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유치원 편
“앙기 쌤!”
앳되고 높은 목소리와 함께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눈이 동글동글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원복을 입은 다섯 살배기 아이는 꼭 병아리 같이 귀여워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날 정도였다.
“어서 와요, 하나 양.”
앙겔라가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려 건넨 말에 남달리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얼굴을 빛내며 아이가 말갛게 웃었다.
병설 유치원이 딸린 공립 초등학교 양호교사로 부임한 첫날 운동장 구석에서 흙장난을 하던 아이와 우연히 마주친 이후, 아이는 그날부로 앙겔라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침, 점심, 그리고 유치원이 끝난 오후 세 차례에 걸쳐 꼬박꼬박 양호실을 찾아왔다. 처음부터 이름도 묻지 않고 그저 천사 쌤, 하고 불러대기에 민망해서 이름을 알려줬으나 아직 어린 아이의 혀는 앙겔라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덕분에 앙겔라는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에 앙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중이었다.
아이가 문을 닫고는 뽈뽈거리며 앙겔라에게 다가와 짧은 팔을 파닥거렸다. 앙겔라가 웃음을 흘리며 아이를 안아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히자 아이는 평소처럼 앙겔라의 품에 답삭 안겼다. 어린 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과 달달한 우유향이 느껴졌다. 아이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앙기 쌤, 나 오늘 당근 다 먹었어요.”
“그랬어요? 그럼 이제 편식 안 할 거예요?”
“앙기 쌤이 뽀뽀해주면 꼬박꼬박 먹을게요. 뽀뽀-.”
아이는 유달리 스킨십을 좋아했다. 앙겔라는 웃으며 아이의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매일같이 볼 뽀뽀를 조르면서, 매번 볼이 발그레 물드는 것이 참 신기했다.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면서 어떻게 이리 애교를 부려댈 수 있을까? 앙겔라는 그 점이 참 궁금했다.
“오늘은 뭐 배웠어요?”
“오늘 노래 배웠어요. 불러드릴게요. 쨍쨍쨍쨍 쨍쨍쨍쨍 해가 떴어요 어디 가세요 유치원에 갑니다?”
아이는 매일매일 새롭게 배우는 것들을 잘 기억했다가 앙겔라를 찾아와서 늘어놓곤 했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라 그리 어려운 것들을 배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딴에는 열심히 배웠다가 앙겔라의 앞에서 피로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해가 뜨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유치원에 간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 뒤에 아이가 다시 앙겔라에게 폭 안겼다.
“하나 양은 유치원이 좋아요?”
“네, 아주아주 어어엄청 많이 좋아요.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유치원 다녔으면 좋겠어요.”
“휴일에는 놀러가지 않고요?”
“앙기 쌤이랑 놀래요. 안 가도 돼요.”
저 때문에 유치원이 좋다는 아이 때문에 웃음이 터진 앙겔라가 물었다.
“지난주에는 놀이동산 다녀왔다고 자랑했잖아요. 다음에 또 안 가도 돼요?”
그러자 아이가 작은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아이가 무슨 표정이 이리 풍부한지, 앙겔라는 아이를 볼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짧은 고민이 끝난 후, 아이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앙겔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 가도 돼요. 앙기 쌤이랑 있을래요.”
“정말요? 솜사탕도 못 먹는데?”
“…안 갈래요.”
“저랑 있으면 과자도 못 먹는데요? 하나 양이 좋아하는 초콜릿도 못 먹을 거예요.”
“……그래도 안 갈래요.”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긴 했으나 아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러나 울망울망한 커다란 눈동자를 보니 이 이상 놀리면 안 되겠다 싶어, 앙겔라는 가운 주머니에서 오렌지맛 사탕을 하나 꺼내들었다.
“대신 이거 먹어요. 좋아하죠? 오렌지맛.”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는 맛이죠?”
“제일 좋은 건 앙기 쌤이에요!”
아이가 언제 울먹거렸냐는 듯 방긋 웃으며 공손히 두 손을 내밀고 말했다. 앙겔라는 사탕 봉지를 조금 찢은 후에 아이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기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으나, 다음 순간 고민스러운 얼굴로 앙겔라를 보았다. 앙겔라가 물었다.
“왜 그래요, 하나 양?”
“앙기 쌤은 어떻게 해요?”
“전 괜찮아요. 어른은 사탕 잘 안 먹어요.”
“해바라기반 선생님은 잘 드시던데.”
“음, 사람마다 다른데, 저는 잘 안 먹어요. 그러니까 하나 양이 저 대신 먹어줄래요?”
“네! 그럴게요!”
아이가 활짝 웃더니 사탕을 입에 넣고, 사탕 껍질은 원복 주머니에 꼬물꼬물 집어넣은 후 앙겔라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보통 아이들처럼 쓰레기를 휙휙 버리지 않는 모습이 참 대견해서, 앙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그 뒤로 영어 수업에서 배운 단어를 가르쳐주겠다며 혀짧은 소리로 열심히 발음했다. 원어민인 앙겔라에게는 그런 아이가 한없이 귀엽게 보일 따름이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부러 투박한 발음으로 따라했더니, 아이는 그렇게 발음하는 게 아니라며 몇 번이고 다시 단어를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앙증맞아서 앙겔라는 아이를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던 아이가 슬슬 잠이 오는지 눈을 부비더니 곧 앙겔라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딱 낮잠 잘 시간이었다. 어쩜 이렇게 생체시계가 칼 같은지. 앙겔라는 자세를 고쳐 아이가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몇 분 있자,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아이를 담당하는 유치원 선생이 곤란한 얼굴로 양호실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치글러 선생님. 또 하나가 여기 와 있네요. 놀아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혹시 무슨 말썽이라도 부리지 않았나요?”
“전혀요. 하나 양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 데요. 이렇게 착하고 순한 애는 처음 봤어요.”
아이를 유치원 선생에게 건네주며 그리 말하자,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하나가 순하다고요?”
“네, 그렇지 않나요? 말도 참 예쁘게 하던걸요.”
“예쁘게… 네에… 하나가 치글러 선생님은 잘 따르나보네요. 후우… 그나마 다행이에요.”
