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이디야가 스타벅스 옆에만 있다는 소문에 화나서 분석한 자료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385 추천 1 댓글 7
2018년 10월, 커피전문점 브랜드 평판을 조사한 결과 1위는 스타벅스가 차지하였고 3위는 이디야로 분석되었습니다. 수많은 커피 브랜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가운데 스타벅스와 이디야만이 매출액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하기도 하였는데요.그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고 있는 두 브랜드죠. 스타벅스와 이디야는 각각 해외 브랜드와 한국 브랜드를 대표하는 커피 전문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디야는 스타벅스 옆자리만을 고집한다는 오명을 듣고 있는데요. 스타벅스가 찾은 좋은 입지에서 보다 저렴한 커피를 판매해 스타벅스의 고객들을 뺏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의 중심에 선 이디야입니다. 이와 같은 억측에 이디야 역시 난감을 표하며 반박자료를 제시했다고 했는데요. 어떤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디야가 전략적으로 스타벅스 옆자리를 꿰찬다는 의혹은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실제로 서울 광화문이나 강남 일대, 부산, 대전, 청주 등에서 스타벅스와 나란히 붙어있는 이디야 매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처럼 스타벅스 옆 이디야 매장이 자주 목격되었기 때문에 이디야의 추종 전략이 아주 뜬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스타벅스 매장을 좇아간다는 전략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죠. 업계의 후발주자로서 검증받은 롤모델의 전략을 모방하는 것만큼 안전한 투자방식이 어디 있을까요. 과거에도 모방을 창조의 어머니격으로 여긴 회사들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따라서 이디야가 추종 전략을 펼친다는 소문은 업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까지 대부분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스타벅스는 매장 위치 선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모든 매장을 직영점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회사 자체에서 철저한 시장 조사를 거쳐 매장 위치를 선정한다고 알려져 있죠. 이것이 스타벅스가 항상 흥하는 비결이자 스타벅스 롱런의 원칙이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스타벅스는 ‘허브 앤드 스포크’라 불리는 전략을 통해 입지를 정한다고 하는데요. 이는 유동인구가 많은 특정 지역에 매장을 집중시키는 전략으로 강남 일대에 스타벅스가 밀집해있는 현상도 이와 같은 전략과 연관이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스타벅스 매장 8곳 중 7곳이 목동에 쏠려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죠. 스타벅스가 위의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쉬우며 종업원을 이동 근무시키기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처럼 검증을 마친 몫 좋은 자리에 스타벅스를 따라 매장을 오픈한다는 의혹은 이디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디야가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기 때문이죠. 더불어 스타벅스가 찾은 좋은 입지에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공급해 스타벅스의 고객들을 뺏는 것이 이디야의 유일한 판매 전략이라는 조롱도 뒤따랐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디야 관계자는 "이는 사실과 다르다"라고 단호한 의사를 밝혔는데요. 위와 같은 논란은 실제 수치 자료만 확인해도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939곳에 이르는 스타벅스 직영점과 이디야의 1767개 가맹점 입지를 분석한 결과 얻은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에 덧붙여 이디야 관계자는 위 소문이 뜬 소문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추가로 제시했습니다. 1. 이디야의 수많은 매장이디야는 스타벅스와 달리 가맹점이 매장 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부만이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을 뿐이죠. 따라서 매장 수면에서는 이디야가 스타벅스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스타벅스의 매장 수가 1천여 개인 반면 이디야는 5년 전인 2013년 이미 '1000호점'을 달성했고 올해는 2,600개를 돌파했다고 하는데요. 서울시 매장만 따져보면 스타벅스는 445개, 이디야는 612개입니다. 이처럼 이디야의 매장 수는 스타벅스를 포함한 다른 커피 브랜드보다 최소 2배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매장수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에 자주 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어딜 가도 많은 이디야가 스타벅스 옆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눈총을 받을 이유는 없는 셈이죠. 이디야 관계자는 "매장 수가 많으니 눈에 많이 띄고 스타벅스 근처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것일 뿐"이라며 ‘스타벅스 옆 이디야’ 논란을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습니다. 2. 스타벅스와는 차별화되는 이디야의 입지 전략회사 자체가 추구하는 전략 면에서도 이디야는 스타벅스와 사뭇 다릅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골리앗의 모방이 다윗에게 무슨 메리트가 있겠냐는 것이 이디야 측의 입장이죠. 실제로 스타벅스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선정한 자리는 이디야로서는 감당할 능력도 안된다고 관계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몫 좋은 자리는 당연히 임대료가 비쌉니다. 모든 매장을 본사 직영으로 운영하는 스타벅스라면 모를까 가맹점주들은 턱 없이 비싼 임대료를 부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스타벅스와는 차별화되는 전략이 구사되는 것이죠. 이디야는 자생의 방법으로 분산정책을 펼쳤는데요. 유동인구가 많은 대형 상권이 아니어도 다양한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점포를 확장하는 전략이죠. 이디야 본사가 공개한 점포 입점 기준에도 '지방 및 특수상권을 포함한 미개척 상권 개발'이 있었습니다.따라서 도시의 밀집 지역을 제외하면 ‘스타벅스 없는 이디야’가 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에서도 중구, 강남구 등의 번화 지역을 논외로 치면 스타벅스와 이디야 매장의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데요. 강서구의 스타벅스 매장은 12개인 반면 이디야는 40개가 영업 중이며 도봉구에는 18개의 이디야 매장이 있지만 스타벅스는 단 1개뿐입니다. 이처럼 외곽지역에까지 넓게 분산되어 있는 이디야의 매장을 일부 예만을 가지고 ‘스타벅스 옆 이디야’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이죠. 오히려 스타벅스가 없는 지역에까지 퍼져있는데 말입니다. 이상 이디야가 스타벅스 옆에만 있다는 소문에 화나서 분석한 자료였습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취미로 영상 시작했다가 유튜브계 평정중인 금수저 크리에이터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455 추천 1 댓글 2
요즘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유튜버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는 올해 가장 돈을 많이 번 유튜버는 7살 꼬마 라이언이라고 발표했는데요, 그가 2년 동안 올린 수익은 우리나라 돈으로 242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유튜브는 전 세계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으로 주목받고 있죠. 우리나라 유튜버 스타들도 예외가 이닙니다. 최근 한 프로그램에서 대도서관은 연 매출이 17억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그들 중에는 유튜버를 하지 않아도 태초부터 여유로운 삶은 사는 이들도 있다는 거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닌 취미로 영상을 만드는 금수저 유튜버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1. 70평짜리 자취방, 레나금수저 유튜버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뷰티 유튜버 레나입니다. 그녀는 털털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구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유튜브 스타인데요. 동시에 천 단위 명품 하울의 시초이기도 하죠. 구독자들이 그녀를 금수저라고 추측하기 시작한 건 그녀가 부모님이랑 같이 살던 집을 공개했을 때부터인데요. 그 당시 그녀는 평창동 집을 본가가 아닌 세컨드하우스라고 밝혔었죠. 그 후 그녀가 독립을 하게 된 집을 공개하면서 그녀가 금수저라는 걸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답니다. 무려 그녀가 자취를 하게 된 집은 한남동에 위치한 유엔빌리지 형우베스트빌로 알려졌기 때문이죠. 지금은 각종 논란으로 유튜브 활동을 중단했지만 금수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튜버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2. 집 아니고 궁전, BJ 케이남자 BJ에서도 별 풍선 수익이 상위권이라고 알려진 BJ 케이, 그는 얼마 전 그의 두 번째 슈퍼카 구매 기념 영상을 업로드해서 화제가 되었죠. 영상 속 람보르기니 우라칸 스파이더 가격은 3억2천만원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의 집 한 채에 가까운 금액으로 자동차를 구입한 건데요.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진짜 놀라운 건 포항에 있는 그의 집이었습니다. 일명 '포항 궁'이라고 불리며 300평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차고, 수족관, 찜질방, 헬스장, 일하시는 분만 3명인 식당까지 있는데요. 그의 부모님은 힘들게 자수성가하신 분들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초호화 집을 공개하기 전 많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BJ로 활동하며 노력했던 것들이 금수저라는 단어만으로 무너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많았고 밝혔죠.3. 페라리를 사랑하는 의사, 오프 라이드최근 역대급 이벤트로 유트브계를 뒤집어놓은 유튜브가 있습니다. 바로 자동차 유튜버 오프 라이드입니다. 2019년 신형 자동차를 선물하겠다는 이벤트를 열어서 구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죠. 그의 재력은 의사라는 직업으로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본인의 소유 차량만 페라리 5대, 람브르기니, bmwM, 벤츠amg, 레인지로버등 10대가 넘어갑니다. 대부분의 카유튜버들은 부유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받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신차가 출시되면 1-3억이 넘어가는 차들을 주저 없이 바로 구매해 컨텐츠를 만듭니다. 또 자동차에만 그치지 않고 갤러리아 프라이빗 데이 쇼핑, 고급 음식점 방문 등 다양한 컨텐츠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금수저가 맞냐는 질문에 " 단지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해주셨던 것뿐 자동차를 사주시는 건 아니다. 돈은 있어야만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금수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산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죠. 또 자동차를 할부로 결제하면 매달 열심히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며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냈습니다.   4. 유명 BJ들의 열혈팬 출신, 슘짱정겨운 대구 사투리와 뛰어난 입담이 트레이드 마크인 슘짱, 그녀는 유명 bj들의 열혈팬으로 개인 방송에 여러 번 출현했다고 해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평범한 수저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팬클럽 중 별 풍선을 많이 쏜 20위까지가 열혈팬이 되기 때문이죠. 과거 세야라는 bj, 철구 등에게 수천만 원 어치 별 풍선을 후원했다고 해요.  슘짱은 그렇게 취미로 개인 방송을 하다가 팬의 권유로 유튜브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녀의 입담이 담긴 명품 언박싱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올 초 명품관 영상으로 크게 화제가 되며 유튜버 스타로 거듭났습니다. 인터넷상에서는 그녀가 대구의 유명 무역회사 회장님의 딸이라고 알려졌는데요. 30살 때 버스를 처음 타봤다고 해요. 금수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이겠죠.5. 자칭 청담 언니, 치유지금껏 명품 하울은 그녀와 비교할 수 없죠. 8000만 원 명품 하울의 주인공, 디자이너이자 패션 유튜브인 청담 언니 치유입니다. 8000만 원 하울이 끝이 아니라 무려 14편의 명품 하울 컨텐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패션 이야기를 들려주는 브이로그도 인가가 많은데요. 그녀는 치유와 소누아를 론칭한 패션디자이너입니다. 패션전공이 아닌데 패션 브랜드를 성공시킨 걸로 유명하죠. 전공자도 힘든 브랜드 론칭 성공에 금수저라는 꼬리표는 그녀를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금수저라는 질문에 "좋은 부모님이지만 부유하게 자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금수저설을 일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패션 하울에서 독보적인 그녀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지고 있죠.지금까지 금수저 유튜브 스타들을 알아봤습니다. 그들이 금수저라서 쉽게 성공해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부모님으로부터 일찍 독립해 자기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금수저라는 걸 밝히기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과 노력을 폄하당하기 때문이죠. 금수저들과 평범한 사람들과 출발 선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을 무조건 비난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을까요?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삼성 디자인에 로고만 바꿔넣어 팔다가 딱 걸린 대기업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276 추천 0 댓글 2
2018년 10월 일본의 대기업 소니가 대망의 스마트폰을 새롭게 출시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소니 XZ3의 디자인은 익숙함을 넘어 친근함마저 들게 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후 소니의 신제품이 퍼지면서 네티즌들의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요. 이때 그 찜찜함의 원인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삼성전자의 갤럭시 8과 꼭 빼닮았다는 것이죠. 물론 엣지 부분과 버튼의 위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네티즌인 이렇게 결정 내린데에는 과거의 전적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으로 동남아시아로 수출한 일본 닛신사의 짝퉁 불닭이 있죠. 마치 한국 제품인것 처럼 한국어까지 넣어 놓았으니 괴씸죄가 추가돼 한국인들의 분노는 폭발 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아이돌 그룹인 방탄 소년단을 따라 탄도소년단까지 따라 만들었으니 일본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말 그대로 갤럭시까지 닿을 수준 이었죠. 이렇게 일본기업이 따라 만든 것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소니'라는 일본 대기업의 카피사건은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현재 일본 스마트폰 업계에서의 소니와 삼성에 대한 사회 이슈를 좀 더 살펴 보겠습니다.1. 자국민이 등돌린 소니의 스마트폰현재 소니의 스마트폰 사업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막강한 스마트폰 기업인 애플, 삼성은 물론 현재 화웨이에도 뒤처져 있는 상황입니다. 일본인들 또한 '소니가 내세울 건 오직 플레이스테이션 뿐이다' 라고 자기 학대를 한지 오래인데요. 소니의 이전 모델인 '엑스페리아XZ 프리미엄' 점유율은 나날이 줄어 애플이 54%인 것에 비해 민망한 수준인 12%라는 하락세를 보여줬습니다. 상하단 광할한 베젤로 인해 구시대적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물리 버튼이 아닌 소프트 버튼을 고수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된것인지 조차 의문을 들게 했죠. 다행이도 이후 출시된 엑스페리아 XZ 프로는  사이즈가 커지고, 베젤리스 디자인이 적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니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스펙 카메라를 장착하였지만 듀얼 카메라 붐이라는 시장 상황에서 단일 카메라를 탑재한 것은 단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이렇든 소니에 대한 실망감이 쌓이다보니 자국민들은 소니 스마트폰에 등을 돌려버렸었죠. 하지만 이제까지 스마트폰 업계에서 두각이 없던 소니가 2018년 신규모델 발표 소식을 전하자,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졌었습니다. 결과는 짝퉁 논란으로 휩쌓였지만 말이죠.2. 일본인이 삼성을 대하는 자세지난해 일본 스마트폰 시장에서 자국 업체들의 점유율이 반토막이 났습니다. 이때 갤럭시 노트8 출시를 앞두고 있던 삼성 입장에서는 점유율을 향상시킬 절호의 기회로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삼성휴대폰의 일본 시장 점유율은 3.8%로 5위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볼 수 있는데요. 이렇게 저조한 원인은 일본 통신회사 Docomo와의 협력관계가 끊긴 것도 일부 차지합니다. 또한 일본인이 자국산을 선호한다는 것과 내수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돼있어 한국산을 단체로 밀어내는 경향도 있죠.이 문제를 혐한 문제로 볼수 있는 것이 애플 스마트폰의 경우 매년 점유율이 상승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애플의 강세로 일본 시장 점유율 4위를 차지하던 후지쯔가 최근 철수하며 현재는 소니, 샤프, 교세라, 파나소닉만 남게된 상황입니다. 이렇다 보니 삼성에게만큼은 절대 밀릴 수 없다라는 것이 일본인의 속마음이라고 하는데요.3. 갤럭시 S6의 비하인드 스토리일본에서 삼성로고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인데요. 일본과 한국이 역사적인 문제로 얽혀 있기 때문에 거리상으로 가깝지만 절친한 나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2015년 삼성에서 출시된 갤럭시 S6 제품에 삼성 로고를 빼서 일본에 출시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죠. 삼성은 글로벌 버전 폰에는 삼성(SAMSUNG)로고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출시한 제품에는 예외였는데요. 이것은 미적 문제가 아닌 혐한 감정과 관련된 것임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소니 판매율이 저조해지면서 삼성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지고 있다' '일본은 삼성 로고가 붙으면 절대 사지 않는다'라는 의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간의 관계에 따라 자국민의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우도 갤럭시를 '세상을 즐거움을 덮는다'는 뜻의 '가이러스'로 바꾸었죠. 특히나 일본은 외산의 무덤이라 불리기 때문에 기업로고를 지운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대한항공 승무원 세후 500만원의 급여는 정말 사실일까?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216 추천 1 댓글 1
