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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여우 1 ~ 2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2.13 13:49:17
조회 1479 추천 46 댓글 12
														

여우 1 중에서 좀 바뀐 부분이 있어서 같이 올림...
3편으로 완결 예정.






오늘도 잠을 자지 못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동이 터 오는 것을 보고 한숨만 내쉰다.
이게 다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때문이다.
정말이다. 나는 19살이 다 되도록 별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다 하고 살면서 고민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때문에 수능 전날에도 잘만 쏟아지던 잠이 안 와서 계속 이 고생 중이다.
불면의 원인인 내 고민은 남들한테 말하기 힘든 일이다.
왜냐면 봐봐,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동성애의 ㄷ만 꺼내도 다들 흰 눈으로 쳐다보는걸.
게다가 상대가 나보다 12살이나 많은 어른 여자라는 걸 알면,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말이나 듣게 될 것이다. 욕 안 듣는 게 어디야.
내가 원래 동성애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TV 속에서나 그런 걸 접했을 뿐인 아주아주 평범한 애였지.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와 만나 결혼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이게 다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때문이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레나 언니가 운영하는 카페로 놀러 나왔다. 내 이런 고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레나 언니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되게 할 말이 많지만 굳이 하지는 않겠다는 표정으로 날 보는데,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아는 모양이다.
“박사님이 날 유혹한 게 틀림없어.”
“뭐?”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갑자기 박사님한테 빠질 리가 없잖아.”
“야 꼬맹이, 정신 차려. 네가 뭐 볼 게 있다고 치글러 박사님이 너를 꼬시냐?”
“왜? 나 정도면 잘났잖아. 어린 나이에 밥벌이 하지, 예쁘지, 성격 좋지, 몸매 쩔지.”
“여러 가지 태클 걸 곳이 넘쳐나는데, 무엇보다도 박사님 정도 되면 너는 그냥 애로밖에 안 보일 거야.”
“아냐, 내가 박사님을 좋아하게 된 건 모두 박사님 때문인걸. 박사님이 나 꼬신 거야.”
“응 아냐.”
“맞다니까?!”
“응 아냐.”
오늘도 레나 언니는 내게 정신 차리라며 혀를 쯧쯧 찬다. 박사님을 좋아하는 걸 정신 차리라는 게 아니라, 박사님이 나를 꼬셨다는 생각-레나 언니는 이걸 망상이라고 지칭한다-을 버리라는 거다. 아니, 근데 진짜로 내 생각엔 박사님이 나 꼬신 거 맞다니까?
원래도 친절한 분이지만 둘만 있을 땐 더 많이 더 예쁘게 웃어주고, 지나가다 마주치면 내가 자주 씹고 다니는 껌도 쥐어주고, 맨날 나한테 귀엽다 예쁘다 말해주는데 어떻게 관심이 안 갈 수가 있냐고.
레나 언니는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친절한 분이니 어서 꿈에서 깨란 말을 하지만, 내가 볼 땐 박사님이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 건 나밖에 없단 말이지.
나보다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박사님 정도면 나무랄 곳 없는 애인감이다. 예쁘지, 똑똑하지, 능력 있지, 성격 좋지. 박사님이 나를 좋아한다는 촉을 느꼈을 때, 나는 3초 만에 박사님을 받아주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그 뒤로 반년이 다 되어가도록 이상하게 박사님에게서 느껴지는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거다.
분명 먼저 좋아하기 시작한 건 박사님인데, 정신차려보니 내가 박사님에게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더란 거지. 본인 말로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고 하지만, 박사님은 연애 고단수인 게 틀림없다. 얼굴도 모르는 박사님의 전 애인들을 욕하려다가 그만뒀다.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미래지. 박사님과 내 핑크빛 미래 말이다.
“오늘도 박사님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응. 오늘까지는 휴가거든. 여기서 놀면서 박사님 기다릴래.”
“그래라.”
레나 언니네 카페는 박사님이 일하는 병원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좋아서 그런지 장사가 엄청 잘 되는데, 일손이 부족할 때면 가끔 도와주기도 한다. 대신에 공짜 음료 이용권을 얻었지. 요즘 들어서는 집에 혼자 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라 수능 끝나고부터는 계속 카페에서 죽치고 있는 중이다.