유치원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앙겔라는 고개를 갸웃하고서 물었다.
“하나 양이 유치원에서는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는 건가요?”
“문제까진 아닌데… 애가 자기주장이 아주 강하고 과하게 활기차긴 하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매번 신세지네요.”
“뭘요. 저도 즐거우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하나는 돌보기가 조금, 아니 많이 벅차서…… 이만 가볼게요. 일 힘내세요.”
“네, 선생님도 힘내세요.”
앙겔라는 유차원 선생의 '돌보기 벅차다'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다보면 그만한 고충이 있겠거니 여기며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아이 때문에 점심시간을 1시간 정도 비워놓는 만큼, 미뤄두었던 논문 공부를 다시 이어가야했다. 아이의 높은 미성이 없어진 양호실이 조금 적막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논문을 찾아 손에 쥐었다.
# 1-2. 유치원 편
유치원이 끝나고 아이가 노란 가방에 노란 모자까지 쓰고서 앙겔라를 찾아왔다. 오후에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이가 양호실에 들러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안 아이의 부모가 폐를 끼쳐서 죄송했다며 인사하고 간 뒤 한동안 아이는 아침과 점심시간에만 양호실에 들르곤 했었던 것이다.
“앙기 쌤, 나 다쳤어요!”
아이가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통 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앙겔라는 놀라서 아이를 살폈다. 과연 아이의 말대로, 흙 묻은 무릎이 까져서 살짝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저런……. 어쩌다가 다쳤어요?”
“술래잡기 하다가 넘어졌어요!”
다친 주제에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말하는 걸 보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앙겔라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양호실 침대 위에 앉힌 후, 식염수로 상처 주위를 씻었다. 그간 몇 번이나 다쳐서 양호실에 찾아온 적이 있기에 아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앙겔라가 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소독할 텐데, 살짝 아플 거예요.”
“앙기 쌤이 호 해주면 안 아프던데.”
“그럼 호 해줄게요.”
아이가 방긋방긋 웃는 사이에 소독약을 상처 주위에 발랐다. 슬쩍 아이의 얼굴을 보니, 아프긴 아팠는지 조막만한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통증을 참고 있었다. 그 얼굴마저 귀여워서 앙겔라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소독을 마치고 연고를 바른 뒤, 아이의 청대로 호 하고 입김을 불어주자 그제야 아이가 다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상처 위에 습포까지 붙여주자, 아이가 침대에서 내려서더니 꾸벅 배꼽인사를 했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더 다친 곳은 없고요?”
“네, 없어요! 아, 맞다. 앙기 쌤, 이거 보세요.”
아이가 등에 맨 가방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앙겔라에게 내밀었다. 받아서 보자, 그것은 여섯 살짜리의 실력치곤 꽤 잘 그린 그림이었다. 노란 금발에 파란 눈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앙겔라를 그린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그려준 거예요?”
“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 그리라고 해서 앙기 쌤 그렸어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차마 마음껏 좋아할 수가 없었다. 보통은 부모님을 그리지 않나?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이가 한껏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앙겔라는 다정하게 웃으며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고마워요. 보물로 간직할게요.”
“정말요? 진짜 보물이에요?”
“그럼요. 하나 양이 열심히 그려서 준 거잖아요. 이런 선물 처음 받아보는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사실 양호 선생이라는 직업상 특정 아이를 오랫동안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외로울 수도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지만, 앙겔라는 아이 덕분에 부임과 동시에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앙겔라에게는 떼를 쓰지도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유치원에서는 또 다른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앙겔라가 보아 온 아이는 한결같이 착했다.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환한 웃음을 짓더니 앙겔라의 품에 폭 안겼다. 앙겔라는 작년에 비해 많이 묵직해진, 그러나 여전히 가벼운 아이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가 빙긋 웃으며 앙겔라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뭘 했어요?”
“음, 교통 신호 보는 거랑, 아! 장래희망 이야기 했어요!”
“장래희망이요? 하나 양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그 말에 아이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커서 앙기 쌤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네?”
“앙기 쌤이랑 결혼할래요!”
앙겔라는 잠시 말이 막혔지만, 곧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만 여섯 살의 어린애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만큼 저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할 수 없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아이가 작은 손으로 앙겔라의 빈 손을 꼭 쥐고서 물어왔다.
“앙기 쌤, 나 클 때까지 기다려줄 거죠?”
“…으음, 하나 양…….”
“네? 나랑 결혼해줄 거죠?”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눈동자에 대고 한국에서는 여자끼리 결혼을 할 수 없다느니, 결혼하기에는 둘의 나이차가 너무 많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어린아이였다. 앙겔라는 아이의 별빛 같은 눈빛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와아! 그럼 나랑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아이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더니, 손가락을 열심히 꼼지락거리며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앙겔라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손을 들어 작은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그리고 아이가 하자는 대로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고, 손바닥을 대고 복사까지 마쳤다. 처음 겪는 문화였지만 나름의 절차가 있구나 싶어 묘한 감상을 안는데, 아이가 답삭 안기더니 앙겔라의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하더니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처음 한 약속은 그 사람의 시뇽이 걸려 있으니까 꼭 지키는 거랬어요!”
“…시뇽? 아, 신용 말이죠?”
“네, 시뇽요.”
아이의 모친이 변호사라더니 어려서부터 남다른 교육을 시키는 모양이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구나 싶어 조금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긴 했지만, 아이가 신용의 뜻을 알기도 전에 저와의 약속을 잊어버릴 확률이 아주 높았으므로 그냥 웃기로 했다.
아이는 앙겔라에게서 약속을 받아낸 것이 기쁜지 그 날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하루 종일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저 나중에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이불만 차지 않기를 앙겔라는 바랐다.
# 2-1. 초등학생 편
“놀이기구 안 타도 돼요?”
앙겔라는 제 옆에 딱 붙어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소풍으로 3학년 전체가 다 같이 서울 랜드로 온 참이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나서 신이 난 아이들끼리 뭉쳐서 이리저리 쏘다니는데, 정작 아이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앙겔라를 향해 웃어보였다.
“앙기 쌤도 참, 제 나이가 몇인데 놀이기구예요.”
