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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붉은 밤에 피는 백합 [5]

synara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6.03 23:59:14
조회 685 추천 18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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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소매를 걷어 제 팔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바깥면과 손등, 팔등을 새까만 비늘이 덮었다. 팔 안쪽과 손바닥에 상처 자국이 빼곡했다. 그녀는 그 흉한 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크게 남은 흉터의 감촉이 선명했다.


몸은 여전히 이 년 전의 귀신이다. 하지만 마음은 변하고 있다. 그 괴리감이 아랑을 흔들었다. 여지껏 느껴본 적 없는 흔들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아랑은 행낭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사매가 보낸 편지였다. 아랑은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그것을 읽어내렸다.




진 사저 귀하


불초 사매가 사저를 뵈옵니다.


같은 예의는 집어치울게요. 우리 사이에 뭔 짓이야 이게. 잘 지내죠? 난 잘 지내요. 해본 적 없는 일 하느라 힘들고 정신도 없지만, 예전에 하던 것보다는 낫네요. 피도 덜 보고 있고. 사저는 어때요? 하고 싶다던 말은 했어요?


편지로 답하지 말고 직접 들려줘요.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소개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네. 절건성 남명시(南明市)로 온 다음 북문이나 서문 근처에서 아무나 붙잡고 류씨 의가(醫家)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돼요. 꼭 와야 해요. 꼭.


이서연 배상(拜上)




갈겨쓰다시피 한 초서(草書)가 인상적이었다.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씨체를 보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랑은 손끝으로 편지지를 잡은 채 사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가족을 잃었다. 홀로 남은 뒤로 마음 속에 귀신을 품었고 그 속삭임에 따라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원수를 갚았고, 아랑보다 먼저 귀신을 떠나보냈다. 서신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을 보아하니 마음 한가운데 뚫린 빈자리를 빠르게도 채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사매와 이야기를 나누면 해답이 나올 것도 같았다. 편지를 곱게 접어 행낭에 도로 넣은 아랑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서두르자."


갈 길이 멀었다. 한시라도 빨리 사매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띈 채 걸음을 재촉했다.



* * *



한시라도 빨리 자랑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시하는 화영의 방에 뛰어들었다.


"화영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지 마십쇼! 저도 개인 시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니."

"두고봅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마님 담당으로 자리 옮길 겁니다."

"안 놔줄 건데."

"징그러운 소리는 됐습니다. 왜 혼자 오십니까? 차이셨습니까?"


화영은 은근히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로는 시하의 철면피에 생채기도 낼 수 없었다. 시하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차이기는. 내가 누군데. 당연히 성공했지. 선약이 있어서 그쪽에 들렀다 나중에 오신대. 열흘 정도 걸릴 거라 하시더라."

"선약이라……. 아마도 선우 방주님은 아니실 테고, 이서연 대협을 보러 가셨겠네요."

"잘 아네."

"그런데 왜 그리 좋아하십니까? 아가씨가 이 대협께 밀린 거 아닙니까?"

"아니니까 좋아하지."

"아니라고요?"

"응."


시하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쏟아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덩어리진 말소리가 방 안 여기저기를 튀어다녔다. 한참 동안 언어의 격류를 견딘 화영은 시하의 말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그러니까, 진 가주님은 아가씨와 이 대협을 사이에 두고 경중을 비교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거지요."


시하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영이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시는 겁니까?"

"고작?"

"그럼요, 고작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진 가주님께 이 대협은 소중한 분입니다. 경중을 비교한 적 없다 하셨으니, 아가씨도 진 가주님께 소중하다는 거지요."

"그렇지. 그게 왜 고작이야?"


시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화영에게는 그녀가 사냥꾼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슴처럼 보였다. 지금 쏘면 반드시 맞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화영이 말의 화살을 시위에 매긴 다음 내쏘았다.


"당연하잖습니까. 설마 그 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 넓은 세상에 둘뿐이겠습니까?"

"뭣."


명중이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비수가 박힌 듯한 표정으로 시하가 덜컥 굳었다. 화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우 방주님도 계시고."

