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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승 김상협 - 사상계 편집위원

운영자 2016.10.06 17:27:55
조회 329 추천 0 댓글 0
사상계 편집위원

  

1956년경 초여름 김상협 교수에게 야마구치 고등학교 동창인 강봉식이 찾아왔다. 그는 김상협교수에게 잡지 사상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강봉식은 사상계의 발행인인 장준하에게 끌려 여러 차례 기고를 했었다. 발행인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 유학중 학병으로 나갔다가 탈출해서 광복군에 참가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광복 후 그는 백범과 함께 귀국한 인물이었다. 백범 밑에서 일하다가 사상계잡지의 발행인이 된 것이다. 강봉식은 장준하의 꼿꼿한 성격에 끌려 젊은 고려대교수인 김상협을 끌어들인 것이다. YMCA뒷편 관철동 한청빌딩에 들어있던 사상계 잡지사에서 야마구치고교 출신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30대의 김상협교수는 언론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싶었다. 김상협 교수는 사상계에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정당론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적시했다.


‘집권당이 정치를 더럽혀 국민이익을 저버리는 배신행위를 할 때 서슴지 않고 정권교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시민 각자의 양심과 용기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같은 신생 후진국가에서 권위주의적 가부장형의 독재가 나타나고 있다. 일반대중은 무지몽매하고 민간자본 축적은 빈약하며 민주주의적 경험 또한 일천한 조건하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독재가 나타난다. 민주사회의 지도자는 선량(選良)에 불과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의 초월적 지위는 부정되며 인치가 아닌 법치를 추구해야 한다.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그는 이승만 정권을 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당시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해방후에 나타난 정치적 이상현상은 민주주의의 범람이다. 우리사회의 성격적 기본바탕은 민주주의 생장토양과는 거리가 먼 식민지적 반봉건상태에 머물러 있는데다 공산분자의 파괴책동이 가열되고 있다. 선거는 부정과 타락으로 일관하고 있고 국회는 전근대적 권모술수와 당리당략의 이전투구 현장으로 되어 있다. 행정부는 부패의 온상이 되어 민생을 도탄으로 몰아넣고 이 최악의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지금 절망에 빠져있다. 아무리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항구적 전제와 부패는 민중에 의한 폭력적 돌발사태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젊은 정치학교수의 통렬한 사회비판이고 4.19와 5.16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그는 좌담회에도 참석해 거침없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상협교수는 1958년4월부터 잡지 사상계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사상계의 편집방향은 당면한 국내외의 제반 현실문제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사상계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논객들이 대거 참여했다. 안병욱이 자유주의 철학, 이상주의 철학을 해설적으로 제일 많이 썼고, 김준엽, 양호민, 신상초, 황산덕등이 글을 썼다. 당시 젊은 대학생들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사상계의 영향은 대단했다. 부정부패가 만연된 자유당 정권에 대해 사상계는 불을 뿜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가 김상협 교수와 함께 한국은행 조사부장인 유창순을 명동의 술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유창순이 경제 문제 쪽을 쓰기에 적합한 필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준엽이 조금 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한국은행의 현직 직원이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사상계에 기고한다는 것은 문제였다. 나아가 편집위원이 된다는 것은 더 위험했다. 

“편집위원이 되는 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장준하가 염려가 된다는 표정으로 유창순에게 말했다.

“우리들 모두가 이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글을 쓰는 행동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데 나 개인에게 불이익이 돌아와도 그 정도는 각오를 해야죠.”

유창순의 혈기 가득한 원칙론이었다. 

“그럴게 아니라 글을 쓸 때 가명을 쓰면 어떨까?”

김준엽이 의견을 제시했다. 김준엽은 학병출신으로 탈주해서 장준하와 중국대륙에서 함께 광복군운동을 했던 동지였다.

“아닙니다. 당당하게 이름을 걸고 쓸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유창순이 말했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김상협이 입을 열었다.

“새를 잡는 게 매면 됐지 매의 진짜 이름이면 어떻고 가명이면 어때? 상관없는 거지.”

20년 후 등소평이 한 백묘흑묘론하고 같은 얘기였다. 그 무렵 김상협교수는 자유당정권과 이승만 박사를 독하게 비판했다.


