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베른트 기제피우스는 전쟁 전 몇년간 게슈타포에 몸담았던 사람입니다. 불행히도 전쟁 중에는 히믈러에게 해고당해 게슈타포의 간부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반나치스 음모자들에 대한 게슈타포의 수사를 직접 방해할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수사망이 좁아지는 것을 막았고, 무엇보다 스위스 주재 미국 OSS지부장이던 앨런 덜레스와 교통하여 반나치스 음모가 진행중임을 서방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는 1904년 태어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는 법과대학에서 수학하고 변호사가 됩니다. 1930년대 초에는 독일 재건의 강력한 비전을 제공한 나치즘에 매료되어 그 협력자가 되었고 1933년 프로이센주 수상인 헤르만 괴링의 눈에 띄어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이 되었고 이 직제를 이용해 프로이센주 경찰을 움직여 나치돌격대가 반나치스집회를 습격해 반나치들을 때려죽이는 것을 방관합니다(1933년 총선기간 나치스 18명, 반나치스 51명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주에서 최초의 게슈타포를 조직합니다. 이때의 게슈타포는 괴링의 개인적인 테러기관이었죠. 1934년 4월 괴링이 히믈러를 게슈타포의 차장 자리에 앉히면서 이 조직의 효율성은 급상승하고 규모도 커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의장 겸 독일 최대의 주 수상인 괴링은 연방수상 히틀러의 경호대장에 불과한 히믈러를 유능하고 소박한 인물로 볼뿐 그가 조직 내부를 장악할 줄은 몰랐습니다. 히틀러는 헤스와 당권을 양분한 괴링이 경제성 관료들을 통제하고 공군총사령관으로서 공군 재건의 임무를 맡게 되자 그에게서 게슈타포를 떼내어 히믈러의 SS 산하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SS 산하에 RSHA가 편성되고 보안경찰, 형사경찰, 게슈타포가 모두 그 밑에 소속되었는데 RSHA의 장관에는 상관에 대한 반항심이 강한 야심가 하이드리히가 임명되었죠. SA 소멸 이후 강대해진 히믈러의 SS로 하여금 괴링을 견제하면서 아울러 히믈러를 견제하기 위한 히틀러의 세심한 인사조치였습니다. 게슈타포를 잃은 괴링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라서 게슈타포 내부에 계속 자기 인맥을 남겨두는데 그가 바로 한스 기제피우스였습니다. 초반에는 나치즘 지지자로서 그리고 괴링에 대한 충성심에서 게슈타포 간부로 활약하던 기제피우스는 나치스 체제가 정당뿐만 아니라 종교인, 문화인, 예술인, 학계 모든 방향으로 숙청의 칼날을 들이대고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 목사 바이슬러를 살해하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자 나치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나치가 타도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다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무렵부터 태동된 반나치세력의 접근에 응해 게슈타포의 만행을 기록할 증거자료들을 꽤 많이 수집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게슈타포의 잔인한 업무에 소극적이 되고 나중에는 손을 뗍니다. 마침 괴링계 인맥인 기제피우스(이때의 기제피우스는 이미 괴링에 대한 정도 떼버린지 오래였지만)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히믈러는 그를 근무태만, 나치즘 실천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으로 규정하여 그를 게슈타포에서 내쫓아 버립니다. 반나치스 음모자들에게는 안좋은 일이지만 기제피우스에게는 잘된 일이죠(만약 계속 거기에 몸담았으면 아이히만, 하인리히 뮐러의 전철을 밟았을 겁니다). 기제피우스는 우수한 정보수집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국방군 첩보국에 들어갑니다. 첩보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실무책임자 한스 오슈터 대령도 반나치였고 이들은 의기투합해 반나치 음모자들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합니다. 그리고 카나리스 제독이 뒤를 받쳐주어 기제피우스는 몇차례의 히틀러 암살시도에 참여합니다. 1943년 첩보국이 히믈러 게슈타포의 탄압을 받아 그 관계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갈때도 기제피우스는 다행히 거기서 한발을 빼 살아납니다. 그는 OSS 스위스지부와 통해 독일 내 미국간첩망을 도왔고 7.20 반란 직후 이 간첩망을 통해 스위스로 무사히 탈출합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반나치스 음모자들 중 한명이었죠. 1946년 그는 Bis zum Bitteren Ende, ("To the Bitter End")을 펴냈고 이것은 반나치스 음모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서 필독도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