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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전쟁 -49-

김유식 2003.04.03 16:36:46
조회 4728 추천 0 댓글 0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전 12시(프랑스시간). 프랑스 파리. 몽빠르나스.   콩코르드 광장 옆의 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브릴 앙드레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경보를 하는 것 같아 보일 정도로 빨리 걸었다. 매일 오후 11시에 일이 끝나는 그녀는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면 터키 태생의 애인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최근 한 달 동안 한 번도 늦지 않았는데 오늘은 늑장을 부리다가 드디어 한 시를 넘겼다.   우락부락한 그녀의 애인은 용서라는 것을 몰랐다. 오늘도 분명히 그녀의 얼굴은 붓고, 터질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상처난 얼굴로 오후에 클럽에 나갈 수 있을지의 여부를 걱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도망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능력 있는 그의 부하들은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든지 3일 이내에 찾아내곤 했다.   집의 거실과 침대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누군가가 TV나 비디오를 보고 있어야 할 1층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소 두 명씩은 와 있던 그의 부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외출했기를 바라는 아브릴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침실로 갔다. 침실 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애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스타파의 목에는 뒤로부터 커다란 칼이 앞을 향해 관통해 있었다. 두 눈알이 빠지고 혀가 턱 아래까지 빠져 나와 있는 상태였다. 아브릴은 크게 놀랐으나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더 이상 매맞을 일은 없다! 무스타파의 부하 둘은 각각 침실 바닥에 무스타파와 비슷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아브릴은 침착하게 무스파타의 지갑과 패물들을 찾아다녔다. 10분 후 그녀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가지고 집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부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지만 지문은 이리 저리 남아있을 것이었다. 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윗층을 슬쩍 올려다본 아브릴은 침실 창문에서 검정 색 인영(人影)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잘못 보았거니 생각하며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전 8시 10분(일본)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山端)   늦은 조찬을 함께 하기로 한 이중은은 두 명의 통역 겸 부하들을 이끌고 히라타 구미의 본가에 도착했다. 김재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의하러 온 이중은은 오히려 히라타 조직 내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오전 7시에 데리러 온 차는 벤츠였지만 달랑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7대목이 직접 오는 일은 없더라도 최소 조직의 고문이나 산하 조직의 장이 왔어야 하는데도 약간 거만해 보이는 운전사 한 명만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곧 기모노를 차려입은  일본여성의 안내를 받아 7대목이 기다리고 있다는 장소로 움직였다. 정장 차림의 야쿠자들이 미닫이문을 열자 방안에서는 여러 명의 낯익은 얼굴들이 이중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을 보니 아직 7대목은 도착하지 않았다. 상석 아래로 한 개의 자리가 비어있고, 그 주위에는 조직의 고문이자 히라타 구미 내에서 가장 큰 조직을 이끌고 있는 요시이가 앉아 있었다. 고문인 미야자키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어서 오라며 인사를 건네긴 했으나 앉은 채였다. 이중은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요시이에게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꾹 참고 7대목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자 시종이 따라준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중에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차를 다 마셨을 즈음 젊은 야쿠자 한 명이 문을 열고 7대목이 오고 있다고 알려왔다. 모두들 보스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중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어났고 곧 미닫이문이 열리며 진지한 얼굴의 7대목이 너댓 명의 부하들과 같이 들어왔다. 7대목이 상석에 앉으며 오른손을 상  위로 올려 흔들며 다들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전통 일본무사 차림의 7대목은 과연 일가를 이루는 조직의 두목답게 절도 있는 행동을 보였다. 사람들이 앉는 동안 다소 일었던 소음이 사라졌는데도 7대목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자 장내의 분위기는 점차 냉랭하게 변했다. 이중은은 개인적으로 인사하고 영국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보호를 보다 강화시켜 줄 것을 요청하려 했으나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2분 여가 지났다. 침묵을 지키던 7대목이 입을 열었다.   "미야자키, 우리 조직이 제일 금기시하는 것이 무엇이지?"   "예! 에, 그것은 조직에 대한 배신입니다."   7대목보다 십 년 연상인 미야자키가 "하이!"라는 대답을 하고 잠깐 생각한 뒤,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7대목이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우리 히라타가 7대까지 오는 동안 배신자들은 어떻게 처리했지?"   "예!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죄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맞아. 