전직 승무원이 유튜브에서 말하길 승무원의 덕목은 가벼운 엉덩이라고 했습니다. 쉴 틈도 없을 만큼 강도 높은 업무임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죠. 실제로 고객 안내는 기본이고 기내 화장실 청소와 승객의 뒤처리 등 모든 궂은일을 담당하고 있는데요. 화려한 유니폼에 가려져 망각하고 있었지만, 입사 후 조금만 일하다 보면 체력테스트가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고 하죠. 이렇다 보니 서비스업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며, 사람들은 승무원 월급에 대해 관심이 몰렸는데요. 예전 온라인 게시글에서는 대한항공 승무원은 세후 500만원을 받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실제로 항공사 공고에 나와있는 연봉 외에 추가적으로 지급되는 수당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세후 월급이 500만 원일지, 그리고 어떤한 추가 수당에 대한 항목은 무엇일지 알아보겠습니다. 1. 승무원 기본 급여 3가지승무원의 급여는 기본적으로 기본급과 비행 수당, 상여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본급의 경우 공고에 나와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2년제와 4년제가 500만원정도의 연봉차가 있었지만, 현재는 구분이 없어지며 평균 초봉이 3천만원 초중반대로 동일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비행수당은 어떨까요? 이 수당은 지역이 아닌 비행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승무원마다 편차가 생깁니다. 최소 비행시간은 60시간으로 대게 한 달에 75시간~80시간을 비행하기 때문에 평균 200만원 중후반대를 받습니다. 비행수당은 [비행 1시간당 수당 x 시간]인데요. 대략 8천원~2만원 사이입니다. 그래서 간혹 승무원이 부족해서 90시간 이상씩을 비행할 경우 세후 300까지 받는 게 가능합니다. 그다음으로 연봉을 가장 많이 높여주는 상여금을 보겠습니다. 올해 대한항공 명절 상여금은 160만원 도로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명절 상여금만 있는게 아닌데요. 격달로 연말까지 보너스 개념의 상여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총 여섯 번의 보너스가 존재합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인턴과정이 끝나면 연봉에 780%의 상여금이 플러스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그래서 상여금을 모두 합치게 되면 평균 월급이 300만원 이상은 되는 것이죠.2. 달러로 들어오는 제2의 통장승무원에게는 기본 기본 급여와 별도로 들어오는 수당이 있습니다. 바로 체류비 명목으로 나오는 퍼듐이라는 것이죠. 해외에서 체류할 동안의 생활비 개념으로 지급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금액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아시아는 유럽보다 적게 나오는 편이죠. 지급 방식은 기본 수당과 별도로 분리되어 다른 시기에 다른 통장으로 들어옵니다. 바로 외화통장으로 달러가 들어오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월급을 두 번 받는 기분이 들죠. 그래서 이 월급통장들의 알람 덕분에 승무원들이 고된 업무를 견디는 힘이 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합니다. 이외에는 출근비와 초과근무수당이 있는데요. 출근비에 해당하는 교통비는 공항버스 기준으로 5~6천원 정도가 지급되고 있습니다. 3. 승무원의 파격적인 티켓 가격승무원의 복지혜택 중 일반인들은 가장 부러운 것을 꼽자면 바로 항공 티켓입니다. 국내 대기업 항공사의 경우 승무원에게는 50-90% 할인된 가격으로 매년 25개 정도의 왕복 티켓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할인율이 높은 경우 비확정 티켓이라서 승객이 우선순위입니다. 그래서 튕길 확률이 높아 대부분 비수기에만 사용하는게 일반적이죠. 하지만 50%티켓은 부담금액은 높지만 튕길 확률은 낮아집니다. 그리고 확정 티켓이 한가지 더 있는데요. 바로 신혼여행 티켓으로 10% 요금만 내지만 확정 좌석이라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위에서 언급했듯이 승무원 급여 체계를 확인해보면 인터넷 게시글에서 의문을 던진 '35살의 승무원 월급 500만원'은 현실성이 있습니다. 물론 기본급 이외에 지급되는 항목이 많기 때문에 개인 편차가 있고, 개인도 매월 변동되는 근무 스케줄 때문에 급여 변동 폭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300만원 이하로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하지만 비행시간이 많고, 연차가 쌓이고 또 보너스 달이 끼워진다면 세후 500만원까지 받는 것도 가능한 것이죠. 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억대 매출+넘사벽 미모까지 거머쥔 대표적인 한국 여성CEO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284 추천 1 댓글 1
‘억대 매출’, ‘성공’이라는 단어는 생각만 해도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그려집니다. 이 단어들에는 누구나 꿈꾸는 미래가 담겨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젊은 나이에 이미 이 모든 걸 이뤄내 ‘성공신화’를 완성한 여성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미모까지 갖추고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하는 그녀들인데요. 그리고 이들에게는 미모에 부까지 모두 거머쥔 여성 CEO라는 사실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존재합니다. 바로 직접 경험한 불편함을 불편함에서 끝내지 않고 이를 사업으로 가져왔다는 점이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업의 영역에 반영하는 개척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죠. 최근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여성 CEO들의 도전정신과 열정을 한 번 느껴보러 가볼까요. 1. ‘요가복 브랜드 CEO’ 신애련한 요가 강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400억 대의 대박신화를 이룬 젊은 CEO가 되었죠. 신애련씨가 요가복 브랜드 ‘안다르’를 만들게 된 이유는 가격 대비 품질이 좋지 못한 요가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요. 그녀는 요가 강사였던 만큼 요가복을 입고 활동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당시 만족스러운 요가복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요가복은 대체로 불편했으며 민망한 디자인이 많았죠. 그리고 심지어 가격마저 비쌌습니다. 그 값어치를 하지 못하는 요가복에 많은 실망을 한 신애련씨는 ‘직접 요가복을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브랜드가 ‘안다르’입니다. 누구보다 요가 레깅스의 불편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어떤 부분을 개선하고 보완해야 할지 완벽하게 캐치하여 여성들이 원하던 레깅스를 완성해냈는데요. 그렇게 본인이 경험한 불편함을 적극 반영하여 만든 레깅스는 2,30대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여성들이 레깅스 입을 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역시나 Y 존이었죠. 그래서 신애련씨는 Y 존을 부각시키지 않는 '시리 레깅스'를 만들어냈고 ‘대박 히트’를 치게 된 것입니다. 시리 레깅스는 출시 하루 만에 품절되는 사태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며 안다르는 브랜드 론칭 3년 만에 약 2천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가격에 실용성까지 갖춘 레깅스를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겠죠. 안다르의 레깅스는 일상생활에서도 편히 입을 수 있는 레깅스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신애련 CEO의 안다르는 현재 레깅스 외에도 맨투맨, 후디, 집업 등 다양한 여성 의류로 확장해가고 있는데 그녀의 성공 신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2. ‘천연화장품 브랜드 CEO’ 김다해보나쥬르는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천연 기능성 화장품’으로 현재 각종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 2010년 설립되어 올해로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보나쥬르는 소비자가 직접 선정한 ‘2018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인기는 보나쥬르의 CEO 김다해씨를 연 매출 50억의 여성으로 만들어주었는데요. 보나쥬르의 김다해 CEO는 어린 시절부터 아토피, 여드름, 각종 알레르기 등 많은 피부 고민을 겪었는데 이때, 직접 연성초, 부활초 등을 이용한 천연 화장품을 만들어 사용하고 많은 효과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연화장품 사업의 기초가 되었죠. 그녀는 현재도 “나와 우리 가족이 쓰는 화장품을 만들겠다"라는 생각에서 전 직원이 직접 테스트를 진행하며 직원 중 단 한 명에게라도 문제가 생기면 해당 제품은 전량 폐기 처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개발된 화장품 중에 ‘그린티 워터밤’은 중소제품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인기 제품은 50만 개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일명 ‘흔적 세럼’이라 불리는 ‘익스트림 스팟세럼’ 또한 소비자들의 큰 호응을 얻은 보나쥬르이죠. 보나쥬르는 한국을 넘어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터키 등 다양한 국가에서도 뷰티 박람회를 통해 우수한 제품력을 인정받았는데요. 연간 100만 달러 인도네시아 수출 계약과 함께 오프라인 쇼핑몰을 오픈하여 해외 진출에도 성공한 김다해 CEO입니다. 그녀는 앞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진 글로벌 브랜드를 목표로 더욱 사업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3. ‘속옷쇼핑몰 CEO’ 하늘2011년, 케이블 채널 Comedy TV '얼짱시대 6'에 출연하여 귀여운 외모로 주목받았던 한 학생이 현재는 연 매출 40억 원의 쇼핑몰 CEO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쇼핑몰 ‘하늘하늘’은 특색 있게도 속옷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2년 연속 동종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녀가 수많은 패션 의류 중에서도 ‘속옷’을 선택한 것에는 그녀의 취향도 담겨 있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속옷 모으는 걸 좋아했던 하늘 씨는 ‘내가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확신에서 속옷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웹서핑 중 그녀는 ‘왜 속옷 쇼핑몰은 모델에게 속옷을 입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모델이 속옷을 직접 착용해 보여주는 쇼핑몰이 전무했습니다. 이에 하늘 씨는 ‘내가 직접 입어보고 착용샷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주면 훨씬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녀의 이 생각은 100% 적중하여 쇼핑몰을 오픈하자마자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피팅모델을 했던 경험을 살려 직접 속옷 모델로서 착용샷을 공개했고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이슈가 되어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톡톡한 홍보 효과를 누렸습니다. 더불어 속옷만 중점적으로 파는 쇼핑몰도 없었기 때문에 경쟁사도 레드오션 속 블루오션을 정확히 파고든 셈이었죠. 가장 크게 히트 친 상품은 ‘코르셋 브라’로 놀라운 볼륨업 효과로 넘치는 후기가 달리기도 했었습니다. 하늘 씨는 “쇼핑몰이 처음 시작부터 흑자를 보긴 쉽지 않은데 저희는 쭉 흑자를 봤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손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인터뷰하기도 했죠. 그녀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그녀를 20대 젊은 나이에 연 매출 40억 원을 달성한 CEO로 만들어 준 것인데요. 11월 15일에는 ‘하늘하늘’ 오프라인 매장도 오픈하여 더욱 사업을 확장해가고 있는 하늘입니다.글 CCBB 에디터 스마트인컴시시비비랩
'뽀샵질' 안하는데 해외서도 찾아오는 동네사진관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297 추천 1 댓글 3
찰칵, 당신의 지금 이 순간을 찍어드립니다.아날로그 감성의 '연희동 사진관'웨딩 사진가 출신의 김규현씨가 운영보정없는 사진에도 하루 70명 넘게 찾을만큼 인기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연희동 사진관'. 흰색 외벽에 검은색 글씨로 정직하게 쓰인 수수한 간판이 인상적이다. 밝은 갈색 나무로 된 유리문은 따뜻해 보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정원(한석규 분)의 사진관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평(33㎡) 남짓한 공간에는 오래된 카메라 두 대와 검은 천이 둘러진 촬영 공간만이 덩그러니 있다. 사진관 주인 김규현(31)씨는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연희동 사진관은 필름촬영을 주로 하고 촬영 후 보정은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찍는다. 꾸미지 않고, 고치지 않고 그 순간을 날 것 그대로 사진에 담는다. 흑백 사진이 많다. 그럼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벌써 2개월 가까이 예약이 꽉 차 있다. 주말 하루 평균 70여명이 이 구닥다리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다.  포토샵도 안 해주는 '솔직한 사진관'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뭘까. 잡스엔(jobsN)이 사진가 김규현씨를 만나 창업 배경과 성공 비결을 물었다.흑백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김규현 씨 모습 / 김규현 씨 제공-사진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아버지가 카메라에 관심이 많아 저도 자연스럽게 사진을 접했어요. 15세때부터 필름 카메라를 썼고, 중학교 졸업선물로 디지털 카메라를 받았어요. '쿨픽서(니콘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라는 사진동호회 활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사진촬영을 시작했고요. 부산에 살면서 해안절벽과 다대포 해수욕장의 모래절벽을 주로 찍었어요. 고1때 사진을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그는 2006년 서울예술대학 사진과에 입학했다. 전공은 파인아트, 부전공은 광고사진이었다.-대학에선 주로 어떤 사진을 찍었나."지금 하는 연희동 사진관의 사진 촬영과는 정반대의 사진들을 많이 찍었어요. 인물 사진 보다는, 주제가 정해진 연출 사진을 주로 찍었습니다.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고요. '레트로 스튜디오'(故이재오 씨가 운영하던 신사동 패션 스튜디오)에서 11개월 동안 어시스트로 일하며 패션 사진도 찍었습니다."(왼) 20대의 흔들리는 마음을 표현한 작품 '마인드스케이프' (오) '2010 한국광고사진공모전' 입선작 '드라이피니쉬 #3' / 김규현 씨 제공-지금 연희동사진관은 인물사진 위주인데 인물촬영은 언제 익혔나."계룡대 육군 본부에서 사진병으로 있었어요. 군대에서는 상급자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좀 더 잘 돋보이게 할까'를 염두에 두고 찍거든요. 그러면서 인물사진 촬영에 점점 익숙해졌어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도 도움이 많이 돼요. 사진촬영 기술은 학교에서, 인물사진 촬영의 관점은 군대에서 배운 셈이예요."여기까지는 여느 사진 전공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하나씩 전문 기술을 터득한 것은 보통 사진가가 걸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달라지는 현실에 적응하며 조금씩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갔다.-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사진업을 시작한건가."2011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강남'허그스튜디오'에서 8개월간 일하고 그 해 10월 개인사업을 시작했어요. 웨딩촬영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처음엔 독일유학 자금을 모으는 게 목표였어요. 독일이 현대사진의 메카거든요. 돈이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다녔어요. 샘플 사진을 촬영해서 웨딩업체에 영업도 많이 다니고요. 그리고 2013년 초에 방배동에 웨딩 스튜디오를 차렸습니다."-웨딩 스튜디오는 어떻게 운영했나."주로 결혼식 스냅사진(결혼식 예식 전과정을 따라다니면서 촬영)과 본판 사진(결혼식 단체사진)을 찍었어요. 웨딩촬영에 대해서 대학에서 별도로 가르쳐주는 건 아니라서 처음엔 어려움도 있었죠. 하지만 웨딩 업계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작업 의뢰도 많이 받고 차츰 적응해나갔어요. 그렇게 약 2년간 스튜디오를 운영했습니다."-대학 때 주로 찍은건 연출사진, 광고사진인데 막상 일은 웨딩 촬영을 선택한 이유는."연출·광고·패션 사진은 사업자간 만남이라 작업을 의뢰받는데 한계가 있어요. 인맥이 없으면 힘들죠. 그에 비해 웨딩이나 아기 사진은 사업자와 고객이 직접 만나다보니 시장이 커요.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컸습니다."-그런데 왜 그만두었나."웨딩촬영은 꾸준히 수요는 있지만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을 생각하면 전망이 좋진 않아요. 뉴스에 나오는 통계만 봐도 결혼하는 커플도 점점 줄고 있잖아요.그리고 결혼식 스냅사진이 보통 3시간의 결혼식에 1000~2000컷을 찍고난 후 작업실로 돌아와 괜찮은 사진을 150컷 정도 골라내요. 수많은 컷을 찍지만 단 10프로의 사진만이 남는거죠. 이런 작업이 어느 순간부터 소모적으로 느껴졌어요. 이런 방식은 기존의 웨딩 촬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거라 재미도 없었고요.그리고 웨딩사진은 포토샵으로 보정을 많이 합니다. 점점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잘찍는 사람'이 아니라 '포토샵을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되는 게 싫었어요. '찍는 중요성'보다 '고치는 중요성'이 더 커진 데 대한 회의감도 들었고요."-그럼 웨딩 스튜디오를 그만두면서 현실적인 고민은 없었나."마침 아기가 태어났을때라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책임이 무거웠어요. 그래도 사진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사진이니까요. '사진으로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없을까' 매일 고민했어요. 웨딩 스튜디오 운영이 잘 되긴 했지만, 웨딩업의 특성상 수입이 들쑥날쑥 했거든요. 수입이 한 달에 100만~200만원 정도였어요."그는 오랜 고민과 준비 끝에 2015년 5월 '연희동사진관'을 열었다. '사진으로 먹고살되, 남과 다른 사진을 찍자'는 것이 목표였다.공간 디자인부터 정성을 들였다. 사진관까지 찾아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라면 사진관 인테리어도 중요하게 여길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상부터 시공까지 모두 직접 했다. 입구는 유럽의 옛 제과점처럼 디자인했고, 벽면은 철판이나 강화유리 대신 통유리를 사용해 내부에 햇살이 들어오도록 했다. 한국적인 느낌을 담기 위해 일부러 나무를 소재로 사용했다. 사진관 벽면 창문엔 한옥에서 쓰는 창호로 격자무늬 느낌을 살렸다.연희동사진관 전경 / '연희동사진관' 제공-초기부터 반응이 좋았나."처음에는 동네 주민들이 찾아오셨어요. 주로 연세 꽤 드신 분들이었죠. 어릴때 본 사진관처럼 옛 사진관같은 풍경에 끌리신 거에요.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제주도에서 일부러 찾아오시기도 하고, 해외에서도 많이 오세요. 미국에 오래 살던 한국분이 오셨는데 멀리서 왜 우리 사진관을 일부러 찾아왔냐고 물었더니, '한국적 느낌이 나는 곳이라 좋았다'고 하더군요. 처음에 사진관 디자인에 신경쓴 것이 통하는구나 싶었어요."-기억나는 촬영 에피소드 또는 사람이 있나."1년전쯤 70대 어르신이 사진관을 찾아오셨어요. 추리닝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편한 차림으로 오셨는데 상의는 깔끔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자켓을 걸치고 오셨죠. '내 마지막 모습을 담아주소'라고 하시더군요.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신 거였어요. 저도 영정사진을 찍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분의 환한 미소가 아직도 기억납니다.또 한 번은 딸, 사위와 함께 온 어머님이에요.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이 편찮으신 모습이었어요. 세 분이서 함께 가족사진을 찍고, 다음에 어머님 혼자서 영정사진을 찍었어요. 촬영 전 "내가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하시더니 눈물을 흘리셨죠. 하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어요. 그런 분들이 기억이 납니다. 짧지만 그 찰나, 먹먹함을 주셨던 분들입니다.20대의 마지막을 남기고 싶다던 스물아홉 아가씨도 기억나요. 