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연휴기간에 느긋하게 감평이나 쓰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생각 외로 플스 트로피 따는 일이 빡세서 이틀을 완전히 날려버린 터라, 벼락치기로 부랴부랴 감평을 작성해왔습니다.
우선 참가작인 11작품의 감평을 먼저... 주최자님의 작품은 죄송하지만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얼핏 훑어보니 필요로 하는 배경지식이 꽤 되었던 관계로 구글을 켜두고 정독해야 하는 터라....ㅠㅠ 주최자님의 작품 감평은 추후에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제가 어려웠던만큼, 전반적으로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개개인이 선호하는 글의 취향도, 그리고 구성이나 문체의 단점도 이번 대회만큼 명확히 부각되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감평을 진행하면서 저도 전개나 묘사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여러번 돌아보게 만들더군요. 역시 시험도, 이런 대회도 어려울수록 변별력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는 걸 보니, 다음 모팬대는 어떤 불맛을 보여주실지 걱정 반 기대 반 싱숭생숭한 마음이네요.
주최자님의 작품은 늦어도 내일 중으로 감평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밤 씹고뜯고맛보고즐기며 작품을 100% 이해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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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들이 사나에 - 안돼요시키님
전체적인 플롯은 사나에가 모리야의 무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 동기와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모티브는 아마도 1번? 눈앞에서 펼쳐지는 탄막의 향연과 레이무의 현란한 움직임이 마치 퉁구스카의 대폭발처럼 사나에의 기억 속에 큰 임팩트를 남긴 것 같네요. 좀 더 개연성 있게 사건을 연결하고 모티브와의 관계를 부각시켜 주었다면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코의 존재라던가, 사나에의 부모와의 갈등, 텐시의 등장 등 길지 않은 글에서 많은 부분이 미해결 떡밥으로 남아있다보니 전반적으로 글에 몰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원리나 속마음, 작품의 의도 등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좀 더 친절히 풀어써주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계곡의 인간들 - NANNDA
환상향에 입주할 자격이 되는 건 어떤 존재들일까요. 잊혀진 존재 모두 라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잊혀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묘사에 따르면 향림당엔 잊혀진 구세대 가전기기들이 잔뜩 쌓여있지만 마을에서 그걸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진 않고, 동물이나 민족, 문명 중에서도 잊혀진 것들이 꽤 될텐데 말이지요. 환상향에서 잊혀진 자라고 함은 말 그대로 진실이라 믿어졌다가 거짓으로 부정된 존재들에 한정된 것이 아닐까요? 가전기기, 고대인, 멸종 동물 그런 것들은 존재가 잊혀졌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존재했다,라고 모두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 작품에선 전반적으로 환상향의 배타적인 모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위해가 되고, 요괴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죠. 하지만 여기서 저는 위와 같은 이유로 환상향의 결정이 어느정도 정당성이 있었다고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스스로들이 잊혀진 존재라 생각하여 환상향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현세에 대가 끊겼다고 믿어지는 존재들, 요괴나 신 처럼 그 존재가 부정당하고 처음부터 환상 취급당한 것은 아니었죠. 네안데르탈인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면 과연 세상이 그들을 부정할까요? 아닙니다. 비록 연구대상이 되거나 매스컴의 노예가 되거나 하는 결말이 있을 지언정 그들의 존재는 엄연히 바깥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받아들여질겁니다. 환상향의 다른 존재들과는 확연히 다른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인류 진화의 링크를 지워버리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진화과정에 대해 의문을 품고 궁금해 하는 건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 귀중한 과학적 증거가 되든 무엇이 되었든 요괴나 신들에게 있어선 환상인 척 하는 불청객에 불과할 뿐일 겁니다. 어찌보면 환상향에서 배척받는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이 요괴나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요괴 입장에선 고기에 불과한 것들이니
쉴드는 이쯤 하고, 환상-잊혀진 자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쭉 적은 것처럼 인간이나 사나에의 입장이 아닌, 환상향의 입장에서 고대인의 존재와 그들의 처우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밤하늘 - ㅇㅇ(175.195)
마리사가 마법사를 동경하게 된 계기를 풀어낸 짧은 글입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현재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설정은 사나에를 다룬 첫번째 작품과 비슷하네요. 소설 전반적으로 동화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상상해 봅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보는 형형색색의 밤하늘을, 그 한가운데를 날아가는 멋있는 마법사의 모습을. 문득 어릴 때 여의나루에서 보았던 불꽃 축제가 생각나네요. 차는 끊기고 밤은 춥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것 같았지만 그런 기억은 다 희석되고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장관만이 기억에 남아 예술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죠. 마리사의 기분은 그 이상이 아니었을까요. 사족이지만, 어린 시절에 접한 경험이 평생의 취향이나 진로를 좌우하는 일은 꽤 흔하다고 합니다. 케이네 같은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서 희석되고 잊혀져가지만, 한 번 받은 충격은 무의식의 영역까지 새겨져 무슨 짓을 해도 떨쳐낼 수 없지요.
