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쓰던 픽인데...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픽을 더 못 찾아서 자급자족 하려고 쓰기 시작했는데, 쓰고보니 너무 구려서 봉인해뒀음.
휴지통 데이는 이런 것도 버릴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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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댈러스는 나름대로 큰 도시다. 땅덩어리로 보나 인구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나름대로 미국 내에서 열손가락 내에 꼽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이 지역 주민들은 다양한 장점들을 누리고 있다. 일주일동안 매 끼니를 서로 다른 국가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던지, 영화관을 선택할 때 시트의 안락함과 스크린 크기, 프레츨의 맛 중에서 더 마음에 드는 장점을 보고 고를 수 있다던지.
혹은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기 위해서 여러 곳의 병원을 갔다가 입을 열지 못 하고 나와도,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
벌써 몇 분째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늦봄의 시원한 바람은, 아직 다 올라가지 못 한채 비스듬히 비치는 미약한 햇살과 어우러져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공원의 오솔길을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몇몇은 목줄을 쥔 채 애완견과 함께 달리고, 몇몇은 그 광경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스쳐지나간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무심코 깨달았다. 저 사람들은 대부분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걸 보니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온다.
나는 왜 떨고있는걸까. 슬픔, 외로움, 분노, 죄책감 등의 이유가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를 고를 수도 없었고, 그 모두를 고를 수도 없었다. 적어도 추위 때문은 아닐거라고 추측할 수는 있겠지.
'추위 때문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조용히 속삭여 보았다. 입밖으로 살며시 스며나온 단어들은 햇살에 부서지고 산들바람에 휘날려 조용히 사라졌다. 그 산들바람은 성질이 고약했는지,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장난을 한 번 더 친 듯 했다. 눈앞에서 주인과 함께 달리던 골든 리트리버가 사람처럼 코가 추운듯이 기침을 크게 한 번 하더니 콧물을 한 번 크게 뿌리는게 보였다.
"추위 때문이라면 좋겠어."
얼굴의 긴장이 살짝 풀리는걸 느끼며, 귀여운 동물에게 아주 살짝 미소를 지어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있는 작은 2층 건물이 보인다. 어느샌가 건물 안쪽의 조명이 켜져있는게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건물쪽으로 침착하게, 혹은 무겁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게 말을 해야 하는 두려움인지, 말을 하고 싶다는 욕망인지를 생각했고, 건물 입구의 유리문에 도착할 때 까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불투명한 유리문에는 '파비의 정신과의원(Pabbie's mental health clinic)'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쉬고 문을 밀면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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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갈하다, 진료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낡았지만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 않는 빛바랜 베이지색 벽지가 소담한 크기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따스한 햇살에 기분 좋게 부드러운 난반사를 일으켰다. 부서진 빛의 조각들은 듬성히 들어찬 책장에, 흰색 원목으로 깎은 책상에, 그리고 거기 팔을 올려놓은 나이 든 남자에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예약하신 안나 아렌델씨죠? 파비 리빙스톤입니다. 그냥 파비라고 불러주세요."
작은 체구의 남자. 말할 때 입꼬리 하나 올라가지 않지만 목소리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눈가에 자글한 주름들은 피로와 노화의 흔적이라기 보다는 지혜로움의 증거로 보인다. 의사란 직업 때문인가? 아니면 흰색 가운 때문? 겉모습으로 사람의 내면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너무나 무해한 남자로 보인다. 아니면, 단지 이 남자가 무해하길 내가 원해서 그렇게 보이던가.
"예약을 하실 때... 조언이 필요하다고 하셨더군요. 흠..."
그는 회전의자를 돌려서 등 뒤에 있던 책장에서 차트를 느릿히 꺼내서 읽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선 직접 만나서 말하고 싶다... 그렇군요."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트위에 적힌 내 정보를 천천히 읽고 있었다. 이름, 나이, 성별, 병력, 가족관계 같은 별 의미 없는 것들을. 아니, 하나는 의미가 있나.
"닥터 파비... 전...."
