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이라고 썼지만, 걍 상편이랑 통합한 통합본이니 이것만 봐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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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모든 사람이 등진다고 해도 저는 당신만을 따를게요.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저는, 저만큼은 당신만을 따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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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독스럽다라는 문장을 날씨에도 쓸 날이 올 줄이야.

하얀 볼로 흐르는 땀줄기를 대충 닦아낸 린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을 그냥 폭파 시켜버리고 싶다. 라고도 생각했다. 제 아무리 사막이란 걸 감안해도, 그래도 이 날씨는 좀 심하다.

린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옆에 있던 여인을 보았다. 십자가형 지팡이에 작은 몸을 거의 기대면서 걷고 있는 그녀. 이리 저리 헤진 로브 사이 햇빛에 빛나는 은발이 눈에 띈다. 세상에 막 나온 아기처럼 하얀 피부 또한 눈에 띈다.

도망자 신세에 걸맞지 않은, 눈에 띄는 용모다.

린은 잠시 여인의 옆에 서서 로브를 잘 여며주었다. 여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야트막히 호선을 그렸다.

“아, 고맙습니다. 린.”

“별 말씀을요. 성녀님.”

성녀라고 불린 여인의 웃음에 린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성녀님의 웃음은 언제, 어디서 봐도 파괴력이 굉장하다.

“조금만 힘내세요. 저기 멀리 도시가 보입니다.”

괜스레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린은 갈 길을 재촉했다. 린의 뒤를 성녀가 뒤따랐다. 그들의 시야 너머로 사막 도시 하나가, 아지랑이 속에서 거칠게 일렁였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모여든 도시의 모습은 마치 큰 시장판과 비슷했다. 여기저기서 몰려온 무역인들의 교역지 노릇을 하는 모양인지, 보따리를 한아름 풀고 떠드는 그 모습은 어딘가 정겹기까지 했다.

“사람이 굉장히 많네요.”

사람들이 일궈내는 기분 좋은 소음에 성녀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피곤했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성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구경 좀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녀가 반문했다. 그 반문은 ‘추격에 쫓기는 신세인데, 저희 그래도 돼요?’ 라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성녀도 보고 싶었으리라.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이다. 린은 성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성녀의 그 마음도 잘 알았다.

“제 예상이지만... 추격자들은 저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타고 있었던 말 두 필을 희생시켜 제 멋대로 도망치게 했으니까요. 여기까지 오는 데에 흔적도 최대한 열심히 지웠고, 설마 성녀님이 사막까지 도망치셨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알 수 없겠죠.”

물론 린은 여관 침대에 누워 깊게 쌓인 피로를 풀고 싶었다. 린은 땅바닥에서 자는 걸 가장 싫어했고, 근 보름간을 땅바닥에서 잤으니 침대가 너무도 그리웠다.

“로브만 좀 조심히 여며주신다면, 뭐 얼마든지요.”

그래도 성녀님이 바란다면 그까짓 구경쯤 못할 것도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린의 확답에 성녀가 와! 하며 두 손을 들었다. 간만의 사람구경에 즐거운 모양이다.

역시 민생 시찰이라는 것보다, 그냥 시끄러운 그 풍경을 구경하고 싶은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관에 대충 짐을 풀고, 식사를 한 두 사람은 다시 무역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왔다. 날이 좀 저물었는지, 몇 몇 장사치들은 벌써부터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사막의 밤은 춥다. 추워지기 전 저들처럼 먼저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스 드래곤의 피로 만든 시원한 물약이 여기 있습니다요!”

그런 사람들의 움직임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막 성녀와 린의 앞으로 다가온 손길 또한 그러했다.

“이것만 마신다면 더위도 싸악! 마치 이스 드래곤이 옆에 있는 오싹함을 직통으로 느끼실 겁니다!”

유리병 안에서 보라색 액체가 찰랑였다. 저 멀리 만년설만 먹고 산다는 이스 드래곤. 최근에도 목격담은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만, 그래도 희귀한 생명체다.

“...그냥 과일 주스 같은데.”

린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주스에 가공한 식용 염색약을 대충 풀어놓은 모양새다. 그럼에도 장사치의 눈길은 일그러짐 없이 호객행위를 이어나갔다.

“하이고, 손님! 이 바닥 하나, 하나 다 짚고 가면 저희는 무슨 믿음으로 먹고 삽니까아! 진짜 이스 드래곤의 피가 맞다니까요!”