모처럼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 훈훈한 작품이었습니다. 마리사가 마법사가 되기로 한 이유가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져요. 나도 마리사처럼 어린 시절 동경했던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도 들더군요. 아무리 봐도 현실과 타협한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 집안도 직장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오롯이 걸어가는 마리사가 참 대견스럽습니다. 그리고 부럽기도 하고요.
깨끗하고 올바른 신문 - 사나에양
그것이 알고 싶다 처럼,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서 모습을 감춘 텐구의 존재에 관해 파헤치는 바깥세계 인간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요괴들이나 신들의 존재가 인간사회의 뒷면에서 암암리에 인간사회를 조종하고 있었다-라는 설정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현대시대 요괴가 등장하는 많은 작품들 (누라리횬의 손자 등)에서도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고요. 순수히 인간의 역사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환상이 떠받쳐주었기에 생길 수 있었던 거라면 흥미롭지 않나요. 부처님의 손바닥 위에 놓인 손오공처럼, 환상을 과학으로 밝혀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우리의 발버둥도 환상이 만들어낸 테두리 안에 갇혀있었다는 뜻이 되니까요. 텐구들이 암암리에 세상을 조종하는 단계까진 아니지만 우리 곁에 늘 있어왔다는 설정은 흥미로웠습니다. 4의 벽을 넘어 동방프로젝트라는 작품이 망상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도요. 전달하고자 하는 스케일은 크지만 글의 구성과 볼륨이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군요. 좀 더 풍성한 내용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인간선언 - ㅇㅇ(1.218)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는 것 같은 걸출한 미스테리 풍미의 팬픽이었습니다. 세밀하면서 지성이 넘쳐흐르는 문장표현과 묘사는 물론이요, 작품 후반부까지 끝까지 주인공 달토끼의 시선으로만 사건을 바라보게 하면서 진실을 감추는 구성 또한 읽는 내내 시선을 떼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작품 초반에 제시된 사건의 진상이 정말 진실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이 섞여들어간 것일까, 우동게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추리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달토끼들의 모습이 현대 종교단체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자신들 내에서 공유하는 지식과 경험을 진리라 받아들여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배신자, 사기꾼, 거짓 선지자 등으로 몰아가며 배척하는 행위는 정말 뉴스에 종종 나오는 모 단체와 비슷한 인상을 주더군요. 자신들은 우월하며 그 외는 전부 우매하다라는 선민사상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들에게 동조하여 일을 그르칠뻔한 우사미나, 실제로 그르친 마리사의 경우엔 사이비에게 희생된 2차 피해자라고 봐야겠죠. 비판하는 이도 의심하는 이도 없는 집단은 썩은물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안에선 진실이란 단어가 소용없다는것이 그들의 답답터지는 행동으로부터 확실히 전해졌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맡은 캐릭터는 그동안의 오해를 풀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데, 우동게는 그러지 못했네요. 배신자여서, 진실을 감추어서,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린치를 당한 데는 달토끼들이 그동안 믿어온 진실과 그를 기반으로 구축된 사회를 산산히 부숴놓은데 대한 원망이 컸었겠죠. 인간이나 달토끼나, 결국 다름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목숨을 건져 속죄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으니 해피엔딩...이라고 봐야할까요? 뒤늦게라도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동참한 주인공 달토끼의 개과천선한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작가님의 필력이 경이로운 수준이어서 여기서 이런 어휘를 쓸 수 있었구나. 이렇게 내래이션을 깔 수도 있었구나 하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습니다.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진 오케스트라, 형형색색의 물감을 사용한 프레스코 벽화라는 감상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느낌의, 예술적인 팬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단점도 눈에 확 띄게 다가오더군요. 예술적인 표현에 가려졌지만 대사나 화자 구분이 불분명한 부분이 꽤 있어 가독성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악장 구분없이 논스톱으로 이어지면 청자는 혼란스러워하기 마련이죠. 챕터 구성은 좋았으나 세밀한 단락 구분이 아쉬웠었습니다. 또 작품의 메인 빌런 중 하나였던 마리사와 얽힌 갈등 해결에 대해, 챕터 초반부터 떡밥을 쭉 깔아온 것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해결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달토끼 교단에 세뇌되어 광인이 되어버린 마리사를 어떻게 되돌려 놓나도 하나의 기댓거리였는데 우사미의 눈물어린 설득 한 줄로 끝나버리다니... 플롯 상 그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 두 가지만 빼면 충분히 이번 대회의 우승후보라고 생각되는 명작이었습니다.
