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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뱅드림) 아리사,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하다. #2

Aris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5.29 00:11:17
조회 760 추천 34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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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사,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하다.


#1화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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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아아아아아?!”
 
아리사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유키나의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유키나 선배가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내가 유키나 선배가 된 거야? 아리사는 그제야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집의 구조가 바뀐 것만이 아니었다. 체형. 목소리. 모든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유키나~! 아침부터 시끄러워!”
 
맞은편 발코니 창문이 열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타난 이마이 리사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뭐야, 유키나 선배. 리사 씨의 옆집에 살고 있었던 거였나. 아리사는 Roselia의 멤버들 집 주소까지 전부 외고 있지는 않았다.
 
아리사는 급하게 발코니를 열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리사 씨가 깰 줄은 모르고….”
“…뭐?”

하품을 하던 리사가 갑자기 정색했다.

“유키나, 어디 아파?”
“아, 그게 저….”

그러고 보면 유키나 선배는 리사 씨에게 어떻게 대했더라. 둘이 어느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 호칭은 뭐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진 의심을 사지 말아야 했다.

아리사는 최대한 목소리를 침착하게 낮추며 말했다.

“…아무 문제없어. 정말.”
“정말?”
“…정말로.”
“오늘의 유키나는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알았어. 세수 하고 정신 좀 차려.”
 
리사는 생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창을 닫았다. 그래. 아무리 유키나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유키나의 몸을 빼앗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겠지. 그런 일이 상식적으로 있을 리가 없잖냐.

아리사는 자신의-유키나의-뺨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상식적으로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있을 리 없는 일이 일어나버렸다.

《이치가야 아리사는, 미나토 유키나가 되었다.》


***


…실화냐.

일단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오컬트 같은 이야기, 누구에게 상담하더라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이치가야 아리사가 미나토 유키나가 되었다니. 상식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잖아.

그 때, 책상 위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리사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쥐었다. 유키나의 스마트폰 위에 카스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키나 선배! 어제는 집까지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젠장, 뒤에 하트는 또 뭐야. 토야마 카스미. 인사차 보내는 말이면 그냥 하트 빼고 보내도 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유키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아리사는 스마트폰을 신경질적으로 침대에 집어던졌다. 힘을 담아 던진 유키나의 스마트폰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토야마 카스미는 미나토 유키나를 사랑한다. 이치가야 아리사가 아닌, Roselia의 보컬 미나토 유키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 유키나의 몸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토야마 카스미는, 계속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닐까.

“…아니. 아니. 아니.”

아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달콤한 유혹이기는 했다. 토야마 카스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욕망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올랐다. 하지만 참아내야 했다.


애초에 진짜 미나토 유키나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지금 아리사가 유키나의 몸에 들어간 이상, 유키나는 아리사의 몸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유키나 역시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아리사는 침대에 던진 스마트폰을 주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일단 자신의 몸에 있을 미나토 유키나와 통화하자. 통화하면 어떻게 하지? 당연히 유키나 선배와 지금 상황을 상의해야지. 상의하면 뭐가 변해? 원래 몸으로 되돌아가야지.

미나토 유키나인 채로 있으면 카스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데?

…하지만. 진짜 미나토 유키나가 살아 있는데,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잖아!

자신의 몸. 진짜 유키나의 존재. 그것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욕망을 짓눌러 주었다. 아리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유키나, 오늘은 좀 늦게 내려왔구나.”
 
유키나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중년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진짜 유키나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대하는 편일까. 아리사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조용히 아침 식사가 준비된 식탁에 앉았다.



‘원래’ 아리사의 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받기는 했다. 세 번 정도 전화를 걸은 후였을까. 아리사의 할머니가 스마트폰을 받았다. 할머니에게서 들은 설명은 간략했다. 아리사가 연락도 없이 사라진 탓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치가야 아리사-어쩌면 그 몸에 있을 지도 모르는 미나토 유키나-는 어디에 있을까. 한 가지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아리사는 일부러 그 상상을 하지 않으려 했다. 단지 꿈일 뿐이었다. 조금 재미없으면서 으스스하기까지 한 질 낮은 악몽.