린과 장사치는 옥신각신 계속 시비를 주고받았다. 이쯤 되면 새로운 호구를 찾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도, 장사치는 오기가 생긴 듯 열심히 유리병을 들이밀었다.

“린.”

그때 옆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녀가 말을 꺼냈다. 린과 장사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고,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하나 사드리죠.”

“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손님!”

린과 장사치, 두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장사치는 그제야 물주가 누군지 깨달은 듯, 성녀 옆에 찰싹 다가가서 호객행위를 이어나갔다. 성녀는 어머, 그래요? 라고 받아주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성녀의 고개 끄덕임을 보고, 린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최근에 찾아둔 돈이 그나마 많이 있는 게 다행이다.

“을므예요.”

린은 이를 악물었다. 누굴 그깟 도마뱀도 못 알아볼 호구로 보나. 확 썰어버릴까 보다.

“이거 어디 가서는 500크렌을 받아도 모자랄 물건인데, 제가 특별히! 단돈 100크렌에 모시겠습니다! 손님!”

하얀 수염을 짐짓 손질하며 너스레를 떠는 장사치의 모습에, 린의 속은 한층 더 뒤집어졌다.

“아니, 이걸 50크렌도 아니고 100크렌? 이거 순 날강도...”

장사치의 허세스러운 모습에 린이 반발하려 했을 때였다.

“린.”

성녀가 조용히 린의 이름을 불렀다. 린의 표정이 바뀌기도 전에, 성녀는 조용히 확실한 뜻을 덧붙였다.

“드리세요.”

너무나도 정직한 그 단언에, 린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100크렌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

장사치의 손에서 뺏어들 듯, 린은 유리병을 낚아챘다. 반면에 25크렌 주화 네 개를 받아든 장사치의 얼굴은 마냥 환하기만 하다.

린과 성녀가 마지막 손님이었던 듯, 장사치는 황급히 보따리를 쌌다. 다른 장사치와는 다르게, 그는 이 주변에서 사는 모양이었다.

여관으로 들어서는 길목 사이에서, 린은 장사치의 뒷모습을 눈에 나지막이 새겨두었다.

“이스 드래곤의 피라... 이걸 마셔도 될까요?”

성녀가 유리병을 한번 찰랑여보였다. 보랏빛 액체가 유리병에 비친 성녀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 모금 마셔보실래요? 만약 그게 진짜 이스 드래곤의 피라면 맛을 느끼기도 전에, 그대로 식도부터 꽝꽝 얼어버릴 거니까.”

평소의 린답지 않은 날이 선 어투였다.

“그럼 린부터 한 모금.”

린의 말에 성녀는 바로 유리병을 들이밀었다. 살짝 벙쪘던 린은 바로 유리병을 채들고,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뽑아 그대로 검신에 액체를 살짝 뿌렸다.

“반응하지 않네요.”

드래곤의 뼈,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린의 검. 뿌렸던 액체가 이스 드래곤의 피를 가공한 물건이었다면, 어떻게든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응은 없었다. 정말, 요만큼의 손톱만큼의 반응도 없었다.

심통이 난 린은 그대로 유리병을 벽에 던졌다. 쨍그랑, 하고 소리가 났고 아니나 다를까 성녀는 깨진 유리병들을 주우려 다가갔다. 그런 성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린이 따라가 그 유리병들을 모두 주웠다.

“린, 삐졌어요?”

“안 삐졌어요.”

“후후, 삐진 거 맞네요.”

“아, 진짜.”

성녀의 놀리는 듯한 어투에, 결국 린은 본연의 성격이 튀어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녀의 앞에서만 유순해지는 성격이지, 린의 본 성격은 꽤나 거칠다.

“저분께 병든 아내가 있을 수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노모가 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들이 많을 수도 있지요.”

성녀가 저 멀리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화르륵 타올랐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때리고 지나갔다. 깨진 유리병들을 한쪽 구석에 모아뒀다.

“행할 수 있는 선이라면, 언제든지 선을 행해야 하는 게 저희의 목적이잖아요?”

린의 뒤에서, 성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린은 뒤를 돌아보았고, 활짝 웃고 있던 성녀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더욱, 성녀님의 미소는 빛을 발했다.