예전엔 게임기만 있으면 장소 따윈 아무래도 좋았는데. 최근에 혼자 있으면 하루 종일 박사님 생각만 하게 되면서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지고, 이런 나날이 계속 되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천장으로 솟구쳤다가를 반복하게 되어서 너무 힘이 든다. 적어도 여기 있으면 내 고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레나 언니가 말이라도 걸어주잖아. 태클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게임할 기분이 나지 않아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박사님이랑 아멜리 언니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하러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가, 포스기 옆에 꼬불쳐놨던 앞치마를 꺼내 입었다. 익숙한 솜씨로 앞치마 매듭을 매는데, 그 모습을 보고 레나 언니가 혀를 끌끌 찬다.
“너 진짜 속 보이는 거 알아? 치글러 박사님이 올 때만 일하는 척 하고…….”
“아, 뭐! 공짜로 일 도와주니까 언니도 좋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짝사랑하는 것 같은데.”
울컥해서 뭐하고 쏘아붙여주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박사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서 오세요, 하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박사님이 나를 알아보곤 부드럽게 웃음 짓는다. 나는 레나 언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복화술을 시전 했다.
“잘 보란 말이야, 사랑이 듬뿍 담긴 저 눈빛을.”
레나 언니는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내 옆에서 멀어졌다. 전혀 모르겠다느니 망상도 정도껏 하라느니 하면서 작게 투덜거리지만, 안 들린다, 안 들려.
“오늘도 보네요, 하나 양. 레나 양 일을 도와주는 거예요?”
“네. 언니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요.”
“안 힘들어요? 친구들은 다들 놀러 다니느라 바쁠 텐데…….”
“전혀요. 박사님 얼굴도 보고 좋은데요, 뭘.”
“저도 하나 양을 봐서 좋아요.”
박사님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데 가슴이 간질간질해진다. 아무리 박사님이 친절한 분이라도 그렇지, 마음이 없으면 이런 대화가 가능하겠냐고. 머릿속에 어젯밤 내내 상상한 박사님과 내 핑크빛 미래가 다시 떠오르려는데, 서늘한 목소리가 상념을 저지한다.
“아가. 주문 받아야지.”
“누가 아가예요? 다 컸구만. 아무튼, 뭐 드실 거예요?”
아멜리 언니는 항상 나를 보고 아가라고 한다. 누가 레나 언니 애인 아니랄까봐 둘이 똑같이 나를 애 취급 한다니까. 이렇게 매력 터지는 아가가 세상에 어디 있어.
“카페라떼, 샷 추가로.”
“저는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아멜리 언니와 박사님에게서 차례로 카드를 받아서 결제한 후, 앉아 계시라고 말했다. 원래는 진동 벨을 건네줘야 하는데, 안 그래도 병원 일로 피곤할 박사님을 번거롭게 하기 싫어서 직접 서빙하게 됐지. 단골 서비스라는 핑계를 만들어내서까지 박사님을 위하는 내 마음을 알면, 박사님도 좀 적극적이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는 만드는 게 간단한데다가 레나 언니는 아멜리 언니가 들어 온 순간부터 카페라떼를 만들고 있었기에 금방 커피가 준비됐다. 하지만 내가 서빙을 하기도 전에, 레나 언니가 쟁반을 챙겨 나가고 말았다. 아악,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는 거냐고! 아까 옆구리 좀 찔렀다고 복수하는 게 분명하다. 쪼잔 하기는…….
어쩔 수 없이 계산대에 서서 줄줄이 들어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위장용 안경을 쓴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기에 영업용 미소로 사진빨 나게 찍어줬다. 아, 이번에도 옆 사람을 오징어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네. 미안하지만 어쩌겠어, 타고난 게 그런 걸. 이게 다 내가 너무 잘난 탓이다.
커피를 내리며 슬쩍 창가 자리를 살피니, 박사님 옆에 레나 언니가 앉아서 맞은편의 아멜리 언니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젠장, 레나 언니 때문에 박사님 얼굴이 안 보이잖아. 속상해서 정말. 이따가 실수인 척하고 발을 자근자근 밟아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시간 손님 러시가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박사님과 아멜리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따가 보자는 박사님의 말에 일 힘내세요, 하고 인사하니 박사님이 살풋 웃으며 가게를 나선다. 나는 레나 언니가 카운터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으르렁댔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아멜리 언니랑 이어지게 내가 도와줬던 거 벌써 잊었어? 시사회 영화표란 영화표는 죄다 구해다 줬더니만…….”