"무슨 소리야. 진 가주님이랑 비설 언니랑 연배 차이가……."


시하는 구차한 변병으로 화영의 말을 받아쳤다. 화영은 비릿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흠도문 소문주도 계시잖습니까."


아랑은 올해로 스물일곱. 사진은 올해 스물둘이다. 요즘 세상에 흠잡을 만한 차이는 아니었다.


시하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검은 눈동자가 역청처럼 끈적하게 번들거렸다. 화영은 신경쓰지 않았다. 계속 후비다 보면 일어날 터였다.


"여하튼, 아가씨와 진 가주님의 관계는 이제 막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거기다 도착점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요."

"그렇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말하면 절반을 지나기 전까지는 시작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응……."

"정신차리십시오.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본 남자애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회일비하지 마시고."

"그래야지……."


시하는 푹 떨구었던 어깨를 폈다. 시들어 고개 숙였던 백합이 도로 피어오르듯 그녀의 자세도 꼿꼿해졌다. 가혹한 진실에 꿰뚫려 허덕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시하의 눈에서 결연한 의지가 번뜩였다.


"그래. 이제 시작이니까. 벌써 축 쳐질 필요는 없지."

"바로 그겁니다. 역시 아가씨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는 정하셨습니까?"


마냥 집 안에 함께 있으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말 없이 차나 마시고 옛날 이야기 한두번 하다가 비무로 끝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 지금까지와 다른 게 없다. 집밖으로, 필요하다면 천경을 떠나서라도 새로운 경험과 장소를 찾아야 했다.


1년 전 비무를 신청한 이래 주변만 멤돌던 시하가 드디어 다음 걸음을 디뎠다. 과연 그 걸음이 어디를 향할까. 화영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답을 기다렸다.


시하는 스스럼없이 답했다.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야지."


화영도 스스럼없이 핀잔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 기대가 너무 과했지요."


그녀의 눈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시하도 뭔가 변명을 했을텐데, 이번에는 마냥 당당하기만 했다. 그녀는 턱끝을 살짝 든 채 도도하게 말했다.


"나 혼자 생각하면 나올 게 뻔하니까."


시하의 취미 낚시와 지붕 위에서 술 마시기, 산책 나가서 도적 때려잡기였다. 기껏 사람을 초대하여 같이 지내면서 할 일들은 아니다. 거기다 같이 지낼 사람이 아랑이니 생각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 그래서 화영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나마 상식적이고 생각에 폭이 넓으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시하는 싱글벙글 웃으며 화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화영아. 뭘 해야 진 가주님이 좋아하실까?"

"좋아하시는 일을 하셔야 좋아하시겠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라 대답이 궁했다. 시하는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진아랑은 무엇을 좋아할까?



* * *



"좋아하는 것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아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겸언쩍은 듯 웃으며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초대한 거니까, 진 가주님이 즐거워하실 만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열흘 동안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더라구요."


아랑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시하의 얼굴뿐이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아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취미는 없으세요? 하루종일 무공 단련만 하시지는 않을 텐데."


사실은 하루종일 무공 단련만 했다. 일어나서 무공을 단련하고 밥을 먹은 다음 일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귀신들린 물건이나 요괴를 사냥한 다음 돌아와서 무공을 단련하고 밥을 먹는다. 원수를 갚은 뒤 아랑의 일상은 항상 그렇게 돌아갔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무공 단련만 한다고 말하면 시하가 퍽 실망할 것 같았다. 아랑은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잠시 말을 잃었던 시하가 중얼거렸다.


"하루종일 무공 단련만 하시는구나……."

"죄송합니다. 기껏 초대해주셨는데."

"사과는 제가 해야죠. 정말 진 가주님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 싶네요. 삼 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인데."

"앞으로 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시하가 아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무언가 실수했나 싶어 아랑은 시하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냥 시하의 말이 이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도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네. 그렇네요. 앞으로 알아가면 되죠."


시하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아랑의 마음에 뚫렸던 구멍이 다시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랑 역시 희미하게 웃엇고, 그것을 본 시하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요즈음 즐거우셨던 일 있어요? 그러면 뭘 좋아하시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불현듯 사매의 얼굴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아랑은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사매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생각인지……. 같은 것들요."