단체사진을 찍을때면 항상 뒤로 숨거나, 셀카를 찍어도 보정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는데 청춘의 한 시절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어요."(왼)흑백 필름촬영한 할아버지와 손자 (오)손을 맞잡은 엄마와 딸 / '연희동사진관' 제공김씨는 필름 및 아날로그 사진을 주로 다룬다. 필름사진은 흑백 120㎜중형 필름으로 찍고, 아날로그 사진은 폴라로이드로 찍는다. 필름사진은 흑백과 컬러로 나누는데 흑백 필름 촬영의 경우 촬영과 원본 비용을 합해서 20만원이다. 촬영 후 필름 사진을 인화하는데 보통 한 달이 걸린다. 필름 사진은 보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디지털 촬영으로 테스트 촬영을 20컷 정도 한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한 컷에 3만원이다. 폴라로이드 촬영 후 인화까지 30초~1분 정도 소요되는데 그 동안 사진관 외관 앞에서 무료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이 서비스 때문에 블로그와 소셜미디어에서 저절로 홍보가 됐다. 김씨는 "사진관 자체가 아날로그 컨셉이기 때문에 온라인 홍보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전혀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고객들 사이에 자연스레 홍보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장비도 오래된 옛날 장비를 선호한다. 그가 사용하는 필름카메라는, 'hasseblad' 카메라로 1980년대 스웨덴에서 제작된 것이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1970년대 후반 제작된 '위스타'이다. 이 카메라는 소형 카메라가 없던 시절, 촬영용으로 흔히 사용되던 오래된 카메라다. 오래된 카메라로 아날로그 감성이 담긴 사진을 찍는 것이다.소박한 사진관 내부 / '연희동사진관' 제공-사람들이나 얼마나 찾아오나."하루 기준으로 폴라로이드 사진은 평일엔 15~20장, 40~50장을 찍습니다. 필름 사진은 최종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주말엔 3팀 정도 찍어요. 사진관은 날씨가 화창한 봄, 가을이 성수기인데 그럴 때는 하루에 폴라로이드 사진 70장 정도 찍습니다."-매출은 어느 정도인가."한 달 2500만원 작년 매출은 1억원대 중반이었고, 현재 한달 총매출은 2500만원 정도입니다. 올해 상반기 매출이 1억원 이상이었고, 연말까지 2억원 내외로 예상하고 있어요. 필름 촬영 업체의 평균적인 매출과 비교하면 조금 높은 편입니다. 그렇지만 순수익률이 높지는 않아요. 필름, 재료비를 고려해야 하니까요. 촬영 때 장비 렌탈비가 꽤 드는 편입니다. 사실 사진관을 찾는 사람들이 문의하는 것처럼 필름의 값은 비싸지 않거든요. 가격에는 손기술이 포함된 거죠. 손기술에 대한 가치를 더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흑백 필름촬영은 아날로그 감성이 담긴 사진을 만들어낸다. / '연희동사진관' 제공-연희동엔 연희동사진관 하나뿐이지만, 다른 지역에 필름 촬영 사진관이 몇 개 더 있다. 연희동사진관만의 차별점이 있다면."우선 합리적인 가격입니다. 보통 필름 촬영 전문 업체들의 평균 가격이 6~8컷에 50만~100만원 정도인데 비해 저희는 12컷에 20만원이니까요. 물론 저희는 인화와 액자값이 별도이긴 하지만, 꼭 액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보통 액자값까지 가격에 포함시켜 강매를 하거든요. 또 한 가지, 원본 데이터 사진을 무료로 드립니다. 사진관에서는 촬영한 원본 사진을 사진관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아요. 고객에게 줄 때도 대부분 유료로 주죠. 하지만 저희는 무료로 드려요.연희동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사진만 찍기 위해 집을 나서기는 쉽지 않잖아요. 사진 촬영하고 볼거리가 많은 연희동에서 데이트하거나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고, 동네가 주는 분위기가 사진관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고요.보통 필름 촬영 업체들이 흑백 사진진을 다룬다는 이유로 무거운 분위기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 사진관은 그보다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인 것도 장점이에요."필름사진을 찍으면 카메라에서 롤필름이 나온다. 이때는 아직 상(像)이 맺혀있기만 할뿐 약품과정을 거치지 않아 희미하게만 보인다. 이것을 '라킹이미지(잠상)'라고 하는데 우리 눈에 보이게끔 하는 것이 현상 작업이다. 이때부터 빨간색 암실에서 길고 세밀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인화는 사진과 싸우는 과정이다. 톤 보정을 하고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선 적게는 3~4장, 많게는 10장을 골라낸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사진에 손상이 가기 때문에 매순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약품 반응을 하면서 빛의 흔적만 남게 되는 게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진이다. 이 과정에서 저절로 사진에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다.(왼)사진을 인화하는 암실 내부 (오)연희동사진관 외부를 흑백촬영한 사진 / 김규현 씨 제공-사실 요즘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인가."사진을 손쉽게 찍을 수 있음에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제게 믿고 맡기는 거죠. 저를 신뢰해준다는 게 즐겁고 감사해요. 한 번 방문했던 분들이 꾸준히 찾아오시는 것도 보람되고요. 결혼할 때 커플 사진 찍고 임신했을 때 또 찍고 아기가 태어나면 가족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그리고 모든 동네 사진관들이 디지털 촬영으로 바꿀 때 대세를 따르지 않고 아날로그 필름을 사용하고 필름 시장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같은 직업이지만 내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게 해내고 있다는 거, 그리고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거, 직업인으로 대단한 행복 아닌가요?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사진을 찍고 있다는 거, 그리고 꾸준히 해온 결과 지금은 특별한 사진이 됐다는 게 좋습니다."-반대로, 사진을 업으로 삼아서 느끼는 어려운점이 있다면."모든 일이 그렇듯이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마냥 좋지는 않죠. 고객을 만나는 게 주된 업무다보니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고요. 가장 힘든 건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고객들이에요. 특히 저희 연희동사진관은 필름촬영을 주로 하는데 필름촬영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시간이 정해져있어요. 평일엔 1~6시, 주말엔 2~4시반까지만 가능합니다. 예약시간에 늦거나 무단으로 취소하시면 운영에 차질이 생겨요.그런 '노쇼'를 방지하기 위해 촬영 가격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예약금으로 받거나 늦게 오는 사람은 아예 촬영을 해주지 않는 방법으로 일단 해결하고 있어요.특히 어려운 점은 저희 사진관의 촬영과 반대의 컨셉을 원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에요. 필름 촬영이고 보정이 없는 사진이라는 걸 알고 오시는 분들도 막상 와서는 보정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어요. 그럴때는 힘들긴 하지만 설득을 하죠. 우리 촬영의 컨셉을 설명하면 대부분 받아들이세요."-사진업은 요즘 '사양 사업'으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그 부분에 대한 고민도 현재진행형이에요. 하지만 대세의 흐름은 어쩔수없다고 봐요.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을 수 있게 된게 오히려 디테일한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이는데도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사진관도 자체적으로 변화를 모색해야죠. 디지털 기술로만 전환하고 가격을 싸게 하려고만 하지 말고, 원래 갖고 있는 전문 촬영 기술과 필름 시장을 살려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동네 사진관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준비중이에요. 동네 사진관들끼리 서로 어울려 일반인들에게 사진 기술 강좌도 열고 촬영 기법도 전하고. 우리가 먼저 고객에게 다가가야죠.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과 전문가들이 찍는 사진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촬영은 간편하지만 당장 사진이 실물로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스마트폰 메모장이 있어도 급할 땐 종이와 펜을 찾는거처럼 있듯이 아날로그는 사라질 수 없어요. 더구나 사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가져가는 거잖아요. 한 사람의 일생 동안요. 사진관도 없어지진 않겠지만 방향 설정을 다시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연희동사진관에는 가족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 '연희동사진관' 제공-필름 촬영의 매력은 무엇인가. "필름 촬영은 정해진 컷에서 결과물을 얻어야 하는 만큼 한 컷 찍을때 심혈을 기울이게 돼요. 그만큼 한 컷에서 다음 컷으로의 호흡도 길고요. 암실에서 인화작업 할 때도 사진 한장 한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돼요. 신기한 건, 사진을 찍는 저 못지 않게 사진을 찍히는 사람도 더 주의깊게 찍으려 한다는 거에요. 필름 사진은 보정을 안해주니까요.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앞으로의 꿈이 있다면."사람들의 영정사진을 잘 찍고 싶어요. 사진가들이 많이 하는 1년에 몇 번 양로원 가서 봉사활동으로 찍는 그런 거 말고요. 배경, 조명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써서 멋지고 화려하게요. 영정사진이라고 꼭 무겁고 어두울 필요는 없거든요. 그렇지만 진중하고 책임감있는 마음으로 찍고 싶어요. 그 사람의 인생 가장 전성기 때 모습을 컨셉으로 찍어도 좋을 거 같고요. 그건 제가 좀 더 내공을 쌓았을때 이룰 수 있는 꿈입니다. 그리고 삶을 꾸려가느라 잠시 놓아둔 독일 유학에 대한 꿈도 조금씩 다시 준비해보려 합니다."글 CCBB 에디터 김민정 시시비비랩
리틀 이건희, 대모…세계가 인정한 한국 대표 여성 CEO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869 추천 4 댓글 8
국내 여성 CEO(Chief Executive Officer)국내 여성 CEO(Chief Executive Officer)리틀 이건희·철의 여인·의약품 유통업 대모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이 6년 연속 꼴찌를 차지했습니다. 100점 만점 중 25점으로 29개 회원국 중 29위에 올랐죠. 유리천장 지수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직장 내 여성차별 수준을 평가한 것입니다. 간부직 내 여성 비율, 남녀 육아휴직 등 10가지를 평가하죠. 한국 여성 기업인 머리 위에 있는 유리천장이 높고 두껍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회사를 이끄는 여성들이 있습니다.포브스코리아가 2017년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CEO를 조사했습니다. 이중 여성 CEO는 21명이었습니다. 회사 창립부터 시작한 자수성가형, 가족경영으로 회사를 이끄는 오너가 출신,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전문경영인 출신 CEO를 알아봤습니다.호텔신라 이부진 대표(좌), 황타오(黃燾) 중국 비잉메이트 사장과 악수하고 있는 매일유업 김선희 대표(우) / 조선DB, 매일유업 제공◇세계에서 인정받는 오너가 출신 CEO호텔신라 이부진 대표는 국내 대표적인 오너가 출신 여성 CEO입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장녀로 경영방식이 이건희 회장과 닮아 '리틀 이건희'라고 불립니다. 호텔신라에는 2001년 기획부 부장으로 입사해 2011년 호텔신라 CEO로 취임했습니다. 이 대표는 재계 안팎에서 경영능력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면세점 사업 진출 후 헤네시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을 만나는 등 3년의 노력 끝에 루이비통을 인천공항에 유치했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2014년 택시가 신라호텔 회전문을 들이받아 5억원의 피해를 냈습니다. 운전사의 어려운 사정을 안 이 대표는 변상 의무를 면제해줬습니다. 그는 2017년 11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서 93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제약업계에는 보령제약 김은선 대표가 있습니다. 창업자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의 맏딸입니다. 1986년 보령제약 입사 후 전 부서를 거치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015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파워 여성 기업인 50인'에 선정됐습니다. 포브스는 선정 당시 “지난 2001년 부회장 승진 이후 보령제약을 매출액 3595억원의 제약업체로 키웠다”고 평가했습니다.매일유업 김선희 대표도 오너가 출신 CEO 중 한 명입니다. 국내 유제품 업계 최초의 여성 CEO기도 하죠. 매일홀딩스 김정완 회장의 사촌 동생입니다.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씨티은행, BNP파리바, UBS 등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2009년 매일홀딩스 김 회장이 김선희 대표를 매일유업 재경본부장으로 영입했죠. 당시 매일 유업 지분을 하나도 받지 않아 전문경영인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쳐 2014년 CEO로 승진했습니다.네이버 한성숙 대표(좌), 홈플러스·홈플러스스토어즈 임일순 대표(우) / 조선DB, 홈플러스 홈페이지 캡처◇매출 1~3위 기업 모두 전문경영인 출신여성CEO가 운영하는 기업 중 매출 1, 2, 3위를 다투는 기업 모두 전문경영인 출신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출 1위 홈플러스스토어즈(7조9456억원)는 임일순 대표가 이끌고 있습니다. 6조6629억원의 매출을 올린 홈플러스 대표기도 합니다. 코스트코, 바이더웨이 등에서 재무업무를 맡아 유통업계의 유리천장을 뚫었습니다. 2015년에는 적자에 빠진 홈플러스 재무부문장(CFO)과 경영지원부문장(COO)을 맡았고 흑자전환에 성공했습니다. 2017년 10월 대표로 취임했습니다.매출 2위 이랜드월드(6조5505억원)는 정수정 대표가 수장입니다. 1996년 이랜드그룹에 입사해 로엠 본부장, 미쏘 본부장 등을 지낸 패션업계 베테랑이죠. 2017년 2월에 CEO에 취임했습니다. 취임 후에는 부실사업을 정리하면서 올 상반기 20개 브랜드 흑자전환에 성공했습니다.매출 3위(4조6784억원) 기업 네이버는 전문경영인 출신 한성숙 대표가 이끕니다. IT기자 활동하면서 10여년 동안 전문지식을 쌓았던 그는 2007년 검색품질센터 이사로 네이버에 합류합니다. 본부장과 총괄 이사를 거치면서 ‘네이버 페이’, 글로벌 동영상 라이브 플랫폼 ‘브이 라이브’ 등을 만들었습니다. 2017년 3월 대표이사에 올라 IT업계에서 유일하게 유리천장을 깬 인물로 평가받습니다.이밖에 전문경영인 출신은 이랜드파크 민혜정 대표, 스마일게이트 엔터테인먼트 장인아 공동대표, 한독 조정열 대표 등이 있습니다.지오영 그룹 조선혜 회장(좌), 기보스틸 최승옥 대표(우) / 지오영 홈페이지 캡처, 기보스틸 홈페이지 캡처◇회사 설립과 성장 함께 한 자수성가형회사를 설립해 매출 1000억원이 넘는 곳으로 성장시킨 자수성가형 CEO도 있습니다. 지오영 그룹 조선혜 회장은 의약품 유통업계에서 '대모'라고 합니다. 지오영은 의약품 및 의료용품 도소매 업체입니다. 36살 늦은 나이에 창업해 11년 만에 매출액 1조원을 달성했습니다. 시장에 생소한 웹 주문 시스템을 도입했고 업계 최초로 자동화 물류센터를 구축 했습니다.'철의 여인'으로 통하는 기보스틸 최승옥 대표 역시 자수성가형 CEO입니다. 기보스틸은 철판 및 철강재 부품, 금속절삭 가공기계 제조 및 도매사업을 하는 중견기업입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대표 거래처죠. 최 대표는 졸업 후 세일철강에 입사. 업계 최초로 여성 영업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삼신철강(구 동암철강) 초대 CEO로 취임했고 1999년에는 직원 4명과 함께 독립해 기보스틸을 설립했습니다.이 밖에 자수성가형 CEO는 의약품 도매업체 비아다빈치 정영숙 대표, 식품 수입·유통전문기업 하이랜드푸드 윤영미 대표가 있습니다.글 CCBB 에디터 하늘 시시비비랩
꼭꼭 숨어있던 90년대 인기스타의 인생 2막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1051 추천 2 댓글 0
미용 관련 자격증만 13개···개그우먼에서 뷰티 전문가로1987년 19세때 MBC 개그 콘테스트 데뷔취미이자 유일한 낙을 '직업'으로 미용 자격증만 13개 뷰티 전문가로 거듭나“무슨 화장품 쓰는지 사진 찍어서 저한테 보내주세요. 뒷면에 붙은 성분표도요. 얼굴에 바르는 건 전부 다 찍어 보내세요. 꼭이요.”  홍대에서 작은 피부관리숍을 운영하는 정재윤(49)씨. 그가 나가려는 손님을 붙들고 신신당부했다. 손님의 얼굴 피부는 울긋불긋 이른바 ‘뒤집어진’ 상태였다. 손님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씨가 손님을 놓아주었다.  “아무리 숍에서 관리를 해도 피부가 민감한 분들은 화장품을 잘못 쓰면 소용없어요. 피해야 하는 화학성분도 많구요. 게다가 평소 수면시간, 먹는 약, 바르는 화장품, 음식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는 원래 30년전 개그우먼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초 후배 개그맨 박미선씨와 '별난여자'라는 코너에서 '미선이 할머니'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엔 라디오DJ, MC로 오랫동안 활동했다.정재윤씨. /jobsN이제는 뷰티 전문가로 더 유명하다. 피부미용사 국가 자격증, 대한경락사협회 경락 자격증, 국제발관리협회 자격증, 화장품전문가 1급, 아로마테라피 국제 자격증, 국제 왁싱 테라피스트를 포함해 13개 자격증을 땄다. 2013년엔 중앙대학교 의약식품대학원 향장미용학과 석사를 받았다. 운영하고 있는 숍은 100% 예약제이기 때문에 손님이 많진 않다. 30평 정도 되는 가게를 찾는 손님은 하루 5~6명 정도. 10회 분에 50만~70만원을 받는다. 각종 대학과 주요 기업에 강연을 나간다. 방송에서도 '개그우먼'보다 '뷰티 전문가'로 출연할 때가 많다. 숍운영, 강연, 방송 출연까지 합해 한해 수입이 억대다. 제2의 인생을 사는 정씨를 만났다.jobsN◇제2의 인생 성공 비결 1.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연예인은 사업을 시작하기가 비교적 쉽다. ‘유명인’이라는 점이 공짜 홍보수단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나 동업자를 찾기도 수월하다.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름만 빌려주는 ‘얼굴마담’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정씨는 동업자가 없다. 직원은 단 2명뿐이다. 손님이 누구든 정씨가 직접 상담하고 관리한다. 전부 관리하지 못하면 마무리 팩이라도 하면서 앞으로 피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꼼꼼히 조언한다. 가게를 비울 때는 직원에게 화상 통화로 지시한다.  “방송일이 아닌 다른 일로 성공하는 연예인들의 특징이 '직접 한다'는 점이에요. 대표적으로 배우 김종결씨를 보고 배웠어요. 여의도에서 큰 고깃집을 운영하는데 서빙이나 계산은 물론이고 신발정리도 직접 하세요. 그걸 보고 ‘저렇게 해야 성공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여러 연예인이 정재윤씨 가게를 찾아 피부 관리를 받는다. /정재윤테라피 블로그피부 관리를 하기 전 '상담'이 중요하다. ‘재밌는 상담’을 원칙으로 한다. 개그맨, 라디오DJ, 리포터, MC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쌓은 입담 덕분이다. 체질, 혈액형, 별자리에 따라 맞춤 상담을 한다. 재밌는 콘셉트로 고객이 상담에 집중하게 만든다.  “가령 별자리가 ‘쌍둥이자리’라면 쾌활하고 민첩해요. 속박을 싫어하고 잘 변화하는 스타일입니다. 쉽게 뚱뚱해지지는 않지만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감기 같은 잔병치레를 조심해야 합니다. 주로 소음인이 많은데 격렬한 운동보다는 요가를 하는 게 좋아요. 이런 분들은 레몬그라스, 일랑일랑, 로즈메리 같은 향이 좋습니다.”   30~40분 길게는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고객이 피부 고민을 털어놓다보면 '인생 상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피부 때문에 정신적으로 위축된 분들이 많아요. 실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도 많이 봤어요. 피부는 눈에 바로 보이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제 임무입니다.”고객의 체형과 건강 상태, 피부 상태를 자세히 파악하고 나서야 팩이나 마사지를 시작한다.  “손님이 ‘뭐 하러 왔어요’한다고 바로 해드리지 않아요. 지금 피부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알고 난 다음 관리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충분히 잡고 오라고 말해요. 사업가로만 보면 서운합니다. '전문가'로 봐주면 좋겠어요.”[1989] 신혜수+견미리 VS 박미선+정재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있지만 VS 짚시여인◇제2의 인생 성공 비결 2. 전문 지식을 쌓아라  어릴 적 꿈은 가수였다. 