마음의 지동설 - 장기짝
팬픽대회 고정 참가자들을 보면 각각의 선호장르나 취향이 글에 명백히 드러나더군요. 이 작품도, 변함없는 작가님의 비봉사랑이 듬뿍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너무 달달해서 충치가 생기는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더군요. 세상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건 태양을 중심으로 돌건 상관없어, 내 마음의 중심은 렌코 하나 뿐이야! 하는 메리라니, 이 어찌나 로맨틱한지. 극중 배경인 꿈만큼 몽실몽실하면서 포근한 내용이었습니다. 티피톱에 대해서 다른 분들은 안쪽에서 무언가 뒤틀려 있어도 어찌어찌 겉으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외부인과 내부인의 감상이 다른 모순적인 현상에 대해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는데 비해 이 작품은 심플하게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티피톱의 일관성 있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셨군요. 단순히 현상 그 자체를 모티브 삼다니, 단순명료한 글의 주제 및 내용과 잘 매치되는 해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달달한 백합물에서 모순이나 과학적인 원리를 파고들어갔다면 내용이 괜히 복잡해졌을 거에요. 쳐낼 건 쳐내고 중요한 뼈대만 살려낸 깔끔하고 담백한 작품이었습니다.
AMANOJAKU in Underland - 잉딱
지상과 모든것이 반대되는 지저세계. 다툼도 거짓도 지배관계도 없는 어찌보면 낙원과 같은 곳을 탐방하는 세이자의 이야기입니다. 지상은 팽이의 윗부분, 지저는 팽이의 아랫부분을 상징하는 것 같군요. 한 방향으로 돌다보면 서로의 입장에선 (각각이 머리가 된다고 했을 때) 정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지만, 결과적으론 이런 상반되는 구성이 팽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돌게 해줍니다. 서로 정 반대인 지상과 지저의 모습 또한 환상향을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겠지요.
보면서 어새신 크리드의 팔라딘과 암살단이 떠오르는 구성이었습니다. 지상은 비록 다툼과 혼란이 끊이지 않지만 모두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며 자유롭게 힘을 펼치고, 그 결과에 따라 승복하며 살아가죠. 그에 비해 지저는 질서가 잡혀있고 분쟁따윈 없어 보이지만, 그 위엔 모두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절대적인 통솔자가 군림해있습니다. 지상의 모습은 암살단, 지저의 모습은 팔라딘의 사상과 비슷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로 대립하는 입장이 아니라 환상향의 절대적인 질서를 위해 공존하는 입장이라는 점일까요.
아무튼, 지저는 지상의 상반되는, 세이자가 그토록 원하는 뒤집힌 세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세이자는 적응하지 못하죠. 이 선의에는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다, 이들은 나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의 행동에 의심을 품으며 흠잡을 건수를 찾아내죠. 결국 이 모든 질서가 사토리 한 명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이자는 옳다구나 하면서 자신의 음모론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스스로 뒤집힌 세계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낳고 말죠. 이미 지상의 모습에서 뒤집힌 세계였기 때문에 세이자 같은 뒤집는 존재가 필요 없었던 것인데... 하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아마노자쿠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처음 팬픽대회에 제출한 작품 중에 똑같이 세이자의 사상을 다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세이자가 진정 원하는 것은 평등사회도, 약자의 유토피아도 아닌, 그저 사회가 흔들리며 야기되는 혼란이라는 주장을 했었습니다. 이 작품 속 세이자도 그와 비슷한 입장이 아닐까요? 이상 사회의 구축은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타인의 원망을 먹고 사는 아마노자쿠의 특성상, 낙원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티끌만큼의 오점을 잡아 물고 늘어지며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이자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티피톱으로 비유하면 팽이의 위든 아래든 회전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홀로 역방향으로 돌고 있는 녀석이 아마노자쿠인거죠. 위상이 변해도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도는 티피톱, 그리고 언제나 옳지 못한 방향으로 도는 아마노자쿠. 지상과 지저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세이자의 모습을 통해 아마노자쿠의 의의를 제대로 나타내주셨네요. 내츄럴 본 트롤러 세이자의 팬으로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세이자는 혁명가보단 테러리스트의 이미지가 더 어울려요.