학교에 가는 길에 한 번 공원에 들러 보자. 그렇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유키나~ 오늘 괜찮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교복을 차려 입고 나서자,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유키나를 기다리던 리사가 다가왔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처럼 허둥지둥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아리사는 기억 속의 유키나를 흉내 내어 말했다.

“그냥 잠이 덜 깨었을 뿐이야. 아무 문제없어.”
“뭐 그런 거라면 상관없긴 하지만. 갑자기 존대를 하기에 깜짝 놀랐지 뭐야.”
“그 이야기는 그만. 학교나 가자.”
“예에, 예.”

아리사는 리사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아, 학교에 가기 전에…잠시 돌아서 공원까지 들렀다 갈 수 있을까?”
“공원?”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유키나 혹시 공원에서 카스미 짱이랑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어? 등교 대신 사랑의 도피라든지….”
“그, 그건 무슨….”
“아하핫, 농담이야. 농담☆ 카스미도 아침엔 학교 가야지~”

그따위 농담 집어치워.

아리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리사를 따라 걸었다. 1차 목적지는 일단 공원이었다. 만약 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시체를-아니, 자그마한 핏자국이라도-발견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공원을 향해 다가갈수록 발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아리사는 침을 꼴깍 삼키며 걸었다. 공원이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공원에 도착했다.

“그래, 이제 됐어?”

리사가 곁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내내 내린 비로 여기저기가 흙탕물 투성이가 된 공원. 그곳에는 이치가야 아리사의 시신…비슷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안도감도 들었고, 조금은 당혹감도 들었다.

그렇다면 원래 내 몸은 어디에 있지?

“유키나?”
“…아냐, 아무것도. 충분히 확인했어. 학교나 가자.”
“예이, 예이.”

지금의 ‘이치가야 아리사’가 어디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기는 했지만. 공원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당장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는 공원을 뒤로 하면서 아리사는 그렇게 자기 최면하듯 말했다. 분명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고.

지금의 고민은 그저 지나친 망상 때문일 뿐이라고.



***



아리사는 미나토 유키나가 아니다. 하지만-지금은 유키나인 채다. 카스미도 오타에도 사아야도 리미링도 없는 하네오카 여학원 3학년 A반 교실. 오늘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리사는 유키나의 흉내를 내야만 했다.

소위 말하는 ‘커뮤력’이 높지 못한 아리사인 만큼, 유키나가 사교적인 성격이었다면 곤란해 질 뻔했다. 다행히 교실 자기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으로도 반 학생들 중 누구도 아리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리사에게는 고양이 때문에 이미지가 조금 깨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유키나를 잘 모르는 평범한 같은 반 학생들에게 유키나는 쉽게 다가가기 힘든, 고고한 이미지의 가희(歌姬)였으니까. 사람 대하는 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리사에게는 유키나가 된 것이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원래 내 몸. 학교에는 들어갔을까. 역시 카스미에게 연락하는 쪽이 제일 낫겠지. 1교시 수업이 시작하기 얼마 전. 살짝 교실을 빠져나온 아리사는 아무도 없는 계단에 앉아 카스미에게 보낼 메시지를 썼다.

『카스미, 아리사는 학교에 잘 왔어?』

아니. 진짜 미나토 유키나는 아리사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을 텐데. 아리사는 메시지를 쭉 지웠다.

『카스미, 다른 포피파 멤버들도 다 학교에 잘 왔어?』

이 정도면 될까. 형식적으로 인사차 건네는 말처럼 보이면서. 다 잘 왔다는 답변이 온다면 원래 내 몸도 멀쩡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아리사는 조심스럽게 전송 버튼에 손가락을 댔다.

