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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급스러웠던 스파이.jpg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은 본명이며, 대중에겐 코코 샤넬(Coco Chanel)로 알려져 있다.샤넬은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수도원에서 자랐다. 이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녀의 흑백 기반의 절제된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18세부터 재단과 재봉을 배우며 아틀리에에서 일했고, 1907년엔 가수를 꿈꾸며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며 ‘코코’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곳에서 만난 장교의 지원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했다샤넬은 1900년대 초, 프랑스 장교 에티엔 발상의 후원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며 패션 산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영국계 사업가이자 연인이었던 아서 케이펠의 금전적·정신적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이 지원을 바탕으로 샤넬은 1909년 파리 마르제브 거리에서 첫 모자 가게를 열었고,1910년에는 캉봉 거리(Rue Cambon)에 ’샤넬 모드(Chanel Modes)’라는 이름의 부티크를 설립했다.이 부티크는 훗날 메종 샤넬(Maison Chanel)로 발전하게 되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샤넬 브랜드의 공식적인 출발점이 된다.이후 샤넬은 기존의 코르셋 중심의 제한적인 여성복에서 벗어나, 간결하고 실용적이며 우아함을 갖춘 디자인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녀의 과감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 그리고 여성의 움직임과 자유를 중시한 실루엣은 당시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중과 상류층 모두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샤넬이 처음 선보인 향수 No.5는 출시 이후 꾸준히 사랑받으며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향수로 자리잡았다.마릴린 먼로가 한 인터뷰에서 “잘 때 입는 것은 샤넬 No.5뿐이에요”라고 말한 일화는,이 향수가 당시 얼마나 아이코닉하고 대중적 영향력이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샤넬은 특히 남성편력이 심한 편이었는데샤넬을 창업하는데 도움을 준 전연인아서케이펄과 헤어지고도 친구로 지내며 본인의성장을 위해 필요한 남자들을 갈아치웠는데샤넬은 웨스터민스터 공작과의 6년간의 연애를 비롯해,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등 여러 저명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그녀는 당대 남성들의 재력과 영향력을 기반으로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자신의 브랜드와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 샤넬은 나치 장교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와의 연인 관계를 통해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 리츠 호텔(Ritz Hotel)의 스위트룸에 장기 투숙하며 전쟁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했다.이러한 배경은 훗날 샤넬의 친나치 논란과 도덕적 평가에 있어 주요한 논쟁점이 되었다.샤넬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보장교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는 ’슈파츠(Spatz)’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며,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의 고위급 정보원이자, 프랑스 내 나치 스파이망 운영 책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샤넬이 이와 같은 인물과 사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한 정황은, 전후 그녀의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성에 대한 평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가 되었다코코 샤넬은 1944년 프랑스 해방 이후, 나치 독일과의 협력 혐의로 프랑스 정부의 조사를 받았다.그러나 그녀는 과거 웨스터민스터 공작과의 인연을 통해 알게 된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도움을 받아, 정식 심문 전에 석방되었다.이로 인해 샤넬의 나치 협력 의혹은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그녀의 전쟁 시기 행적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코코 샤넬은 윈스턴 처칠과의 인연을 통해 전후 정치적 보호를 받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으로 평가받는다.전쟁 중 나치 점령 하 파리 리츠 호텔에 머물렀던 샤넬은 전쟁 후 한때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1954년 파리로 복귀하여 리츠 호텔에서 1971년 87세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프랑스 정부는 나치 협력 혐의에 대한 명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이유로, 샤넬의 프랑스 내 안장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이러한 점들은 그녀의 생애와 유산에 지속적인 논쟁과 평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그렇기에 샤넬의 무덤은 스위스에있다.