입을 열고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조언이 필요해서,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왔다고 해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건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꺼낼 수가 없을 것 같다. 만에 하나 이 남자가 누군가와 만나서 술을 마시다가 내 이야기를 꺼내버린다면? 혹은 실수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소문을 퍼뜨려 버린다면? 내 비밀이 퍼뜨려지면, 우리는 더이상 이 도시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니 전신이 긴장으로 팽팽해지고 입안의 침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다른 병원으로 가봐야하나? 핸드폰으로 검색하면 위치가 나오지 않을까?
그걸 보더니 의사가 다시 한 번 의자를 뒤로 돌려서, 책장안의 어느 파일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곤 책상위에 올렸다.
"손에 힘 빼세요. 손톱이 손바닥을 찢어도 여기선 치료할 수 없거든요."
"....."
그리고 의사는 종이 하단부에 느릿히 뭔가를 끄적이더니 금새 자신에게 종이를 건넨다. 아무 말 없이 종이를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있었다.
<계약서>
나 파비 리빙스톤은 이하의 사항을 지킬 것이다.
첫째, 나 파비 리빙스톤은 환자의 비밀을 지킨다.
둘째, 나 파비 리빙스톤은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셋째, 나 파비 리빙스톤은 환자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위 사항을 지키지 못 할 시 즉시 환자에게 현금으로 51만 달러를 지급할 것이다.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농담을 하는 건지 헷갈려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얼굴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밑에 사인하시면 된다고 말해서 나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래, 적어도 긴장은 풀렸네. 너무 힘을 줘서 새하얗게 변했던 주먹엔 어느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잠시후 손을 몇 번 털고 하단부에 적힌 의사의 사인 밑에 내 사인을 추가했다.
다시 한 번 파비를 쳐다보았다. 작은 체구, 자글한 눈주름, 구부정한 허리.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또렷하고 돌처럼 단단한 의지로 차있었다. 그 눈을 보자 겨우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이 의사구나. 그걸 깨닫자 거짓말처럼 닫혔던 입이 열렸다.
"저기, 파비. 먼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의사는 느릿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50만달러가 아니라 51만 달러죠?"
"집이자 진료소인 이 건물 감정액이 45만달러, 예금액이 6만달러라서 그렇습니다."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고 덤덤히 말하는 남자를 보고 생각했다. 이 의사에게라면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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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있어요."
내가 갑작스레 말했다.
"그렇게 적혀있군요."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왼손으로 붙잡은 차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 조언이 필요해요."
그렇다, 조언이 필요하다. 내 의견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 서있는 누군가의 의견이. 내가 잘못됐는지, 언니가 잘못됐는지, 혹은 둘 다 잘못돼거나 그렇지 않은지를.
"그러면 이야기를 들어보죠."
그는 나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마치 차트에 적힌 단어들 사이에서 뭔가 얻어내려는 듯이 침착하게, 몇 줄 안 되는 내 정보를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 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제가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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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물론 지금도 어리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난 언니와 정말 친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친했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가장 서로에게 가까웠던 건 그 때였던 것 같다.
세 살의 나이 차이 때문에 같이 유치원은 가지 못 했지만, 유치원이 끝나면 엘사는 항상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떤 꿈을 꾸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을 못 해도 몇몇 장면들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법이다. 오래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의 기억들은 전후관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엉망진창이 되었고, 엘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다른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틀림없이 행복했던 순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고, 그 추억들의 몇몇 순간들, 예를 들어 나를 위해 사과를 따주겠다며 멋지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사과를 따주던 엘사를, 같이 공원에 산책을 가서 꽃으로 화관을 만들다가 관리인에게 들키고 혼나면서 함께 키득댔던 순간을, 바다에서 내가 탄 튜브에 손을 걸쳐서 이 곳 저곳 헤엄을 치던 엘사의 개구졌던 미소를 아직도 떠올릴 수 있다. 마치 그 순간들이 프리즘을 거쳐 아름답게 조각나서 만화경처럼 반짝이는 것 처럼, 괴로울 때 마다 내 가슴속에서 빛나며 내게 용기를 준다.