학교에서 장기자랑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뛰쳐나가는 학생이었다. 정씨가 중학생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이끄는 가장 역할을 했다.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한 후 1987년 MBC 개그맨 콘테스트에 응시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한가지 생각만 했다. 당시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엄니 성대모사로 단번에 합격했다. 3만명이 몰린 시험에서 최종합격자 10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세 때였다.  “개그 프로보다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음악 프로그램 녹화장을 더 많이 구경했던 것 같아요. 가수분들과 함께 노래 부를 때도 많았어요. 도시의 아이들, 박남정, 소방차랑 무대에 올랐죠.”  끼를 인정받아 무명생활 없이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하루 스케줄은 3개가 기본이었다. 아침 생방송, 지방 촬영, 스튜디오 녹화, 라디오 게스트 등 많게는 5~6개를 소화했다. 어린 나이에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개그계에서 살아남기에도 쉽지 않았다.개그맨, 리포터, DJ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모습. /정재윤씨 제공“한창 바쁠 때는 1시간씩 잤어요. 스트레스나 피로를 풀 시간이 없었죠. 방송국 주변에 있는 피부관리숍에서 마사지 받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3만~5만원, 비싸도 10만원이면 피로를 풀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어요.”  기회는 우연히 왔다. 2007년 ‘피부 미용사 국가 자격증을 시행한다’는 뉴스를 봤다. 1998년 재미 사업가와 결혼 후 딸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민간 피부 미용 자격증이 난립하고 있는데 이걸 모두 없애고 국가 자격증을 만든다는 내용이었어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바로 다음날 학원에 등록했다. 당시에도 그는 아침과 저녁에 라디오 DJ로 일하고 있었다. 시간을 쪼개며 전문 용어를 외우고 실기를 연습했다. 주말에는 아침9시부터 오후6시까지 종일반 수업을 들었다.방송에 출연해 피부 관리법을 설명하는 정재윤씨. /정재윤씨 제공“기술은 정직해요. 연습하면 할수록 늘어요. 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져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힘들지만 힘든 줄 모르고 했죠.” 공부와 방송일, 육아를 함께했다. 스트레스로 ‘돌발성 난청’을 앓기도 했다. 2008년 피부미용사 국가 자격증을 시작으로 미용 관련 자격증이란 자격증은 모두 땄다. 2013년까지 1년에 2개씩 딴 꼴이었다. 2010년에는 서울호서전문학교 미용과에 입학하고 내친김에 중앙대에서 석사까지 땄다.  “자격증 개수에 연연한 건 아닙니다. 하나를 공부하니 다른 하나도 공부하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대로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연예인이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면 ‘연예인이니까’라는 소리로 평가절하 받을 때가 많아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노력했으니까 지금은 자신 있어요. 많은 연예인들이 찾아오는데 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제가 실력이 없었다면 몇 번 오다 말았을 겁니다.”정씨가 딴 자격증과 상장 일부. /정재윤씨 제공◇제2의 인생 성공 비결 3. 고여있지 마라  정씨는 일주일에 2번씩 경기도 고양에 있는 미디어 센터에서 ‘1인 미디어’ 강의를 듣고 있다. 영상 촬영·편집·기획을 직접 하는 ‘크리에이터’로 나서기 위해서다. 7월 말 피부관리 지식을 전달하는 1인 창작자로 활동할 생각이다.  “제 나이 정도 되면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안일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걸 항상 경계하려고 해요. 신문이나 책보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유튜브 영상, 아프리카TV 파급력이 대단해요. 그런데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나올 때가 많더라구요. 전문가로서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디오DJ, MC를 많이 해서 재밌게 진행할 자신도 있습니다.”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사업실패→연봉 8천만원 ‘정년 없는 직업’ 찾은 30대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1319 추천 1 댓글 6
정년없이 연 8천만원 버는 남성의 직업은?강성일(38)씨는 한때 잘 나가던 휴대전화 대리점 사장이었다. 그는 “전성기엔 대리점 3곳을 운영하면서 수천만원대 월수입을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업계에 종사한지 8년째 되던 2012년 사업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억지로 버텨보려고 했지만 되질 않았습니다. 당시 업황이 좋지 않아 모두들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보증금까지 거의 까먹었을 정도였어요.” 결국 그 해 사업을 접었다.반려동물 장례지도사 강성일씨/본인 제공5년이 흐른 현재 강씨는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로 ‘제2의 인생’을 산다. 경기도 광주 반려동물 장례식장 펫포레스트에서 장례총괄 실장을 맡고 있다. 말하자면 이 회사의 장례지도사 4명 중 최고 책임자다. 자영업자에서 직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두 차례 이직을 거쳐 올해부터 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씨의 연봉은 8000만원. 업계에서 5년가량 경력을 쌓은 그는 “우리 나라에서 마음 편하게 웃고 살 수 있는 자영업자, 사장이 얼마나 되느냐”고 되묻는다. “직원이지만 보람을 느끼고 심적으로 훨씬 편합니다. 지금이 더 행복하죠.”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는 아직 일반에 생소한 신종 직업이다. 이 직업과 관련된 신뢰할만한 민·관 통계도 전무하다시피하다. 강씨는 “현직 종사자가 50명도 채 안 될 것”이라며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반려동물 산업이 유망하기 때문에 전망이 밝다”고 했다. 그를 통해 반려동물 장례지도사에 대해 알아봤다.  ① 어떻게 됐나 사업 실패를 겪고 먹고 살 방법을 고민한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평생 직업’과 ‘전망’이었다. 평소 반려동물에 관심이 있었던 강씨는 그쪽 업계에 몸담기로 결심했다. “반려동물 화장장 알바로 2년가량 일했습니다. 그러다 좀더 배우고 싶어 반려동물 산업 선진국인 일본에 갔습니다.” 2014년 봄 화장장 알바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엔 도시 곳곳에 반려동물 장례식장이 널려 있었습니다. 한 도시에만 50곳이 넘는 곳도 있었습니다. 장례문화가 정착된 것이죠.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반려동물 장례식장이 많이 생기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반려동물 사체를 염습하고 있는 강성일씨/본인 제공장례지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강씨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 장례식장을 찾아봤다.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 20곳 정도, 그나마도 절반은 ‘무허가’였다. 게다가 가족 회사가 대부분이라 신규 채용을 꺼렸다. 강씨는 당시 영업 중이던 모든 장례식장에 자필로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단 한 곳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회신을 받았다. 충남 예산의 한 장례식장이었다.  ② 수련기간과 관련 자격증은2014년 7월부터 장례식장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기술이라면 기술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 했습니다.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도제식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배운 기술 중의 하나가 ‘메모리얼 스톤’ 제작. 반려동물의 유골을 녹여 구슬이나 반지 등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2년반 이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고 경력을 쌓은 강씨는 2017년 1월 1일부로 현 직장인 펫포레스트로 이직했다.강성일씨가 실무 경험 이후 취득한 반려동물 관련 자격증/본인 제공아직 이 업계에서 자격증이 보편화 돼 있진 않다. 직업이 먼저 생기고 제도가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강씨는 2015년 12월 반려동물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사단법인 한국반려 동물관리협회에서 주관하는 민간 자격증이다. 1차 필기 시험(장례학 개론, 공중보건학 및 위생관리, 반려동물 장례행정)를 통과하면 2차 실기시험(장례절차 실습, 매개식물 관리, 펫로스 상담)을 치른다. “지금도 업계에서 자격증보다 운전면허증을 선호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점차 자격증의 중요성이 높아질거라 생각합니다.” ③어떤 일을 하나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는 장례절차의 상담, 절차 진행, 납골, 펫로스 극복 상담 등 장례 전반을 대행한다. 일단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장례를 의뢰하면 직접 데리러 가는 경우가 많다. 사체를 임시 운구함에 넣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면 사체를 닦는 염습을 진행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고객이 반려동물과 작별의 시간을 보낸다. 헌화를 하는 이들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장례를 진행하면서 고객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강성일씨가 근무하는 펫포레스트/본인 제공마지막으로 사체를 화장기에 넣는다. 화장기 운용 방법도 장례지도사가 알아야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 장례지도사가 아닌 전담 직원이 화장기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다른 회사는 보통 지도사가 직접 화장기를 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식을 진행할 때 관과 수의, 유골함은 어떻게 할지 고객과 협의하는 것도 지도사의 역할이다.  ④ 장단점은 반려동물 장례지도사의 장점과 단점은 모두 반려동물 자체의 특성에 비롯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반려인이라고 하는데, 반려인이 아니면 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공유하면서 장례를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실제로 강씨도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이는 ‘감정노동’이라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매일같이 슬퍼하는 고객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감정 이입이 되면서 함께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생활을 함께한 반려동물을 데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구슬프게 우셔서 계속 눈에 밟혔던 기억이 납니다.” 자연사가 아닌 사고사의 경우엔 끔찍하게 훼손된 사체도 많다고 한다.강성일씨는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장례지도사란 직업에 종사하기 어렵다"고 했다/본인 제공⑤ 근무 여건과 급여수준은 강씨는 업계 대우에 대해 “회사의 성과, 그리고 개인 실적이 연동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아직은 월 200만~300만원 수준이 가장 많다”고 했다. 경력과 근무실적에 따라 업계 상위권은 월 500만원을 넘게 벌어가기도 한다. 연봉 8000만원 수준인 강씨는 업계 상위권인 셈이다. 강씨는 “저도 월 200만원 수준부터 시작했다”며 “신규 업종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앞으로 대우가 점차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반 장례식장과 달리 반려동물 장례식장은 24시간 체제가 아닌 곳도 많다. 펫 포레스트도 그중 한 곳이다. 강씨의 경우 오전 9시에 출근, 오후 8시에 퇴근한다. 강씨는 “총 책임자인만큼 저는 주5일이 어렵지만 다른 직원은 대부분 주5일”이라고 했다. 다만 업종 특성상 연휴는 포기해야한다. 강씨가 하루에 처리하는 장례식은 보통 5~7건이다. 건당 1~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⑥ 향후 전망은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 국민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수는 총 457만이다. 인구로 치면 약 1000만명에 이른다. 강씨는 “기하급수적으로 반려동물이 늘고 있는 추세”라며 “이런 흐름에 발맞춰 장례문화도 선진국처럼 변할 것”이라고 했다. “아직 어려운 곳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급증 추세인 반려동물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기 때문에 미래를 보고 이 직업에 뛰어든다면 충분히 매력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수요는 10~15년 전에 태어난 반려동물입니다.”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전망/한국반려동물관리협회 홈페이지가장 중요한 일자리 개수가 대폭 늘 것이라고 강씨는 전망했다. 장례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관련 업체가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이다. “지난해 개정된 동물보호법에 처음으로 장례식장, 화장시설, 납골시설 등의 용어가 명문화 됐습니다. 과거엔 죽으면 그냥 버리는 경우도 흔했으나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게 되면서 장례식장을 찾는 이들이 점차 많아질 것입니다. 처음 업계에 종사한지 5년이 지난 현재 업체가 2배 수준인 35개로 늘어났습니다." 2009년 서울시가 예측한 반려동물 장례식장의 규모는 서울에서만 연간 8만3000마리 규모였다. 정년이 없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일할 능력만 있다면 나이는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고객이 나이든 분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0대 이상의 은퇴자를 고용하는 업체도 있다. 반면 단기적으로는 비교적 열악한 대우와 도제식 수련기간을 견뎌내야한다는 것, 그리고 반려동물 장례식장이 ‘님비 시설(Not In My Backyard·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뜻)’로 인식된다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글 CCBB 에디터 오유교시시비비랩
자고나면 매장 ‘뚝딱’…10억 빚을 4000억으로 바꾼 비결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1510 추천 7 댓글 8
유럽이 주목하는 '켈리델리' 켈리 최 회장유럽이 주목하는 '켈리델리' 켈리 최 회장 7년 만에 유럽 10개국 700여개 매장첫 사업 실패 10억원 빚 더미에서 재기 성공 켈리델리(Kelly Deli)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회사다. 도시락 브랜드 ‘스시 데일리(Sushi daily)’를 운영한다. 대형마트에 입점한 크기 15㎡ 매대에서 요리사가 초밥 도시락을 만든다. 인기는 폭발적이다. 2016년 매출 4000억원을 냈다. 올해 예상 매출은 5000억원. 유럽 10개국에 700여개 매장이 있다. 이 회사가 화제인 이유 중 하나는 창업자가 아시아 동쪽 끝에서 온 한국여성이라는 것이다.켈리 최 회장. /jobsN주인공은 켈리 최(Kelly Choi·본명 최금례·49) 회장이다. 그는 7년 전 프랑스 리옹에서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해 ‘유로피안 드림’을 이뤘다. 최근 성공담과 경영철학을 담은 책 '파리에서 도시락 파는 여자'을 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러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빈털터리 40대 한국인이 유럽에서 성공하기까지 최 회장은 전북 정읍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홀로 상경해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하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스스로 벌었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1988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7년 후 패션 중심지인 프랑스로 갔다. 하지만 ‘최고는 힘들겠다’는 한계를 느꼈다. 때마침 프랑스에서 한국 대기업을 상대로 광고회사를 하던 친구가 최 회장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최 회장은 한국인이고 3개 국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9년 동안 회사를 운영했지만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에게에게 남은 건 빚 10억원 뿐이었다. 그는 실패 원인으로 ‘모든 것을 다안다’고 착각했던 자만심, 눈앞에 있는 업무에만 매달리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꼽았다. “2년 동안 찌질하게 살았어요.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를 두고 ‘커피값을 내가 내야 하나’ 눈치볼 정도였죠. 죽고싶던 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겨우 다시 일어났습니다.”  경기를 타지 않으면서 창업 비용이 적게 드는 도시락을 생각했다. 2년 동안 마트 직원보다 더 오래 마트에 머무르며 시장조사를 했다. 유통·사업에 관한 책은 100권 이상 읽었다. 만나본 적 없는 전문가들에게 끈질기게 만남을 요청해 비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진심을 담은 메일을 보내고 수시로 찾아갔다. 프랑스 대통령이 국가 중요 행사마다 찾는다는 초밥 장인인 야마모토씨에게는 초밥 만드는 법을, 김밥 도시락으로 미국에서 성공한 스노우폭스 김승호 회장에는 경영방식을, 맥도날드 유럽 CEO 드니 하네칸(Denis Hannequin)에게는 글로벌 시스템을 배웠다.야마모토 장인과 켈리 최 회장. 야마모토 장인은 켈리델리에서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재료를 직접 고르고 정기적으로 신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켈리델리 제공“‘유명한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을거야’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들이대세요. 다만 들이대더라도 ‘센스있게’ 해야 합니다. 멘토로 삼고자 하는 사람의 저서와 인터뷰를 모두 읽으세요. 그 사람의 약력·철학·비전을 달달 외웁니다. 이렇게 하고도 해결 못한 궁금증이 있다면 메일을 보내보세요. 진정성이 통하면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답해줍니다.” 유럽 1등 마트 까르푸에 사업 제안을 할 때는 천운이 따랐다. 최 회장이 단 3장의 사업계획서를 까르푸에 보냈는데, 마침 까르푸 회장이 직접 그 계획서를 읽고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최 회장에겐 매대 설치·운영 비용조차 없었다. “파리시(市)의 창업지원사업에 뽑혀 자본금 3만유로(약 3900만원)을 지원받았어요. 까르푸와는 정식 계약 전에 2년 간 테스트 매장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즉석에서 초밥을 만드는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할테니 까르푸에서 운영 비용을 감당하라고 했어요. 까르푸에 돈을 꾼거나 마찬가지였죠.”  2010년 8월 프랑스 리옹 까르푸에 첫 매대를 냈다. 공장에서 생산하지 않고 요리사가 즉석에서 초밥 도시락을 만들었다. 요리사는 손이 크고 투박한 서구인 대신 젓가락을 써 손 근육이 섬세한 동양인만 채용했다. 또 생선과 밥 뿐인 기존 도시락과 달리 채소를 듬뿍 넣어 ‘건강한 음식’임을 어필했다. ‘마트 도시락은 형편없다’는 편견을 깼다. 최 회장은 까르푸에 사업을 제안할 때 월매출 3만유로를 약속했다. 개인 매장이 아닌 마트 안에 있는 작은 매대에서는 불가능한 매출이었다. 우려를 깨고 켈리델리 도시락은 고객의 이목을 끌면서 첫달에 7만5000유로(약 9700만원) 매출을 냈다. 지금도 14㎡~16㎡ 크기 매대에서 30만~450만 유로 매출이 난다. 캘리델리는 5500여명을 고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판 도시락만 1억5000만개가 넘는다. 시장 점유율은 50%로 업계 1위다. 지금도 하루에 한개꼴로 매장이 생긴다. 경쟁업체는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초기 맥도날드보다도 빠른 성장세다. (왼쪽) 매장에서 도시락을 만드는 직원들. /스시데일리 인스타그램◇대표가 자리를 비우고 세계여행할 수 있었던 이유 회사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자 2016년 7월 세계 일주를 떠났다. 13개월 동안 요트 하나에 의지한 채 남편, 딸과 17개국을 돌아다녔다. 