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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비극 - 랭카스트리아호 침몰
https://youtu.be/nq7ORVd--Z8원제 - The Sinking of the British Ship Lancastria in June 1940: A Personal Tale작성자 - Michael Sheldrick, 작성 일자 2022년 6월 17일1940년 6월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바꾼 달이었습니다. 영국에게는 가장 암울한 시기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극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비극은 우리 가족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습니다.1990년대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여동생과 저는 종종 친할머니 클레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작고 허약한 체구의 클레어 할머니는 스윈던 구시가지에 위치한 연립 주택에 살고 계셨습니다.할머니의 골초 습관 때문에 집안 구석구석에는 담배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불쾌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저는 보통 뒷마당에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통조림 미트볼을 먹는동안, 할머니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시며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당시 할머니는 식욕이 거의 없으셨고, 아주 드물게 남은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을 켈로그 콘플레이크 한 그릇에 붓고는 건포도를 듬뿍 얹어 드시는게 전부였습니다.베라 린의 명곡들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저는 할머니에게 "전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습니다. 클레어 할머니는 제2차 세계 대전을 항상 "그 전쟁"이라고 부르셨는데, 그만큼 그 전쟁은 그녀의 삶, 나아가 우리 가족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할머니는 여성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다양한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던 여성 보조군(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서 일했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곤 하셨는데, 대공포대에서 보조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어느 순간 오랫동안 제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대화들 중 하나가 수십 년 후 갑자기 되살아났습니다.콜린의 22세 시절 모습 (1940년)할머니는 오빠 콜린이 프랑스에서 영국 원정군으로 복무 중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 했다고 제게 말씀 하셨습니다. 콜린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녀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먼 곳을 바라보며 콜린 오빠는 독일 공군에게 폭격을 받은 배에 타고 있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프랑스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지만, "물론 그 무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단다"고 말씀하셨죠. 제가 기억하기로는 할머니를 포함해 일가친척들 중 누구도 그 무덤에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수십 년 후클레어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신 직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수십 년이 흐르고 콜린의 이야기는 제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 8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는 뉴욕 지하철을 타고 지금의 직장으로 향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유해를 수습하는 내용이 담긴 어느 기자의 오디오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에 따라 전사한 모든 미군 병사의 유해를 수습하고자 노력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갑자기 머릿속에 번뜩이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가 콜린의 운명을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고, 동시에 풀리지 않은 수많은 의문들이 생겼습니다. 콜린은 정확히 어떻게 죽었을까?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어떻게 폭격을 받았을까? 그의 무덤과 침몰한 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르는 걸까?