그 때의 나는 엘사랑 함께 있는 게 제일 행복해서 새로 친구를 사귈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유치원에 가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놀 수는 있지만, 유치원이 끝난 후나 쉬는 날에 같이 놀 만한 친구는 없는 상태였다. 물론 나는 엘사랑 함께 있으면 되기에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몇 달 전, 그러니까 엘사가 3학년의 막바지에 이를때 즈음에 엄마가 엘사에게 말했다.
'엘사, 안나도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잖니. 안나도 너 외에도 친구를 사귈 여유를 줘야하지 않을까?'
'그치만 안나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안나는 저랑 있을 때 가장 즐거워 하는걸요?'
'하지만 넌 이제 4학년이잖니. 매일마다 네가 숙제를 마칠 때 까지 안나 혼자서 쓸쓸히 기다리길 바라니?'
굉장히 냉정한 내용이었지만, 엄마의 어조는 상냥했고 따스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마 엄마는 엘사가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엘사는 잠시동안 가만히 서있더니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안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새 친구를 많이 사귀고, 걔들이랑 놀렴. 걔들이랑 다 놀고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오면 나랑 놀자. 알겠지?'
난 그저 엘사랑 놀면서도 새 친구들이랑도 놀 수 있다는 말에 방긋방긋 웃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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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때부터였어요. 엘사가 얼굴 표정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건."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흠... '표정을 만든다'라는 말에 대해 더 듣고싶군요."
파비는 차트 위에 계속해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많은 걸 적으면 여백이 모자라진 않을까 걱정을 했다가, 공간이 모자라면 다른 종이를 쓰면 된다는 걸 곧장 깨닫고 부끄러워져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어... 가짜로 감정을 표현하는 거요."
내가 짧게 답했지만 파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라는 뜻인가?
"나에게 엘사가 가장 친한 친구였듯이, 엘사에게도 내가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어쩌면, 아마도, 내가 엘사를 좋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엘사가 나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가 아니라 '틀림없이'. 목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몸을 울렸다.
"그런데 엘사는 그 제일 친한 친구랑 놀 시간이 엄청 줄어든 거죠. 그야 외롭거나 화가 나는게 당연해요. 그 때의 엘사는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니까요. 처음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한 번도 듣지 못 한 이야기를 듣고, 듣지도 못 한 곳에 놀러가는 건 나에게 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네, 엘사랑 노는 것 보다도 더 재밌었어요. 그래서 항상 친구들이랑 놀았고, 어떨 때는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고 밤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엘사는 표정을 만들어 냈어요. 내가 돌아갔을 때 날 반갑게 맞아주며 웃는 표정을 만들었고, 내가 그날 겪은 모험들을 이야기하면 재밌었겠다며 웃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어요. 신기하게도 난 그 표정이, 그 목소리가, 가짜라는 걸 알 수 있더라구요."
"그걸 확신할 수 있나요? 이유라도?"
파비는 잠시 차트를 내려놓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중요한 질문인가?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은데.
"엘사는, 진심으로 웃을 때 얼굴에서 빛이 나요. 진짜 빛이 난다는 게 아니라, 아니, 온 몸으로 표현한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경박하게 웃는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해야 겠네요, 엘사가 진심으로 웃을 때 내가 행복해져요. 그런데 그 때는 엘사의 미소를 보고 내가 슬퍼지더라구요. 그게 내가 확신하는 이유예요."
"조숙했던 언니군요."
파비가 짧게 논평했다.
"희생을 했던 거죠. 희생과 어른스러움은 같은 말이 아니예요."
왠지 모르게 파비의 말이 거슬려서 쏘아댔다. 파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새 종이를 꺼내서 차트판에 끼운 후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공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사람의 무뚝뚝함이 거북했다.
"어쨌건, 그 때의 나는 엘사에게 물어버렸어요. '외로워? 화났어?' 라구요. 그러자 당연히 엘사는 화들짝 놀라면서 아니라고 말했고, 나는 웃으면서 엘사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엘사도 친구를 사귀고 놀러다니면 안 외로울거야.' 라고요."
참 잔인한 말이다. 어리석음은 이따금 정말로 날카로운 칼날이 되는 것 같다. 입에 고인 침에서 쓴맛이 느껴지는 것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침을 삼키자 목이 아린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파비가 조용히 물어온다.
"그래서 당신의 언니는 어떻게 반응했죠?"