4명의 CEO가 최 회장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직원들이 필요로 할 때만 화상통화로 회의에 참여했다. 처음엔 13일도 아닌 13개월 동안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고 만류했다. “성공한 여성 사업가라면 가정을 포기하고 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저는 행복하기 위해 사업합니다. 5살 딸이 크는 모습을 볼 순간은 지금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정의 행복’만을 위해 세계여행을 결심한 건 아니다.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장이 없어도 타격이 없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켈리델리의 시스템을 증명하고 싶었어요.”켈리 최 회장 부부는 2014년부터 세계여행을 준비했다. 요트를 제작하고 휴가 때마다 요트 타는 연습을 했다. 요트를 모는 법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을 익혔다. "유서 쓰고 요트 탔습니다. 대서양을 건널 때는 2주 동안 아무도 만날 수 없어요. 가령 맹장이 터지면 GPS 무전기로 구급대원, 병원 측에 연락해서 직접 수술을 해야 하죠. 별안간 준비없이 떠난 여행은 아닙니다." /켈리 최 페이스북켈리델리의 시스템이란 기업문화인 ‘totally togerther’를 말한다. ‘전적으로 함께’를 뜻한다. ‘가족 같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수평적인 문화’만을 뜻하진 않는다. 켈리델리에선 누군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동료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다. 평소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켈리델리의 기업문화는 프랑스 경영대학원 교재에 소개되기도 했다. “가족 같다고 동료를 막 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를 믿는다’는 의미예요. 켈리델리에는 ‘결재’나 ‘보고’가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서 해요. 동료들이 서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의심 안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게 실패하는 것이제 그의 꿈은 고속 성장 중인 켈리델리를 100년 기업으로 만드는 일이다. 도시락 사업에서 시작했지만 '아시안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회사를 목표로 한다. “오래가는 기업은 고객과 직원, 파트너사가 모두 행복한 회사입니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할 겁니다.” 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했다. “실패해보지 않는 게 실패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흙수저였다가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하나 있어요. 지금 절망해도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안될 거야’ 생각하기 보다 나의 오늘에서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 보세요.”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보석 같다” 외국인들 감탄 쏟아지게 만든 30대 한국인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1945 추천 9 댓글 12
기계공학 전공한 공돌이, 놋그릇을 세계에 알리다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2018년 9월 6일부터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박람회 ‘메종&오브제’의 거창유기 전시부스. 한 인도인이 100만 원짜리 1인용 반상기를 사겠다면서 전시된 제품을 그대로 싸달라고 했다. 스위스에서 인테리어업체를 운영한다는 그는 옻칠로 색깔을 입힌 놋그릇 접시를 보고 “보석 같다”며 연신 감탄했다. 벽장식으로 사용하고 싶다면서 지름 150cm로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인도의 식생활은 우리나라와 다를 텐데 반상기를 선뜻 가져가겠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한 스위스인은 보통 크기의 접시 10개를 200만원에 사갔죠.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놋그릇을 보고 ‘보석 같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릇이 아니라 작품으로 여기는 것 같았어요. 영국, 홍콩,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여러 나라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거창유기 3대 계승자 이기홍 장인(오른쪽)과 그의 아들이자 4대 계승자 이혁 씨.경남 거창에서 놋그릇을 만드는 이혁 씨는 3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해도 최첨단 자동차기술을 연구하던 엔지니어였다. 서강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만도 글로벌 R&D센터에서 일하던 그가 어떻게 우리나라 놋그릇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결심했을까?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박람회 ‘메종&오브제’에 참가한 그는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우리나라 놋그릇의 세계화 가능성을 증명했다.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놋그릇을 보고 ‘보석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릇이 아니라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영국, 홍콩,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여러 나라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2016년 대한민국 공예품 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거창 유기(좌), 놋그릇(중), 옷칠유기잔(우)거창유기는 1924년 김석이 장인이 거창공방을 설립하면서 출발해 94년 역사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거쳤다. 김석이 장인은 일제가 전쟁물자 확보를 위해 놋그릇 제작과 판매를 금지했을 때 끝까지 버티다 고초를 당한 후 광복 직후 사망했다. 그의 문하생이었던 이현오 장인이 1946년부터 그 뒤를 이었고, 그의 아들 이기홍 장인이 1979년부터 대를 이어 유기(鍮器), 즉 놋그릇을 제작해왔다. 이기홍 장인의 말이다. “보통 숯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산골에서 유기가 발달했고, 거창도 그런 곳 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거창에 놋그릇을 만드는 공방이 많았어요. 부엌에서 연탄을 사용하고 스테인리스 그릇이 퍼지는 등 생활문화가 바뀌면서 놋그릇을 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연탄가스 같은 유독가스가 닿으면 색깔이 금방 변하니까요. 요즘은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많지 않아 변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수건으로만 닦아도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거창유기 밥상◇1924년 설립, 94년 역사한 달에 반상기 세트 한 벌도 팔기 어렵던 시절, 이 장인은 징, 꽹과리나 불교용품, 제례용품 등을 만들어 팔면서 버텼다. 놋그릇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달라지는 식생활에 맞추어 제품 개발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을 인정 받아 2003년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혁 씨는 이기홍 장인의 장남. 아버지가 놋그릇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그 일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면서도 ‘금속의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어서 놋그릇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0대까지는 전공을 살려서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시면서 계획을 앞당겼습니다. 2010년, 제가 학사장교로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쓰러지셨어요. 거창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앰뷸런스에 실려 오실 정도로 위급한 상태였습니다. 열두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시면서 사경을 헤매기도 하셨죠. ‘아버지가 안 계시면 가족과 유기공장을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했습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놋그릇 산업의 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대량생산한 값싼 놋그릇이 쏟아져 나오면서 산업 트렌드가 바뀌는 게 느껴졌고, ‘우리나라 놋그릇이 경쟁력을 잃기 전에 뭔가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결국 2015년에 직장을 나와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죠.” 옆에서 듣고 있던 이기홍 씨는 “벌여 놓은 일은 많은데 건강이 좋지 않아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지만, 직장생활을 좀 더 하고 싶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때 선뜻 와준다고 하니 반갑고 고마웠죠”라고 말한다.거창유기 꽹과리접시(좌), 바닥접시◇파리의 한식당에서도 거창유기 놋그릇을이혁 씨는 거창유기에 합류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놋그릇 제작기술을 전수하면서 옻칠회화를 하는 정상엽 작가에게 옻칠을 배우려고 서울을 오가기 시작했다. 색깔이나 모양이나 비슷비슷한 놋그릇을 다양화하면서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다 ‘색감을 입혀보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빛에 주목했던 인상주의 화가 모네와 르누아르,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품을 그렸던 클림트, 색면 추상으로 숭고한 정신을 표현했던 마크 로스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가 만든 놋그릇에서 인상주의 작가와 클림트, 로스코가 모두 느껴졌다. 옻칠로 색을 입힌 놋그릇은 인상주의 작품처럼 화사한 색감이 먼저 눈길을 끈다. 군데군데 드러난 놋그릇의 금빛 바탕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두 가지 색을 사용한 접시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과 같은 감흥을 일으킨다. 그는 놋그릇에 색을 입힐 뿐 아니라 문양도 넣었다. 삼베 문양을 넣어 옻칠한 반상기 세트를 개발해 호평을 받았다. “서울 경의선숲길 근처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요수정’을 운영하는 신창현 셰프가 경남 거창에서 함께 자란 고향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거창유기의 놋그릇을 파스타 접시로 사용하고 다른 셰프들도 많이 소개해줬어요. 셰프들이 어떤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그 용도에 맞는 그릇들을 새로 디자인하면서 빠르게 바뀌는 음식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2017년 대한민국 우수공예품으로 지정된 거창유기의 식기 세트서울 북촌의 한식당 ‘두레유’나 파리의 한식당 ‘레스토랑 권’의 요청으로 새로운 그릇과 수저받침 등을 디자인했어요. 곰탕집 ‘옥동식’이나 팥빙숫집 ‘옥루몽’을 위한 그릇도 만들었지요. 삼베 문양 놋그릇도 ‘두레유’의 류현수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주물 유기로 삼베 문양 그릇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고, 현재 특허출원을 해놓았습니다.”요즘 이름난 식당 중 놋그릇에 음식을 내오는 곳이 많다. 놋그릇을 잘 닦아놓으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데다 보온이나 보냉 효과도 좋다. 뜨거운 음식을 담으면 더 뜨겁게, 차가운 음식을 담으면 더 차갑게 먹을 수 있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으로 만든 놋그릇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이나 병원성 비브리오, 유해 미생물을 죽이는 항균효과가 있는 게 밝혀지면서 건강에 좋은 그릇으로 더욱 인기다. 놋그릇에 음식을 내면 ‘정성껏 대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고급 식당들도 놋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창유기의 제품은 포크 하나에 1만원이 넘는다. 제기세트 110만원, 옻칠혼수세트 300만원 등 전반적으로 고가품이다.“고급 자기를 사용하던 식당들이 놋그릇이 비싸기는 하지만 깨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이라면서 놋그릇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는 짝을 맞추기도 어렵다면서요. ‘깨지지 않는 그릇’이기 때문에 혼수품으로도 인기입니다.” 거창유기 유화접시(좌)와 접시◇연매출 10억원그는 군대에서 중대장으로서 조직을 이끌고, 직장에서 유럽 출장을 다녔던 일 등 다른 일을 한 경험을 거창유기를 현대화·세계화에 녹여 넣었다고 말한다. 그가 합류한 후 거창유기는 더욱 적극적으로 제품 개발을 하면서 2016년과 2017년 연이어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차기 세트, 빙수와 죽 세트, 삼베 무늬 식기 등이 2017년과 2018년 대한민국 우수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2017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상을 받으면서 2018년 ‘메종&오브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2018년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8년 공예트렌드페어에도 참가한다. 저가 유기제품과 경쟁하느라 어려움을 겪던 거창유기는 그의 합류로 꾸준히 매출이 늘어 연매출 10억 원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놋그릇을 대중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지,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수공예 제품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출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수공예 제품으로 만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2024년이면 거창유기가 100주년을 맞습니다. 2024년까지 유기공예의 입지를 다지면서 전반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계시장으로 나간다는 ‘비전 2024’를 만들었어요.” 첨단 기술을 연구하던 30대 젊은 엔지니어는 이제 전통 놋그릇을 현대화와 세계화하는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글 CCBB 에디터 TC시시비비랩
20대 후반 반전 여사원으로…요즘 SNS에서 난리났어요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3468 추천 1 댓글 16
사무실 일화들로 속이 뻥! 인스타그램 웹툰 '삼우실' 김효은·강인경 작가연재 1년만에 14만 팔로어댓글로 사연 모집, 독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웹툰 1~2년 차 중고 신입들에게 공감대 넒어 인스타그램 웹툰 ‘삼우실’이 화제다. 직장인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으로 연재 1년 만에 14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리게 됐다. 직장에서 마주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당당히 대처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독자들은 매회 100개 넘는 공감 댓글을 남긴다. 지난 11월 초에는 그동안 연재한 ‘삼우실’을 재구성한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도 나왔다.웹툰 삼우실 중 '퇴근시간'웹툰 ‘삼우실’은 김효은 작가와 강인경 디자이너의 합작품이다. 글을 쓴 김효은 기자는 2008년, 그림을 그린 강인경 디자이너는 2017년에 CBS에 입사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에 CBS 보도국 소속의 SNS팀에서 처음 만나 함께 카드뉴스를 제작했다. 2017년 8월, 김효은 기자는 강인경 디자이너와 ‘노키즈존 해법’이라는 제목으로 3부작 콘텐츠를 만들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 공공질서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식당 주인, 그리고 그 식당을 방문하는 손님의 입장을 담았다. 이를 웹툰과 유튜브 영상,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사 형태의 글을 차례로 ‘노컷뉴스’의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웹툰 삼우실 중 '퇴근시간'“콘텐츠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어요. 웹툰은 100회, 기사는 190회 넘게 공유되고 댓글도 많이 달렸어요.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인 주제로 웹툰을 제작한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김효은)2017년 10월, CBS에는 ‘디지털미디어센터’가 생겼다. 디지털미디어센터는 인터넷 뉴스 플랫폼 ‘노컷뉴스’, 영상 저널리즘 채널 ‘씨리얼’, 고양이 전문 방송 ‘키티피디아’, 그리고 웹툰 ‘삼우실’을 만든다.웹툰 '삼우실'을 만드는 김효은 작가(오른쪽)와 강인경 디자이너◇우리 모두가 사무실에서 겪는 일‘삼우실’의 배경은 ‘대팔기획’이라는 회사다. 등장인물은 꼰대 같은 구 대표와 조 상무, 워킹맘 김 과장, 야근 많은 일만 사원, 소심한 막내 꽃잎 사원 등이다. 픽션이지만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익숙한 성격의 캐릭터들이다.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여자 사원 ‘조용히’다. 주말에는 상사의 전화를 받지 않고 원치 않는 회식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고구마처럼 답답한 상황에서 할 말 다 하는 사이다 같은 성격이다.“온라인 커뮤니티의 직장인 게시판을 둘러보는데 신입 사원들이 힘들어하는 글이 많았어요. 댓글에는 위로를 건네거나 공감하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요. 그걸 보니 제 주변 ‘중고 신입’들, 그러니까 1~2년의 경력을 가지고 입사한 사원들이 떠올랐어요. 그들은 짧게라도 직장 생활 경험이 있어 그런지 회사 내 불합리한 상황에도 노련하게 대처하거든요.” (김효은)한 달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7년 11월 17일, 1화 ‘미련’을 삼우실 인스타그램 계정(instagram.com/3woosil) 업로드했다. 화요일에는 10장짜리 스토리 만화가, 목요일에는 네 컷 만화를 한 장에 담아 올렸다. 시간대는 수차례의 실험을 거쳐 가장 반응이 좋았던 오후 5시로 정했다.웹툰 '삼우실'의 강인경 디자이너◇댓글로 직장생활 조언 구하는 독자들연재 1년이 채 되지 않은 11월 중순, ‘삼우실’의 팔로어는 약 14만 명에 달한다.“시작할 때 저희의 목표는 1년간 팔로어 1만 명 달성이었어요. 이렇게 단시간에 많은 독자가 생길 줄 몰랐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직장인의 마음이 아프구나’라는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강인경)‘삼우실’을 알리기 위해 두 작가는 한 달 넘게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스타그램을 들락날락하며 인친(서로를 팔로하는 ‘인스타그램 친구’의 준말)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 몇주간의 ‘손가락 마케팅’은 헛되지 않았다. 11화 ‘퇴근시간 1’업로드와 동시에 팔로어 수가 3000명이 늘었다.꾸준한 연재로 일관성 있는 콘텐츠가 점점 쌓이자 만화의 내용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독자들은 매일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막내라는 이유로 가기 싫은 워크숍 계획을 도맡아 짜는, 업무가 아닌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는 자신과 닮은 ‘삼우실’ 속 캐릭터의 모습에 감정이입 했다. 분노와 답답함은 주인공 조용히의 통쾌한 언행을 보는 순간 카타르시스로 바뀌었다.‘좋아요’와 댓글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디엠(인스타그램에서 일대일로 주고받는 대화인 ‘Direct Message’의 준말)이 오기 시작했다.“연재 초반에는 ‘만화 잘 보고 있다’는 것이 댓글과 디엠 내용의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본인의 직장에서 있었던 답답한 일을 털어놓는다든가,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분들이 생겼어요. 쌍방 소통을 하게 된 것 같아 너무 뿌듯했어요.” (강인경)웹툰 '삼우실'의 김효은 작가◇‘꼰대 퇴치법’ ‘최악의 갑질’ 사연 모집두 작가는 ‘삼우실’은 이제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콘텐츠’라고 이야기한다. 본인의 직장 속 일화를 제보하는 디엠이 많아지자 두 작가가 독자들의 사연을 ‘삼우실’ 에피소드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팔로어가 5만 명이 됐을 때는 독자들의 ‘꼰대 퇴치법’을, 10만 명이 됐을 때는 독자들이 겪은 ‘최악의 갑질’을 댓글로 모집하고 몇 명을 추첨하여 만화로 그려주는 이벤트를 열었다.“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휴대폰을 알루미늄 포일로 말아 신호를 차단해서 전화를 서서히 끊기게 한다는 댓글인데, ‘좋아요’ 460개가 넘었어요. 실제로 해보니 정말 5초 만에 전화가 끊기더군요. 기발한 아이디어에 웃음이 나면서도 ‘오죽했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라는 생각에 짠한 마음도 들었어요.” (김효은)두 사람은 2018년 11월 1일 ‘삼우실’을 재구성해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이라는 책을 냈다. 인스타그램에 연재한 웹툰에 김효은 기자가 쓴 에세이가 중간중간 곁들여 있다.책의 마지막은 ‘독자의 추천사’가 장식한다. 출간 한 달 전, ‘삼우실’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추천사 이벤트’ 글이 올라왔다. 독자들과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가 담긴 책이기에 추천사를 독자에게 받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건의 댓글이 책에 담겼다.웹툰 '삼우실'을 만드는 김효은 작가(왼쪽)와 강인경 디자이너김효은 기자와 강인경 디자이너는 앞으로도 ‘삼우실’ 연재를 이어가면서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에 도전할 계획이다. 2018년 11월 5일에는 ‘삼우실’ 유튜브 채널도 오픈했다. 기존의 웹툰에 더빙을 덧입힌 영상을 볼 수 있다.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짧은 응원의 메시지를 건넸다.“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려면 때로는 싸워야 하는 상황들이 있어요. 그럴 때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어요.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거든요.” (김효은)“싸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꾹 참아야만 한다면 저희의 만화를 보는 짧은 시간이라도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강인경)글 CCBB 에디터 TC시시비비랩
