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민이 겪은 엄청난 피해의 주범은 히틀러라기보다는 스탈린입니다. 현대전 교리의 수용을 거부한 것이 첫번째 대죄요, 유능한 장교단을 모두 제거한 것이 두번째 대죄죠. 그의 중공업화 정책이 전쟁수행능력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지만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라는 경제학자는 <대조국전쟁 하의 전시경제>라는 논문에서 "이게 다 레닌동지 덕분이다"라고 주장했다가 1950년 9월 총살형당합니다) 그의 죄과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전쟁 개전 직후 스탈린은 알아서 할복자결 했어야죠.

그러나 우리의 그루지야 인간백정, 이번에도 "이게 다 장군놈들 때문이다"를 외칩니다. 덕분에 서부국경을 지키는 장군들에게 총알 세례가 쏟아졌는데 얄궂게도 이 장군들은 대숙청 기간 동안 운좋게 숙청을 피하고 더불어 공석이 많이 생긴 노른자위 자리들을 차지해 승진가도를 달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미트리 그레고르예비치 파블로프는 1897년생으로 1차대전과 적백내전을 경험하고 1928년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한 1930년대의 흔한 소련군 장교단 가운에 한명이었습니다. 그도 \'프룬제의 아이들\'중 한명이었지만 프룬제와는 달리 전차를 보병의 지원역할에 국한시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1936~1937년 기간 동안 코민테른 군사고문으로서 스페인내전에 참전, 공화국 정부군에게 탱크를 제공하고 이 기갑전술을 훈련시켰습니다.

야니스 베르진, 안드레이 오프센코 총영사 등 스페인에서 사회주의자,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접촉한 소련인은 스탈린 대숙청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파블로프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는 노몬한 충돌과 겨울전쟁에도 참여해 유능한 군지휘관으로 평가받아 1940년 서부방면군 총사령관에 임명됩니다. 8원수 중 5원수가 사라진 마당에 그의 출세는 빨라졌고 육군대장으로 진급합니다.

그러나 독소전 초기 개전 6일만에 민스크까지 함락당하는 이 대패배에 눈깔 뒤집힌 스탈린은 그렇다고 내 탓이오 할 용기는 없고 자기 분풀이를 할 희생양을 찾으니 자연스럽게 파블로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휘하의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들도 알아서 kar98k 저격총의 표적이 되어주는 마당에 현장총책임자가 살아있는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봅니다.

파블로프 대장은 민스크 함락 직후에 엔까베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서부방면군의 공군사령관 코페츠 중장은 아예 침공당일에 권총 자살해버렸습니다. 엉뚱하게도 파블로프는 반역죄라는 황당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1941년 7월 22일 자신의 참모장 클리모브스키 소장, 서부방면군 통신책임자 그레고리예프 소장, 제4군사령관 코로브코프 소장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겨울전쟁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었던 키릴 메레츠코프는 복권되어 레닌그라드 방위군사령관에 임명되고 훗날 원수까지 진급했으니 오히려 행운이라면 행운일까요? 파블로프의 후임으로 서부방면군 총사령관이 된 세미욘 티모셴코 장군도 정치위원단의 치열한 간섭을 받고 벌벌 떨어야했지만 어쨌든 전쟁 내내 목숨은 부지했습니다. 독소전쟁을 버텨낸 소련군인들에게 동정심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