“하나 양은 이제 겨우 10살이잖아요. 한참 놀이기구 타고 놀 때죠.”
“놀이기구는 작년에 뗐어요. 관심 없어요.”
“그래도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다보면 타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에이, 안 그래요. 그리고 저는 앙기 쌤이랑 산책할 건데요?”
산책이야 학교에서도 종종 하는 일이었다. 아이는 급식을 먹고 나면 항상 양호실에 들렀는데, 앙겔라가 딱 식사를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왔기 때문에 소화시킬 겸 같이 운동장을 거닐곤 했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매일매일 꾸준하게 양호실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가 싶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신체검사를 하던 날에 반 친구들 사이에 잘 녹아들어 개구지게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했다. 예쁘장한 외모에 밝은 성격 탓에 친구도 많을 텐데도, 아이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항상 앙겔라를 찾아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앙겔라가 논문 공부를 할 때면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고, 그러다 여유가 될 때면 놀아달라고 졸랐다. 애가 얼마나 눈치가 귀신같은지, 정말 한가할 때만 놀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앙겔라는 아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원체 저를 잘 따르고 방긋방긋 예쁘게 웃어대니 거절할 마음이 도통 들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껏 소풍을 왔는데도 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앙겔라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은근히 권유를 해보았다.
“작년에 바이킹 재미있다고 안 그랬어요?”
“아, 그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거. 몇 번 타니 질리더라고요. 그보다 앙기 쌤은 뭐 안 타실 거예요?”
“네, 저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거 안 좋아해서.”
“저도 그러더라고요. 나이를 먹었더니 취향이 바뀌었나봐요.”
짐짓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보니 앙겔라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어린 애가 나이 운운이라니. 앙겔라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이가 순한 표정으로 웃었다. 보통 애들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말도 잘 안 듣고 엇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는 정말 한결같이 앙겔라를 잘 따랐다.
“앙기 쌤, 아까 보니까 입구 쪽에 장미가 예쁘게 피었던데 그거 보러 가실래요?”
“저는 오늘 인솔 교사로 따라왔으니까 여기 있어야죠.”
“다른 선생님들은 다들 놀러 갔는데도요?”
“맞습니다, 치글러 선생님. 햇볕도 강한데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 한잔 하시죠.”
아이의 말에 앙겔라가 답하려는데, 3학년 체육 선생이 성큼 다가서며 그렇게 말했다. 앙겔라의 얼굴에 곤란한 웃음이 떠올랐다. 올해로 부임한 지 2년째인 체육 선생은 앙겔라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앙겔라는 그에게서 몇 번이나 데이트 신청을 받았지만 번번이 거절했었다. 같은 직장에서 누군가를 사귈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락부락한 체육 선생은 전혀 앙겔라의 취향이 아니었다.
“선생님, 앙기 쌤 감기 기운 있어서 찬 거 드시면 안 돼요.”
“그럼 따뜻한 커피 한잔 하시죠.”
“안 돼요. 아침에 커피 드시고 오셔서 카페인은 이미 충분하시단 말이에요.”
“…야 송하나, 네가 무슨 치글러 선생님 보호자냐? 이게 어디서 어른들 대화하는데 끼어들고 그래?”
“끼어든 건 선생님이죠. 저랑 앙기 쌤이랑 이야기 하고 있었잖아요.”
“뭐야? 인석이……!”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아이에게 씩씩대며 다가서는 체육 선생을 앙겔라가 말렸다.
“그만 하세요, 김 선생님. 애한테 왜 그러세요.”
“아니, 이 녀석이 자꾸 말대꾸를 하잖습니까?”
“말대꾸가 아니라 대답이죠. 제가 선생님한테 시비를 걸었나요, 욕을 했나요? 앙기 쌤 목 아픈데 자꾸 말 거시니까 대신 대답해드린 것뿐인데요.”
“뭐야? 이 녀석 정말?”
체육 선생이 씨근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가 앙겔라의 앞을 막아서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체육 선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앙겔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이의 어깨를 도닥였으나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체육 선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뒤에서 얼핏 본 아이의 얼굴이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보인 것 같아서 앙겔라는 순간 깜짝 놀라 아이를 불렀다.
“잠깐, 잠깐만요, 하나 양.”
“네? 왜 부르세요, 앙기 쌤?”
그러나 뒤돌아 본 아이의 얼굴은 평소처럼 순했다.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체육 선생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와, 무슨 애가…… 송하나, 너 또라이야?”
“김 선생님, 말이 심하시네요. 아이한테 그런 나쁜 말을 하시다뇨!”
“아니, 애가 지금 표정이 완전…….”
체육 선생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앙겔라는 제 할 말만 하기로 했다. 아이에게 함부로 욕을 할 정도의 인성이라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게 앙겔라의 지론이었다.
“저는 괜찮으니 김 선생님은 쉬도록 하세요. 어차피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 하잖아요.”
“아… 아니……. 그럼 제가 같이 여기 있겠습니다.”
“아, 잘 됐다. 앙기 쌤, 체육 선생님이 여기 있어주신대요. 저 아까부터 바이킹 타고 싶었는데,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네?”
아이가 재빨리 말을 바꿔 앙겔라를 졸라댔다. 앙겔라는 잠시 고민했으나, 여기 남아서 체육 선생의 상대를 해주는 것보다는 아이를 따라 바이킹을 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선생님이 여기 맡아주신다니 저는 저쪽 구역에서 애들 살펴볼게요. 이따 뵙겠습니다.”
“네? 아니, 저기 치글러 선…….”
“아싸! 앙기 쌤, 빨리 가요!”
아이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거니 앙겔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앙겔라는 체육 선생에게 목례를 해보인 후 아이에게 끌려 복작대는 놀이공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아이가 향하는 곳은 바이킹과는 동떨어진 방향이었다.
“하나 양, 바이킹 타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에이, 그거 작년에 졸업했다니깐요. 이쪽으로 가면 장미공원 있어요. 조금만 걷다 가게요.”
“하지만…….”