“...자금을 제가 관리하는 이상, 불필요한 지출은 언제나 삼가입니다.”

그렇지만 린은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만약 진짜 여유가 없었다면, 린이 먼저 그 얘기를 꺼냈겠죠.”

“성녀님이 너무 태평하셔서 저만 언제나 이렇게 걱정이네요.”

“저는 그런 린을 믿고 있어요.”

“저는 성녀님의 그런 말들이 반칙이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밝은 목소리가 작은 골목 안에서 살짝 울렸다. 그 목소리에 잠이 깬 듯, 누군가 끄윽 하고 일어났다. 사금을 머리에 모두 흩뿌린 것만 같은 백금발이었다. 하얀 피부와 뾰족한 귀를 보고, 소녀 엘프라고 두 사람은 지레 짐작했다.

소녀의 몰골은 말도 안 되게 처참했다.

입고 있는 옷이 모두 헤진 듯, 차라리 길가에 돌아다니는 넝마가 나을 정도였고, 하얀 피부 사이로 검은색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얀 발은 뜨거운 모래에 화상을 입었는지, 잔뜩 붉어진 상태였다.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낄만한데도, 성녀는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는 그런 성녀를 눈길에 한번 두었다가, 이내 볼멘소리와 함께 빠르게 거둬갔다.

“뭐야...”

소녀는 귀찮은 얼굴로 다시 차가운 돌 쪽을 향해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소녀의 성의없는 모습에 같이 쭈그려 앉아있던 린이 성녀의 로브를 당기려 했을 때였다.

꼬르륵, 하고 누군가의 배가 울렸다. 성녀도 린도 식사를 해결했으니, 이 소리의 주인공은 아마 지금 이 앞에 누워 있는 소녀일 것이다.

“배가 고프세요?”

성녀가 살며시 웃었다.

린은 그 미소를 보았을 때 자애롭다고 생각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게 화가 나는 사람 앞에선 그러한 미소 또한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소녀는 일부로 삐딱한 어투로 답변을 했다.

아니, 했을 터였다.

“아니, 일단 목 말...어?”

소녀의 말이 갑작스레, 위화감을 가지고 끊겼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린의 손이 자연스레 검집을 향했다. 이 세계는 워낙 미친년놈들이 많아서, 잠시라도 긴장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들려?”

소녀의 시선은 그런 린에게 향하지도 않았다. 소녀는 오직 자신의 앞에 서있던 성녀만을 바라볼 뿐, 다른 것에는 일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의 시야엔 오직 성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녀는 성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

성녀는 그러한 소녀의 반응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별 다른 악의는 느껴지지 않아 소녀의 말을 되물었다.

“들리냐고? 아니, 들렸어? 들렸냐고?　내 말이? 당신, 지금, 내 목소리가, 아니 내 말이 들리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너희 종족 언어는 수백년 전에 이미 사멸했어.”

인간들의 무자비한 엘프 사냥으로 인해, (대부분의 엘프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엘프는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고유의 언어를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다. 늙지 않는 엘프 특유의 특성 덕분인지, 때문인지 노인들 또한 모두 인간들이 잡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소수의 엘프들도 이제 ‘세계’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 또한 ‘세계’의 언어를 공통으로 쓰니, 이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이나, 종족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소녀는 린과 성녀에게 자신의 ‘말’이 들리냐고 되묻고 있었다.

“어, 당신도 들려? 아, 씨발... 진짜 나 눈물 날 것 같아. 당신들 진짜 들리는 거 맞지?”

소녀가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간에 들린 알 수 없는 울림에 린과 성녀가 살짝 떨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린은 그 울림이 기분 나쁘다고 느껴졌다.

“들려요. 들리니까. 숨 쉬고 말하세요. 그리고 이 사람에게 빨리 물을...”

거기까지 말하고는 성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아니, 일단 저희 여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네요. 날도 저물고 있고.”

“얘도 같이요?”

소녀는 행동거지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영 수상했다. 어쩌면 이미 추적자들이 그들을 따라잡고, 함정을 파놓은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린은 소녀를 그냥 문 앞에 두고, 욕탕에서 씻고, 그냥 침대에서 잠이나 자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두고 갈 순 없어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자면, 역시 선을 향한 성녀의 고집뿐이다. 가끔은 그 집착을 병적이라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린은 성녀의 그러한 아집이 어디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안에 있는 그것을 쫓기 위해, 성녀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하.”

