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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전쟁 -17-

김유식 2003.04.02 14:38:08
조회 2514 추천 0 댓글 0
2000년 2월 10일. 목요일. 오후 2시.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이번이 정말...마지막이다.'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의 일원인 모리시타(森林)는 역 지하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다짐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한 다짐이었지만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굳게 다짐했다.

  
  아사히 UK.는 일본 최대의 맥주 회사인 아사히맥주 주식회사의 영국 법인으로 이미 영국에 진출한지 6년이나 된 회사였다. 작년까지는 주로 일식 요리점이나 고급 레스토랑을 상대로 수입된 아사히의 병맥주 판매를 해왔다.

  일본의 맥주 시장은 크게 기린과 아사히, 삿포로 등 세 회사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97년까지 일본 최대의 맥주 회사는 기린이었다. 그러나 아사히가, 지난 '87년에 개발한 "슈퍼드라이" 덕택에 결국 기린을 제치고 업계의 수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슈퍼드라이 맥주를 개발한 지 10년만의 쾌거였다. 아사히는 그 동안 일본인들의 입맛을 바꿔놓았다.

  아사히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세 회사들 중 가장 먼저 유럽에 진출했으며 영국의 맥주 공장 설립을 위해 런던 지사의 인원과 규모를 대폭 확장하고 전략적인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다.

  모리시타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피카딜리 서커스 지하철역에서 나왔다.

  '잘못 나왔군.'

  트로카데로 센터(Trocadero Centre) 쪽의 출구로 나와야 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반대편의 피카딜리 쪽으로 나온 모리시타는 에로스 상을 지나 샤프츠베리 애비뉴의 카지노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성공한다고 손 뗄 수 있을까?'

  하와이 태생으로 도쿄 구단시타에 있는 호세이(法政) 대학을 마친 모리시타는 타고난 말재주에 4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실력, 깨끗한 일 처리로 사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사원으로 통했다. 물론 장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젊은이였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22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맥주에 입사한지 3년 차가 되어 런던 법인으로 오게 되었고, 그가 모시던 상사는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런던 법인의 정식 직원이 아닌 파견 형식으로 보내주었을 정도였다. '97년 영국의 광고계를 시끄럽게 했던 히라가나 표기의 아사히 맥주 광고 카피는 그가 런던에 오고 나서의 첫 작품이었다.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아직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많은 영국의 출판물에 아사히의 맥주와 그 옆의 "100년 전 일본에는 차도 맥주도 없었다."라는 카피의 광고는 많은 영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겨울. 일밖에 모르던 모리시타에게 동료 중 한 사람이 도박을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이 도박을 통해 망가진다고 하지만 모리시타는 그 속도가 빨랐다. 가지고 있던 스미토모, 사쿠라, 미츠비시 은행의 구좌는 바닥이 났고 비자와 JBC 등의 신용카드사에서는 연일 경고장이 날아왔다. 하와이의 부모, 일본의 형제와 친구들에게 빌릴 수 있을 만큼 빌려 썼으며 회사 동료와 상사들에게도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 썼다. 그러나 도박을 시작한 후로 한 번도 갚은 적은 없었다.

  도박에 빠지다보니 일에도 관심이 떨어졌다. 회사는 건성으로 다닐 뿐이었고 출근 후에는 카지노가 개장하는 오후 2시까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80kg에 달했던 몸무게는 65kg이 되었고 머리 속에는 온통 일확천금을 꿈꾸는 생각밖에 없었다.

  모리시타는 시계를 보았다. 2시 10분. 카지노가 개장한지 10분이 지났다. 이윽고 카지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서 반갑게 인사한다.

  "헬로우. 미스터 모리시타!"

  모리시타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멤버쉽 카드를 내밀었다. 카운터에서 건내 주는 종이에 사인을 한 후, 그는 "굿 럭." 이라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바쁘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2000년 2월 10일. 목요일. 오후 6시 30분. 런던. 소호(Soho) 렉싱턴 스트리트(Lexington St.) 펍(Pub) 블루 라이언.