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왔다.

「아리사가 학교에 안 왔어요」

이런. 그렇다면 도대체 내 몸은 어디에 있는 거야? 아리사는 초조함을 느끼며 타이핑했다.

『다른 포피파 멤버들도 모른대?』
「연락이 안 닿나 봐요」
『알았어. 혹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까 스마트폰은 계속 확인하고 있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아리사하고 연락 닿으면 선배에게도 알려드릴게요!」
『그래. 곧 수업 시작하니까 이따 다시 연락하자』
「네! 유키나 선배 사랑해요!!!」

사랑한다, 라.

아리사는 천천히 스마트폰을 들어, 검지로 유키나 선배라는 글자를 가려 보았다.


《사랑해요》


오직 그 글자만 보였다. 예전에도 카스미가 포피파 멤버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사랑과 그 사랑은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까지 아리사가 카스미에게서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그 글자들.

“사랑해. 카스미.”

눈가가 매웠다. 거짓된 몸이었지만. 아리사는 지금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스미의 진심을 담은 사랑 고백을 들었다. 목구멍 안쪽에 무언가가 턱 막힌 것 같았다. 가슴이 떨리고 몸이 떨려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카스미의 그 메시지가 공명하듯 마음에서 울렸다. 아리사는 스마트폰을 끌어안은 채, 난간에 쪼그려 앉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것이 사랑한다는 카스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생긴 기쁨 탓인 건지, 아니면 유키나가 되지 않고서는 카스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인 건지. 아리사는 알 수 없었다.


***


상황이 바뀐 건 점심시간 때의 일이었다.

「아리사를 찾았어요.」

짧은 단문의 메시지. 카스미는 그렇게만 말했다.


***


“유키나, 아무리 아리사가 여자친구의 친구라고는 해도, 수업 끝나고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아? 적어도 선생님 허락을 받는다던지 해도 되잖아.”
“…포피파의 모두도 이미 출발했다는데. 나만 시간 끌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하지만 유키나는 포피파가 아니잖아.”

포피파가 맞기는 했다.

물론 그걸 말할 수는 없겠지. 아리사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리사의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씹어 삼켰다.

오후 수업을 무단으로 빠지고 나온 것이 내심 걱정되는 지, 리사는 줄곧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실 다른 Roselia 멤버들에게 따라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도 저쪽에서 먼저 아리사를 졸졸 따라 나온 거였지만.

유키나가 수업을 무단으로 빠질 생각이라면, 자신들도 함께 빠지겠다, 뭐 그런 생각이었겠지. 아리사는 자기 뒤에 모인 Roselia 멤버들을 보았다. 하나사키가와에서 급히 나온 사요와 린코, 하네오카에서 아리사를 따라 나온 리사와 아코.

부담스럽다.

‘미나토 유키나’에게 이 네 명이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사에게 Roselia는 굉장히 음악을 잘 하는, 빡센 군기의 밴드 정도의 인상 정도밖엔 없었다. 아리사 바로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엄격한 표정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사요의 눈빛이 위축된 아리사에게는 더욱 압박처럼 느껴졌다.

아리사는 긴 마당을 따라 걸으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 유키나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Roselia 멤버 4인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깎이는 것 같았다.


“아, 유키나 선배….”


큼지막한 병원 건물의 입구. 풀죽은 얼굴의 타에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타에의 눈 밑이 조금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울었구나. 그러고 보면 오타에가 저 정도로 심하게 운 모습을 본 건 실패한 1주년 라이브 때 이후 처음이었다. 카스미를 빼앗긴 세 달 전 사건 이후 계속해서 위축되어 있었던 탓일까. 다른 누군가가 ‘아리사를 위해’ 울어주었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세상 누가 아리사 같은 겁쟁이를 위해 울어주겠는가.

“괜찮아?”
“…괜찮아요.”

타에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다시 섰다. 아리사는 타에가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릴 때 까지 충분히 기다려준 후 물었다.