“야야, 너 큰일 났어.”
“큰일은 언니한테 난 것 같은데? 이제 곧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게 될 것이야!”
“장난 아니라 진짜로.”
“뭔데 그래?”
“치글러 박사님 선 보신대!”
뭐라고?
누가 뭘 본다고?
*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이 시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아예 없어져버린 느낌이다.
나는 박사님이 대체 언제 내게 고백을 할 것인지 이제나 저제나 고민하느라 밤마다 잠을 못 이뤘는데 정작 박사님은 선을 본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이야?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게 웃어줘놓고는 선이라니, 선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기에 레나 언니가 가져다 준 냉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좀 진정이 되면서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데 레나 언니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꼬맹아, 너무 실망하지 마.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허들이 너무 높았어. 아무래도 상대가 그 치글러 박사님이…….”
“이거 아무래도 밀당 같아.”
“니까…… 뭐?”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박사님이 갑자기 선을 볼 리가 없잖아. 내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게 분명해. 그래, 그 동안 박사님과 내 사이가 너무 긴장이 없긴 했지. 근데 이왕이면 성적긴장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선은 좀 너무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줄이 팽팽해지다 못해 끊어졌을 거라고.”
“꼬맹, 아니 하나야.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박사님은 너한테 관심 없다니까?”
“아니라고! 관심 없으면 매번 수고롭게 집에 바래다줄 리가 없잖아!”
“그건 네가 박사님이 퇴근할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집에 가는 길이 같으니까 겸사겸사 태워다주시는 거고.”
레나 언니가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는 듯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했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 죽겠네. 레나 언니는 이젠 흡사 측은하단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여기에서 더 말을 해봤자 돌아올 반응이 뻔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근데 나도 믿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반 년 전, 우연히 같이 집에 돌아가게 된 이후부터 박사님은 내가 레나 언니네 카페에서 일을 도와주는 날엔 꼭 8시에 퇴근하시거든. 그 말인 즉, 일부러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에 맞춰서 퇴근한다는 소리다. 8시라는 시간에 별 의미는 없다. 그저 처음으로 같이 집에 돌아간 날 퇴근 시간이 8시였을 뿐.
사실 내가 정식 아르바이트생도 아니고 굳이 8시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데, 박사님은 내가 성실하게 일을 도와주느라 퇴근 시간이 정해져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실은 박사님이 올 때만 일하는 척 하는 건데.
아무리 밀당이라고 해도, 박사님이 선을 본다는 말에 초조해지는 건 사실이다. 레나 언니가 자꾸만 이 모든 게 내 착각이라고 우기니까 조금 불안해지기도 하고. 여태 살아오며 고민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진짜 속이 복잡해 죽겠다. 에이씨, 상대가 박사님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마음 쓰는 건 진작 관뒀을 건데.
휴대폰을 들어 '선 자리 파토 내는 방법'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도 몇 개 안 되는데, 그 전부가 당사자가 파토 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약속 미루기, 빚이나 대출 이야기 꺼내기, 상대방이 전혀 관심 없는 주제에 관해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기 등등……. 아니, 내가 궁금한 건 제3자가 선 자리를 파토 내는 방법이란 말이야!
전투적으로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결국 원하는 정보는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 저녁 8시가 거의 다 되었다. 1층에 내려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잠시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박사님이 시간에 맞춰서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속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커피를 건네며 태연스레 인사했다.
“고생하셨어요, 박사님.”
“하나 양도 고생했어요.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갈까요? 하고 잔잔히 미소 지으며 묻는 박사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12월 중순에 들어서자 밤바람이 아주 칼날처럼 매섭다. 절로 목이 움츠러드는데, 박사님이 한 손으로 내 목도리를 꼼꼼히 여며주신다. 도로 갓길에 세워둔 차까지 거리는 고작 열 발자국 남짓인데도. 이 애정 어린 모습을 레나 언니가 봐야 하는데.
차에 타니 박사님이 즐겨 쓰는 연한 머스크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한손으로 익숙하게 운전을 하는 박사님을 힐끔 쳐다본다. 선이 고운 옆얼굴, 그리고 그 밑으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곡선이 새삼스럽다. 블라우스 소매 끝에 드러난 하얗고 얇은, 푸른 핏줄이 살짝 드러난 손목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기에 바라보고 있는데, 박사님이 말했다.