돌과 종이와 아이패드 Pro가 전한다 - 패드쟝
참신한 구성의 작품이었습니다. 공문, 장부, 일기 등을 통해 스토리를 전개하고 독자는 조각난 퍼즐을 맞춤으로서 스토리의 전체적인 구성을 파악한다니,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전개 방식을 매우 유용하게 써먹는 장르가 하나 있죠. 바로 게임입니다. 라스트오브어스, 바이오하자드, 이블위딘, 등등등 요즘 나오는 액션 게임이라면 하나같이 게임 내에서 세계관을 파악하게 해주는 문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죠. 게임 내 숨어있는 이 문서들을 찾으면서 세상이 요지경이 된 원인을 파악하고 게임을 쉽게 풀어나갈 단서를 얻는 등, 스토리라인만 따라가선 얻을 수 없는 재미를 찾는게 꽤 쏠쏠합니다.
이 작품은 그런 문서수집형 구성을 통해, 레이무의 심리묘사부터 갈등의 해결까지의 갈등을 담았습니다. 로보토미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환상체가 나오죠. '적이 없다면 마법소녀는 왜 존재해야하지?' 하면서 스스로 악당이 되는 마법소녀처럼 레이무도 평화로운 세상에 무녀는 왜 존재하는지 그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며 악역으로 흑화할뻔 합니다. 다행히 유카리가 직접 중재에 나서 무녀로서의 짐을 덜어주며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맺음되는 듯 하나...마지막 트루먼 쇼에 대한 리뷰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언뜻 보면 레이무는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 같지만, 그 또한 그녀에게 새로 부여된 역할일뿐이라는 것일까요. 이변해결사 전투무녀에서 평범한 신사무녀A로 변경된 배역, 이전과 180도 달라진 삶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그대로 돌아간다... 트루먼 쇼의 배경과 주제를 생각하면 상당히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결국 어항 안, 만들어진 모형 정원에 불과하다는 조우노세의 해석이 생각나는군요.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참신한 작품이었습니다. 소설의 세계는 넓고도 심오하군요. 매번 예상치 못한 작품이 나와 이마를 탁 치게 만들어주니까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여러 달 - 초록목도리
문장력 하나만큼은 Top 3에 들만큼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장면전환도 자연스럽고, 개인적으로 modify한 환상향 세계관을 맛들어지게 버무려 현실-환상-과학세기를 한데 엮어둔 이 시리즈는 볼때마다 감탄스럽네요. 위에도 적었다시피 저는 이 세상이 환상 속 존재들에 의해 컨트롤 되고 있다는 설정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유카리가 현실 대학 총장으로서 환상과 바깥 양쪽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달은 달대로 하나의 숨겨진 국가로 취급받아 그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인간과 환상 속 존재들이 자유자재로 교류하는 그런.. 어디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창작이라고 생각됩니다. 현대화/미래화된 환상향과 달의 도시 모습도 나름대로 보는 맛이 있었고요. 매번 어느 캐릭터가 어떤 모습으로 어레인지되어 등장할지 기대하는 재미도 있네요.