그랬었지."   이중은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통역으로 따라간 박용준은 왜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조직 내에 누군가 배신을 해서 분위기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박용준이 이중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들의 대화를 알려주려 했으나 이중은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외국인은 자신 한 명 뿐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통역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다시 지속된 얼마간의 침묵 뒤에 7대목이 이중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제, 자네의 동생들이 우리 조직을 배신했네."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이중은의 귓가에 박용준의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믿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7대목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7대목의 말은 계속됐다.   "오늘 새벽에 미키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그 미키도 죽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빠른 통역의 말의 이어졌다. 이중은은 7대목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되었지만 장난이라면 너무 심하다 생각되어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도대체 형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중은의 물음이었다. 박용준이 그대로 일본어로 바꾸어 물었다가 그만 옆자리의 덩치가 산만한 한 40대의 야쿠자가 휘두르는 손바닥에 맞고 말았다. 철썩 소리와 함께 박용준이 뒤로 쓰러졌다. 40대의 야쿠자는 교토의 시치조(七條)에서 조직원 서른 명을 관리하고 있는 도리야마(鳥山)였다. 그는 감히 오야붕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끼어 들어 질문을 하는 무례를 범했다며 나직한 목소리로 쓰러진 박용준을 나무랐다.   이중은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박용준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으나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입안에도 잔뜩 피가 고인 것이 입안이 터졌거나 이가 부러진 것 같았다.   부산의 대표 폭력조직인 해운대파는 평범한 인물이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박용준이 뺨을 맞은 순간부터 약 10초간 이중은의 머리 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르고 정리되었다.   자신 앞에서 통역으로 데려온 동생을 후려쳤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으나 이런 호랑이 소굴 안에서 큰소리치며 덤벼들었다가는 오히려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분함을 꾹 참으며 자세를 고쳐 잡고 7대목을 향해 말했다.   "형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십시오."   박용준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훔치며 이중은의 말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전달했다. 말을 하게 되자 입안에 피가 더 빨리 고였다. 뱉을 수도 없었고, 삼키려니 구역질이 났다.   7대목이 눈짓을 하자 오른쪽 옆에 앉아있던 본가 경호책임의 사사키가 벽장을 열고 긴 상자를 꺼내 7대목 앞에 내려놓았다. 지역조장들과 고문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히라타의 오야붕이 된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7대목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한 번쯤 조직을 휘어잡으려면 누군가 하나는 족쳐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일본인 고위간부보다 바다 건너 온 조직원 아닌 조직원을 이용한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라타 구미의 숙원 사업인 한국 진출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하므로 다소 늦어진다는 손해는 있었지만.   7대목이 상자를 열어 날의 길이가 1미터는 족히 됨직한 칼을 꺼냈다. 칼집을 살펴보다가 두 뼘 길이 정도 칼을 꺼내어 이번엔 날의 상태를 확인했다. 좋은 것이었는지 칼날에서 반사되는 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중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용준은 놀라 입안에 고여있던 피를 조금 삼키고 말았다. 비릿한 피가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느끼자 속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형제의 의를 맺은 나의 아우로서 예를 다해 벌을 받도록 하게."   7대목이 한 말이었으나 박용준은 이를 전하지 못했다. 꾹 참고 피를 삼키려고 해보았으나 이번엔 부러진 이 한 개가 뽑혀 입안에서 돌아다녔다. 도저히 삼킬 자신이 없었다. 이중은이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손짓으로 7대목의 말을 전하려 했다. 벌을 받으라니 어느 정도의 벌을 말하는 것일까? '형제의 의', '나의 아우'와 같은 말을 사용했으니 단지(斷指) 정도의 징벌일 것이다. 박용준은 왼손의 검지 손가락을 내밀고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사용해 자른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이중은은 자신의 왼손을 펴서 한 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하나 정도쯤이야!   이중은이 7대목을 바라보며 비장한 눈빛과 함께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7대목은 그가 반항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벌을 받겠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칼을 들고 일어섰다.   이중은 옆에 앉아있던 야쿠자들이 좌우로 물러섰다. 이중은은, 자신의 손가락은 자신이 직접 자르는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7대목이 직접 칼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마도 일본에서도 조직마다 조금씩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남기고 싶은 말은 없나?"   7대목이 말을 마치자 박용준의 입에서 "큭!" 