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쾌도 홍길동>의 정치 풍자는 통쾌하되 단편적이고, 정치 담론은 진지하되 관념적이다.
길동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창휘는 그것을 꼬박꼬박 말로 풀어준다.
길동이 성폭행을 저지른 양반을 풀어준 고을 수령을 눈 앞에 두고도 죽이지 않은 채 그를 단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창휘는 길동이 생각보다 더욱 무서운 자라면서 그를 경계하는 식이다.
담론을 위한 구체적인 예는 부족하고, 대사를 통한 설명이 계속된다.
창휘의 부하들은 신분제도가 없어진 활빈당을 보며 “저것은 꿈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의 시청자들은 길동이 과연 무슨 방법으로 활빈당 당원들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작은 조직이라 할지라도 신분제를 없애고, 자급자족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은 그것을 ‘만들었다’고 가정한 뒤, 그것이 우리의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말한다.
<쾌도 홍길동>의 부족한 정치 인식은 백성의 묘사 방식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쾌도 홍길동>에서 백성들은 지극히 순진무구한 존재다.
그들은 길동의 활약에 과장되게 말하다가도, 조정에서 길동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또한 길동이 나눠주는 양식을 먹을 때는 길동의 편을 들지만, 조정에서 그들을 조금만 위협해도 금새 돌아 선다.
어제까지 길동의 편을 들던 사람들이 배고픔을 이유로 길동을 공격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선동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길동은 절대로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
국민은 때로는 계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선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행동에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깔려 있다.
그건 지금 대통령이 뽑힌 것이 단지 국민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집 값을 비롯한 여러 이유가 결합된 것과 같다.
드러난 결과는 바보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개개인의 이유는 멍청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쾌도 홍길동>은 그 복잡한 정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현실 정치의 복합적인 문제들을 표현할 역량은 갖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쾌도 홍길동>의 정치는 단선적이다.
어느 한 쪽에서 행동이 일어나면 백성을 통해 금새 여론화 되고, 그것이 상대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정치가 단순해지다 보니 정치를 위한 고민은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보다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념들이 반복된다.
‘백성을 위한 왕’, \'세상을 바꾸는 힘‘, ’이룰 수 없는 꿈‘같은 것들.
미친 왕의 시대에 나타난 이상한 컬트
그래서, <쾌도 홍길동>은 이른바 ‘웰메이드 드라마’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이야기는 허술하고, 담고 있는 메시지를 구현하는 방식은 순진해 보일 만큼 단순하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쾌도 홍길동>이 설파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이제 막 정치에 눈 뜬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쏟아낸 것 같다.
생각은 많은데, 실천적인 방안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이 웰메이드 드라마가 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이 형편없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쾌도 홍길동>은 원한다면 훨씬 쉬운 길을 갈 수 있었다.
그저 정치를 비웃고, 길동 일당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양반들을 괴롭히는 이야기였다면
<쾌도 홍길동>은 보다 대중적이거나, 더 매끈한 이음새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후반부를 왕과 길동의 화합으로 이끌기만 했어도 <쾌도 홍길동>은 보기 편한 드라마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쾌도 홍딜동>의 엔딩은 작가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다.
물론, 그 선택의 과정에서 사인검이 가짜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식의 전개는 무리수다.
사인검이 가짜로 판명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에 대한 복선이 있어야 했다.
특히 사인검이 가짜가 되면서, 왕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위한 왕이 되려는 창휘의 고민은 물거품이 되었다.
길동은 창휘에게 ‘백성의 왕’이 되라고 하지만, 명분상 사인검을 바탕으로 왕이 될 수 있었던 창휘가
그것을 단번에 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은혜가 길동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길동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것 역시 진부한 전개다.
그거야말로 트렌디 드라마에서 홍자매가 가장 비웃던 전개 아니었던가.
하지만 홍자매가 그렇게 해서라도 <쾌도 홍길동>의 후반부를 비극으로 끌고 간 것은 그들의 확고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에서 호부가 불가능한 청춘들은 연대했으나, 결국 계급적인 차이에 의해 분열되는 이야기다.
길동과 창휘, 이녹은 모두 세상이 바뀌어야 자신의 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길동과 창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그들은 정권을 얻은 뒤 분열하게 된다.
창휘가 아무리 길동을 옹호한다 해도, 그가 왕으로 있는 나라에서 서자인 길동은 체제의 근본을 뒤흔드는 인물이다.
반면 길동의 입장에서 창휘는 왕이 아니라 백성의 대리자일 뿐이다.