  로버트 노블은 매우 짜증이 났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손님은 벌써 8파인트나 되는 스텔라 아토이즈의 생맥주를 마셨다. 조금 꼬부라진 혀로 한 시간이 넘도록 떠들고 있었다. 그 손님이 또 맥주 주문을 한다면 축객령을 내릴 생각인 로버트는 묵묵하게 일하며 미스터 킴. 즉, 김창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버트는 김창환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 이안 노블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김창환은 아버지에게 거액의 자금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담보로 잡힌 펍도 그대로 자신이 운영하도록 해주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영국 남부의 휴양도시 브라이튼의 한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는 김창환은 세상일과는 담쌓고 살았지만 영국에 오기 전부터 꿈꾸어 왔던 한 가지 일은 그대로 추진했다.

  그것은 자신이 대주주로 있으며 유통까지 맡고 있는 명성맥주의 영국 수입건이었다. 이미 명성맥주와 다른 한국산 맥주는 "Imported"라는 딱지를 붙여 다른 회사가 수입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산 병맥주의 영국 판매량은 미미한 수치였지만 그래도 2만 명에 달하는 교민과 주재원들, 한국 식당의 고객이 있었으며 맥주를 좋아하는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한국산 맥주의 맛을 좋아하는 매니어들도 있었다.

  영국의 맥주 시장은 연간 24억 달러 규모. 전체 소비량은 6천만 헥토리터(hl)에 달한다. 흔히 맥주 왕국은 독일이라 하지만 독일은 지역마다 특색 있고 개성 있는 소규모 맥주회사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진출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영국은 독일과는 다르다. 대표적인 맥주라고는 스타우트(Stout) 종류인 기네스(Guinness)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대륙에서 건너온 브랜드였다. 또한 납세를 마친 맥주 수입의 제한도 없었다.

  독일에서는 라거(Lager), 영국에서는 스타우트인 기네스만 마시는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국의 음주자들은 자신들의 소득 중 6퍼센트를 음주에 쓰고, 그 중의 반은 맥주를 마시는데 쓴다. 또 마시는 맥주의 반 이상은 라거이고 나머지는 스타우트, 비터, 에일 종류의 맥주가 차지한다.

  로버트는 김창환의 요청대로 블루 라이언 안에 천연 암반수로 만든 명성의 병맥주를 진열해 두었고 포스터와 스티커도 곳곳에 붙여두었다. 예상했던 대로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값도 비쌌지만 원래 펍에서 판매되는 맥주의 90% 이상은 생맥주였고 나머지 10%의 대부분은 안호이저 부쉬사의 병맥주, 즉 버드와이저의 차지였다.

  "원 모어 파인트 플리즈!(1파인트 더 주세요.)"

  로버트의 귓가에 술 취한 손님의 맥주 주문이 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 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리시타는 울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어제 카지노에서 마지막 돈을 잃고 난 후 모리시타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룰렛 판의 칩을 모두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새벽까지 카지노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으나 잠이 올 리 없었다.

  그가 속해있는 특수영업팀은 발로 뛰며 미소와 화술을 이용한 영업 전략을 구사했다. 아사히의 구로나마(黑生)라는 이름을 가진 생맥주를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런던의 펍 마다 돌아다니며 랜드로드를 설득하는 것이 특수영업팀의 일이었다.

  각 펍에는 레벤브로이, 칼스버그, 밀러, 포스터스 등의 생맥주가 공급되고 있었는데 이런 인지도 높은 브랜드 맥주를 밀어내고 신생 아사히의 생맥주를 공급하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대신 아사히로서는 자사의 생맥주를 공급받는 펍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펍의 단장은 물론 자금 지원과 홍보용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방침을 세웠다.