“어차피 체육 선생님이 거기 남아 있을 거잖아요. 게다가 다른 선생님들도 알아서 다 돌아다니던데요 뭘.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애들이 담임선생님한테 가지 않을까요? 정말로 앙기 쌤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휴대폰으로 연락 올 테고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앙겔라는 잠시 망설이다 아이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떠올라서 아이를 불러 타이르듯 말했다.
“하나 양, 아까 제 대신 대답해준 건 고마웠지만 선생님한테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돼요. 야단맞을 뻔 했잖아요.”
“하지만 앙기 쌤도 사실 싫었잖아요. 아니에요?”
싫긴 싫었지만 한참이나 어린, 그것도 학생에게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좋다고 하기에도 뭣했다. 두리뭉실하게 어린 아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같단 생각에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앙겔라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아이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앙기 쌤.”
“…그래요. 그럼 점심시간까지만 좀 걷다가 돌아가죠.”
“네! 아, 그리고 앙기 쌤, 이따 저랑 점심 같이 먹어요. 제가 앙기 쌤 도시락 가져왔거든요!”
“도시락을요? 번거로울 텐데 뭐 하러 그랬어요. 어머니께서 고생하셨을 텐데.”
“아니에요, 아침에 사 온 거예요. 집 앞에 도시락 가게가 생겼는데 꽤 맛있더라고요. 앙기 쌤 아까 보니까 핸드백 말곤 짐 없던데, 저랑 먹어요. 네?”
망설였지만 결국 이번에도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생각해서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는 아이의 정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알고 지낸 지 오래 되어서 그런지, 아이는 앙겔라를 정말 잘 배려했다. 이럴 때 보면 도무지 열 살배기처럼 생각되지가 않았다.
앙겔라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장미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왠지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날 하루는 내내 아이와 보냈다.
여느 때와 비슷한 하루였다.
# 2-2. 초등학생 편
요즘 들어 아이의 표정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앙겔라는 유심히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시선을 보내기만 하면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는 같이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이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생각에 골몰해서인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웃음이 맴돌던 평소의 아이와는 크나큰 차이였다. 앙겔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나 양, 요새 무슨 고민 있어요?”
“아, 앙기 쌤…….”
앙겔라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앙겔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고민……. 고민일까요?”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제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이가 우울한 눈동자를 들어 앙겔라를 보았다. 처음 보는 심각한 표정에 앙겔라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학교 문제예요? 아니면 집?”
“학교… 학교 문제 같아요. 앙기 쌤, 저 중학교 가면 이제 어떻게 해요?”
“네? 중학교 진학하는 게 고민이에요?”
“저 없으면 이제 앙기 쌤 누가 지켜줘요?”
앙겔라는 난데없는 아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켜주다니. 반대라면 모를까, 딱히 아이에게서 보호 받은 적 없는 앙겔라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켜주다니요?”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어떻게 해요. 나 정말 너무 걱정돼요. 미치겠어요, 정말.”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두 손으로 쥐어짜며 그렇게 말했다. 제 딴에는 뭐가 심각하게 고민인 것 같은데 앙겔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걱정이라는 거죠?”
“네, 네. 엄청 걱정돼요. 그리고 제 인생도 걱정돼요. 정말… 정말 미치겠어요.”
미치겠다는 말을 연달아 하며 아이가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사춘기에 돌입한 걸까? 아마도 친한 사람들의 인생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앙겔라도 자라면서 한번쯤 해봤을 고민이었기에 딴에는 미간에 주름까지 잡아가며 고민하는 아이가 귀엽게만 보였다. 그 조막만 하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나이에 걸맞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찡하기도 했다.
침울한 분위기의 아이에게 다가서서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팔을 뻗어 앙겔라를 끌어당겼다. 앙겔라는 순순히 다가섰다. 아이는 한동안 앙겔라의 품에 머리를 박고 부비적거렸다. 간지러웠지만, 아이가 걱정이 되어 그냥 참고 등을 도닥여주었다.
“하나 양, 당장 고민해서 바뀌는 일이 아니라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지금 하나 양의 고민이 조만간에 해결이 나는 고민이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계속 고민하다보면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인생은 길어요, 하나 양.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야를 넓게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보통 인생을 걱정할 정도의 일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개 끝에 가서 웃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죠.”
“끝에 가서 웃는다고요? 그,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다,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죠?”
“으음, 네, 뭐 비슷하긴 하네요.”
그보다는 당장 눈앞의 일에 안달내지 말고 좀 더 인내하고 기다려보라는 의미를 담아 한 말이었지만, 어쨌든 대충 의미는 전해진 것 같았다. 아이가 그 말을 듣더니 서서히 얼굴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기 때문에 앙겔라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기로 했다.
*
“앙기 쌤! 이거 한번 들어보세요. 이번에 새로 나온 뉴에이지 앨범이에요.”
며칠 동안 우울한 기색이었던 아이는, 그 다음 주가 되자 평소의 해맑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의 기분이 가벼워진 대신, 두 손이 무거워졌다. 오늘 들고 온 것은 새로 나온 음반과 사탕으로 된 꽃바구니였다. 전에도 종종 꽃이나 선물 같은 걸 들고 찾아오던 아이였지만, 요즘처럼 매일 무언가를 들고 온 적이 없었기에 때문에 앙겔라는 조금 부담이 되어 말했다.
“하나 양, 또 사온 거예요? 그러지 말라니까요.”
“아니에요. 이건 받은 거예요. 앨범은 앙기 쌤이랑 듣고 싶어서 산 거고요.”
“선물 받았으면 하나 양이 먹어야죠. 이렇게 절 주면 어떻게 해요.”
“아니에요. 준 애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먹으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유난히 예쁘장하던 아이는, 6학년 들어 소녀티 물씬 나기 시작하자 인근에서 소문난 미소녀로 거론되더니 이것저것 잔뜩 선물을 받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받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게 바로 며칠 전의 이야기 같은데,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근래 들어서는 매일같이 선물을 들고 앙겔라를 찾아왔다.
혼자 먹을 수 없다는 핑계로 앙겔라에게 이것저것 선물해주거나, 가끔은 선물 받은 꽃다발을 화병에 예쁘게 장식해두었다. 아이가 양호실에 들락날락 할 때마다 삭막한 양호실이 조금씩 변해갔다.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앙겔라의 취향에 딱 맞게 이것저것 챙기는 터라, 앙겔라도 점점 아이가 하는 대로 그저 내버려두게 되었다.