소리와 함께 한 컵 분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는 곧장 7대목에게 날아가 그의 기품 있어 보이는 일본 전통 복장을 붉게 물들였고 얼굴에도 튀었다.   손가락 한 개정도 자르는 줄 알았던 벌이란 것이 목을 자르는 일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박용준이 놀라서 입안의 피를 뿜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즉시 외쳤다.   "형님! 피하십시오! 소..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자르려고 해요!"   박용준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도리야마가 다가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이중은은 상황을 파악했다. 앉은자리에서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로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나이가 들어 예전 만한 위력은 없었지만 한때는 부산 전체는 물론 전국에 명성을 떨쳤던 것이 이중은의 발차기였다. 다가오던 도리야마는 배를 맞고 주저앉았다.   히라타 구미 산하 열 세 개의 지역 조장들과 고문들이 모두 일어났다.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나이 분포도를 가진 이들 중에는 용감한 자들도 있었으나 각각 한 개의 조직을 맡고 있는 조장들인 만큼 직접 몸을 쓰는 것을 꺼려했다. 이중은과 박용준에게 달려들기보다는 재수 없으면 오야붕이 휘두르는 긴칼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마침 도리야마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자 이들은 더욱 겁을 집어먹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몇 명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의 수행원을 불러댔고, 몇 명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 우당탕!   두 개의 미닫이문이 크게 부서지며 뛰어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가려던 야쿠자들과 부딪혀 방안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중은이 통역으로 데려온 동생들 중 한 명이었는데 박용준의 친동생인 박상준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문을 지키고 있던 다른 야쿠자들을 물리치고 뛰어들어 온 것이었다.   반역자를 빨리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한 7대목은 눈으로 들어간 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칼을 휘둘렀다. 바닥에 있던 이중은이 황급히 옆으로 굴러 피했다. 칼끝이 지역 조장 중 한 사람인 이케다의 옆구리를 살짝 베며 지나갔다. 재차 칼을 치켜 든 7대목이 이중은을 향해 아래로 그었다. 살과 뼈가 싹둑 잘리는 느낌이 칼날을 타고 전해져왔다.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7대목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그러나 칼을 쥔 채로 뒤로 물러선 7대목은 흠칫했다. 이중은이 즉사했다면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팔을 들어 눈 주위를 훔쳐 피를 닦아냈다. 고통에 겨워 지르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사내가 바닥에서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고, 처음 보는 사내 한 명은 잘린 팔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7대목의 눈에 천천히 일어나는 이중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중은에게 내려꽂히는 칼을 막은 것은 박용준이었다. 그의 왼쪽 팔은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박상준이 형의 잘린 팔을 들고 바라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에 지역 조장들은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사사키를 비롯한 젊은 야쿠자들 서너 명이 들어와 이중은 일행을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 그대로 두어라. 셋 모두 여기서 처리하겠다." 7대목의 말이었다.   "우리 함께 여기서 죽자."   이중은의 조용한 음성과 함께 그는 허리띠를 풀어 꺼내들었다. 히라타 본가에 들어올 때뿐만 아니라 김해 국제공항과, 간사이 국제공항에서도 금속물 탐지 검사와 함께 무기를 지니고 있는지 검사를 받았지만 이중은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가죽 허리띠는 한 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었다. 가끔씩 금속 탐지기에 걸려 삑삑 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누구도 그 허리띠의 가죽 안에 얇은 금속판을 감추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허리띠를 푼 이중은은 그것을 반으로 접어 부러뜨리고는 바클이 있는 부분과 허리띠의 끝 부분을 손으로 잡고 한바퀴 감았다. 그리고 가죽을 들어내자 면도칼처럼 얇고 부드러운 금속이 빛을 내며 나타났다. 흐늘거리던 금속띠는 두 겹으로 뭉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중은이 무슨 짓을 하나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젊은 야쿠자들 중 한 명은, 그가 허리띠를 이용해 칼처럼 생긴 것을 만들어내자 "코노야로!(이 새끼!)" 라는 외침과 함께 달려들었다. 히라타의 본가 정문에서 손님들의 몸수색을 담당하는 가와츠였다. 흥분을 가라앉힌 이중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뻗어 손목을 조금 흔들었다 싶은 순간, 가와츠가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로 흐르는 피가 삐져 나왔다. 옆에 있던 사사키가 가와츠의 손을 떼어 얼굴을 살폈다.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와 입은 형체도 없이 잘렸고 이마와 뺨, 눈 등에 있는 수십 줄기의 상처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왔다.   사사키가 부하들 중 한 명을 향해 고개 짓을 하자 이번엔 유도를 배웠다는 모로보시가 이중은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했다. 이중은이 살짝 피하며 허리띠를 흔들자 모로보시의 두 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의 열 손가락들 중 다섯 개가 잘렸다. 