“아리사…아니, 이치가야 씨는?”
“안내해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타에는 재빨리 돌아서서 성큼 걸었다. 병원 복도를 따라 걸을 때마다, 타에의 어깨가 경련하듯 떨렸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타에에게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흐으윽, 흐으으윽.”

아마 타에의 안내가 없었다고 해도, ‘이치가야 아리사’의 병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병실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눈가를 가리고 통곡하는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먼 곳에서도 들렸다.

입 안이 썼다.

두 분. 여기 제가 있어요. 이치가야 아리사가 여기에 왔어요. 정신 차리고 저를 봐요. 그렇게 소리치며 달려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아리사만이 알고 있을 만한 정보를 말한다면 믿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사는 그럴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카스미에게서 받은 사랑한다는 문자 때문이었을까. 유키나가 아닌 아리사로서는 카스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으니까?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울고 있는 걸 지켜보고만 있으려고 하는 거야?

정말 저열하구나. 나라는 인간은.

“미나토 씨, 괜찮으신가요?”


사요가 아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어? 아, 괜찮아. …가자.”
“긴장되더라도, 아코가 계속 함께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코가 풀죽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우다가와 아코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기는 했지만, 용기를 주려 하는 건 고마웠다.

죄송해요. 제가 겁쟁이라서. 아리사는 울고 있는 자신의 조부모의 옆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지나쳐 1인 병실 문을 열었다.

1인실의 침대. 머리에 붕대를 감고 호흡기를 단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이치가야 아리사’. 그 주변에 모인 포피파 멤버들. 온갖 기계 장치들을 덕지덕지 붙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건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리사는 침대에 누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몸에 주렁주렁 선들을 매단 아리사의 몸은 마치 미라처럼 양 팔을 들어 X자 모양으로 교차해 자신의 가슴께에 내려두고 있었다.

“새벽에 공원에 쓰러져 있는 걸 누가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왔어요. 휴대전화도 지갑도 없어서 신원 확인이 빨리 안 되는 바람에 우리에게 연락이 늦게 왔던 거였어요.”
“어제 그렇게 비가 왔는데, 이치가야 씨가 혼자 공원에 있었다고요?” 사요가 물었다.
“범죄에 휘말린 건 아닌지 조사 중이라는데…아직 경찰도 아무것도 모르나 봐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다른 포피파 멤버들 대신, 사아야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 휴대전화는 할머니에게 있었고, 지갑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기억은 역시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던 거야.

“깨어날 가능성은…있대?”

아리사가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리사는 고개를 들어 카스미를 보았다. 침대의 끝자락을 양 손으로 움켜쥔 카스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 눈물을 통해 아리사의 몸을 깨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흑, 끄으윽…. 흐윽….”

울지 마.
 

난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난 네가,

네가 정말 좋으니까.
 

그러니까.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카스미.”
“유키나 선배, 흐윽. 아리사가…아리사가….”
“어이, 카스미.”
“아리사가 죽으면 저 어떻게 하죠…. 저는….”
“야, 토야마 카스미!”

아리사가 고함쳤다.

“미나토 씨. 지금 토야마 씨는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
“카스미, 내 눈을 봐!”

아리사는 유키나의 흉내를 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카스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몇 번을 울었을까. 카스미의 양 볼은 은하수처럼 흘러내린 눈물이 전등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스미. 넌 포피파의 리더잖아. 다른 사람들이 아닌 네가 지금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흐으윽, 끄윽, 하지만, 하지만 아리사가아….”
“지금 같은 상황일수록, 네가 포피파를 강하게 지탱할 수 있게….”
“잠깐만요, 유키나 선배. 지금 카스미는 좀 진정이 필요해요.”
“카스미 짱도 저희들만큼이나 힘들고 괴로울 테니까….”