“앙기 쌤, 이거 들어보세요.”
아이가 오디오에 CD를 재생시킨 후에 등받이가 없는 내방용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리더니 앙겔라의 무릎에 머리를 실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하던 자세였기 때문에 앙겔라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잔잔한 음악이 양호실 안에 흐르기 시작했다.
앙겔라와 거의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아이와는 이상하리만치 취미가 잘 맞아 떨어졌다. 아이는 오래된 음악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대개 앙겔라가 10대 때 듣거나 보았던 것들이었기에, 자연히 대화를 나누는 주제도 늘어만 갔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도 그 한 예였다. 때문에 드물게는 아이가 동년배의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긴 곡이 하나 끝나고, 트랙이 넘어가는 짧은 시간을 노려 아이가 앙겔라에게 물었다.
“앙기 쌤, 저 중학교 올라가서도 양호실 자주 놀러와도 돼요?”
“학교가 늦게 끝나지 않겠어요?”
“해봤자 4시쯤엔 끝날 거라 지금이랑 큰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친구들이랑 놀아야죠. 저야 괜찮지만, 하나 양이 학교생활에 적응 못할까봐 걱정이 되네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저 친구 많단 말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방과 후 대부분을 양호실로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주변에는 언제나 또래 친구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는 중학교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앙겔라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학교가 바뀌면 잘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지잖아요. 당분간은 찾아오지 말고 중학교 친구들을 사귀고 그래요.”
“저 A중으로 발표 났어요. 한 동네니까 아는 애들도 많고, 그러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A중이라고요? 바로 옆 중학교잖아요.”
“네. 그러니까 놀러와도 되죠?”
잠깐 생각해봤는데,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앙겔라가 학년을 담당하는 교사라면 모를까, 양호실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곧 제 또래 애들과 놀러 다닐 시기였다. 조만간에는 한번 시간 내서 들르라고 해도 바쁘다며 거절하겠지. 그 날을 상상하니 조금 섭섭해지려는데, 앙겔라의 허락에 반색한 아이가 방긋 웃으며 앙겔라의 목에 매달렸다.
“앙기 쌤, 사랑해요!”
“그래요, 저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좀 떨어져 줄래요?”
“아, 어릴 때는 안아서 볼에 뽀뽀도 해줬잖아요. 얼른 해주세요.”
“그땐 하나 양이 깃털처럼 가벼웠을 때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아이의 말대로 볼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아이는 여전히 어릴 적처럼 볼을 살짝 물들이며 수줍게 웃었다. 이런 점은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구나 싶었다.
적어도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앞으로 반년은 더 이런 평화롭고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벌써부터 서운해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 3. 중학생 편
“앙기 쌤, 이건 뭐라고 읽어요?”
“어디 봐요… Ich liebe Sie. 이히 리-베 지- 라고 발음해요.”
“이히 리-베 지-.”
아이가 앙겔라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앙겔라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음 좋네요, 하나 양. 그런데 웬 독일어예요? 학교에서 영어 배우는 거 아니었어요?”
이제 중학교 1학년. 한창 영어를 배울 나이에 아이는 어디에선가 초급 독일어 교재를 들고 와서 앙겔라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열의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난데없이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건 의아했다.
“커서 쓸 데가 있어서요.”
“…쓸 데가 있을 것 같다, 도 아니고 있다고요?”
“네. 꼭 써야 해요.”
“무슨 일에 쓸 건데요?”
“음- 비밀이에요. 저 스무 살 되면 알려드릴게요.”
아이의 깜찍한 말에 앙겔라는 웃음을 흘렸다. 스무 살이라니, 그 때까지 아이가 저를 기억하고 있을지나 모르겠다. 아니,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0년 동안이나 계속 친하게 지내왔으니 기억이야 하겠지.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앙겔라에 대한 기억은 아주 작아지고 작아져서, 언젠가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게 될 터였다. 먼 미래를 생각하며 앙겔라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앙겔라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앙기 쌤, 내일 뭐 하세요? 토요일인데.”
“음, 글쎄요. 이번에 열리는 전시회에 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혹시 가시려던 곳이 간다라 미술전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저도 가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티켓도 있어요. 여기요.”
아이가 뒷주머니에서 토끼모양의 동전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고이 접힌 초청권을 꺼내들었다. 두 장이었다.
“어디서 난 거예요?”
“아빠 회사에서 준거래요. 앙기 쌤, 저랑 같이 가실래요?”
“음…….”
앙겔라는 고민했다. 아이와 주말에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도 않았다.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는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아이가 보기엔 지루한 내용이 아닐까 고민하던 앙겔라는 곧 순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눈치 채곤 빙긋 웃었다. 이미 여러 차례 같이 외출했던 바, 아이는 제 나이답지 않은 취향의 전시회를 조용조용 열심히 감상하곤 했었다. 간다라 미술전이라니, 아이 또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티켓을 얻어서 가려고 했을 정도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이야기 상대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같이 가요. 대신 부모님께 허락 받고요.”
“에이, 제가 무슨 애인가요? 맨날 부모님 허락 맡으래.”
“애잖아요. 이제 겨우 열네 살인데 한참 애죠.”
아이는 그 말에 입술을 삐쭉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언제나 제 말에 수긍하는 아이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씩 웃더니 앙겔라에게 안겨들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이어진 포옹이라 익숙하게 아이를 받아들고 등을 도닥였다. 아이는 앙겔라를 한번 힘주어 꼭 안았다가 팔을 풀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앙겔라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잠깐 침묵하다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앙기 쌤, 남자 친구 분 전화인가봐요.”
“아, 네. 미안해요,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네, 이훈 씨.”
아이가 있는 앞에서 전화 받기가 민망하긴 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를 받자 남성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퇴근 후에 볼 수 있냐는 내용의 전화였다. 딱히 용무가 없었기 때문에 7시에 학교 앞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앙겔라가 통화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툭하니 말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하는 거랬어요.”