“오늘은 말이 없네요, 하나 양.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은 박사님한테 있었죠. 불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달래면서 태연스레 대답했다.
“별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박사님, 레나 언니 말로는 박사님이 선보신다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아.”
짧게 소리 낸 박사님이 조금 난처한 듯 웃는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리저리 돌려서 묻는 건 내 성미에 안 맞는걸.
“선을 보기로 한 건 아니고, 그런 이야기가 들어왔을 뿐이에요. 아는 분이 한번만 만나보라고 자꾸 말씀하셔서요.”
레나 언니가 전해준 말과는 많이 다른데? 아무래도 덜렁대는 성격의 레나 언니가 지레짐작해서 내게 전해준 모양이다. 그래, 밀당 치고는 너무 세다 싶었어. 에이씨, 괜히 가슴 졸였잖아!
“그럼 안 보실 거죠?”
“글쎄요, 어쩔까요. 말을 꺼내신 분이 신세진 분이라 마냥 거절하기도 그렇고…….”
아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선 보지 마요.”
울컥해서 나도 모르게 말하고 난 뒤에야 아차 싶었다. 박사님이 한번 당겼기로서니 냉큼 미끼를 문 것 같잖아. 이씨, 먼저 날 좋아한 건 박사님인데 이거 꼭 내가 박사님한테 매달리는 것 같다. 여기서 박사님이 왜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거지. 박사님은 나 좋아하잖아요? 틀린 말은 아닌데 요 며칠 레나 언니에게서 자꾸만 부정을 당했더니 차마 말을 못 하겠다. 그때 다른 대답을 궁리하는 내 귓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뭔가 낚인 기분이다. 곤란한 질문을 받지 않고 원하는 대답도 들었는데 왜 이렇게 하이킥을 하고 싶은 거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기에 창밖을 보면서 열을 식히는데 가로수를 장식하는 꼬마전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주일 뒤가 크리스마스인데, 아직 박사님하고 약속도 못 잡았네.
틀림없이 박사님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이 지냈는데, 오늘 선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 보니 이거 아무래도 내가 말을 꺼내야 하는 모양이다. 자꾸만 모양새가 이상해져가지만,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미적미적거리다가 혹시라도 엄한 놈이 박사님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연말인데, 박사님은 뭐하실 거예요?”
“글쎄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집에서 쉬고, 아니면 출근해야겠죠? 연말이라고 해서 응급환자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러면… 혹시 크리스마스에도 병원 나가시는 거예요?”
“그 날은 오프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 박사님의 얼굴을 보니 한순간 말이 막혔다. 이거 완전 그린라이트잖아? 데이트 신청하라는 소리다. 일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이렇게 대놓고 신호를 주는데 못 받아먹으면 그건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일 거다. 가볍게 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랑 영화 보러 가실래요? 보고 싶은 영화도 있고, 마침 저도 그 날 스케줄이 없거든요.”
원래대로라면 이런저런 행사가 많은 날이지만, 반년 전 박사님을 받아주기로 마음먹었을 때 무리해서 미리 일정을 비워두었지. 연인이 된-그때는 적어도 한 달 안에 박사님이 고백할 거라고 생각했다- 박사님과의 첫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한 거였는데, 아무래도 좋다. 내 선구안이 이렇게 탁월하단 말이야. 보고 싶은 영화야 지금부터 찾으면 되는 거고.
“그럴까요? 그럼 제가 저녁 살 테니, 예쁘게 꾸미고 와요.”
장난기가 담긴 말이지만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여태 한 번도 박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 촉이 왔다. 아무래도 박사님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고백하시려나보다! 그래, 반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으면 이제 슬슬 결정타를 날릴 때가 됐지.
어젯밤에 세운 계획대로라면 박사님이 먼저 데이트하자고 말을 꺼내야 하는 건데,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뭐.
데이트의 피날레는 역시 고백이지!
벌써부터 일주일 뒤가 기다려진다.
***
이튿날부터 닷새 동안 연일 행사에 불려 다니느라 레나 언니네 카페에 얼굴도 못 비추다가, 오늘은 오후에 스케줄이 끝나기에 신이 나서 달려왔다.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가자, 아멜리 언니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레나 언니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꼬맹이, 왔어?”