"네,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 말대로 엘사는 조숙했던 것 같네요. 언니는 나를 꽉 끌어안고, 조용히 알았다고 말했어요."
그래, 나한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꽉 끌어안았지. 한참을 끌어안았어.
그리고 파비는 이 한 마디를 듣고 뭔가를 잔뜩 적어댄다. 그의 무뚝뚝함이 너무나 거북하다.
"드문 사람이군요."
파비는 다시 차트를 책상에 내려놓고 내 눈을 바라본다. 마치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뭔지 안다는 듯이 뻔히 쳐다본다.
".....네"
대답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파비는 한동안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만지작 거리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따라 눈을 옮기자 눈부신 햇살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서 그늘을 만들자, 창밖의 공원에서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얼마전 까지라면 보고 미소 지었을 것이고, 힘들 때라면 부러워 했을 것이고, 지금은...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옆에서 파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자기의 입꼬리가 비틀려있던 걸 깨달았다.
"...보건복지부(DHHS)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대인의 약 30% 정도가 평생 한 번 이상의 정신질환을 겪는다고 합니다. 이건 담배로 대표되는 니코틴 중독 증상과, 경증의 습관성 알코올 섭취를 제외한 수치죠."
그를 돌아보자, 햇빛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이 차분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물론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비율이 낮겠지만, 지금 창밖의 공원에 걸어다니는 저 사람들 중에서도 정신 건강상의 불편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지금 당신처럼 말이죠."
입꼬리가 한층 더 비틀려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아, 다른 사람들도 힘드니 나만 힘든 척 하지 말란거야?
내가 예리하게 노려보는 것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파비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저들보다 현명한 선택을 한 겁니다. 아플 때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방에 틀어박히거나, 술이나 담배같은 의존성 약물에 기대거나, 남을 상처입히는 식으로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돌리는 것 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입니다."
현명한 선택. 어디까지나 무뚝뚝한, 중립적인 단어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딱딱한 내용의 문장 속에는 딱 편안함을 느낄 정도만의 상냥함도 느낄 수 있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입꼬리와 눈가의 힘이 어느샌가 자연스레 풀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 보다 훨씬 좋은 표정이군요."
파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난 그냥, 누군가에게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신과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그거죠. 백 마디의 말을 듣고, 한 마디의 조언이나 처방을 내리는 것."
신기하게 이 사람이 말을 하면 상냥한 말조차 무뚝뚝하게, 아니, 중립적인 사실로 느껴지는 것 같다. 이젠 이 말투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그럼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요?"
"안 됩니다."
"네, 그럼... 네?!"
나는 의도치 않은 대답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다음 예약이 잡혀있거든요. 안나 아렌델씨가 전화로 예약할 때 시간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최소 시간인 30분으로 잡아놓았습니다. 상담원이 말을 했을 겁니다만..."
파비는 자신이 글을 적던 종이를 차트에 차곡차곡 모아서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순 없나요?"
이제 겨우 이야기 할 만큼 마음이 편해졌는데, 이렇게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안 됩니다. 대신 뭔가를 해드릴 순 있을 것 같군요."
그는 다시 한번 의자를 회전시켜 등 뒤의 책장에서 또 다른 차트를 꺼내서 훑어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냉정한 태도였다.
"내일 예약을 잡아놓은 몇몇 환자에게 진료를 취소해달라고 부탁해보겠습니다. 급한 환자가 생겼다고 하면 이해해 줄 것이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의료법에 따라 급한 환자부터 봐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겠죠."
"어... 그, 그래도 되나요?"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됩니다. 보건의료법으로 보장된 의사의 권리니까요."
그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건 다른 고객들에게 클레임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행동 아닌가? 나만 특별취급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거야? 하지만 그의 무뚝뚝한 말투를 들으면, 이게 너무나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 당장 나가주셔야 합니다. 다음 환자분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내일 몇 시에 올지는 카운터에 가서 말하시면 됩니다. 내일 이후로도 올 거면 이후의 진료까지 한 번에 예약을 하는 게 좋겠군요."
안나는 이 냉정한 말투에 실망해야 할지, 이 배려에 감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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