“네? 갑자기 무슨…….”
“앙기 쌤도 그렇게 생각하죠? 몇 번을 지더라도 마지막에 승리하면 해피엔딩인 거잖아요. 그렇죠?”
간절하게 물어오는 아이에게 앙겔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작년에 사춘기 고민으로 걱정하던 아이에게 제가 했던 말이었다. 아직 한창 사춘기인지, 여전히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가끔씩 하곤 했다. 그럴 때는 무조건 긍정의 답을 들려주는 편이 나았다. 하나 양의 말이 맞아요, 하고 대답하자 아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앙겔라는 그저 아이의 사춘기가 빨리 끝나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마음고생을 덜하기만을 바랐다.
*
결국 아이와의 주말 외출은 무산되었다.
퇴근하고 만난 남자친구가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다며 토요일 일정에 대해 자연스레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앙겔라는 순간 많은 고민을 했지만, 2주일 전부터 예약을 해두었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아이와의 약속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별로 실망한 것 같지 않은 태도로, 그럼 나중에 다른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할 뿐이었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토요일인 오늘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제가 VIP 고객의 주거래 은행을 뚫은 거죠. 그 덕에 내년에는 승진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일이네요, 축하드려요.”
“치글러 씨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앙겔라의 손을 잡아왔다. 앙겔라는 불편한 마음으로 애써 손가락에 힘을 뺐다. 항상 아이의 부드럽고 작은 손만 잡다가 단단하고 커다란 남자의 손을 잡으려니 자꾸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에 비해 앙겔라가 가진 마음의 크기가 많이 작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주위의 강한 권유에 의해 시작된 만남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주도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앙겔라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그와는 다르게 앙겔라는 아직도 남자친구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덧 앙겔라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남자친구의 나이는 앙겔라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남 초기부터 꾸준히 결혼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앙겔라는 그 부분이 제일 부담스러웠다. 만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에 남자친구의 호의에 부응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심해지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직업, 외모, 성격 모두 괜찮았지만 앙겔라 스스로가 연애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자꾸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이어지는 이야기가 정말 따분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이와 전시전에 갔었더라면 지금쯤 작지만 깔끔한 식당에서 전시회 감상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시간이 남는다면 새로 나온 뉴에이지 음반도 청음하러 갔을 것이다.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떠올릴 감상이 아니었지만, 앙겔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게 다였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일 있을 일정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앙겔라의 손에 깍지를 끼어왔다. 앙겔라는 낯선 감촉에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서자 남자가 앙겔라를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앙겔라는 순간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하고 느꼈다.
“오늘 제가 에스코트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은 와인 바를 아는데요. 늦게까지 모시고 싶네요.”
하는 말은 특별할 것 없었으나 뉘앙스는 전해졌다. 더 깊이 있는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사귄 지 4개월,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진도였다. 몇 번인가 키스도 해봤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러나 앙겔라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였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남자와의 스킨십에 아직까지 적응을 못 한 상태였다. 앙겔라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을 배려해준 남자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제 느린 페이스를 이유로 적령기의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못할 짓인 것 같았다. …애초에 그와의 관계를 그렇게까지 진전시킬 마음도 없었다.
“죄송해요, 이훈 씨. 저는 아직…….”
“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집에 바래다드릴게요.”
“아니요, 끝까지 말하게 해주세요. 아무래도 제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시간 낭비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의 얼굴에 곤혹감이 퍼졌다. 제 딴에는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도 했고 대화 내용도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꺼내진 이별 이야기에 납득을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남자가 물었다.
“혹시 달리 마음에 두신 분이 있으시다거나…….”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너무 페이스가 느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애를 할 마음가짐이 안 된 것 같아요.”
“그런 문제라면 제가 조급해한 게 맞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려드릴 수 있어요.”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앙겔라는 이미 결심을 내린 후였다. 앞으로 그와 더 만남을 이어간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관심사부터 시작해서 취미까지 모두가 앙겔라와 달랐다. 앙겔라에게 신경을 쓰노라고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학교 여학생보다도 앙겔라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다. …사실 그 점이 그에게 정이 별로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훈 씨는 좋은 분이지만, 제가 이 이상으로 이훈 씨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죄송합니다.”
세 번째 사과를 입에 올리고 나서야 남자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아, 정말 아쉽습니다. 전 치글러 씨가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요. 저 나름 좋은 남자인데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저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치글러 씨가 좋은데……. 정말 안 되겠습니까? 이번엔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데요.”
“……네, 안 될 것 같아요.”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차에 타시죠.”
“아니요, 택시 타고 갈게요. 그러는 게 서로한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안타까워하는 남자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앙겔라는 주차장을 나섰다. 조금 충동적으로 행동한 바가 없진 않았으나 마음은 홀가분했다. 남자를 소개시켜 준 6학년 주임 선생의 얼굴 보기가 한동안 민망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애초에 그녀에게 떠밀려서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딱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
택시를 타고 아파트 입구에 내렸을 때는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저녁식사만 했을 뿐인데 지친 느낌에 앙겔라는 터덜터덜 아파트 공동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잡힌 익숙한 인영을 보고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 양?”
적지 않은 확신을 담아 부르자, 벤치에 앉아 있던 아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앙겔라는 의아한 마음에 아이에게 다가갔다.
“왜 여기 있어요? 혹시 저 만나러 온 거예요?”
“아, 아니오. 그냥 잠깐 친구들 만나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앉아 있던 거였어요.”
“그래요? 혼자 앉아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 아니에요? 부모님 걱정하실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슬슬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여느 날과 똑같이 순순히 대답하는 아이었지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아이의 옆자리에 허리를 내렸다. 아이도 엉거주춤 다시 벤치에 앉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이가 물었다.
“……데이트 하고 오셨어요?”
“아……. 네, 뭐.”
“…….”
아이가 말없이 제가 신고 있는 하얀색 스니커즈로 시선을 떨궜다. 문득 앙겔라는 아이와 오늘 약속을 했다가 취소했던 것을 떠올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이 좋은 아이의 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약속 취소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이미 말씀 하셨잖아요. 데이트가 더 중요한 일인걸요, 뭐.”