우선 아버지와 큰 아버지께 여쭤봤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분 모두 수십 년 전에 할머니가 제게 말해준 것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큰 아버지께서는 누군가에게 덩케르크 철수 작전 중 콜린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어떤 함장이 독일군에게 배의 출항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배신 행위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덧 붙이셨습니다. 두 분은 오늘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경향과는 달리, 전쟁에 참전하셨던 부모님 세대들은 그 시절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말씀 하셨습니다.콜린에 대한 저의 조사도 금세 막다른 길에 다다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라인에서 접근하기 쉽고 방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CWGC) 사이트에서 1918년생에 부모의 신원이 확인된 "콜린 토마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그러던 어느 토요일 저녁, 늦은 밤에야 비로소 제 실수를 깨달았습니다. 아주 사소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실수였는데, 놀랍게도 가족들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할머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하신 1918년 6월에 찍은 생후 4개월 된 콜린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을 스캔해서 보내주셨는데, 사진 뒷면에 "존 콜린 리 토마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평생 콜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신 탓에 그의 본명은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저는 다시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CWGC) 기록보관소 사이트에 접속했고, 몇 분 만에 프랑스 덩케르크 시립묘지에 위치한 영연방군 전쟁묘역 추모 명판에 새겨진 증조부님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미스터리를 밝히다"드디어 찾았어…" 스크롤을 내리면서 룸메이트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명판에 있었습니다. -존 콜린 토머스 이등병- 1940년 6월 17일 사망, 향년 22세, 버밍엄 홀 그린 출신 존 웰던 토머스와 에이미 토머스의 아들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큰 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추모 명판의 위치를 보면 콜린 할아버지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 중 사망한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간단히 구글 검색을 해보니 덩케르크 최종 철수일자는 6월 4일이었습니다. 그건 콜린이 공식적으로 사망한 날보다 13일이나 앞선 날짜였고 뭔가 이상했습니다.더 자세히 조사해 보니 콜린은 덩케르크에서 남쪽으로 약 335마일 떨어진 프랑스 생나제르라는 작은 항구 도시 앞바다에서 HMT 랭카스트리아호 침몰로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랭카스트리아호 침몰은, 영국 해양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참사였습니다. 실제로 이 비극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타이타닉호와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망자 수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증조부님에 대한 내용을 찾은 후, 저는 랭카스트리아호 참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이야기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랭카스트리아호큐나드 - 화이트스타 라인 RMS 랭카스트리아(Lancastria)는 16,243톤급 5층 갑판 규모의 여객선으로 1920년 건조되었습니다. 진수 당시에는 티렌히아로 불렸지만 1924년 랭카스트리아로 선명을 바꾸었습니다. 1932년 이후 부터 1939년 전쟁 발발 전까지는 노르웨이 피오르드와 지중해, 서인도 제도를 누비던 크루즈선으로 활약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급히 랭카스트리아호를 징발하여 병력 수송선으로 개조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캐나다와 영국 간 병력 수송을 담당하고, 노르웨이에서 영국군 철수 작전을 지원했으며, 마침내 덩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 이어졌던 잘 알려지지 않은 철수 작전인 '아리엘 작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작전 개시까지의 과정 또한 그 못지않게 극적이었습니다.병력 수송선으로 개조된 후 촬영된 HMT Lancastria노르웨이 하르스타드에서 영국으로 항해중인 랭카스트리아알파벳 작전 당시 2,653명의 영국군이 승선한 이 배는 철수 도중 독일공군 폭격기들에게 공격 당했지만, 무사히 영국으로 도착했다.나치 독일의 전격전에 압도당한 프랑스 방어선은 덩케르크에서 마지막 철수가 이루어진 6월 4일 이후 며칠 만에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민간인 난민들과 프랑스 군인, 그리고 프랑스에 남아 있던 영국군 약 15만 명이 급히 남쪽으로 탈출했습니다. 