"제가 바로 카카오톡 인기 1위 이모티콘 작가입니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11333 추천 20 댓글 84
카카오톡 판매 1위 이모티콘은 누가 만들었을까? ‘옴팡이’ 작가 정다슬‘옴팡이’ 작가 정다슬2018년 한 해 동안 억대 수익커뮤니티 ‘웃긴 대학’에 만화로 시작pc방 알바 경험을 만화로 그리기도전화보다 SNS로 소통하는 일이 많은 요즘, 이모티콘은 점점 더 사랑 받고 있다. 2011년 11월 카카오톡이 처음 등장할 때 6개로 시작한 이모티콘 상품이 2018년에는 6500여개로 늘었고, 매달 2700만 명에 달하는 이용자가 22억건의 이모티콘 메시지를 보낸다.인기 캐릭터와 스타 작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기 이모티콘 작가는 억대의 수익을 올린다. 2018년 한 해 동안 카카오 이모티콘 판매 1위를 기록한 ‘옴팡이’를 만든 작가 정다슬 씨를 만났다. 말하자면 그녀는 카톡 이모티콘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작가다. 2017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한 작가는 같은 해 9월 옴팡이를 처음 내놓았다.정다슬 작가“이모티콘을 카카오 이모티콘샵에서 판매하려면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7월에 제안서를 제출하고 9월에 ‘승인’ 통보를 받기까지 마음을 많이 졸였어요. 경쟁이 심해 거의 포기했는데, 통과 소식에 기뻤습니다. ‘이번에 떨어지면 또 도전할거야. 예순 살이 될 때까지 도전해볼 거야’라고 마음먹었거든요. 잘 팔릴 줄은 몰랐고, 그저 내가 만든 캐릭터를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어요.”옴팡이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순위 2위까지 뛰어올랐다. 그 후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을 때마다 판매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이모티콘은 보통 24개 묶음으로 판매하는데, 옴팡이는 6탄까지 출시됐다. 지금은 7탄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한다.옴팡이 이모티콘◇캐릭터 상품도 출시이모티콘이 인기 끌면서 2018년 여름에는 인형, 공책, 볼펜, 가방, 달력, 휴대폰케이스 등 옴팡이 캐릭터 상품도 나왔다. 작가는 이모티콘을 내놓자마자 인기를 얻은 데 대해 “너무 운이 좋았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운이 좋기만 해서일까? 작가가 옴팡이를 만들기까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어릴 때부터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작가는 대학에 입학하자 대학생 커뮤니티 사이트 ‘웃긴 대학’에 만화를 올렸다.“남성들이 많이 보는 사이트여서 처음에는 조금 거친 내용으로 올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소재로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죠. 지금의 옴팡이 형태도 그때부터 그렸어요. 감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을 사람들이 퍼 나르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인기를 끌었고, 그 그림을 본 한 웹툰 작가가 ‘이모티콘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대학졸업 후에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제 일상을 만화로 연재하면서 이모티콘도 준비했습니다. 지금은 잘되면서 이 일에 전념하고 있어요.”옴팡이 이모티콘옴팡이는 찹쌀떡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한 몸과 분홍빛 볼로 눈길을 끈다. 동작 하나하나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뭐해’라고 묻거나 발끝으로 콕콕 찌르고, 베개 속으로 고개를 처박거나 ‘세상 밖은 무서워’라는 표정으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소금통 안으로 들어가 ‘짜져 있을게’라고 말하기도 한다.작가는 옴팡이에 대해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사랑이 많은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작가를 만나보니 캐릭터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의 친구들은 캐릭터를 보고 “정다슬 그 자체”라고 말한다고 한다.“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게 콤플렉스였는데, 그게 제 이모티콘의 특징이 된 것 같습니다. 저도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편이거든요. 감정 표현도 잘 못하고 삭이는 편인데, 이모티콘이 대신 해주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작가와 이모티콘이 꼭 닮은 경우가 많아요. 작가의 개성과 진솔한 마음이 담겨야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정다슬 작가◇마케팅회사 인턴 경험옴팡이 이모티콘에는 유독 하트 모양이 많이 등장하고 사랑에 관한 미묘한 감정표현이 많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기 좋은 이모티콘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초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한 남자애가 있었어요.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쓴 일기장이 따로 있을 정도였죠. 그때 너무 감정을 쏟아서인지 그 다음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어요.”그런데도 옴팡이에서 풋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고등학교 때 일기를 열심히 썼다고 말한다.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일기에 세세하게 적었다.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만화처럼 그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전공 중 문화 콘텐츠를 공부하다 1년 동안 마케팅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대학 재학 중 교수님 소개로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습니다. 연령과 관심사에 따라 고객을 세분화해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이었죠. 정직원으로 일해 달라는 제의까지 받았는데, 복학하면서 그만뒀습니다.”옴팡이 이모티콘옴팡이는 단순한 형태지만 섬세한 감정표현이 두드러진다. 작가는 이모티콘을 구상할 때 감정을 세밀하게 분류해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놀라는 감정 하나만 가지고도 기분 좋은 놀람과 기분 나쁜 놀람, 무서워서 놀랄 때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작가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할수록 사용자도 진정성 있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옴팡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끼는지 ‘엄마는 어디 있어요?’ ‘친구는 누구에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이모티콘을 구상하기에 앞서 나 자신의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게 중요합니다.”정다슬 작가◇서울이 낯선 20대 작가옴팡이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써온 일기,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을 분석한 경험, 커뮤니티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해온 독자들과의 꾸준한 소통 등이 모두 자양분이 되었다.그는 전남 광양에서 성장하고 충북 청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일이 많아지면서 2018년 여름에 서울로 이사했다는 작가는 “아직은 서울이 낯설고,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을 타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 발그스레한 볼과 처진 눈이 귀엽고, 맑고 순수한 느낌의 옴팡이는 느릿하게 행동하면서 소소한 감정까지 소중하게 간직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생활한 작가의 감성에서 우러나온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됐다.정다슬 씨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모티콘 작가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한다. “옴팡이는 20대인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나이가 들고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면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까요?”글 CCBB 에디터 TC시시비비랩
‘20대 부동의 1위’ 정보처리기사 제친 자격증은?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6616 추천 2 댓글 30
요즘 20대가 가장 많이 딴다는 이 자격증, 현실은?최근 1년간 가장 많이 딴 ‘지게차운전기능사’자차 있는 베테랑은 월 600만~700만원 번다현장에서 필요한 안전교육 부족하다는 말도그동안 20대가 가장 많이 딴 국가자격증은 정보처리기사였다. 공무원 시험 등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년 처음으로 정보처리기사를 제치고 1위에 오른 자격증이 있다. 바로 ‘지게차운전기능사’다. 10대(전기기능사)·40대(한식조리기능사)를 제외하고 30·50대와 60세 이상에서도 1위를 했다.지게차운전기능사는 지게차 운전·점검법과 기초적인 정비 능력을 평가한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로 나뉜다. 작년 8만1520명이 필기시험에 응시해 4만2655명이 합격했다. 실기시험은 7만961명이 응시해 3만3339명이 합격했다. 합격률은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47%였다. 2008년 필기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4만9명이었다. 10년 만에 응시자가 두 배 늘었다.걸스데이 민아는 지난 2014년 자신의 SNS에 굴삭기 자격증 인증 사진을 올렸다. /민아 인스타그램 캡처◇고등학교 갓 졸업한 20대부터 은퇴한 중년까지자격증 취득을 위해 중장비 학원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경기도 화성의 한 중장비 운전학원 직원은 “요즘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대도 학원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중장비 운전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를 염두하고 미리 자격증을 따 놓으려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같은 학원 관계자는 “보통 건설 회사나 취업 사이트를 통해 일자리를 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당장 지게차 운전을 안 해도 나중에 공장·물류센터 등에서 쓸 수 있으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학원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덧붙였다.서울중장비직업전문학교 관계자도 “건설 현장에서는 중장비 중에서도 지게차 수요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했다. 이어 “40대 수강생이 가장 많고 20대와 50세 이상도 학원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자동차 운전면허 1종 대형 면허가 있으면 따로 시험을 보지 않아도 일정 기간 교육만 받으면 3톤 미만 지게차는 운전할 수 있다. 공장이나 물류센터에서는 대부분 3톤 미만 지게차를 쓴다. 건설 현장이나 철광 회사에서는 보통 3톤 이상 지게차를 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지게차운전기능사를 취득해야 한다.채널A 유튜브 캡처◇자차가 대부분, 가격은 3000만원부터 4억원까지지게차는 각종 건설 현장이나 항만·제조 공장 등에서 쓰인다. 화물을 싣고 내리고 옮기는 일을 한다. 30년 이상 지게차를 운전해온 박상대 전국지게차연합회 수석 부회장은 “보통 20년 이상 일해야 베테랑 운전자로 본다”고 했다. “물론 현장에 베테랑 운전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주지만 초보자를 구하는 곳도 있다.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경험을 쌓으면 먼저 불러주는 곳도 생긴다.”건설 현장에서는 개인택시처럼 영업용 번호판을 단 지게차를 쓴다. 지게차를 보유하고 자차를 이용해 일하는 경우가 80% 정도다. 운전자는 건설회사와 계약을 맺고 차를 직접 몰고 가서 일한다. 지게차의 종류도 다양하다. 물류센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톤 이하 지게차부터 5·10톤, 100톤 짜리 지게차도 있다.국산인 두산 지게차는 3.3톤 디젤 모델이 3300만원, 4.5톤 모델이 4800만원 정도다. 25톤 초대형 지게차의 기본가는 4억1000만원 정도다. 두산산업차량 관계자는 “건설 현장에서는 3톤과 4.5톤 지게차가 주로 쓰인다”고 했다. 이어 “중고차 시세는 연식과 운행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고 덧붙였다. 지난 11월에는 전국지게차연합회 카페에 10년 동안 957시간 운행한 3톤 짜리 두산 지게차 매물이 1600만원에 올라온 적도 있다.◇지인 통해 일 구하기도···베테랑은 월 700만원 번다건설 현장에서는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건설근로자공제회가 2018년 11월18일 공개한 ‘2018 건설근로자 종합생활 실태조사 결과’에서 전체의 85.6%가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카페를 통해 구인·구직도 한다.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3년씩 건설 현장에서 일할 때도 있다. 그러면 철새처럼 가족과 떨어져서 지낸다. 집이 서울인데 대전에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고 하면 건설 현장 인근에 원룸을 구해서 산다. 예전에는 회사가 현장에 마련해준 컨테이너에 살았지만 사고나 화재 위험이 있다. 요즘은 근로자가 직접 원룸을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박 부회장은 “예전에는 새벽부터 일을 시작했다. 오전 6시가 넘어서 출근하고 오후 4시쯤 일이 끝났다. 요즘은 주택 밀집지역의 경우 민원 때문에 8~9시쯤 일을 시작한다. 보통 하루 5~6시간 일하고 한 달에 2일은 쉰다. 일이 많은 베테랑 운전자는 하루 종일 일한다. 수입도 천차만별이다. 차 없이 운전만 하는 기사는 적게는 월 200만원부터 베테랑은 350만원도 넘게 번다. 자차로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일하는 숙련자는 월 600만~700만원도 번다”고 했다.조선DB 제공◇사람은 몰리지만 건설 경기는 최악지게차운전기능사가 인기인 반면 올해 건설 경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8년 10월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8년 3분기 국내총생산(GDP)’에서 건설 투자는 이전 분기 대비 6.4% 줄었다. 건설업 생산도 5.3% 줄었다. 올해 건설 투자·생산 지표는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20년 만에 가장 저조했다.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올해 건설수주액이 작년보다 23조6000원 감소할 것으로 봤다. 수주가 줄면서 향후 5년 동안 산업생산액과 취업자 수가 각각 52조1000억원·32만6000명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120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전국지게차연합회 카페에서는 지게차운전기능사의 인기를 두고 불만도 나온다. “가뜩이나 일자리도 구하기 쉽지 않은데 사람만 몰리고 있다”, “일을 구하기 더 힘들어지기 전에 전업해야 하는 것 아니냐”, “지게차 운전하다가 사고도 많이 나는데 자격증은 너무 따기 쉽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돈보다 안전이 중요하다지게차는 철근 등 건설 현장의 위험물을 다루는 만큼 사고가 많다. 요즘은 현장에 외국인도 많다. 작업자 사이에 말이 안 통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다. 중장비는 후진할 때 ‘백 알람’(back alarm)이라는 경고음이 울린다. 요즘은 후진하면 ‘비켜주십시오’라는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로도 조심하라는 음성이 나오도록 만든다. 현장이 정신 없고 다들 자기 일 하느라 바빠서 차가 오는지 신경을 못 쓰고 있다가 사고가 발생한다.박 부회장은 “사고 치료비 때문에 집까지 팔아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보험에 가입했지만, 사고가 나면 운전자 개인 책임으로 몰아간다는 설명이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걸고 일해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 모르고 그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현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글 CCBB 에디터 송영조시시비비랩