“그래도…….”
“정 미안하시면 다음 데이트 때는 미리 말씀해주시면 돼요. 그럼 그 날은 피해서 약속 잡을게요.”
“그럼 내일이라도 전시회 갈래요?”
“내일요? 내일 데이트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제 데이트 할 일 없어요. 헤어졌거든요.”
태연스레 말하는 앙겔라와는 달리 아이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서 앙겔라는 살짝 미소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괜... 괜찮으세요? 그 남자가 헤어지재요? 아니, 앙기 쌤이 차일 리가 없는데.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왜요?”
“왜……랄게 있을까요. 그냥 맞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진짜로 헤어진 거예요? 정말이에요? 앙기 쌤, 괜찮아요?”
“네, 생각보다 덤덤하네요.”
저 때문에 시간 낭비한 남자에게 미안하긴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오히려 미안하기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린 아이에게 더 미안했다.
“그러니까 내일 저랑 전시관 가줄래요? 아, 하나 양이 내일 다른 일정이 없다면요.”
“네, 네! 갈래요, 꼭 갈래요! 저 내일 완전 한가해요. 숙제도 다 해놨고 수행평가도 다 해놨고 진짜 할 일 한 개도 없어요!”
갑자기 활기차진 아이 때문에 앙겔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벌떡 일어서서 두 주먹을 꼭 쥐고 내일 일정이 아무것도 없다고 피력하는 아이에게 진정하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거 하나 아냐?”
“야, 송하나!”
“너 전화해도 받질 않고 어딜 갔나 했더니… 어? ……누구셔?”
저 멀리에서 다짜고짜 씩씩거리며 다가오던 한 무리의 여중생이 앙겔라를 보고 움찔 하더니 작게 물었다. 앙겔라가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서자, 아이가 잠깐 망설이다 느릿하게 대답했다.
“……앙기 쌤인데.”
“아, 이분이 그 '앙기 쌤'이야?”
아이들 사이에서 앙겔라는 꽤나 인지도 있는 인물인 듯 했다. 단발머리 여중생 두 명과 긴 머리 여중생이 흥미진진한 눈초리로 앙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긴 머리 여학생이 성큼 다가서더니 앙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와, 대박 예뻐. 음, 헬로우? 왓 아유 프롬?”
“머저리야, 웨어 아 유 프롬이라고 해야지.”
“아, 맞다. 그럼 다시. 웨어 아 유 프롬?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듀?”
“아오 이 멍청이가! 네가 묻고 네가 대답하면 어떻게 해?”
“아 몰라. 아무튼 존나 예쁘다 진짜. 유 아 뷰티풀! 쿨 걸! 예에!”
“뭐라 지껄이는 거야. 너 발음 핵 구려. 영어 못하면 나처럼 말을 말든지.”
“아씨, 너네 조용히 안 할래?! 지금 밤 열시거든?”
중학생들이 와르르 웃고 떠드는 바람에 앙겔라는 조금 정신이 없었다. 결국 아이가 한번 큰 소리를 내고야 중학생 무리가 조금 진정이 됐다. 앙겔라는 아이가 이렇게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10년 동안 아이는 단 한 번도 앙겔라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 단발머리 여학생이 아이를 보고 말했다.
“송하나, 우리 너 찾고 있었어. 오늘 내내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고 발길질하고 난리치다가 달려 나가더니, 지금은 존나 멀쩡해 보인다? 너 괜찮아?”
“누, 누구더러 미친년이래? 그런 험한 말 함부로 쓰지 마.”
“……? 너 뭐 잘못 먹었냐? 평소에는 이년 저년 입에 아주 달고…….”
아이가 화들짝 놀라더니 말을 하던 여중생의 입을 급히 틀어막고는 외쳤다.
“야 김미연! 너, 너 저번에 말한 3반에 축구부 애, 걔 소개해줄게. 그러니까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으읍, 진, 읍……. 아, 치워봐! 야 너 그거 진짜야? 정말이지? 아까는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어, 그러니까 얼른 가줄래?”
“송하나 짱이다! 웬 일이래? 약속한 거다? 응?”
“알았으니까 이제 밤도 늦었고 하니 그만 집에 가봐야하지 않겠니?”
“말투 왜 그래? 아무튼 진짜 소개해주는 거 맞지?”
계속 반복되는 질문에 아이가 빽 소리쳤다.
“소개해준다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죽어도 소개 안 해줄 것 같거든!”
“아, 뭐냐? 성격 진짜 이상하네. 알았어, 그럼 학교에서 보자! 안녕히 가세요!”
“굿바이! 아이 씨 유! 굿럭!”
“씨 유 어게인이라고 해야지, 띨박아!”
“아, 씨유 어게인! 바이바이!”
떠들썩한 무리가 떠나갈 때까지 앙겔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끄러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근 10년을 보내왔다 해도, 앙겔라는 방금 전 본 중학생들처럼 정신없고 시끄러운 애들은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그런 앙겔라를 보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앙기 쌤. 애들이 좀 정신없죠?”
“…활기 찬 친구들이네요.”
아니라곤 할 수 없어 그렇게 돌려 말하자, 아이가 멋쩍은 듯 웃었다.
“나쁜 애들은 아닌데 입이 좀 험해요.”
“그러면 됐어요. 착하면 된 거죠. …그래도 하나 양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거죠?”
발음도 내용도 수상쩍었던 긴 머리 여학생을 떠올리며 그렇게 묻자, 아이가 별 소릴 다 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휴,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저 이번 기말고사에서 전교 3등 했어요. 미연이, 그러니까 그 긴 머리 애가 유달리 영어를 못하는 것뿐이에요. 전 더 잘 한다고요. 그보다 내일 완전 기대돼서 죽겠어요. 진짜로. Because I've totally fallen for you.”
“으음, 그 말은 이 상황에서 맞지 않는 말 같은데요.”
“발음은 괜찮지 않았어요?”
“그건 완벽했어요.”