그리고 그러한 고집과 집착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기에,

“새벽에 깨시면 빨리 빨리 행동하셔야 돼요.”

린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린과 성녀가 말하는 것을 두고 보고 있던 소녀 엘프. 그리고 린의 서슬 퍼런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그제야 조금 겁이 나는 듯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너, 이름이 뭐야?”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 그런 소녀를 향해 린은 물었다.

일단 여관방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은 좀 알자는 심정이었다. 입구 옆에 앉아있다는 것만 빼면 그들은 소녀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이름이라는 말에 소녀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놀랍게도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곧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소녀의 이상 반응에 린의 의심이 짙어지려는 찰나.

“채이.... 한 채이.”

문득 소녀는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채이.”

린은 그 이름을 혀에서 한번 굴려보았다. 그 울림은 뭐랄까, 이질적인 느낌이 굉장히 심했다. ‘세계’의 언어가 아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지닌 굴림이었다.

“이상한 이름이네.”

그래서 린은 일말의 여과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소녀 또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 하도 오래 있어서, 이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성녀가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그들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성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나지막이 소녀가 읊조렸던 중얼거림. 그 자그마한 목소리를, 린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 했으니까.”

자신의 이름을 까먹을 뻔 했다고 말하는 이상한 소녀 엘프. 여전히 소녀는 영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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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늦게까지 돌아서였을까. 그다지 이른 저녁 식사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늦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금 저녁을 먹어두면 새벽엔 배를 곪을 일이 없으리라. 그래서 린은 오늘 저녁을 간단히 때울 생각이었다.

스프는 성녀가 특히 좋아한다. 따뜻할 때 먹는 스프가 저녁으로 최고라고, 성녀는 항상 입이 닳도록 말했다. 항상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린에게 미안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오랜 감금 생활로 길들인 식습관이 그러해서였을까.

린은 그게 궁금했다. 그러나 식재료가 지닌 모든 영양소를 몸에 쌓아 둘 수 있는 그 음식을 린도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밀로 만든 빵을 스프에 적셔 먹기. 린이 생각한 오늘의 저녁메뉴다. 여관의 주인에게 부탁을 하면 넉넉히 잡아도 10크렌 정도로 이번 저녁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켁, 켁!”

제 아무리 퍽퍽한 빵도 스프에 적셔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소녀 엘프처럼 무식하게만 안 먹는다면 말이다. 성녀는 황급히 흙으로 구워진 잔에 물을 담았다. 린은 빵을 살짝 뜯어 스프에 적셨다.

“누가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린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앞에 지금 이 소녀 엘프가 왜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린이 생각한 예정대로라면 저녁을 간단히 먹고, 마을에서 산 마법 천으로 검을 한번 손질할 예정이었다. 그리고는 성녀와 함께 목욕을 끝내고 일찍 잠에 들어 내일 아침 ‘대지의 기적’을 탄 채, 빠르게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더, 더 없어?”

“뭐?”

지금 이렇게 웬 소녀 엘프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린의 계획에 없었다. 유랑 생활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계획에 틀어지는 일이 있을 때마다 린은 머리가 아파왔다.

선을 행하기 위해, 그게 아니라면 그냥 호구짓을 해야 하는 성녀를 위해서라도 돌발 상황은 자제해야 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쫓기는 상황에는 더욱.

“자, 제 빵도 조금 더 드세요.”

성녀가 빵을 살짝 뜯어 큰 부분을 엘프에게 나눠주었다. 그러자 엘프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고, 그 눈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엘프가 수저를 놓고, 성녀의 두 손을 콱 잡았다. 깜짝 놀란 린의 손이 순식간에 검으로 향했다.

“천사야? 당신은 레알 천사인 거지?”

“레... 뭐?”

엘프의 이어지는 말에는 린도 성녀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는 다시 그릇을 들었다. 스프에 코를 박을 기세였다.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엘프다. 이름도 분명 이곳에서는 쉬이 접할 수 없는, 이상한 굴림이었던 것 같다.

“채이.”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성녀가 엘프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이름이 불린 엘프... 아니, 채이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정말로 없어요?”

자신을 한 채이라고 밝힌 소녀. 소녀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주장’ 하고 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한 채이라는 이름 석 자 뿐. 그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채이는 주장하고 있었다.

“응. 거의 기억이 없네.”