이녹이 길동과 창휘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은 애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가 어떤 계급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녹은 원래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자라기는 평민으로 자랐고,
신분을 자각하기 전에는 길동의 연인이었으나 자각한 뒤에는 길동의 아버지가 자신의 친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길동의 연인이 은혜가 아닌 이녹이 되는 것은 누가 더 어울리느냐,
로맨틱하느냐의 문제를 떠나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에 관한 것이다.
이녹이 길동을 선택하면서, 그들은 한시적으로나마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계급 사회를 뛰어넘는다.
계급은 사랑보다 단단하다
사랑과 우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계급은 그것을 초월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계급적인 문제로 칼과 봉을 겨누는 것이 계급이다.
이는 매우 급진적인 선택이다.
<쾌도 홍길동>은 기존 드라마에서 내세우던 인간적인 정 대신,
그것마저 누릴 수 없게 만드는 계급 사회의 냉혹함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길동의 “내 알 바 아냐”는 실상 그의 아버지 세대가 길동의 세대에 만들어놓은 감옥이다.
그의 “내 알 바 아냐”는 사실 이판의 “아무 것도 하지 말아라”였고,
그것은 곧 사채업자의 말처럼 최철주의 말처럼 “남의 일 신경쓰지 말고 가던 길 가라”고 한다.
아버지 세대는 그들의 체제 수호를 위해 자식 세대에게 그들이 현실에 대해 관심 가지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이 시대의 자식들이 아닌 오직 ‘내 자식’만을 위해 산다.
인영의 어머니는 인영을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창휘의 어머니 격인 용문 객주(최란)는 창휘를 위해 길동과 이녹마저 죽이려 한다.
또한 창휘의 친 어머니는 사인검의 밀지를 조작해서라도 창휘를 왕으로 만들려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그들에게 도덕과 연대 대신 복종과 권모술수를 가르친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쾌도 홍길동>에는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청춘의 무의식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청춘들은 이 부모 세대를 넘어서기 위해 연대하지만, 계급의 벽을 넘지 못한다.
인영은 은혜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정받을 여지가 있지만,
그는 은혜의 사랑을 얻기 위해 길동을 죽이려할 뿐만 아니라, 평민들을 학대한다는 점에서 끝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쾌도 홍길동>은 청춘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지만, 계급의 문제가 그에 우선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계급 의식을 깨지 못하는 청춘은 길동과 같은 그 ‘청춘’이 아니다.
홍자매는 정치에 대해 단순하게 접근했지만, 그것을 낭만 따위로 포장하지 않았다.
여기엔 사랑과 청춘이 현실을 바꿀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없고, 모두가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착한척도 없다.
이 냉정한 현실 인식과 계급문제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는 <쾌도 홍길동>에 기이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내 알 바 아냐”를 외치던 개인주의자 길동은 자신의 계급이 자신의 일상에,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각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길동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계급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길동은 아버지 앞에서 화살을 맞고, 역적으로 몰리며, 자신이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거나,
자신이 구하려는 사람을 눈 앞에서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지지한 정치가는 자신을 기만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 그러나, 그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부딪치는 사람들의 노력.
그래서, <쾌도 홍길동>은 그 계급 문제를, 현실에 부딪쳐 좌절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세상을 바꾸려는 길동의 고민을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준다.
길동이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편에게 누명을 씌운 양반에게 복수하던 여성들을 구하지 못할 때,
이녹과 은혜 모두 길동을 사랑하면서도 계급의 문제로 길동에게 다가설 수 없을 때,
그것은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현재의 ‘평민 계급’을 가진 청춘들의 현실이 된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의 관점은 ‘해서 안되는 것’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것은 <쾌도 홍길동>의 문제제기가 지극히 순진하지만 당연한 것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의 에피소드에서 1차적인 피해자들은 가난한 여성들이다.
<장화, 홍련>의 이야기가 양반의 성폭행을 덮기 위한 거짓이었다고 뒤트는 에피소드에서
첫 번째 희생자는 성폭행 당한 가난한 여성이고, 이 때문에 피해를 입은 남편들을 복수하기 위해 나서는 것도
힘없는 여성들이다.
또한 사채업자 최철주가 돈 대신 끌고 가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여성들이다.
또한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은 아니지만, <쾌도 홍길동>에서 길동이 쓰는 무기는 봉이고,
길동과 활빈당원들은 칼을 쓰는 순간에도 사람을 베는 대신 칼 등으로 사람을 친다.
현실은 냉정하다. 계급의 벽은 높다.