“그럼 됐죠, 뭐.”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지적을 하자 시무룩해하길래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아이가 앙겔라의 품에 폭 안겼다. 습관적으로 등을 다독이며 이제는 전 남자친구가 된 남자와 이 정도만 되었어도 제 연애전선에 별 문제가 없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앙겔라는 그다지 아쉽지 않은 지난 인연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아이의 말대로 내일 있을 아이와의 데이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보다는 훨씬 즐거울 내일이 될 것 같았다.
# 4-1. 고등학생 편
“앙기 쌤- 저 오늘 완전 열공했어요. 야자 쨀랬는데 담임선생님한테 걸려가지고 완전 코앞에서 감시당하고 힘들어 죽겠어요. 아니 야자 안 한다고 해서 진학했더니 갑자기 야자를 강제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아이가 징징대며 덥석 안겨왔다. 앙겔라는 그래요, 그래 하면서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어느새 키가 많이 자란 아이의 시선은 앙겔라와 엇비슷해졌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어린 티를 다 못 벗고 있었다. 앙겔라의 앞에서는 여전히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행동하곤 하는 아이 때문에 앙겔라는 웃음 짓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면 당연히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죠. 왜 안 하려고 했어요?”
“학교에서보다 앙기 쌤네 집에서 공부하는 게 더 잘 된다고요. 아니, 사람마다 공부가 잘 되는 장소가 따로 있는데 돼지우리에 가축 몰아넣듯 좁은 공간에 애들 집어넣고 공부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래요?”
“그래도 공부하는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건 무시할 수 없죠.”
“그래도 전 앙기 쌤네 집이 좋단 말이에요. 아~ 빨리 고3 되어서 수능 보고 끝내고 싶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아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앙겔라를 꼭 껴안더니 팔을 풀었다. 아이가 실내 슬리퍼를 신는 것을 보고 앙겔라는 거실로 향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아이가 올 것을 대비해서 과일과 음료수를 방금 막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는 그것을 보고 씽긋 웃고는 앙겔라의 볼에 기습적으로 뽀뽀를 했다.
“아, 앙기 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저 수능 끝나면 꼭 보답할게요.”
“네, 네. 기대할게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가 입술을 삐쭉였다. 그러나 곧바로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져서는 가방을 내려놓고 테이블 앞에 가서 앉았다. 앙겔라는 바로 뒤의 소파에 앉아서 학술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니는 B 고등학교는 앙겔라의 집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 아이가 이 B고를 희망한다고 했을 때 앙겔라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B고는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학군 내에서는 제일 공부를 못 하는 소위 '꼴통' 학교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우려하는 앙겔라에게 틈새 전략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경쟁이 치열한 명문고에 가서 고생을 하느니 보다 쉬운 B고에 가서 전교 1등으로 내신을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그간 보아 온 아이의 성정으로 보아 주위에 휩쓸려 삐뚤어지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환경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라 앙겔라는 걱정이 몹시 컸다. 그래도 아이의 선택을 지지해주기는 했다. 아이는 그런 앙겔라의 목을 끌어안고서 단단한 목소리로 절대 앙겔라가 걱정할 만 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은 놓아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입학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당초의 계획대로 아주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앙겔라의 집을 독서실 삼아 드나들고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내는 동안 몇 번이고 앙겔라의 집에 놀러온 아이였기에, 고등학교를 끝마친 뒤 놀러오겠다고 하는 아이를 앙겔라는 공부하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는 앙겔라와의 약속대로 꼬박 네다섯 시간을 열심히 공부한 후에 한 시간 정도 앙겔라와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덕분에 앙겔라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가족보다도 가족처럼 느껴지는 아이의 존재가 그만큼 익숙했다. 한참동안 문제를 풀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앙겔라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앙기 쌤, 이번 주말에 레베카 보러 가실래요? 아빠가 표 줬는데.”
“뮤지컬 말하는 거죠?”
“네, 주말 동안 관람 가능한 표예요. A팀이랑 B팀이랑 내용이 조금씩 다르대요. 같이 보러 가요, 네?”
“그래요, 그럼. …그런데 괜찮겠어요? 공부 해야 하는데 제가 방해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별 말씀을 다 하시네. 앙기 쌤, 가끔씩 이렇게 콧바람을 쐬어줘야 효율도 더 올라가는 거라고요. 맨날 공부만 하면 지겨워서 어떻게 살아요? …아, 그런데 그 날 데이트 일정 없으신 거 맞죠?”
“음, 네. 있더라도 나중으로 미루죠, 뭐. 하나 양이 표까지 구해온 걸요.”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환히 웃었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긴 했지만, 미리 잡힌 아이와의 약속을 깨면서까지 만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제 말에 신이 나서 품을 파고드는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앙겔라는 설핏 웃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저를 따르는 아이가 귀엽게만 보였다.
*
“최 선생님께는 제가 말할게요. …아니에요. 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앙겔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침대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누운 채로 화학 문제를 풀고 있던 아이가 앙겔라를 힐끔 살피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앙기 쌤?”
“하아……. 글쎄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남자 친구 분 일이에요? 그 회계사라던…….”
“이제 아니에요. 헤어졌거든요.”
생각보다 말이 덤덤히 나갔다. 아이가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 앙겔라를 보았다. 아이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평일에는 서로 바빠서 잘 못 만나고, 주말에는 아이와 놀러 다니느라 약속 잡기가 힘드니 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된 남자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남자 쪽에서 만나달라고 하도 사정을 한 끝에 만나기 시작한 거였고, 몇 번의 만남을 가졌지만 그에게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다. 아이와는 모든 게 자연스럽고 편한데, 새 남자친구와는 어색한 사이로 모든 것을 하나부터 새로이 시작하려니 피곤하기만 했다.
앙겔라는 저보다 18살이나 어린 애한테 별 말을 다 한다 싶으면서도 무언가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말을 이었다.
“연애라는 게 잘 안 되네요. 애초에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앙기 쌤…….”
“하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별로 슬프지도 않고……. 혼자여도 그렇게 불편한 것도 없고, 그냥 이대로 혼자 살까봐요.”
아이가 슬픈 눈동자로 앙겔라를 바라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다가서서는 앙겔라의 머리를 살짝 감싸 안더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앙겔라는 그 미약한 힘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아이의 온기가 와 닿자 위로가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앙겔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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