그리고 그 ‘주장’은 여전히 굽히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수상한데.”

린은 채이의 그 ‘주장’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엥? 왜?”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이젠 먹는 것보다는 대화에 집중하는 채이. 하지만 수상하다는 말에는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런 채이를 향해 린은 나이프를 겨눴다. 나이프엔 스프가 조금 묻어 있었다. 스프가 묻지 않은 부분이 불빛에 반짝였다.

“우린 지금 쫓기고 있는 입장이거든.”

너를 믿을 수 없다는, 실로 간단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린의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저만 쫓기고 있어요.”

“아니, 우리가.”

성녀가 린의 말을 정정하고, 린이 다시 성녀의 말을 정정했다. 오랫동안 관계를 재정립하지 못한 듯, 두 사람의 말은 엇갈렸다. 성녀는 린이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이 싫었고, 린은 성녀가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게 싫었다.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린의 말을 보충해주기 위해 설명에 들어섰다.

“제 목숨엔 지금 현상금이 걸려 있어요.”

성녀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현상금이라는 단어에, 채이도 살짝 긴장한 듯 자세를 다 잡았다.

“살아서 데려오든, 죽여서 끌고 오든, 어떤 짓을 해서든 설령 그게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해도....”

성녀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신의 사자, 성녀였던 ‘죄인’ 아르인을 죽여라.”

죄로 더럽혀진 아르인이라는 이름을, 성녀는 밝혔다. 설마 이름까지 밝힐 줄 몰랐던 린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사람이 무르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세계의 입장에서, 저는 죄인이에요.”

성녀는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멋쩍은 웃음이 그녀의 슬픔을 가렸다. 그것을 알았던 린은 성녀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린은 제가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는 인질이죠.”

한껏 굳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성녀는 린을 가리키며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인질보단 공범에 가까워요.”

“후후, 린 마음대로 하세요.”

“정말.”

입가를 풀면서 말했지만, 인질보다 공범이 더 좋다는 건 린의 솔직한 마음이다. 린의 그런 마음을 성녀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녀는 린이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는 게 싫을 뿐이다.

“아무래도 좋아.”

채이는 말했다.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채이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이목을 집중했다. 갑작스럽게 쏠린 시선이 조금 당황스러운지, 채이는 눈을 굴렸다.

“어차피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당신들뿐인 것 같고.... 그래서 일단 두 사람이랑 함께 가고 싶어.”

말을 살짝 끄는 채이. 채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 눈에 담았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유이한 사람들. 가급적이면 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리고 당신들... 그렇게 나쁜 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아.”

두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도 그러지 않았는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지금 내 꼴을 봐. 때 국물은 질질 흐르고, 냄새도 심해서 사람 몰골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모습이잖아.”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인과....”

“린.”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구나 싶어서, 린은 이름을 알려주었다. 린의 이름을 한번 머금었던 채이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린. 두 사람은 이렇게 먹을 것도 줬어. 심지어 아르인은 이전까지 나를 알지도 못했는데, 무릎까지 꿇으며 내 얘기를 들어줬어.”

빈 그릇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채이. 두 사람을 만나기 직전까지, 채이는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타지'에서 고립 된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두 사람을 만나는 게 단 하루라도 늦었다면 채이는 분명 굶어 죽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물론 조금 툴툴 거리는 면이 있긴 하지만 댁도 나쁜 사람이라곤 생각 안 해.”

그게 채이가 곰곰이 생각하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었다. 채이가 도출해낸 결론을 듣고, 린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단순한 혼잣말이었다.

“곤란하네.”

“곤란하네요.”

성녀 또한 린의 혼잣말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기뻐요.”

그리고 이번엔 린이 성녀의 말에 공감했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성녀’ 아르인을 선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성녀는 기쁜 표정이었다.

“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채이는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채이를 향했다.

“일단 좀 씻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꼴은 너무 더러워서...”

“그래. 여관 주인에게 말해서 갈아입을 옷은 일단 구해둘게.”

“고마워.”

여관은 공동욕탕을 쓰기 때문에 방을 나서야했다. 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았고, 확실하게 말했다.

“돈을 떼먹지만은 않을 거야. 내 나름대로 갚을 테니까.”

“누가 뭐래?”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는 듯, 황당히 말하는 린에게 채이는 웃어보였다.

“그냥.”