6월 14일, 당시 리버풀에 정박 중이던 랭카스트리아호 승무원들에게 프랑스 생나제르 항으로 서둘러 이동하라는 긴급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바로 그날, 나치는 파리를 점령했고 상황은 절망적 이었습니다.콜린은 당시 브르타뉴의 옛 수도이자 해안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낭트의 무기 및 장비 저장 기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전 수습 사무원이었던 콜린은 영국 원정군 주력 부대를 지원하던 수많은 지원 병력들 - 엔지니어, 수리병, 수송 및 연락병, 무선 통신병, 공군 지상 요원, 보급병, 조리병, 제빵사, 행정병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흔히 "식료품 보급병"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적어도 프랑스 침공 초기에는 주 방어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본인들이 전투에 참전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가 독일군의 맹공격에 그렇게 빨리 함락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도 거의 없었지만요.파리 함락 이후, 프랑스에 남아 있는 영국군을 지휘하던 앨런 브룩 장군은 처칠 총리에게 전면 철수 명령을 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6월 15일 새벽, 30분간 이어진 긴박한 통화에서 브룩 장군은 프랑스군의 사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고 절박하게 전하며 "그들은 시체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결국 마음을 바꿔 같은 날 오전 10시에 전면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두번째 영국군 철수 작전인 Operation Aerial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낭트에 있는 콜린의 기지에도 철수 명령이 전달 되었습니다.기지에 있던 군인들이 서둘러 철수 하는 와중에 가져갈 수 없는 장비, 차량, 무기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광란의 상황이 여러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기지에 보관된 식량과 음료를 마음대로 가져갔습니다. 웨일스 출신의 19세 헨리 하딩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모든 것이 활짝 열려 있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갈 수 있었고 우리는 초콜릿을 잔뜩 챙겼다." 그 후, 독일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영국군은 작가 조한탄 펜비가 "마지막 남은 탈출구"라고 묘사한 곳으로 향했습니다.생나제르 항구에서 촬영된 철수 중인 영국군철수 명령이 떨어지고 24시간 후, 생나제르는 영국군과 난민들로 북적였다. 영국군이 정부에서 징발한 여객선에 올라타기 시작하자 프랑스 시민들은 작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6월 17일, 랑카스트리아호는 생나제르에 도착했습니다. 이 날은 그 배에게 운명의 날이 될 것입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랭카스트리아 호에 승선했으며, 콜린이 소속된 부대가 가장 마지막으로 승선했습니다. 먼저 승선한 군인들은 금색 단추가 달린 화려한 흰색 제복을 입은 큐나드 선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승선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운이 좋은 군인들은 식당에서 소시지, 베이컨, 계란에 따뜻한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즐겼습니다. 해안까지 급히 달려온 며칠간의 여정 끝에 얻은 이 아침 식사는 그들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당시 랭카스트리아에 승선한 인원들은 영국육군 및 공군 병력, 숫자 미상의 폴란드 및 체코 군인들,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 직원들, 벨기에 페어리 항공 직원들과 가족들 40명으로 알려져 있다.) 브레스트 항에서 철수 선박에 승선 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영국군들수많은 사람들로 꽉꽉찬 배의 내부가 너무 비좁아진 나머지, 일부 장교들은 랭카스트리아호 선장 루돌프 샤프에게 추가로 사람들을 더 태우지 말고 출항하라며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샤프 선장은 국제법과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우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거부했습니다. 승선한 사람들은 모두 빨리 생나제르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후 1시 48분, 랭카스트리아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탑승객들을 승선 시키던 오론세이호가 독일 공군기에게 공격을 당했고, 폭탄이 함교를 직격했습니다. 