  오늘 새벽 일찍 회사로 온 모리시타는 어차피 망가진 인생, 마지막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이미 모리시타는 도박 중독 말기에 들어서서 도박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특수영업팀에게 영업 지원용으로 할당된 다섯 대의 아우디 80 승용차 중에서 한 대를 몰고 가 런던 남부 복스홀 지역의 한 창고에 넣어두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온 모리시타는 같은 방법으로 모두 네 대의 아우디를 복스홀에 가져다 두었고 마지막 차를 가지러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 했을 때는 시간이 늦어 버렸다. 다른 사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된 것이다.

  모리시타는 전화를 걸어 불러낸 흑인 남자와 대 당 오백 파운드씩에 거래했다. 그래서 손에 쥔 돈은 이천 파운드. 지금까지 잃은 액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액수였지만 카지노에 갈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다.

  회사에서 지급받은 노키아 휴대폰은 꺼 두었고, 오후 2시까지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회사에서 카지노로 자신을 찾으러 올 지도 몰랐지만 사내에 골든 너겟 카지노 멤버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멤버가 아니면 출입이 안 되는 곳이었으니까.

  모리시타가 지금까지 골든 너겟 카지노에서 잃은 금액은 총 7만 파운드. 엔화로 따져서 천만 엔이 훨씬 넘는 거액이었다. 카지노에는, 그 정도 금액이라면 눈 하나 깜빡 않는 부자들이 많았지만 월급 30만 엔 짜리 샐러리맨에게는 몇 년씩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카지노는 이런 사실을 잊게 해 주었다. 오늘 갖고 있는 이천 파운드를 룰렛의 한 숫자에 걸어 맞추기만 한다면 35배의 배당을 받을 수 있고, 이는 단숨에 그간 잃었던 모든 돈을 만회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모리시타는 주위를 살피며 카지노에 들어갔다. 자신이 첫 번째 손님이었다. 가장 큰 금액까지 베팅할 수 있는 룰렛 테이블 앞에 앉자 머리가 맑아졌다. 도박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딜러에게 오십 파운드 짜리 지폐 마흔 장을 내밀었다. 무슨 칩을 원하느냐고 묻는 딜러를 '그것도 모르느냐?'는 뜻으로 쏘아보다가 생각을 바꿔 핑크 칩으로 달라고 했다.

  빅 그린 칩 두 개로 승부 하려던 모리시타는 스무 개의 핑크 칩을 받았다. 한 두 사람씩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딜러가 룰렛 휠을 돌렸다. 카지노에서는 룰렛의 휠이 멈추어 있지 않도록 항상 돌아가게 해둔다. 볼은 휠이 도는 반대편으로 퉁기지만 능숙한 딜러들은 그 볼이 어느 지점에서 떨어질 것인지 안다고 했다. 즉 정확한 숫자는 맞추지 못해도 대략은 가능하기 때문에 딜러 출신의 도박사들은 볼이 돌아가는 힘과 휠의 속도를 파악하여 '몇 번 근처'라는 식으로 베팅한다. 때문에 많은 룰렛 도박꾼들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딜러가 볼을 퉁긴 이후에 베팅했다.

  딜러가 웃으며 볼을 퉁기자 모리시타는 0번에 핑크 칩 열 개를 올려두었다. 볼은 신기하게도 0번의 바로 옆인 26번에 떨어졌다. 모리시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딜러도 안됐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 숫자만 옆으로 지나갔어도 삼만오천 파운드의 돈이 생기는데 아쉽다는 생각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아쉽다는 마음은 지난 3개월 동안 수도 없이 가져본 모리시타였다.

  다시 핑크 칩 열 개를 0번에 올려두었다. 딜러의 장난인지, 하늘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볼은 0번 옆의 32번에 떨어졌다. 모리시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이제 남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본국으로 소환 당하게 되어 있었고, 회사 차를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회사에서 사법처리를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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