금 아닌 다이아 물고 태어난, 세계 최고 부자왕입니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4398 추천 7 댓글 8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은?1위는 33조원을 가진 태국 국왕모나코 알베르 2세, 국토의 25% 소유 왕실자금 운영기관서 기업처럼 운영도왕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신분이다. 왕족으로 태어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세계의 왕족 중 일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아랍국가 국왕들의 자산 규모는 수십조 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등 일부 유럽 통치 왕실의 순자산 역시 여느 글로벌 기업 못지 않은 수준.부자 왕족들은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자산을 물려받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왕족들은 별도의 왕실자금 운영기관을 두고 왕실 자산을 재투자해 부를 창출하기도 한다. 왕족들은 자산을 기업처럼 운영한다. 일부 유럽의 왕족들은 왕실활동비로 막대한 양의 경비를 받기도 한다. 세계 왕실의 자산 규모는 얼마일까.태국 국왕 마하 와치랄롱꼰 / 출처 태국왕실 홍보실1. 태국,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 : 순자산 33조원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은 태국의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이다. 태국 왕실 재산이 구체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지난 5월 태국 왕실 재산 규모를 300억달러(약 33조4230억원) 이상으로 추정했다.태국 왕실의 자산은 태국 왕실자산국(CPB)이 운영한다. 부친인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 서거 한 달여 만인 2016년 12월 왕위를 물려받은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지난 6월18일 왕실 재산 승계 절차를 마무리했다. 그동안 자체적으로 관리해 온 모든 왕실 재산은 새 국왕의 개인 재산과 합쳐져 관리된다.태국 왕실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이다. 태국 2위의 상업은행인 시암 커머셜 뱅크와 태국 최대 기업인 시암 시멘트도 왕실 재산이다. 왕실이 보유한 이 두 기업의 가치는 대략 90억달러(약10조원)다.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545캐럿 골든 주빌리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고 있다.브루나이의 술탄 하사날 볼키아 / 출처 위키피디아2. 브루나이, 하사날 볼키아 국왕 : 순자산 22조원석유생산국인 브루나이 왕실의 주요 재원은 석유와 가스 산업이다. 브루나이의 술탄 하사날 볼키아의 추정 순자산은 200억달러(22조2820억원)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에서 살고 있으며, 이 궁전의 가치는 3억5000만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롤스로이스만 600대 넘게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사우디 아라비다 국왕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 출처 위키피디아3. 사우디 아라비아,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 : 순자산 19조원사우디 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의 순자산은 약170억달러(약19조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재산 대부분은 범아랍권 미디어그룹에서 나온다. 사우디 왕족은 범아랍 일간지 아샤르크 알아우사트와 알 에크티사디아를 포함한 미디어 그룹을 소유하고 있다.맨체스터시티 구단주 '만수르'의 형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UAE 아부다비의 국왕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 출처 위키피디아4. UAE 아부다비,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국왕 : 순자산 16조7000억원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사장 겸 아부다비 국왕인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은 UAE의 잉여 석유 매장량을 관리하는 아부다비 투자청장으로 재산을 모았다. 2018년 그의 자산은 150억달러(약16조7000억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동생이 그 유명한 만수르다.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니하얀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시티의 구단주이자 ‘하노칼’이라는 국제석유투자회사 소유주다. 만수르 가문의 보유 재산은 5600억 파운드(790조원)에 달한다.모로코의 국왕 모함마드 6세 / 플리커 제공5. 모로코, 모함마드 6세 국왕 : 순자산 6조3400억원모함마드 6세의 재산은 주로 모로코의 민간지주회사 형식의 투자회사 국립투자협회(SNI)에 대한 왕실 지분에서 나온다. SNI는 모로코를 포함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해 은행, 통신, 재생 에너지 분야 등에 투자한다. 모함마드 6세 왕실의 순자산은 57억달러(6조3400억원)으로 추정된다.리히텐슈타인의 한스 아담 2세 공작 / 위키피디아6. 리히텐슈타인 공국, 한스 아담 2세 공작 : 순자산 5조5600억원유럽 왕족 가운데 가장 많은 순자산을 보유한 사람은 리히텐슈타인의 한스 아담 2세 공작이다. 50억 달러(5조5600억원)에 달하는 리히텐슈타인 왕실의 자산은 리히텐슈타인공작재단(Prince of Liechtenstein Foundation)이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왕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프라이빗 뱅킹그룹 LGT 은행과 부동산, 숲, 와이너리 등을 관리한다. 한스 아담 2세 공작은 왕실 경비로 연간 27만709달러(3억184만원)를 받는다. 엄밀히 리히텐슈타인은 왕국이 아니다. 고위 귀족인 리히텐슈타인 일가가 지배하는 땅이다. 그래서 공국 혹은 후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작, 후작이 왕처럼 다스리는 영토란 의미다.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 / 출처 Denis Probst7.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 : 순자산 4조4500억원앙리 대공은 급여를 따로 받지는 않지만 왕실 활동을 위한 경비로 매년 32만5000달러(약3억6200만원) 가량을 받는다. 올초 공개된 2017년 왕실 예산 가운데 앙리 대공 가계의 비용 지출은 1218만1914달러(135억8000만원)였다. 룩셈부르트크 경우 왕실 가문의 자산은 모두 앙리 대공 소유로 귀속한다. 룩셈부르크 왕족의 순자산은 40억달러(4조4500억원)으로 추정된다.카타르의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 출처 위키피디아8. 카타르,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 : 순자산 1조3000억원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그의 아버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가 국왕직을 사임한 이후 카타르의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의 자산은 12억달러(1조3000억원), 아버지가 보유하고 있던 자산은 24억달러(2조7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카타르 왕실의 자산은 대부분 석유와 가스 매장량을 관리하는 카타르 투자청에서 나온 것이다.모나코의 알베르 2세공 / 플리커 제공9. 모나코, 알베르 2세공 : 순자산 1조1100억원모나코의 알베르 2세공은 국가의 4분의 1 상당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자산은 10억달러(약1조1100억원)이다. 모나코 국토의 면적은 1.95km²로 서울 여의도 크기의 23% 수준이다. 알베르 2세공의 어머니는 할리우드 여배우 출신인 그레이스 켈리다. 알베르 2세공의 자산엔 2016년 75만4000달러(약8억4000만원)에 구입한 어머니 그레이스 켈리가 살던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동산과, 클래식 자동차 컬렉션, 주식, 고가의 우표 수집 등이 포함돼있다. 2015년 모나코 국가가 왕실을 위해 쓴 돈은 5278만8294달러(638억8000만원)에 이른다.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 출처 OGL10.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 순자산 6000억원영국 왕실의 자산은 왕실 소유지 관리 위원회(Crown Estate)가 관리한다. 부동산, 예술품, 주식 등으로 구성돼있으며, 버킹엄 궁전과 보석 등 대부분의 자산은 여왕 개인이 아닌 국가에 귀속된다. 스코틀랜드의 발모럴 성, 노퍽 샌드링엄 하우스는 여왕의 소유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 자산은 5억3000만달러(6000억원)로 추정된다.   글 CCBB 에디터 TC시시비비랩
한국서 날개 돋친듯 팔리는 명품백, 그 시작은 이랬습니다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5412 추천 4 댓글 14
벨보이에서 224억 달러 명품 브랜드 창립자로명품 브랜드 창립 스토리벨보이·짐꾼에서 명품 브랜드 창립‘구찌(Gucci)·샤넬(Chanel)·발렌시아가(Balenciaga)·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연간 조(兆)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명품 패션 브랜드들입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하고 한 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실력을 쌓은 장인들이 제품을 만들죠. 구찌와 샤넬은 '2018 명품 브랜드 가치 TOP10'에서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인이 알아주는 브랜드라는 것 말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창립자들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죠. 어떻게 자신의 브랜드를 창립하고, 세계 10위 안에 드는 브랜드로 성장시켰는지 알아봤습니다.(왼쪽부터)구찌오 구찌, 가브리엘 샤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살바토레 페라가모 / fashion elite, chanel youtube, google art&culture, catwalkyourself 캡처◇호텔 벨보이에서 224억 달러 명품 브랜드 창립주로'뱀부백(bamboo bag)', GG로고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 브랜드 가치만 224억 달러(한화 약 25조)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브랜드는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만들었습니다.그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 무렵 영감을 얻고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파리와 런던으로 건너갔습니다. 런던에서는 샤보이 호텔(savoy Hotel)벨보이로 일했습니다. 귀족과 상류층의 짐가방을 나르면서 그들의 취향과 문화를 익혔습니다. 그러던 중 상류층이 쓰는 최고급 짐가방에 감명받은 그는 1900년대 초 피렌체로 돌아가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기술을 배운 그는 1921년 피렌체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열고 장갑, 부츠 등 승마용품을 중심으로 한 가죽제품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작업장을 확장해 본격적으로 핸드백·신발·장갑 등 패션 소품을 만들었죠. 상류층이 즐기는 패션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1945년 위기를 맞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물자가 부족해진 것입니다. 이때 많은 이탈리아 가죽 업체가 도산했습니다. 구찌는 돼지 피혁과 당시 유일하게 수입할 수 있었던 일본산 대나무로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구찌를 대표하는 뱀부 백이 탄생했죠. 1953년 구찌오 구찌가 죽자 그의 아들 알도 구찌, 바스코 구찌,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나눠 가졌습니다. 그러나 가족경영 체제를 이어가던 중 형제끼리의 불화가 생겼고 구찌는 경영난을 겪었습니다. 결국 1989년 구찌 일가 형제들은 지분을 전문 투자 기업에 넘기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했습니다.구찌 뱀부 백(좌), 샤넬 2.55(우) / fashion elite, 1stdibs 캡처◇카바레에서 노래 부르던 ‘코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은 '샤넬 넘버5', '혼수백' 등으로 유명합니다. 2017년 매출 96억2000만달러(한화 약 10조7000억원)를 기록했습니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났습니다. 12세 때 엄마가 병으로 죽자 자식을 키울 능력이 없던 아빠가 그와 동생을 수녀원에 맡겼습니다. 18살에는 수녀원에서 나와 보조 양재사로 일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샤넬은 밤에는 카바레에서 가수로 일했습니다. 당시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라는 노래를 즐겨 불러 ‘코코’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그는 1910년 바느질 솜씨를 살려 파리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가게를 열었습니다. 샤넬은 당시 화려한 장식을 다는 유행과 달리 심플한 디자인의 모자를 만들어 팔았고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915년 패션 부티크 ‘메종 드 꾸뛰르’를 열고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과 땅에 끌리는 치마를 입었습니다. 샤넬은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라’는 철학을 담아 옷을 디자인했죠. 남성 운동복용 옷감 ‘저지(jersey)’를 이용해 저지 원피스를 만들었습니다. 코르셋을 입을 필요가 없는 널널한 라인, 무릎까지만 오는 치마로 여성들의 활동성을 높였습니다. 이후 상복에만 사용하던 검정색을 이용해 '리틀 블랙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또 깃이 없는 가디건 재킷과 무릎 라인까지 오는 스커트가 상징인 ‘샤넬 수트’, 퀄팅(quilting·누빔) 처리한 가방에 체인이 달린 ‘2.55 백’ 등을 출시했죠. 87세에도 컬렉션을 준비하기에 바빴던 그는 197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샤넬 화보 찍은 블랙핑크 제니(좌), 발렌시아가 신발을 신은 헨리(우) / 하퍼스 바자, 헨리 인스타그램◇어머니늬 삯바느질 돕던 아들, 완벽주의 '쿠튀리에(couturier·브랜드 대표 디자이너)'로올해 패션 아이템으로 떠오른 '어글리 슈즈'를 선도한 브랜드 발렌시아가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가 창립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어촌 출신으로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머니를 돕는게 일상이었습니다. 덕분에 13살에는 옷 한벌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해 자신의 동네로 휴가를 왔던 귀족 부인의 드레스에 반해 똑같은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원작보다 더 깔끔한 재봉을 선보였고 귀족부인의 추천으로 한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죠.1919년에는 자신의 가게를 오픈했고 2, 3호점을 내면서 성장했습니다. 1937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딴 매장을 오픈했죠. 첫번째 파리 컬렉션으로 성공을 한 후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의상 구상부터 재단, 봉재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할 수 있는 유일한 쿠튀리에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맞춤복인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시대가 지고 기성복인 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가 유행했습니다. 흐름에 맞춰 공장을 알아봤지만 공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품질의 옷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업을 포기합니다. 결국 1968년에 은퇴 후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996년 프랑스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영입하고 인기를 되찾았습니다. 그가 루이비통으로 떠난 후에는 알렌산더 왕을 거쳐 뎀나 바잘리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오드리 헵번의 플랫 슈즈 / heroine 캡처◇농촌 출신 구두 제작자 할리우드를 사로잡다이탈리아 나폴리 농촌 출신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자신의 이름을 딴 명품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14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구두와의 인연은 9살 때 여동생의 신발을 만들어 주면서 시작됐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11살에 구두가게에서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6살 때 형제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1919년 캘리포니아에서 구두 제조 및 수리점을 열었습니다. 영화 소품으로 쓸 신발을 만들어 납품하면서 회사를 키웠습니다.더 편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 페라가모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했죠. 신발 중앙에 철심을 박아 체중을 지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뛰어난 착용감을 자랑하는 신발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1927년 미국 경제가 안 좋아지자 다시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이름을 딴 살바토레 페라가모 컴퍼니를 설립했습니다.이후 다양한 소재와 참신한 디자인의 구두를 제작했습니다. 코르크 웨지힐도 이때 만들었죠. 1948년에는 미국 뉴욕에 첫 번째 직영매장을 열었습니다. 메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그의 구두를 신으면서 인지도가 올라갔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페라가모는 196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의 가족이 경영을 맡았고 향수, 시계 등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갔습니다.글 CCBB 에디터 하늘시시비비랩
16년 고생 끝에 이름 알린 걸그룹 트와이스의 ‘엄마’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4
조회 6573 추천 6 댓글 19
가수 겸 보컬 트레이너 김성은씨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는 베테랑 '노래하는 법'뿐만 아니라 직업정신 가르치는 직업김성은(38),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프로듀스 101의 ‘성은쌤’이라 하면 바로 얼굴이 떠오른다. 101명의 소녀들을 때론 따끔하게 혼을 냈고, 때로는 따뜻한 말로 격려하던 그 사람. 그녀는 트와이스, 방탄소년단을 가르친 보컬 선생님으로도 유명하다. JYP·큐브·빅히트·플레디스·안테나뮤직 등 내로라하는 기획사에서 보컬 트레이너로 일했다. 국내를 넘어 외국인 가수 지망생에도 노래를 가르친다. 중국판 프로듀스 101 ‘몽상지려’, 미얀마 오디션 프로그램 ‘갤럭시스타2017’에도 보컬 트레이너로 출연했다. 김성은씨. /CCBB김씨의 이력서엔 보컬 트레이너 경력을 2010년 시작했다고 씌여있다. 하지만 실제 경력은 2002년부터라고 봐야한다. 그 무렵부터 대학 후배, 가수 지망생을 알음알음 가르쳤기 때문이다. 올해 16년차 베테랑이다. 하루에 소화하는 스케줄은 3~4개. 방송출연, 개인 레슨, 연습생 트레이닝, 대학 출강으로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다.보컬 트레이너로 유명하지만 본업은 가수다. 허스키한 목소리와 소울창법이 특징이다. 가수 활동명은 ‘AG성은’. 은(銀)을 화학기호로 ‘AG’라 하는데 여기서 따왔다. 방송사에서 자주 부르지만 가수 AG성은에 대해 묻지는 않는다. 무대 뒤에서 주로 활약하는 ‘아이돌 메이커’로 알려진 탓에 자신의 이야기보다 아이돌의 데뷔 전후 에피소드를 들려줄 때가 많다. 이번에는 온전히 그의 직업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로듀스 101 시즌 1에 출연한 김성은씨. /김성은씨 제공◇보컬 트레이너보다 '가수'가 먼저였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는 항상 음악이 흘렀다. 아버지가 모아둔 LP판 덕분이었다. 그 영향을 받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가수를 꿈꿨다. “제가 학창시절을 보낼 때는 팝의 전성기였어요. '머라이어 캐리, 자넷 잭슨, 휘트니 휘스턴, 뉴키즈 온더 블락'처럼 지금 ‘전설’이라 불리는 가수들이 현역으로 활동할 때였죠. 국내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가 한국 가요판을 흔들고 있었어요.” 그의 어릴 적 꿈은 단 하나. ‘대전을 떠나 서울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음악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학교에 ‘밴드 동아리’도, 악기를 다룰줄 아는 학생도 없었습니다. 정말 폭포수 아래서 소리 지르고, 식초물 마셨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수백번씩 들었죠. 서울 대학로, 홍대를 누빌 그날을 꿈꾸면서요.” 악바리처럼 공부해 1998년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 학비를 충당하고 음악을 배우러 다녔다. 공연하는 모습. /김성은씨 제공2학년 때 흑인 음악 동아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연을 하러 다녔다. 스컬, 미료, 재즈보컬 남예지 같은 내로라하는 뮤지션이 같은 동아리 출신이다. 당시 대학 보컬·밴드 동아리는 대학 축제 뿐만 아니라 힙합 클럽, 기업 행사 등 불러주는 곳이 많았다. “1학년 때 아르바이트 시급이 1700원이었는데,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해도 한달에 40만~50만원 벌었어요. 반면 공연은 무대에 한번 서고 15만~20만원을 받았어요. 통장에 항상 200만~300만원 있었던 거 같아요. 백화점 같은 곳에서 협찬도 받았어요. 대학 동아리로는 축복받은 세대였죠.” 김씨는 래퍼가 즉석에서 가사와 비트를 만들 듯, 즉흥으로 멜로디를 만들 줄 알았다. 