다행히 오론세이호에서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오후 2시부터 선원들은 공습 대비 태세로 선상을 돌아다니며 대비했지만, 승선한 인원들이 너무나 많아 폭탄을 피해 몸을 숨을 곳이 없다 샤프 함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샤프 함장은 노르웨이 철수 작전 당시 경험으로 최대 3,000명의 인원을 배에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가능한 더 많은 인원들을 태우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은 상태였던 걸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오전 6시 부터 정오까지 5,00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랭카스트리아호에 승선했다는 것이다. 계수기로 체크한 인원은 6,000명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오후에 승선한 인원들은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다.)Operation Aerial 당시 프랑스에서 병력을 싣고 영국으로 항해중인 SS Guinean의 선상 모습.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거의 모든 선박들에 규정된 정원을 훨씬 초과한 인원들이 승선 했다.수천 명의 사람들이 랭카스트리아에 승선하는 가운데, 프랑스의 새 지도자 페탱 원수가 그날 아침 독일과 휴전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항구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협 건너편에서는 처칠이 곧 망명 프랑스의 차기 지도자가 될 샤를 드골을 다우닝가 10번지 정원에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벨기에에서는 히틀러가 프랑스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허벅지를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칠은 그날 오후 "프랑스를 위한 전투는 끝났다"고 선언 했습니다.침몰큐나드사 소속 선원들은 승선한 군인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후퇴로 지친 군인들은 요리사들이 제공하는 양배추 스튜와 소시지를 게걸스럽게 먹었고, 바에서 판매하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무사히 배에 승선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호위함을 애타게 기다린 끝에 오후 3시 45분, 랭카스트리아호는 마침내 부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승선한 이들이 느낀 안도감은 생나제르에서 불과 17km 떨어진 지점 하늘에서 독일 공군 폭격기 5대가 급강하 폭격을 가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적기 발견 1분 후, 배에 설치된 공습 경보 사이렌(ARP)이 뒤늦게 울렸고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독일공군 폭격기에서 처음 투하한 폭탄들은 빗나갔지만, 오후 3시 50분, 후속한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 폭탄 4발 모두 랭카스트리아호에 명중했고, 2, 3, 4번 화물칸 덮개와 굴뚝 주변 갑판을 관통한 폭탄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랭카스트리아호를 폭격한 건 JG 30 소속 Ju-88 폭격기들 이었다. 명중탄을 낸 조종사는 피터 슈탈(Peter Stahl)로 알려져 있다. (사진 좌측에서 세번째)침몰하는 랭카스트리아호와 주위에서 표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 피격 24분 후, 랭카스트리아는 완전히 침몰했다. HMS 하이랜더 자원 보급병이었던 프랭크 클레멘츠가 촬영한 사진들생존자들의 증언을 읽는 것은 참혹한 일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튀어나온 듯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한 프랑스인 15세 소년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지옥… 끔찍하고, 공포의 극치였다"라고 묘사했습니다.우리는 콜린이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2, 3, 4번 화물칸에 급조된 침상들 사이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군인들 대부분은 폭탄들이 폭발하는 와중에 즉사했습니다. 2번 화물칸만 해도 800명이 넘는 영국공군 부대원들이 있었습니다. 갑판을 관통한 폭탄은 기관실에서 폭발했습니다. 갑판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많은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터진 파이프에서 새어나오는 뜨거운 김에 피부가 익는 것을 참아가며 밖으로 나가고자 사투를 벌였습니다. 웅장한 판넬과 아치형 천장으로 장식된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목재로 만들어진 난간과 계단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익사했습니다. 2,200명 이라는 선박 정원 보다 최소 세 배나 많았던 승선 인원에 비해 구명조끼는 고작 2,500개에 구명정은 32척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급속하게 배가 전복되면서 소수의 구명정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구명 조끼를 입고 배에서 뛰어든 사람들 중 일부는 착수 직후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배에 발생하는 폭발들로 벽과 바닥에서 쏟아져 나온 나무 파편들이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의 살에 박히거나 몸둥이를 찢어버렸고 갑판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구멍난 선체에서는 수백톤의 기름이 바다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자신들을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군복을 벗어던졌고, 그 결과 알몸으로 물에서 구조되었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물속에서 자신들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가 기름때문에 몸에서 미끄러져 벗겨지기도 했습니다. 