보조개가 살짝 파인, 뭔가 굉장히 귀엽고 앳된 웃음이다.

문이 탁, 하고 소리를 냈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린은 살짝 기지개를 켰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고 간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채이의 성격도 회오리바람과 비슷하다고 린은 생각했다.

“슬슬 치울까요.”

린은 비어진 그릇들을 한 그릇에 겹쳤다. 한 채이의 옷도 구할 겸해서 여관주인에게 갔다 줘야겠다. 내일 갈 도시는 덥다기 보단 추운 곳이니, 기후에 맞는 옷을 준비하려면 여관주인이 발품을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갔다 올게요.”

“오늘은 뭔가... 린답지 않네요.”

문 고리로 향하던 린의 손이 멈췄다. 답답하다는 듯, 조여오는 성녀의 목소리에 린의 마음이 조금 동요했다. 성녀가 거기까지만 느꼈다면 좋으련만.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기분이에요. 린이라면 알 수 있잖아요? 채이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계속 이어지는 성녀의 목소리에 린은 제 마음이 칼로 베여나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난도질하는 걸까.

“한 채이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잠시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씀 드릴까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잠시 정적. 그릇들을 식탁 한 구석에 두고, 린은 의자를 끌었다. 끄윽, 하고 일어나는 불협화음이 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린은 의자에 앉아 하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때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예쁜 손은 이런 저런 상처가 나 못생겨져버리고 말았다.

“저희 둘 사이에 누군가 끼는 게 싫어서 그랬어요.”

그러나 린은 상처 입은 손보다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더욱 보여주기가 싫었다.

“린...”

성녀는 린의 이름을 뇌까렸다. 린은 손에 얼굴을 묻고 계속,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셋보다는 둘이 좋아요. 그건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불안해요. 이런 제가 미치도록 짜증나긴 하지만 이제부터 같이 다닌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질투가 더 나서 미치겠어요.”

둘이였던 선을 찾는 여정에 누군가가 끼어든다. 그 생각만으로도 칙칙하고, 어둡고,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쓰레기같은 감정들이 휘감는다. 자신을 쥐어 뜯어, 감정에 좀먹게 한다.

어마어마한 속 좁음에 린은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좀... 아니, 많이 구질구질하네요. 저란 사람은.”

성녀는 린의 웃음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흐릿한 감정만이 린의 눈에 보일 뿐이다. 평소와는 다른 성녀의 눈에 린은 겁이 났다.

설마 자신에게 질려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하, 하지만 서, 성녀님은.”

급히 말을 꺼내려 했던 탓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린은 말을 더듬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린의 손이 성녀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의 손을 부여잡은 또 하나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성녀는 느꼈다.

“이런 추악한 저라도 사랑해주실 거죠? 성녀님은.”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해보이는 린. 그러나 린의 볼엔 이미 투명한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가는 헤실헤실 웃고 있어서, 린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슬픈 꼴이 되었다.

더 이상 린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할 것 같았던 성녀는 결국 린의 몸을 끌어안았다.

“서, 성녀님?”

살짝 놀란 린이 성녀의 모습을 눈에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성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성녀의 온기만이 린을 감쌌다. 그 따스한 온기에, 린은 성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했다.

“전혀 추악하지 않아요, 린.”

성녀는 말했다.

“사람이 사랑받길 원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세상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 그러나 이젠 세상이 죽이려드는 여자가 린에게 말했다.

“신의 사랑은 공평하니까요.”

신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얼마나 고결한 모습이란 말인가. 린은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눈물을 찍어냈다. 그런데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제 신은 당신이에요.”

“전 그러한 그릇이 못 돼요. 저는 그저 신의 사자일 뿐이랍니다.”

린의 말에, 성녀는 혀를 살짝 내밀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한 구석에 놓인 그릇들을 손에 들었다. 그것들을 한 손에 얹더니, 이내 다른 손의 검지 하나를 세워 린에게 보여주었다.

“오늘은 일찍 잠에 드는 편이 좋겠어요.”

어느새 한층 싸늘해진 밤이다. 성녀의 말에 린 또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뒤엔 식기들을 내려 보내고, 이불 몇 개를 받아왔다. 채이가 돌아왔을 때도, 성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해주는 성녀의 배려가 린은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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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주만에 쓰는 후속편.

다음편도 4주가 걸리려나.

이놈의 스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