적과의 동침: 코코 샤넬의 비밀 전쟁의 저자 할 본은 샤넬이 나치 첩보기관 압베어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샤넬은 나치 스파이 루이 드 보플렁과 연인이 되어 모로코와 스페인에서 첩보 활동을 벌였으며, 독일의 영국 비공식 휴전 제안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또한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히틀러 찬양으로 독일 부유층과 친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도 제기되었다.이 같은 사실은 샤넬의 전쟁기 행적에 대한 논란을 증폭시켰다.이 책은 프랑스에서도 출간되었으나, 샤넬 측의 출간 금지 신청으로 유통이 중단되었다.그러나 2014년 프랑스 국영방송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의혹의 그림자』를 통해, 샤넬이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국방부 문서가 공개되었다.문서에 따르면 샤넬은 코드네임 ‘웨스트민스터(F-7124)’로 나치 첩보망에 속해 있었다.샤넬의 스파이 활동 동기에 대해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첫째, 극우주의적 성향과 유대인 혐오로 독일에 우호적이었으며, 독일 장교와의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협력했을 가능성이다.둘째, 향수 ‘샤넬 넘버 5’와 관련된 재산권 회복을 위해 나치와 협력했다는 주장이다(역사학자 프랑 페레의 분석).셋째, 독일군 수용소에 있던 친지의 석방을 위해 스파이 활동에 가담했다는 추측도 있다.요약1.샤넬은 강력한 인맥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남자들을갈아치워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했다.2.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의 첩보 활동에 관여하며,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했다.3.그녀는 뛰어난 업적과 심각한 논란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당대 여성상과 권력 관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결론아무리봐도 한녀 최상위호환이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한국 최초의 군함 이야기.jpg
북한이 서울 밀어붙이면서 동시에 동해 쪽으로특수부대 600명 태운 배를 몰래 부산 쪽으로 보내려 했다.근데 문제는 그때 우리 해군, 함포 달린 군함이 단! 한 척도 없었다.그냥 말이 해군이지, 진짜로 총 들고 배만 타는 수준이었다.“우리가 배 사자.”본인이랑 해군 전체가 월급 10%씩 각출하자고 함.그 시절 장교 월급이 쌀 한 말 값도 안 되는 시절인데도 단 한 명도 반대 안 하였다해군 병사들이 고철 모으고, 장교 부인들이 바느질해서 장사까지 해가며총 1만5천 달러 모으기에 이르른다이승만한테 가서 결제 받으려고 찾아간다그 시절엔 해외에 20달러 이상 쓸 때 대통령 결재 받아야 됐다나라가 개가난했음.손원일 제독이 모은 돈 들고 이승만 찾아가니까이승만이 감격해서 4만5천 달러 추가로 주게되며총 6만 달러 모이게된다이걸로 미국에 가서어느 대학 실습용 중고 군함 하나 사오게되고직접 고치고, 함포 설치하고, 포탄까지 챙겨온다배가 남해안에 도착하니까어부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한다“우리도 드디어 군함이 있구나…”근데 그 군함, 지금 기준으로 보면 경비정 수준.그치만 너무나도 소중해서 배 주위에 새끼줄 치고 헌병이 지킬 정도였다고1950년 6월 25일 저녁, 출동 명령동해 묵호(지금의 동해시)에 북한 무장병력 침투 정보가 들어와 소탕작전에 출항한다밤 8시쯤, 부산 오륙도 앞바다에서 수상한 배 포착.정선 명령 씹히고, 추격전 시작.밤 11시쯤 북한군 특수부대 태운 배라는 거 확인됨.그리고 6월 26일 00시 10분,전투 명령 떨어짐.대한민국 해군, 그렇게 첫 실전 해전 시작함장 최용남은 전투 직전 이렇게 말한다“전원 죽을 각오로 싸운다. 김일성 공산당은 우리의 적이다.”그리고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도 부하들한테“혹시라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 속옷 갈아입자. 깨끗하게 죽자.”훈련도 못 받은 애들이, 실탄도 아끼느라 포 쏴본 적도 거의 없음.그런데도, 포 쏘고 또 쏘다가드디어 적함 맞추게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결정타 넣기 직전에 백두산함 포가 고장난다그 사이 북한 배에서 쏜 포탄이 우리 조타실에 명중.피가 튀고 배안은 아수라장근데 그 상황에서도 조타수 김창수 상조(상사)는내장이 흘러나와도 키 놓지 않고 배 몰았고탄약수 전병익 병장도 가슴에 포탄 박혔는데자기 자리 안 떠나고 결사항전하였다김춘배 상조(상사)도 다리에 구멍 뚫렸는데통신 전화기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마지막까지 싸운 병사들의 한마디김창학 병장이 피 흘리며 갈증 때문에“사관님… 물 좀 주세요…”최영섭 소위가 물을 준다마시고 나서 김창학이 묻는다“사관님, 적함은 침몰했습니까…?”사실 아직 가라앉기 전이었지만최영섭은 죽어가는 병사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응. 침몰했다. 우리가 이겼다.” 라고 함.그러자 김창학이“끝까지 싸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만세…”그리고 숨을 거둔다전병익 병장도 “대한민국 만세” 외치고 따라 전사한다국군의 두 전사자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 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되었고, 전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1.후방 침투 차단백두산함이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킴으로써, 600명 규모의 특수부대가 부산항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UN군 병참기지였던 부산 교두보를 안정화시킴.2.낙동강 방어선 유지에 기여만약 침투를 허용했더라면, 후방 교란과 항만 파괴로 병력·물자 수송이 차단낙동강 전선 붕괴 위험 제거3. 전략적 가치:이 전투는 단순한 해상교전이 아니라,후방 방어와 전선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한명량해전에 비견될 전략적 승리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온한 바다는,74년 전, 포탄 한 발도 아끼던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결과였다.대한해협 해전,그건 단순한 해전이 아니라,대한민국이 바다를 지킨 최초의 의지였다그날 밤, 백두산함은 적을 막았고,대한민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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