표류하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은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으며, 작은 구조선들이 기름띠를 헤치고 생존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게다가 구조선들은 기관총 사격을 받았고, 바닷물에 닿으면 발화하도록 칼슘으로 제조된 구명정의 조명탄들이 바다에 떠다니는 기름에 불을 붙여 화재와 자욱한 연기를 발생시키기도 했습니다.바다로 뛰어든 많은 사람들이 주변 해역을 뒤덮은 기름에 질식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하고 잔인했던 것은 독일 공군(Luftwaffe)의 폭격기들이 다시 선회해 해안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을 무차별 사격했다는 사실입니다. 갑판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한 명의 브렌 기관총 사수가 기총소사를 퍼붓는 폭격기들을 향해 연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용감한 사수는 다른 이들처럼 침몰하는 배를 떠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에 남아 폭격기를 격퇴하고자 했습니다. 생존자들 중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름없는 영웅으로 남았습니다.구조된 생존자들의 모습. 총 2,477명이 랭카스트리아호 침몰에서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참상들 속에서도 눈에 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빠르게 가라앉는 랭카스트리아호 용골에 서있던 병사들은 'Roll Out The Barrel' 과 'Hanging Out the Washing on the Siegfried Line' 같이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불렀고, 죽음이 가까워 오자 'There Will Always Be An England'를 담담하게 불렀습니다. 선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God Be With You Till We Meet Again'를 제창했습니다.저는 랭카스트리아호 침몰 직후 정부에서 보낸 첫 전보를 고향 집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콜린은 "전투 중 실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외증조부모님과 그의 두 누이가 언제 소식을 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은 클레어 할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의 말대로 "독일인을 죽이고 싶다"는 불타는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스스로를 "말괄량이"라고 칭했던 할머니에게 콜린은 영웅이었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여성 보조군에 입대했습니다.랭카스트리아호 침몰 후 몇 달동안 생나제르 인근 해안가에서는 수백구 이상의 시신들이 해변에서 발견되었다. 프랑스 민간인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 1940년 겨울까지도 수많은 희생자들의 뼈와 군복들이 해변으로 밀려왔다. 랭카스트리아호 참사는 최근 몇십 년 동안에야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발생한 영국군 전사자 수치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 했음에도 혹은 바로 그 때문에, 국민들의 사기를 유지하고자 했던 처칠 총리는 언론과 생존자들 조차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도록 보도 금지령 (D-Notice)을 지시했습니다. 5주가 지난 7월 말이 되셔야 미국과 스코틀랜드 신문들에 랭카스트리아호 침몰에 대한 소식이 보도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나치의 전쟁 기계 앞에서 영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참사는 너무나 철저하게 은폐되어 생존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아내와 친척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전후 처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오후에 조용한 내각 회의실에서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신문들이 오늘은 적어도 충분한 참사(프랑스의 독일과 휴전협상)를 접했으니 보도를 금지하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참사 소식을 발표할 생각이었지만, 사건들이 너무나 순식간에 닥쳐와서 금지령을 해제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이 끔찍한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75주년2015년, 랭카스트리아호 침몰 75주년이 되어서야 영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인정했습니다. 