“나 크리스마스에 박사님이랑 데이트하기로 했다!”
인사를 씹어 먹을 기세로 레나 언니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자, 레나 언니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야, 나 그 말 이미 백 번은 들은 것 같거든? 아침저녁으로 틈만 나면 말했잖아. 문자로든, 전화로든!”
“언니가 자꾸 안 믿으려고 해서 그렇지.”
“그래그래, 이젠 믿어. 믿으니까 그만 말 해.”
“나 그날 고백도 받을 거라고!”
“응 그건 아냐.”
“백 퍼 고백 각이라니까?”
“응 아냐.”
아, 사람 말 진짜 안 믿네. 뭐 상관없어. 크리스마스 지나고 나서 결과로 알려주면 되지. 닷새 동안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고백 받을 확률이 70%, 드라이브 마지막에 고백 받을 확률이 30%였다.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상 속의 고백에 설레발치지 말고 치글러 박사님 드릴 선물이나 생각하지 그래?”
“아, 맞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나. 같이 좀 골라주라.”
품에 들고 왔던 VIP 카탈로그를 내려놓자 레나 언니가 관심을 갖는다. 귀걸이부터 시작해서 발찌까지 여러 상품이 실린 페이지를 훑어보던 레나 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꼬맹아, 근데 이거 가격이 너무 센 거 아냐? 내 생각엔 좀 더 덜 부담스러운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나이를 생각해야지.”
“언니, 나 돈 잘 벌어. 그리고 받을 사람이 박사님인데, 박사님 나이에 맞는 걸로 고르는 게 맞지 않겠어?”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카탈로그에서 몇 개 고르고, 내일 매장에 들러서 직접 보고 살 생각이다. 일단 반지는 제외. 박사님이 커플링으로 준비할 수도 있으니깐.
한참을 살펴본 결과, 목걸이 두 개와 시계 하나, 팔찌 하나를 추려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다 선물하고 싶지만, 그러면 박사님이 많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고…….
“아멜리 언니, 팔찌나 시계는 어떨까요? 박사님 손목이 가늘어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나랑 레나 언니가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도 신경도 쓰지 않는 시크한 아멜리 언니에게 물어봤다. 아무래도 박사님과 오래 알고 지냈으니 나보다 아는 점이 많겠지. 아멜리 언니는 책에 시선을 준채로 대답했다.
“별로야. 특히 은팔찌는 절대 하지 마. 아주 싫어하거든.”
“그래요?”
나는 은으로 된 액세서리가 더 예쁘던데. 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아무튼 좋은 정보를 얻었다. 박사님은 은팔찌를 싫어한다. 음, 생각해보니 팔찌 자체가 진료할 때나 수술할 때 방해되니까 안 좋을 것 같네.
“그러면 목걸이는 어때요?”
“무난하지.-
아멜리 언니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목걸이로 정했다. 은을 싫어하시니까 금으로 해야 하나? 박사님 살결이 화사하니까 뭐든 잘 어울릴 거야. 아니, 그냥 금보다는 로즈골드가 더 나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무 센스 있어.
박사님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는 상상을 하며 한창 신이 나 있는데 레나 언니가 그런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꼬맹이 넌 뭘 믿고 박사님이 너한테 고백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감이지. 내 감에 의하면 박사님은 지금껏 고백 타이밍을 재고 계셨거든. 그런데 마침 크리스마스라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이벤트가 있고, 데이트까지 하게 됐잖아. 척하면 척이지 뭐.”
“그 감이라는 게 영 쓸모없어 뵈는데…….”
“쓸모없기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내 감이 얼마나 활약했다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완전 영역이 다르잖아.”
“같지, 그럼! 진짜 이거 백 퍼 고백 각이라니깐?”
또 레나 언니가 할 말이 많지만 하지는 않겠단 눈빛을 보내온다. 아오 답답해.
“이씨, 두고 봐. 크리스마스 다음날엔 언니가 부러워할 정도로 사랑 넘치는 커플이 되어서 나타날 테니깐.”
“제발 그러길 빈다.”
영혼 없는 응원에 코웃음을 쳤다. 박사님이 고백만 해 봐. 언니네 커플하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깨가 쏟아지도록 알콩달콩 예쁘게 사귀어서 염장질러 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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