그 무렵 기획사에서 앨범을 내자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김씨가 직접 작곡·작사를 한 곡으로 앨범을 준비했다. 하지만 계약을 맺기 직전 앨범 발매가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니, 서울음반을 포함해 회사를 여러번 옮겨 다녔다.  “2000년대 초반 음반 시장은 CD에서 음원으로 넘어가고 있었어요. 솔로보다 그룹이 주목 받았구요. 이렇게 급변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에 저는 뛰어나게 예쁘지도 않고, 특색있게 부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대중을 생각하기 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고집하기도 했구요." 그룹 '앨리캣'으로 활동할 때 공연 모습. /김성은씨 제공2003년 MC스나이퍼의 2집 타이틀 ‘한국인’에 보컬로 참여했다. 대중에게 가수 ‘AG김성은’을 알린 계기였다. 이후 키네틱 플로우, 아웃사이더, 배치기, 슬로우잼의 앨범에 참여해 멜로디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가수 ‘AG성은’의 단독 앨범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2009년엔 지인에게 사기까지 당했다. 그 좋아하던 ‘노래’를 증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 스튜디오 다 정리하고 제자 집에서 얹혀 살았어요. ‘가수’ 안한다고 했죠. 부모님께 효도는 커녕 끼니 걱정을 해야 했으니까요. ‘노래’와는 관련 없는 학원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다른 직업을 찾았어요.” 김성은씨. / CCBB모든 걸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2010년 데뷔를 앞둔 걸그룹 ‘달샤벳’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그가 맡은 연습생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자, 큐브에서는 그에게 신인개발팀을 맡아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내친 김에 2011년 '위대한 탄생'에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이때 방시혁 프로듀서의 회사에 속한 방탄소년단 진, 정국, 크나큰의 인성을 가르쳤다. 연달아 트와이스, 샘킴, 이진아를 가르치면서 '보컬 트레이너'로 자리 잡았다. (상단 왼쪽부터) 트와이스, 트와이스 쯔위와 사나, 방탄소년단 진, 정국 /트와이스 공식홈페이지, 방탄소년단 공식 페이스북◇보컬트레이너의 삶 김씨는 ‘더블유아이컴퍼니’라는 회사를 이끌고 있다. 그를 포함해 보컬 트레이너 5명이 속한 ‘보컬 팀’이다. 기획사의 의뢰를 받아 가수 지망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친다. 발성, 호흡, 기교 같은 실전부터 음악의 역사 같은 이론도 알려준다. 김씨와 다른 보컬 트레이너들이 연구한 커리큘럼이 있다. 순서대로 할 때도 있지만 기획사와 의논해 과정을 바꾸기도 한다.“보컬 트레이너를 시작하면 처음엔 시간당 2만원을 받아요. 이후 5000원씩 올라갑니다. 보통은 4만~5만원을 받아요. 저는 10만원 정도 받습니다.” 연습생들에게 김씨는 '엄마'와 같은 존재다. 노래만 가르치지 않는다. 노래 이외 가수로서 가져야 할 직업의식·가치관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눈다. “노래를 업(業)으로 삼으려면 지겨워요. 수천번 외우고, 부르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노래부르는 게 마냥 즐거우면 안되요. 공인이니까 무책임한 말도 하면 안되구요. 연습생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잘 설명해줘야 해요.” 연습생과 아이돌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말도 빼놓지 않는다. 연습생 대부분 중·고등학생이며 대부분 10대 후반에 데뷔한다.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나이에 악플을 보고 마음이 쉽게 다친다. 김씨는 연습생들이 유쾌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하지 않아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귀하다’는 말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강단이 있어야 해요. 혼낼 때도 있어요. 그때는 ‘너 자신이 아니라 부족한 실력·직업 정신·책임감을 지적하는 거다’라고 말해요.”프로듀스 101에 출연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맨 오른쪽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이 김성은씨다. /김성은씨 제공‘프로듀스 101 시즌1’은 김씨에게 도전이었다. 보컬 트레이너는 가수가 음원을 녹음하거나 무대에 설 때 어떻게 불러야 할지 지도하기도 한다. 같은 노래라도 편곡에 따라,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듀스 101'에서는 보컬 지도, 음원·무대 디렉팅을 한꺼번에 해야 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3~4일, 많아야 일주일을 줘요. 그 사이에 애들을 무대에 올려도 손색없을 만큼 만들어놔야 합니다. 애들도, 스태프도 잠을 못자요. '며칠 전에 잤어'가 안부인사였어요. 방송에는 실전만 나왔지만 ‘스트리트 리듬이 어떻고, 바운스 리듬은 뭐고’하는 이론도 싹 다 가르쳤어요. ‘같은 곳에서’ 음원 녹음할 때는 B1A4 진영씨랑 생방송 직전에 12시간 동안 디렉팅 했죠.” 가르친 제자들이 데뷔해 1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다. '성은쌤 고맙다'며 먼저 연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제자들을 떠올릴 때면 안타깝다. 어릴 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다. "10대, 20대를 통째로 바쳐도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돌을 가르치고 만드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재즈싱어 겸 피아니스트 써니와 함께한 '주크박스'로도 활동 중인 김성은씨. /김성은씨 제공◇늦게 피는 꽃도 아름답더라 보컬 트레이너로 인정받으면서 끼니 걱정은 안 한다. 1년에 서너번은 어머니를 해외여행 보낼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가수'로 각인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2009년 랩퍼 언플러그드소울(unpluggedsoul)과 혼성듀오로 첫앨범을 냈다. 2013년엔 ‘앨리캣’이라는 그룹으로 앨범을 냈다. 재즈가수 써니와 ‘주크박스’라는 팀으로도 활동 중이다. 솔로 앨범은 2015년 ‘One way’가 처음이다. 잘 팔리진 않았다. 그는 앨범을 냈을 때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제 데뷔하나' 싶으면 무산될 때가 많았어요. 일종의 트라우마랄까요. 좋아하는 티를 내면 지금 이 기회와 행복이 달아날 것 같았어요.”“‘중이 제머리 못깎는다’고, 아직 가수로서 제 색을 완전히 찾진 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왜 노래를 부르는 지는 확실히 알아요. 얼마 전 공연이 끝나고 내려오는데 관객분이 ‘당신 노래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 참 좋은 일 하고 있다’고 말해주셨어요.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힘을 얻는다면 충분해요. 상업적인 성공은 운명이 따라준다면 찾아오겠죠. 전전긍긍하진 않을래요. 제 자신과 연습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자. 늦게 피는 꽃도 아름답더라.'"글 CCBB 에디터 욘두시시비비랩
평사원에서 경영자까지 '능력' 하나로 올라간 월급쟁이 신화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3
조회 1389 추천 2 댓글 11
올해 초, JTBC <한끼줍쇼>에 으리으리한 집의 주인공이 출연해 화제가 됐었죠? 그때 다들 입을 벌리고 감탄했던 그 집의 주인공은 웅진코웨이 前 CEO 박용선 대표였습니다. 사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을 갖고 있는 이 분도 처음에는 평사원에서 시작해 CEO까지 오르신 분이라고 합니다. 평사원에서 이렇게 승진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자신의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 경영인이 되신 분들도 결코 적지 않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평사원에서 최고 경영인까지 승진했던 승진의 아이콘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1. 웅진코웨이, 前 CEO 박용선 대표<한끼줍쇼>에 출연하며, 많은 화제가 되었었죠. 박용선 대표는 지난 1981년 웅진그룹 창업자가 세운 출판사 '헤임인터내셔널'로 입사해 CEO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취임 7년 만에 1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정수기를 판매하는 대신 렌털 시스템을 도입해 매달 돈을 받으며 관리해주는 아이디어로 매출을 약 11배나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2. 샘소나이트 코리아, 서부석 대표샘소나이트 코리아 서부석 대표는 처음부터 샘소나이트에서 일했던 것은 아닙니다. 서부석 대표는 샤넬·발리·프라다를 거치며 회계, 판매·마케팅, MD, 점포 디자인, 영업 등 다방면을 섭렵하며 제너럴리스트로 경력을 쌓았고, 2005년 쌤소나이트 코리아 대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2014~2016년에는 샘소나이트 아시아 사장도 역임했습니다. 3. 노보텔 엠베서더 강남, 유춘석 대표유춘석 대표이사는 1994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현대호텔, 웨스틴조선호텔의 연회 판촉, 마케팅 업무를 총괄 부장, 남산 스테이트 타워 오픈 총 지배인, 신세계 조선호텔 면세사업부 상무, 웨스틴조선호텔 부산 총지배인 등을 과정을 거쳐 승진하며 베테랑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그 결과 올해 6월에 노보텔 엠베서더 강남에 신임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4. 넥슨, 이정헌 대표게임업계에서는 평사원 → CEO의 신화로 유명한 넥슨 이정헌 대표입니다. 이정헌 대표는 2003년 넥슨코리아에 신입 개발자로서 입사해, 실장과 본부장에 이어 2015년 사업총괄 부사장으로서도 활약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FIFA 온라인 3’의 론칭과 흥행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모바일게임 사업을 강화해 HIT(히트),  다크어벤저 3, AxE(액스), 오버히트 등의 다양한 모바일 게임들을 성공시켰습니다. 이처럼 개발자로 시작했던 이정헌 대표지만 능력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승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5. 무학, 이수능 대표'좋은데이'로 유명한 무학에도 샐러리맨 신화를 이룬 이수능 대표가 있습니다. 이수능 대표는 1984년 무학 총부무로 입사했지만 기획실과 마케팅부에서도 활동했으며, 영업부장과 이사 등을 거쳐 무학 사장, 좋은데이 D&F 대표이사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2002년 무학 이사로 승진한 후 2004년부터 ‘좋은데이’ 사업부장을 맡아 성공시킨 '좋은데이'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반 직장인들에게 임원이나 사장이라는 직함은 항상 멀게만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사원에서 출발해 최고 경영인의 자리까지 올랐던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능력으로 평사원에서 최고 경영인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이런 분들을 보면 다른 배경이나 환경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갈고닦으며, 능력을 발휘했던 모습이 중요하다는 게 느껴집니다. 결국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입증받으면, 경영인으로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글 CCBB 에디터 피클시시비비랩
'3조'원 게임회사를 설립하게 만들어 준 대한민국 레전드 게임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3
조회 4414 추천 9 댓글 40
11월 29일,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CEO는 리니지 20주년 기념행사인 미디어 간담회 ‘ONLY ONE’을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리니지의 미래에 대한 포부를 밝혔는데요. '리니지 리마스터'를 통해 오래 꿈꿔온 것을 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앞으로 리니지 서비스 방향과 비전을 공개한 것이죠.이때까지 큰 틀은 바꾸지 않아 왔던 리니지에 큰 변화를 주려한다는 뜻도 언급했습니다. 마니아층이 상당한 리니지 게임의 변화 소식에 게임업계의 귀추가 주목하고 있는데요. 리니지는 엔씨소프트의 주요 수익원으로서 현재까지 단일 게임 누적 매출 3조 원을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엔씨소프트를 있게 한, 리니지의 탄생 비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니지 20주년 기념행사’ 개막사를 위해 무대에 오른 김택진 CEO는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리니지' 유저 여러분 덕분이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수많은 유저를 양산한 전설의 게임, 리니지는 그의 손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김택진 CEO는 리니지를 초창기부터 만들어온 개발자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서 일하던 중 돌연 1997년에 사표를 내고 자신의 회사를 차렸습니다. 바로 지금의 엔씨소프트를 창업하였는데 여기서 1998년에 '리니지’라는 게임을 처음 선보이게 되는데요. 리니지는 국내 최초 네트워크 인터넷 기반 온라인 게임으로 리니지의 대성공 덕분에 김택진 CEO는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엔씨소프트 역시 엄청난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현재까지 단일 게임 누적 매출 3조 원을 넘어섰으며 게임업계 매출 1조 클럽에 넥슨과 넷마블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입한 회사가 되었죠. 그만큼 리니지는 출시일부터 20년의 세월 동안 꾸준한 인기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초창기 인기가 엄청났는데 론칭 15개월 만에 업계 최초로 100만 회원을 확보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하였죠. 2008년에는 단일 게임 최초로 누적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던 리니지이기도 하죠. 그리고 작년에는 모바일 리니지 게임으로 다시 한 번 대박을 터트렸는데요. 리니지M이라는 이름으로 리니지 게임을 모바일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자 원작의 매니아층이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리니지M'의 돌풍으로 엔씨소프트는 사상 첫 연 매출 1조 원 달성을 이루었습니다. 엔씨소프트의 지금을 있게 한 게임이자 현재까지도 대들보와 같은 존재인 ‘리니지’지만 그 시작은 상당히 초라했었습니다. 김택진 CEO는 간담회 자리에서, 전설의 게임 ‘리니지’의 탄생 비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는데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졌다는 리니지입니다. 당시 사무실은 비만 오면 바닥에 물이 차서 누전이 되곤 하는 작은 방이었다고 회상한 그는 그 시절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혹여나 비 때문에 서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김택진 CEO는 집에서 자다가도 비가 오면 바로 사무실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서버실 앞에서 대걸레를 들고 지키기도 했다며 당시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었는데요. 그리고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서버실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던 직원들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힘든 환경에서 키워온 리니지가 지금의 효자 게임이 되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김택진 CEO이죠. 실제로 그는 리니지에 대한 유별난 애정으로도 유명합니다. 리니지는 엔씨소프트가 창립 후에 선보인 첫 게임이자 그가 스스로 개발자로 참여했던 결과물이라 그로서는 리니지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겠죠. 그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모두 리니지와 관련된 이슈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리니지 TV 광고에도 직접 출연까지 하여 많은 화제를 낳았었죠.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향까지 고려한다면 뜻밖의 행보인 셈입니다. 그는 게임 속에서 그의 이름을 딴 TJ’s 쿠폰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더욱더 주목됩니다.
22억치 슈퍼카 부대를 끌고 다니는 즐라탄의 차 컬렉션
CCBBL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3
조회 2226 추천 5 댓글 10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스웨덴 출신의 축구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Zlatan Ibrahimovic)는 세계 최고 클럽들인 아약스 부터 유벤투스, 인터밀란, FC바르셀로나, AC밀란, PSG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까지 거쳐왔습니다. 이 클럽들은 즐라탄에게만 쏟은 이적 비용이 무려 2억달러 (2,344억원)가 넘어가죠. 현재 즐라탄의 재산은 1억1,500만달러 (1,347억8,000만원)로 호날두와 메시 그리고 네이마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돈이 많은 축구 슈퍼스타입니다. 현재는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소속으로 미국 리그에서 활약중인 축구 부호 즐라탄의 차 컬렉션은 과연 어떨까요? 22억원 어치 슈퍼카 컬렉션을 소유중인 즐라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프랑스 리그의 명문 PSG에서 활약하던 즐라탄은 초특급 대우를 받으면서 주급으로 무려 3억7,300만원을 받았죠. 그러던 그가 자신의 걸프스트림 전용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라가서 맨유와 활약했었습니다.맨유 구단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 즐라탄이 영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만반의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었죠.몇 개월간 맨체스터 시내의 라디슨 블루 호텔에 머물러야 했던 즐라탄은 맨유 구단이 마련해준 체셔 주의 럭셔리 저택에 들어갔습니다. 이 6개 방짜리 저택은 월세가 무려 2만달러 (2,350만원)인데, 물론 맨유 구단이 전부 부담했죠.여기에 맨유 전 감독인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몰던 벤츠를 즐라탄에게 내줬습니다. 물론 즐라탄의 프랑스 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구단이 배려해준거죠.그리고 그는 따로 협찬받고 있는 스웨덴의 볼보 사로부터 세단을 리스받았는데, 이 차를 몰고 다니면서 그의 22억원 어치 슈퍼카 부대를 기다렸습니다.맨유에 입성한지 한 달째 되는 날, 그는 드디어 자신의 애마들을 만나볼 수 있었죠. 아래는 즐라탄이 가장 아낀다는 포르쉐 918 스파이더로 1백만 유로를 지불하고 사들였죠.그 다음은 2002년 7월에 처음 공개되어 현재 401대만 있다는 엔초 페라리 입니다.슈퍼카 까지는 아니지만 즐라탄이 공식 모델로 활동중인 스웨덴의 볼보 사는 그에게 C30 해치백과 XC90를 협찬해줬습니다.또한 FC 바르셀로나 시절부터 보유해 온 아우디 S8과 RS6도 있죠.여기에 톡톡 튀는 분홍빛 보라색의 람보르기니 가야르도도 빼놓을 수가 없었습니다.PSG 시절, 경기장과 훈련장으로 출퇴근할 때 가장 자주 이용했던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도 잊지 않고 가져왔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즐라탄은 전용 운전기사가 몰아주는 BMW 3시리즈를 타고 다니는데, 아직까지 길눈이 어두워 길을 조금 익힐 때 까지는 운전사를 계속 이용할 예정이라고 하죠.지난  PSG와 로리앙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이뤄낸 즐라탄은 아래와 같이 경기 축구공을 1등석 좌석에 따로 모셔오는 극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글 CCBB 에디터 피클시시비비랩
갤러리 내부 검색
전체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개념글 []

/

    이슈줌NEW

    1/6

    뉴스NEW

    1/3

    실시간 검색어

        12.20 14:27

        제공 Daum 검색

        힛(HIT)NEW

        그때 그 힛

        1/3

        초개념

          디시위키

          심심할 땐 랜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