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조지 옵스본 의원은 "전시 기밀 유지 때문에 당시에는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오늘 이 하원에서 희생자와 생존자, 그리고 그들을 애도하는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안타깝게도, 랭커스트리아호에서 목숨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참사는 전쟁 중 발생한 수많은 비극 중 하나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존재합니다. 무엇이 이 비극을 다른 모든 비극과 차별화해야 할까요? 게다가,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는 덩케르크의 "패배 속의 승리"와는 달리, 랭커스트리아호 참사와 같은 규모의 비극은 영국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덩케르크 철수 후 프랑스에 남겨진 15만 명의 병사들의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주류 역사책에서 거의 잊혀졌습니다.심지어 친척들 사이에서도 무관심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사촌이자 콜린의 조카인 한 분이 제가 보낸 휴대폰 메시지에 "아무도 콜린에 대해 얘기해 준 적이 없고, 아마 내가 그보다 더 많이 알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답장했던 기억이 납니다.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도록 둘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 클레어 할머니가 제게 사랑하는 오빠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덩케르크에 있는 콜린의 추모 명판도 생각났습니다. 지난 80년 동안 그의 가족 중 누구도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아셨다면 할머니를 바로 데리고 갔을 텐데 말입니다. 클레어 할머니는 가실 수 없었지만, 우리는 갈 수 있었습니다.랭카스트리아호 침몰 80주년을 얼마 앞두고, 저는 가족들과 함께 페리를 타고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춥고 안개가 자욱했던 어느 겨울날 아침 8시, 우리는 무덤을 도착했습니다. 작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 각자의 잔에 한 잔씩 따른 후,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잔에 위스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작은 명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건배를 했습니다.존 리 콜린 토머스는 1940년 6월 17일 랭카스트리아호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그는 사라졌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https://www.historyisnowmagazine.com/blog/2022/6/17/the-sinking-of-the-british-ship-lancastria-in-june-1940-a-personal-tale - 원글 링크본글 내용 중 일부는 아래 링크들을 참조하여 추가한 것https://media.nationalarchives.gov.uk/index.php/forgotten-tragedy-the-loss-of-hmt-lancastria/https://www.royalpioneercorps.co.uk/rpc/history_lancastria.htmhttps://historianet.nl/oorlog/tweede-wereldoorlog/grootste-scheepsramp-uit-de-britse-geschiedenis-6500-doden스코틀랜드 출신의 랭카스트리아호 선장 루돌프 샤프는 침몰 직전 함교에서 탈출하였고, 바다에서 표류 중 구조선에 구조되었다.이후 그는 큐나드 - 화이트스타 라인 여객선 이었던 HMT 라코니아호 (Laconia)의 선장직을 맡게 되었다.1942년 9월 12일, 1,800명의 이탈리아 포로들을 포함해 약 2,300명의 인원을 수송하던 라코니아호는 U-156이 쏜 2발의 어뢰에 격침당하며 1,658명의 사망자를 냈다.루돌프 샤프는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명정에 태우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함교로 걸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라코니아호와 함께 가라앉았다.랭카스트리아호 참사 마지막 영국군 생존자였던 왕립 공병대 제633공병중대 소속 레그 브라운 (Reg Brown)저는 6월 17일, 배에 마지막으로 탑승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배에 탔을 때, 저는 온몸이 더럽고 꼴사나웠으며 배도 고팠습니다. 운동화를 신고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먼저 몸부터 씻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음식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냥 밥부터 먼저 먹기로 했습니다.저는 갑판에서 두 층 아래에 있었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의자에 앉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나더니 배가 요람처럼 흔들렸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보니 계단이 박살나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넘어서 기어 올라갔고, 사람들도 저를 넘어 갑판 위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우린 끔찍한 상태였고, 두려움에 떨며 죽을 각오를 다졌습니다. 