하지만, 그것을 수긍하는 한 가장 약한 사람부터 먼저 죽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혁명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길동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길동의 실패는 그의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안 돼’보다는 ‘그래도 해라’라는 응원을 끌어낸다.
그래서,
<쾌도 홍길동>은 <홍길동 전>과 가장 다른 길을 갔지만,
<홍길동 전>의 정신을 가장 창의적으로 재현한 리메이크이자,
동시에 웰메이드가 아닌 컬트의 자리에 올라설 자격을 갖췄다.
에피소드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뚝뚝 끊어지고,
유머와 진지함은 다른 두 개의 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불균질하며, 정치 담론은 관념적이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은 마치 길동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상업성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밀고 가겠다는 그 에너지.
그 진심은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몰입시키고,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에 같이 동참하도록 만든다.
길동이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눈물 흘릴 때,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감정 과잉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기엔, <쾌도 홍길동>은 감정과 관념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길동의 눈물은 드라마 속 눈물만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홍길동 전>이 사실은 대중에 의해 윤색된 이야기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홍자매가 <쾌도 홍길동>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쾌도 홍길동>의 길동은 원작의 홍길동보다는 체게바라에 가깝다.
게릴라전과 백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혁명을 이루려는 길동의 움직임은 가상의 영웅보다는 실천적인 혁명가에 가깝다.
홍자매는 영웅대신 혁명가를 통해 지금 이 시대의 문제와 해결에 대해 고민하는 자기 자신들의 현재를 그려냈다.
<쾌도 홍길동>은 드라마적 완성도를 일정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어떤 정치적 신념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다수의 ‘인정’을 받는 대신 일정 숫자의 ‘지지자’를 만들어냈다.
<쾌도 홍길동>이 마지막까지 14% 내외의 시청률을 얻은 것을 단지 홍자매나 강지환의 유명세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극단의 에너지가 뭉쳐 이상한 도둑이 탄생했다
이는 단지 홍자매의 뚝심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쾌도 홍길동>은 기묘하게도 연출과 연기까지 모두 극단의 무엇을 보여줬다.
홍자매가 <쾌도 홍길동>에서 매우 장단점이 뚜렷한 극본을 보여준 것처럼,
이정섭 감독 역시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차가 심한 연출을 보여준다.
<환상의 커플>에서 잘 드러났듯,
홍자매의 코미디는 그것을 코미디로 부각하는 것보다 빠른 전개를 통해
시청자들이 코미디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때 더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환상의 커플>에서 상실과 철수의 코미디는 그 자체로는 과장된 상황이었지만,
연출에 의해 현실적인 느낌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정섭 감독은 홍자매의 코미디를 전형적인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연출한다.
사건의 기승전결을 천천히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이어질 반전이 있다는 분위기까지 잡는 식이다.
활빈당 당원들이 말 장난을 하면 모든 인물들이 대사를 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잡으면서 이제 코미디가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이다.
이는 <쾌도 홍길동>의 코미디와 진지한 부분을 더욱 균열시키는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코미디의 질 자체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정섭 감독은 진지한 부분에서도 극단적인 연출을 사용한다.
길동과 왕이 궁에서 대면할 때, 이정섭 감독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 때 그들의 대화에는 어떠한 BGM이나 효과음도 없다.
오직 클로즈업의 연결을 통해 두 사람의 대립은 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차분한 길동과 광기어린 왕의 대립이 더욱 몰입감을 갖는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거친 화면 구성, 그리고 때로는 현장음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사운드는 일반적인 드라마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쾌도 홍길동>에서는 그것이 캐릭터의 감정이나 그들의 정치 이념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거칠고 불편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펄펄 살아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시종일관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말투로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언제나 뭔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성유리의 연기는 일반적인 연기의 기준으로 볼 때는 어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에 성유리에게 요구한 이녹은 그런 모습이다.
<쾌도 홍길동>은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계급적, 정치적 위치를 상징하고,
캐릭터는 그것을 단순하지만 선명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복잡한 내면 연기 보다는 오히려 캐릭터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쾌도 홍길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이녹이 어떤 말투를 가졌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성유리는 이녹의 캐릭터를 제대로 설명했다.
이는 장근석도 마찬가지다.
이녹과 정 반대이긴 하지만, 창휘의 캐릭터 역시 표정만으로도 캐릭터가 설명될 수 있고,
그런 캐릭터에게 중요한 것은 다양한 종류의 연기가 아니라 작품 내내 일관된 톤을 잡는 것이다.
시청자가 창휘를 떠올릴 때 삿갓을 쓰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창휘의 캐릭터 묘사는 성공이다.