"이 소저를 정말 좋아하시네요. 진 가주님은."

"네. 좋아합니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아랑은 사매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회상했다. 그녀는 늘 아랑을 웃게 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녀가 주는 웃음은 갈라진 땅에 떨어지는 소나기나 다름없었다. 사매가 없었다면, 진작에 아랑은 말라 비틀어졌을지도 모른다.


"저는 지금 명 소저의 앞에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에요? 제가 모르는 게 또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대부분의 사람은 아랑의 사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랑은 짤막하게 덧붙였다.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니까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시간이 되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은근히 도드라졌다. 묘한 불길함에 아랑이 숨을 삼키자 시하가 물었다. 여전히 미소지은 채로.


"진심이세요?"

"진심입니다."


문득, 열흘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매는 가족이나 다름없고, 정말로 소중하다고. 그리고 사매와 시하를 사이에 두고 경중을 재어본 적 또한 없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아랑은 사매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때 했던 말과 지금 한 말을 이으면, 당연히 시하가 그렇게 해석할 리는 없었고, 없으며,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어 보면.


진아랑은. 사매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명시하를.


아랑은 멋대로 폭주하는 생각에 멍에를 씌웠다. 더 이상 떠올렸다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듯했다. 저번에도 충동을 이기지 못한 탓에 엄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티나지 않게 이를 꾹 깨물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낯가죽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 *



시하는 은연중에 아랑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대로 창백하고 차가우며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다분히 노리고 물어본 질문은 아랑의 얼굴에 부딪혀 튕겨나간 모양이었다. 하긴 장난 같은 연상작용에 아랑의 평정이 흔들릴 리 만무했다. 시하는 픽 웃으며 생각했다.


'화영이가 알면 또 비웃겠네.'


그리고 변죽만 올리면서 여자 손목 못 잡아본 남자애처럼 굴었다고 잔소리를 퍼부을 터였다. 그래서야 지난 일 년과 다를 바가 없다. 의미 없는 말장난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음……. 진 가주님이 좋아하시는 이 소저도 없고. 여기엔 우리 둘뿐이네요."


시하의 친인척들은 아랑을 불편히 여겼다. 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랑 또한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어색해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외출을 수행할 사람이라고는 화영 하나뿐인데, 화영은 또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야겠느냐'고 성을 냈다.


그래서 명씨세가의 대문을 나선 것은 아랑과 시하 둘뿐이었다. 가운데에 껴서 행선지를 주도해줄 사람이 없던 탓에 둘은 목적지 없이 걷기만 했다. 하루종일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큰 맘 먹고 문을 나섰으니 아무 것이나 해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제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죠. 진 가주님도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시잖아요?"

"명 소저는 뭘 좋아하십니까?"

"달밤에 지붕에서 술 마시기, 산책 나가서 산적이랑 도적 때려잡기, 그리고 낚시요."

"낚시로 하지요."

"그러실 거 같았어요. 가요!"


기껏 나왔는데 산적이나 때려잡기엔 시간이 아깝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시하는 앞장서 걸었다.







화영이의 특기는 시하가 돌리는 행복회로를 깨부수는 겁니다.

아랑이는 좀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어요. 특히나 시하 앞에서는 좀 긴장타고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4화에서 잠깐 정줄 놓았다가 큰일 낼 뻔하기도 했고.

비설 마님 쯤 되는 고수가 아니면, 각 잡고 표정을 숨기는 아랑을 꿰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급하게 쓰느라 문장이 좀 흐트러졌을 수도 있어요. 오늘 새벽이랑 오늘 밤에 작업한 거라...

아, 그리고 허니문 동양풍 GL에서 밤백합이 주간베스트 2위를 먹었습니다. 대충 2-3위를 와리가리하고 있네요.

1위가 <그대가 있음에>라서 1위로 올라가기는 힘들어 보이지만요.

모두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입니다. 다음화는 빨리 쓸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모자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백합이 피는 밤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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