타다미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들 중 몇 개가 파닥거리며 움직였다.   "다들 물러서라."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깨끗하게 닦아낸 7대목이 칼을 치켜들었다. 이런 좋은 기회는 없다. 이중은이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칼은 배 이상 길지 않은가? 행패를 부리는 배신자 처단이라는 명분도 확실하고, 지역 조장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 강화에도 도움이 되는 기회였다. 7대목은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튀어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칼을 통해 무언가 닿았다는 느낌이 전해져왔으나 이중은을 베기에는 아직 가까운 거리였다. 이중은의 앞을 막아서며 7대목에게 달려든 인물은 박상준이었다. 가련하게도 그는 무기대신 피가 빠져 하얗게 된 형의 팔을 들고 칼을 든 7대목에게 할퀴듯이 달려들었다. 7대목이 냉소와 함께 박상준의 가슴 깊게 박힌 칼을 뽑아냈다. 옆가슴부터 심장까지 박힌 칼이 뽑히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상준아!"   박용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박상준은 7대목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상체가 앞으로 꺾이면서도 그의 팔은 7대목을 할퀴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박상준은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고개를 돌려 이중은을 쳐다보았다.   "크...큰형님. 죄...죄송합니다."   박용준, 박상준 두 형제와의 나이 차가 20년 가까이 되는, 평소라면 얼굴도 제대로 바라다보기 어려운 경상도 폭력계의 거물 이중은이었다.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기회도 없었다. 죽어가면서 박상준은 처음으로 이중은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유가 어찌됐던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보람있는 일일 수 있지. 하지만 네 놈들은 곧 죽을 목숨이라 보람은커녕 개죽음이 되겠지. 더 이상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순순히 벌을 받아라. 영예롭게 할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7대목이 한껏 위엄을 부리며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박용준은 그의 말을 이중은에게 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보스는 자살을 하느니 싸우다 죽을 사람이었다. 지금 박용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현재의 상황을 부산에 알리는 것이었다. 양복 주머니 안에는 어제 김해공항에서 로밍 서비스를 받아온 휴대전화기가 들어있었다. 양복으로 잘린 팔을 감싸기는 했으나 피는 심장박동이 있을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떨리는 것이 쇼크가 오려는 것 같았다.   이중은이 앞으로 나서 허리띠 칼을 들었다. 몇 명의 야쿠자들이 덤벼들려 하자 7대목이 제지했다.   "흠...내 손에 죽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칼을 번득였다. 아무리 이중은 이라도 무기의 길이에는 당할 수 없었다. 한 치가 길면 그만큼 유리한 것이 칼이다. 검도의 달인인 7대목의 칼은 이중은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두 동강냈다.   이중은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박용준을 바라보았다. 7대목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순간 이중은이 바닥을 굴러 7대목의 다리를 안고 쓰러졌다. 이때 박용준은 왼팔을 감싼 채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두 명의 야쿠자들과 부딪히기는 했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한바퀴 구른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렸다. 뛰면서 오른팔을 이용해 양복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그 바람에 상처를 감쌀 수가 없게되자 양복이 떨어졌고 왼팔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땅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야쿠자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뛰면서 번호를 누르자니 버튼 크기가 작아서 엉뚱한 것이 눌러졌다. END 버튼을 눌러 취소하고 다시 입력했다. 부산에 있을 때는 작아서 좋다고 자랑하던 모토롤라 8900형 전화기가 이렇게 불편할 때도 있을 줄은 몰랐다. 눈이 커다란 여고생 출연자의 광고가 마음에 들어서 산 것이었다.     번호 입력을 다 하고 나서 SEND 버튼을 눌렀다. 야쿠자들은 뒤에서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박용준은 정신없이 뛰면서도 전화기의 신호음에 귀를 기울였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어제 공항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저녁 늦게 왔기 때문에 로밍 서비스는 다음날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왼쪽 팔이 잘렸기에 시계는 없었다. 박용준은 고통스러움을 동반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곳을 찾아 뛰었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8시 10분이었으니 곧 아홉 시가 될 것이었다.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커다란 나무 뒤의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한 번 SEND 버튼을 눌렀다. 운 좋게도 이번엔 신호음이 들려왔다. 예닐곱 번 울리자 대양 프로덕션 사무실 여직원의 "안녕하세요? 대양입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고 박용준은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둣발이 날아와 그의 전화기를 차버렸고 다시금 그 구둣발에 의해 머리를 가격 당하자 그는 정신을 잃었고 오분 후부터는 과다출혈로 인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긴 대양 프로덕션에서 히라타 구미 본가로 전화를 해 보았으나 얻은 대답은 이중은 일행이 모두 죽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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