작품의 백미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전개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한 데 뭉치는데서 드러납니다. 이런 류의 작품은 쓰기가 매우 힘들죠. 타임라인을 분리하고, 각 타임라인 별 주인공들의 행동을 지정하는 동시에 어디서 교차하고 어디서 합류할 지를 일일히 지정해줘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서 어색함이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걸 보면 시나리오를 짜는 능력 하나는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선의 회수라던가, 적절히 독자를 밀고 당기는 완급 조절이라던가 그런 소설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는 작품의 매력을 배가 시키며 독립적인 세계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멋들어지게 창조한 매력적인 세계관인 만큼 단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전 작들과 연결지어 하나의 유니버스를 구성하는 대서사시를 쓰고자 하는 작가님의 의도는 전달됩니다만, 그 연결과정에 주제나 모티브가 지정되는 대회가 끼어들다 보니 장편과 단편의 장단점이 뒤섞여 이도저도 아닌 맛이 되는건 아닌지 우려가 좀 있습니다. 마블 영화로 예를 들면, 앤트맨은 '애증'이란 주제에 맞춰 각본을 쓰고, 그 다음 '폭발'이란 주제가 주어졌을 때 이에 맞춰 각본을 쓰고, 그 다음 '고대사'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인피니티워 각본을 쓰고, 그런 느낌입니다. 대회 주제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작품 전체를 꿰뚫는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각각의 에피소드는 임팩트가 있는가 하면 전편과 후편을 기획하고 계시는지 각 편의 임팩트도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 들고요. 세계관은 유지하되 연재용 소설과 대회용 스핀오프 에피소드를 구분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잊혀진 - 아이디어뱅크
레이무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쿠레이 레이무의 기원을 밝힌 잔잔하면서 무거운 작품입니다. 멀쩡한 아이들을 납치해서 기억을 지우고 제자로 삼는 오키나나, 무녀로 삼는 유카리나 역시 현자들은 그게 그거라는 감상이 드는군요. 위의 작품 중 하나가 환상향의 질서를 위해 무녀의 삶에서 평범한 소녀의 삶으로 뒤집어진 레이무의 모습을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환상향의 질서를 위해 소녀의 삶에서 무녀의 삶으로 뒤집어진 레이무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 같은 캐릭터로 이렇게 상반된 해석을 할 수 있다니, 사람의 상상력이란 정말이지 놀랍네요.
레이무의 심리변화 또한 인상깊었습니다. 처음엔 기억을 되찾아 갚아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것이 점차 나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인간을 지켜주자는 쪽으로 바뀌다니,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그녀의 삶을 강제로 뒤집어 놓은 원인이 결과적으로 그녀의 생각도 뒤집어 주다니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쩌면 유카리는 이미 레이무의 변화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기억을 되찾아도 어찌하지 못하는 그녀의 처지를 아니 그냥 내버려두었을거고, 결국 레이무도 현실에 굴복하여 무녀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심했으니 모든 것은 유카리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환상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절대적인 강자인 주인공이 이렇게 시스템의 또다른 피해자가 될 수 도 있다는 해석이 마음에 드네요. 처지가 안쓰럽지만 이것이 환상향이구나 싶어서 다른 의미로 흐뭇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마노자쿠 - 아야벅지
특이하게 세이자와 유메미를 엮어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되돌려 올바른 역사를 새로 쓰려는 세이자와 순전히 흥미 본위로 그녀를 돕는 유메미의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케미가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먼저 상황에 대한 해설이나 묘사 없이 주인공들의 대사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읽는 내내 호흡이 가빠지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시간 반 동안 쉴새없이 대사 티키타카가 이어지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보니 꽤 길었던 서사마저 지나치게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게, 대사라는게 아무리 길어보여도 다 읽는데 1분이 안 걸리거든요. 20마디 정도 나누는 동안 상황은 휙휙 변하는데 쉬어가는 내레이션이나 설명문은 없으니, 10여분 남짓하는 짧은 시간동안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듯 합니다.
내용 전개에 불필요한 대사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중간중간 억지 유머를 비틀어 넣거나 유행어를 끼워 넣는 등, 한국 영화에서 주로 비판 받는 부분이 소설에서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단점과 더불어,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없고 그 부분을 불필요한 잡담과 유머가 가득 채우고 있으니 플롯을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줄줄히 해설과 설명을 넣는 편이 이해와 몰입 측면에선 더 나았을 것 같군요.
전반적으로 플랫폼에 연재되는 웹소설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부분부분 임팩트를 터트리고, 대사 위주의 전개를 이끌어내는 점 등이 말입니다. 하지만 보통 웹소설은 5천~1만자 이내에 중요한 내용을 압축시켜 담아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방대한 양의 내용을, 환상향-바깥세상-달의도시를 아우르는 방대한 스케일로 담아내려 하고 있죠. 그릇과 담으려는 내용물이 맞지 않으니 거기서 느껴지는 괴리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스프 그릇에 스테이크를 담아내고 넓은 접시에 스프를 담은 그런 느낌. 분량이 긴 글은 좋지만 그에 맞게 형식을 가다듬어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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