문가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그 용팔이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미쳤냐고 야단이다. 699달러 짜리를 160에 사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트리오이니 저가형보다야 낫겠지 했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번 터프가 20페이즈에 99만원으로 나온 것에 비해 트리오는 16페이즈에 160만원이나 받아처먹는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그 노인의 처사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인텔 CPU는 혹 CPU를 탈착하려면 걸쇠가 꽉 물고 늘어져서 쿨러만 깔끔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요새 AMD CPU는 써멀이 한 번 CPU랑 딱 붙으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메인보드에 캐패시터를 붙일 때, 질 좋은 솔리드 캐패시터를 잘 박아서 은납으로 땜질한 후에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기를 12번 한 뒤에 비로소 밀봉 포장한다. 이것을 12페이즈(Phase) 전원부라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전해 캐패시터로 때운다. 가격은 싸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오버클럭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값비싼 캐패시터 박을 회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케이스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케이스를 사면 오직 내구성과 확장성만을 신경쓰고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그저 잼민이들과 인싸들 만을 위한 강화유리와 RGB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고 싸다, 그러나 든든하지가 못하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명품을 만들어 냈다.
이 트리오란 물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으리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지. 나는 그 용팔이에게 낚인 것 같은 치욕감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장사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듯한 용팔이가 이따위 물건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것들을 등쳐먹는 세상에, 예전처럼 아름다운 물건이 나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노인을 찾으러 용던으로 갔다. 웬일로 입구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길바닥이 온통 버려진 찌라시로 가득했다.
‘ASUS 유통사 인텍앤컴퍼니, 용산 전자상가 업자들과 계약 파기'
'기가바이트와 이엠텍 등도 3080 하이마트 등 오픈마켓으로 직접 판매'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읽던 찌라시를 손에 움켜쥐고 노인을 찾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여 가며 겨우 인파 속을 헤치고 들어온 끝에, 마침내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많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의도로 노인들 찾아온 듯했다.
나는 찌라시를 꺼내어 용팔이의 면상 앞에 디밀었다.
“주인장, 이게 어찌 된 거요?”
“그것은 경쟁사에서 의도적으로 뿌린 찌라시에 불과하오. 안심하시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심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완성해 준다던 트리오는 어디에 있소? 얼른 내 주시오.”
“쿠팡 때문에 물량이 충분하지 않으니, 다음번에 다시 찾아오시오.”
그렇게 기다렸건만, 또 다시 찾아오라니.
이 노인은 나를 시간이 남아돌아 집구석에서 방바닥이나 긁는 백수쯤으로 아는 모양이다.
“이미 다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요? 얼른 내 놓으란 말이오.”
“지금은 곤란하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농락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니었다.
“됐소.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이다. 그냥 안 살 테니 물건 값이나 돌려주시오.”
노인은 한사코 안 된다고 하더니 결국 가격을 124만원까지 깎았으나, 터프는 99만원이란 것을 상기시켜 주었더니, 비로소 돈을 물려 주었다.
“내 이 돈이면 스트릭스를 지르고도 남을 것을, 저런 노친네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나는 그 노인과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쿠팡으로 가서 대뜸 터프를 질러 버렸다.
집에 돌아가서 물건을 보여 주니 아내도 화색을 띠었다. 용팔이가 득세하던 시절은 이미 옛 일이라나.
보름 후, 서울에 다시 올라갈 일이 있어 상경하는 길로 용던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용팔이가 앉았던 자리에 용팔이는 있지 아니했다.
전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용팔이가 앉았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왠지 모두 흥분하고 기쁜 듯 보였다.
아마도 비난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혹은 안 되겠다 싶어 판을 접고 날랐는지는 몰라도, 축제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맞은편 용산전자상가 옥상을 바라보았다. 짙게 선팅한 창문들 사이로 용팔이들의 절망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무심히 '하기실음관두등가(河己失音官頭登可') 라는 이사(理事)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손주녀석이 컴퓨터로 열심히 총질을 하고 있었다. 전에 친구들과 카스를 하던 생각이 난다.
용팔이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즘은 CPU와 메인보드 마저 쿠팡 로켓배송이 대세라고 한다.
"손님 맞을래요"이니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발언들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3년 전 트리오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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