1960년2월15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 월트리드 육군병원에서 서거했다. 그로써 이승만 후보는 단일후보로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일자를 1960년3월15일로 정했다.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인 3월26일 이전에 대통령으로 당선을 시켜 노인을 기쁘게 해드리자는 취지로 날짜를 당겨 잡은 것이다. 당시 85세의 노인인 이승만대통령은 언제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노인이었다. 자유당은 대통령유고시 그 직을 승계하는 부통령에 반드시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안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유당은 경찰과 행정조직을 총동원한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있었다. 관철동 한청빌딩 사상계 편집실에는 당대 논객들이 모여 각자 돌아가며 국내외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들은 이승만대통령이 그만 두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토론이 끝나면 편집위원들은 김상협을 앞장세워 명동의 갈릴레오주점의 술자리로 옮겨 시국론을 계속하기도 했다. 4.19혁명이 일어났다. 김상협 교수는 데모를 한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4.19혁명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과 민주적 자각에 기초하여 발현된 자유민권의 승리였다는 데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민족사적 의미로 더듬어보면 멀리 실학사상, 동학운동, 3.1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진 민주의 근대화로 향하는 각성과 자유의식의 개화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4월 혁명은 지식인의 사명감을 새롭게 자극했고 불의에 타협해 온 안일하고 근시안적인 기성세대에게는 일대 경종이었습니다.”

정치학자인 그는 신중하게 연구검토한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4월 혁명은 휴머니즘을 소생시켰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한 때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이 고갈되고 미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이 포기된 황야에서 자유에의 정열과 민주에의 가능과 인간회복의 활력을 회생시킨 억센 휴머니즘의 핏줄기와도 비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월 혁명은 공간적으로 볼 때 분산적이고 산만한 지방단위의 저항운동을 단숨에 중앙무대에 옮겨 놓았습니다. 담당계층으로 볼 때 시민차원의 혁명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행동으로 결정적인 국민의 호응을 얻어 결정적인 승리를 기약한 결정적인 의거라는 것입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의 피가 끓었다.

  

사상계 그룹의 중심이 되었던 김상협이 대통령감이라는 대망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제일 처음 대망을 걸었던 사람은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김상협을 인물로 보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꿈을 키웠다. 장준하는 4.19후 사상무장운동을 일으켰다. 고학력 실업자가 널려있던 그 시절 일자리가 없어 허송세월하는 젊은 지식층을 상대로 일정 인원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 사회기풍을 세워 나가도록 훈련시키는 간부양성사업을 벌였다. 경제적 빈곤에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피폐해 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김상협 교수로 하여금 청년들을 교육하게 했다. 함석헌과 양호민등 당시 논객들이 참여한 운동이었다. 당시 분위기를 안병욱교수는 이렇게 글에서 회고했다.

“우리의 꿈은 김상협선생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는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공통된 간절한 일념이었다. 언제 그날이 올 것이냐, 그날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이냐, 무슨 방법을 써야 이 목적을 빨리 실현할 수 있겠는가 그게 당시의 중요한 과제였다.” 


김동길교수는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사실 남제 선생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셨으면 하고 바랐던 많은 한국인들 중 한사람이다. 나의 누님인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김상협총장처럼 후덕한 이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면 나라의 앞날도 훤하게 트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호민씨는 김상협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온유하고 오만하지 않고 내심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내색조차 보이지 않는 심지가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남재를 내세워 한번 싸워보자고 했었다.”


민주당 장면정권의 노장파와 이철승의원이 주도하는 신풍회는 공동으로 김상협교수를 초청해서 여러 차례 특강을 듣기도 했다 점차 젊은 김상협 교수의 명성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시 장면정권의 시국은 점점 혼미상태로 빠지고 있었다. 사상계 1961년4월호 권두언은 혼란한 정국에 대해 이렇게 투쟁을 선언했다.

‘만일 현 국회와 정부가 더 이상 우유부단과 무능, 무계획을 일삼으면 사상계는 민족적 자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가차 없는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음을 또한 첨부해 두는 바이다’ ​


예고편이라도 되듯 바로 다음달 5.16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후 나온 사상계 6월호의 권두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정치생리와 사고방식에 있어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그 결과로 사치, 퇴폐, 패배주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게 했다. 그 결과 지금은 다시 발생한 5.16혁명정권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혁명정권은 앞으로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에서 <박정희의 자주사상>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형아는 4.19이후 사상계 잡지를 매개로 하여 벌어진 한국 지식인들의 토론은 박정희의 통치이념 틀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혁명에 성공한 박정희소장은 젊은 유망주 김상협교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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