살든 죽든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친구인 버트 해리스와 저는 양말, 속옷, 조끼만 남기고 옷을 벗은 채 배 밖으로 뛰어내리기로 했습니다.우리는 필사적으로 헤엄쳤습니다. 사방에 기름이 흥건했고,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독일 비행기들이 다시 돌아와 기관총을 난사했고, 총알이 물에 박힐 때마다 진동이 느껴졌습니다.약 3시간 후, 우리는 프랑스 기뢰 제거함에 구조되었습니다.레그 브라운은 2018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랭카스트리아호 침몰에서 생존한 민간인들의 모습 최연소 민간인 생존자는 당시 생후 2년 6개월이었던 재클린 틸리어 (Jacqueline Tillyer)였다. 재클린은 부모님 클리퍼드 틸리어, 베라 틸리어와 함께 바다에서 4시간 동안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재클린을 안고 있는게 아버지 클리퍼드, 차를 따르고 있는게 어머니 베라)1949년 6월 17일, 런던 화이트홀 전물자 기념비 앞에 모인 랭카스트리아호 생존자들 속 11세 소녀 재클린 틸리어랭카스트리아호 선원들이 아기였던 재클린에게 선물한 선원용 스웨터를 들고 있는 모습 재클린 태너 (Jacqueline Tanner)는 2023년 8월 11일 사망했다.프랑스 생나제르 해안가에 위치한 랭카스트리아호 추모비 "이곳 맞은편에는 1940년 6월 17일 프랑스 철수 작전 당시 영국군과 민간인을 태우던 중 적의 공격으로 침몰한 수송선 랭카스트리아호의 잔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4,000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며, 많은 생명을 구했고 부상자를 돌보았으며, 희생자들에게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준 생나제르와 주변 지역 주민들을 기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HMT 랭카스트리아 협회, 1988년 6월 17일영국 리버풀에 위치한 랭카스트리아호 추모 명판영국 스코틀랜드 골든 주빌리 대학 국립 병원 앞에 위치한 랭카스트리아호 추모비이 곳은 랭카스트리아호가 건조된 비어드모어 조선소가 있었던 장소이다.영국 정부의 공무상 비밀보호법에 따라 1940년 당시 작성된 랭카스트리아호 공식 보고서는 2040년까지 비공개되고 있다.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미군이 달려서 적 모가지 치는 이야기 - 上
마두로?아니, 크라우트들. 때는 1944년 7월 말.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이어지던 노르망디 전역이었지만, 결국 결착이 나고 있었다. 독일군의 전열은 붕괴했다. 붕괴한 전열을 메꾸고 전선을 수습할 부대들. 기갑교도사단을 위시한 독일의 정예들은 연합군의 공습을 얻어맞아 녹아내리고 있었다. 메꿔지지 못하고 무너진채로 남은 독일군의 전열 사이사이로 연합군 선봉이 스며들어왔고 무너진 전방 부대들을 쓸어 담으며 전과 확대에 나서고 있었다. '끼요옷!' 그리고 옆으로 눈을 돌리면, 어떤 전쟁광이 신대륙식 기동이란 어떤 것인가, 를 보여주며 초고속으로 질주, 독일군의 텅 비었고 빈약한 측방을 찌르다 못해 쪼개고 있었다. 요컨대, 서부전선은 총체적으로 좆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좆된 상황은 프랑스 남부의 방위를 담당하는 독일 G집단군 - 19군도 공유하고 있었다. G 집단군에 대해서라면, 상황은 좋지 않았다. 원래는 1군과 19군을 둘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1군은 노르망디 전역의 붕괴를 막기 위해 북부로 차출된 상황이라, 사실상 예하에 군 하나밖에 없는 집단군 호소인이 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G 집단군 곧 19군인 수준이었다. 19군에 대해서라면... 서류상으로는 25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거느린 19군이었지만, 까고 보면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일단 인적자원부터가 심각하게 문제였다. 알다시피, 독일군의 주전장은 동부전선. A급이란 A급은 다 빨아먹는 블랙홀이다. 동부전선을 빼고 봐도, 누가 봐도 서방 연합군의 주공이 들이칠 북프랑스 지역에 남은 A급을 쓸어넣어야 했다. 그러니, 19군이 받는 것은 B급, 그리고 C급. 폐급으로 분류된 병사들과 부상병들. 그리고 재편성을 위해 이곳에 잠깐 주둔하는 중인 패잔병들. 또는 동유럽에서 긁어모은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슬라브-발트인들. 사람이 모자라면 장비라도 좋아야하는데, 사실 장비도 좋지 못했다. 말했다시피, A급 장비는 동부로, 그리고 노르망디로 가야했으니. 구 프랑스군의 시대착오적인 장비들마저 쓸만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판이라 19군은 제대로 무장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령 예하의 4개 보병 사단은 아예 모든 기동 자산을 회수당하고, 배치된 지역에서 싸우다 죽으라는 고정 사단으로 지정되어 있었더랬다. 그나마 신뢰할만한 부대는 11 기갑 사단으로, 군 안의 유일한 기동예비대였다. 1940년에 창설된 이 부대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와 키예프에서 싸운 부대였다. 특 A급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이 정도면 준수한 부대... ... 