다만 강지환은 다르다.
강지환은 <쾌도 홍길동>에서 여러차례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그 사이에 가벼운 연기를 함께 보여줘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 감정의 변화를 포착해내고, 어느 순간에도 진심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강지환은 <쾌도 홍길동>에서 가벼움에서 진지함으로 넘어가는 연기만큼은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데뷔 당시부터 강지환은 한 작품 안에서 가벼운 남자친구와
가슴 아픈 멜로연기를 동시에 소화해야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KBS <경성스캔들>과 <쾌도 홍길동>은 그것을 멜로가 아닌 시대극 속의 개인으로 옮기면서
강지환의 장점을 극대화 시켰다.
강지환은 혼란의 시대에서 가볍게 살고 싶은 개인과 무거운 짐을 진 청춘 양쪽의 얼굴을 씬마다 변화시키는
흔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
드라마가 세상과 조우하는 방법
그래서, <쾌도 홍길동>은 매우 기묘한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결코 잘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고, 메시지의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중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은 꾸준히 일정 시청률을 유지했고(상대 프로그램이 30%를 오르내렸던 <뉴하트>임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인 팬들을 만들어냈으며, 배우들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
이는 지금 한국 드라마의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KBS는 <경성스캔들>, <한성별곡>, <쾌도 홍길동>을 연이어 방영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시대극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실상은 이 시대와 청춘을 이야기했다.
<경성 스캔들>은 비극의 시대에서 사랑과 저항을 함께 해 나가는 방법을,
<한성별곡 正>은 현실 정치의 문제를, <쾌도 홍길동>은 홍길동을 필요로하는 시대가 무엇인가에 대해 그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현실과 사랑을 하나로 조화하기 위해 매달리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다.
이 작품들의 제작진은 왜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경성스캔들>과 <한성별곡 正>, <쾌도 홍길동>은 지금 드라마가 시대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접근하는 세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저 세 작품의 장점이 서로에게 흡수될 때,
한국 드라마는 웰 메이드 드라마나 전문직 드라마 외에 또다른 새로운 동력을 얻을 것이다.
특히 <쾌도 홍길동>이 앞의 두 작품과 달리 10% 중반 이상의 평균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쾌도 홍길동>이 앞선 두 작품에 비해 아주 뛰어나다거나 대중적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소재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구성능력은 <경성 스캔들>이, 메시지의 깊이는 <한성별곡 正>이 탁월하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은 두 작품보다 더욱 많은 어떤 시청자에게 강한 공감을 일으키는 무엇이 있다.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척 살다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세상을 바로 보게 되는 길동의 모습은
지금 정치에 눈뜨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만히 살려고 하는데 내 집 옆으로 운하가 지나갈지도 모르고, 모든 수업을 영어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쾌도 홍길동>은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단면을 낭만적인 멜로로 과도하게 치장하지도,
무책임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지 않고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홍자매가 무모할 만큼 다른 세계에 도전해 얻은 결실이다.
그들은 길동처럼 ‘돌아가지 않고’ 앞에서 정면승부를 벌여 한국의 청춘 드라마,
혹은 정치 드라마가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얻어냈다.
지금은 작품의 완결성 이상으로 대중과 시대 정신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쾌도 홍길동>은 작가와 대중 모두에게 그것이 필요한 순간,
자신의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 도전해 이룬 절반의 성공, 혹은 불완전한 컬트다.
그리고, 홍자매가 됐건 누가 됐건 여기에 다른 두 작품의 장점을 흡수한다면 한국 드라마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무엇을 할텐가
그래서, <쾌도 홍길동>은 드라마 그 자체보다 드라마사(史)적으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재평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쾌도 홍길동>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 당시 만들어졌다면 정말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또한 <쾌도 홍길동>이 방영되던 당시에는 이제 도저히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어떤 징후를 보여줄 뿐, 그것이 현실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쾌도 홍길동>이 종영한지 한 달여 되는 지금, 광화문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모두가 평소 정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금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쾌도 홍길동>은 불완전한 드라마지만, 이런 드라마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
길동처럼 “내 알 바 아냐”를 외치던 사람도, 홍자매처럼 현실과 떨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집필하던 작가들도
지금은 어쨌든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됐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귀찮고 힘들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도 일단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때가 있다.
그 다음에는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나씩 배우고 생각하면 된다.
<쾌도 홍길동>은 묻는다. 미친 왕의 시대가 열렸다. 당신은 가만히 있을 건가?
글 : 강명석(
lennone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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