였었다. 11기갑사단이 1944년 8월까지 그런 준수한 부대로 죽 남아있었으면 동부전선에서 바그라티온때 녹아내렸거나 노르망디 전역에서 포위섬멸 당했지, 남프랑스에서 숨 돌리고 있지 않았으리라. 11 기갑사단은, 코르순-체르카시 전역 당시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혔었다. 필사적인 후퇴를 시도했지만 사실상 전멸. 대부분의 장비를 망실했으며 부대의 뼈대 정도나 겨우 살려 돌아온 상태였다. 이후 보충병을 받아서 남프랑스에 배치, 숨을 돌리며 재정비, 또는 사실상의 재생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노르망디 전역이 붕괴하자 예하에 있던 2개 기갑 대대 중 하나를 북프랑스로 차출을 보내어, 이게 사단인지 여단-연대인지 구분도 안가는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그러다가 남프랑스 전역의 시작을 목도하게 되었다. (7~8월경 서부전선군 사령관 권터 클루게)'그러니까.''북프랑스 전설은 사실상 붕괴 상태라 19군 후방은 비어있는거나 다름없고.''옆인 이탈리아에서도 뭐 도와서 빼줄 역량 없고.'(이탈리아 전선은 남프랑스 전선과 동급인 3선급 전장으로 분류되었다.)'ㅇㅇ 걍 개좆됨.''말씀대로 노르망디 붕괴해서 뒤가 위험함. 팔레즈에서 7군 전멸중이라 답도 없어.''근데 또 보면 알겠지만 19군 애들 연합군 상대로 못싸울 것 같음. 숙련도도 매우 낮은데다가 사단간 간격이 90km임. 그러니까 앞도 위험함.''남프랑스 상륙한 연합군이 찌르면 앞으로 뭉그러지고 뒤에서 패튼같은 미친 놈이 기갑부대로 찌르면 그냥 군 자체가 전멸 판정 나는겨.''걍 후퇴하고 제대로된 부대들이랑 제대로된 부대 앞에서 같이 싸우게 합시다. 폐급도 아껴서 써야지 얘들도 허무하게 소모하면 진짜 할배들이랑 애새끼들 징집해서 돌격대로 써먹을듯? 뭐 설마 그럴 일이 있겠나 싶지만...''ㅇㅋ 빼''뭐 후퇴?''누가 그래 Nei...'(19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비체)'어디서 개가 짖나.''ㄳㄳ 바로 갑니다. 파울루스 꼴은 면해야하지 않겠노' ... 라는 로직으로, 19군은 철수에 들어간다. 그리고 19군의 후퇴 상황은 모두 남프랑스로 진입중인 미 집단6군에 접수되는 상황이었다. (6군단 군단장 루시안 트러스콧 중장)'그러니까, 독일군이 다 튄다.''근데 그 새끼들 장비 병신이라 싸우는 것도, 튀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며.''이건 기동예비 투입해서 포로 쓸어담으라는 거지. 완전 차려진 밥상 아님?''ㅇㅇ 맞죠 잡아야죠.''근데.''우리 기동부대가 없어요.''후속 상륙중인 프랑스 B군에 배속된 1기갑사단이 있기는 해요. 근데 그거 다 전개되길 기다리면 늦음.''오랑 쪽에서 빼올 수 있는 프랑스 기동부대가 있는데 얘들도 제때 오고 제때 싸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정치적인 문제도 있다카고.''아니 시발 개밥도 차량화해서 뿌릴 것 같은 천조국 군대에 기동예비가 없다는게 말이나 되노?''기동부대 다 어디감????''끼요오오옷!''그런건 저기 북쪽에 몰려있고요... 뭐 여튼 우리 밑에 있는건 그냥 보병사단입니다. 독일 기갑사단보다야 기계화되어있지만 그게 잘난건 아니죠.''답 없어보이는데.''뭔 답이 없어 ㅅㅂ''여기는 군대다.''기동 예비가 없어? 그럼 만들어. 못할거 같아? 그냥 해. 씨발 위캔두잇!!!'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진것이 이 부대, 버틀러 특임대다. 보병/전차/구축전차/포병 대대가 하나씩. 이외에 수색부대로 그레이하운드로 무장한 기병수색대대 1개와 기병중대 3개를 넉넉히. 이외 지원 세력도 가득.편제를 늘어놓아 보면 -제117기병정찰대대 제59기갑야전포병대대 제753전차대대 (중전차 1개 중대 및 경전차 1개 중대 결원) 제143보병연대 2대대 (차량화) 제636전차구축대대 C중대 제344공병연대 F중대 (TF 버틀러에 행정적으로 배속되었으나 합류하지는 못함)제111의무대대 C중대 제111의무대대 D중대 파견대제3426병참트럭중대제87병기중대 파견대헌병 파견대 (제6군단)(특임대 지휘관 프레데릭 버틀러)'라고는 하지만 씨발 본부 중대가 없어.''통신 장비가 없다고.''안그래도 급조 부대라서 손발 안맞고 적 종심 깊숙히 침투 해야하는데 통신까지 안되면 걍 죽으라는거 아니냐. 내 머리 위에 있는게 미 사령부가 아니라 대본영, OKH던거임?' 결국 어쩔 수 없이 특임대 사령부를 정찰 대대와 겹치고, 정찰대대의 통신망을 중심으로 부대 내 통신망을 개척. 그야말로 급조부대 다운 지휘체계를 구축한다.'그것만 문제가 아냐.''우리 애들 전투 경험 있고, 숙련된 보병들이긴 한데. 어디까지나 보병들로서, 그리고 그 보병을 지원하는 기갑세력으로서 도가 튼거지. 전투 리듬 자체가 보병의 전투 속도야. 복잡한 고기동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표준 전투 절차도 없는데?''훈련할 시간도 없는데???' 그렇지만 일단 휘하 병사들과 장교들을 믿기로 하고,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개념 브리핑만을 실시한 채 전투에 돌입한다. 이십만이 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임무라."끼에에에에엑!" 원래는 이 아저씨와 그 예하부대같은. 맹렬한 투지에 불타는 지휘관과 압도적인 질량의 기갑세력으로 해야하는 거지만. 뭐 어쩌겠누. 남프랑스에는 그런게 없다. 그래서, 급조된 여단급 부대로 이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건 다음편에...... 출처 TASK FORCE BUTLER: A CASE STUDY IN THE EMPLOYMENT OF AN AD HOC UNIT IN COMBAT OPERATIONS, DURING OPERATION DRAGOON, 1-30 AUGUST 1944. MICHAEL J. VOLPE, MAJOR, USA
작성자 : Ashige_good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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