 
사아야와 리미가 아리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모두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말리는 거야. 지금 카스미가 울고 있는 게 안 보여? 그것도 나 때문에 울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아리사는 침대 난간을 강하게 쥐었다. 카스미를 울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카스미가 우는 것이 보고 싶지 않았다.

카스미에 대한 감정 하나 전하지 못하고, 미나토 유키나라는 가짜 신원으로 주고받은 몇 통의 문자메시지에 행복해 하기만 했을 뿐인. 이치가야 아리사라는 그 한심한 존재 때문에 카스미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리사는 침대 난간을 쥔 손을 놓았다.

지금 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위로’를 하기 위해서.
 

“괜찮을 거야. 어차피. …이치가야…아리사는…포피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잖아.”
“…네?” 리미가 중얼거렸다.
“잠깐만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사아야가 분노한 목소리로 말하며 성큼 아리사를 향해 다가왔다. 리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재빨리 사아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해, 진정. 옛날부터 유키나는 자기 생각을 전하는 데 서투르니까, 분명 아리사를 비난하려고 한 건 절대 아니었을….”
“비난하는 거야.”
“유, 유키나!”
 
당황한 리사가 돌아섰다. 미안해요, 리사 씨. 하지만 저는 카스미가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카스미에게는 앞으로 긴 시간이 남았고. 포피파도 앞으로 긴 시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하잖아요.
 
아리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치가야 씨 정도의 키보디스트는 카스미와 지금 포피파의 인지도 정도면 어렵지 않게 새로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만 하세요.” 사아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차피 이치가야 씨 따위 포피파에 있어서 꼭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새 멤버가 들어오면 모두들 며칠만에 이치가야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릴….”


“그만 하라고!”


쩌렁쩌렁한 고함.
 
아리사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 사아야가 울음을 터트리며 리사를 밀치고 달려왔다. 사아야는 힘을 주어 양 손으로 아리사의 목을 졸랐다. 생각 이상의 손 힘에 숨이 턱 막혔다.

“미나토 씨!” “유키나!”
“사아야 짱!” “사아야!”
 

사요와 리사가 사아야의 팔을, 그리고 타에와 리미가 사아야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떨어져나가지 않으려 버티던 사아야가 네 사람의 힘에 밀려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사아야는 계속해서 일어나 아리사에게 달려들려 하며 소리쳤다.
 
“당신이 아리사에 대해 뭘 알아. 도대체 포피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사아야 짱, 제발 그만 해!”
“바깥, 바깥으로 가자. 찬바람도 좀 쐬고 비둘기도 쓰다듬자. 병원 앞에 비둘기가 되게 귀여워.”

소리치는 사아야의 양 팔을 붙잡고, 타에와 리미가 허둥지둥 사아야를 병실 바깥까지 끌어냈다.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는 사아야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아리사는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사아야도 저렇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리사는, 아리사는…. 절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알고 있냔 말이야!”


병실 문이 닫혔다.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라. 아리사는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저기 말이야, 사아야. 나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Roselia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조금 아프네.”
“유키나 씨. 정말 이상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아코가 주먹을 강하게 쥔 채 앞으로 나섰다.

“아코는 포피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아코 도저히 여기 못 있겠어요. 죄송해요!”

아코가 소리치더니, 뒤돌아 열린 병실 문을 따라 뛰쳐나갔다.
 
“자, 잠깐. 아코 짱!”
 
놀란 린코가 허둥지둥 뒤를 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리사가 돌아섰다.
 
“내 생각에도 방금 전 유키나는 너무 했어. …아코를 찾아올게.”
“미나토 씨. …아니에요. 저도 같이 다녀오죠. 토야마 씨에게 사과해 두세요.”
 
리사는 사요와 함께 병실을 따라 나갔다.

오직 생명공급장치의 기계음만이 울리는 적막한 방. 방금 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카스미와 ‘두’ 아리사만이 병실에 남았다.

“카스미. 나는.”
“…그만 해 주세요.”

카스미는 양 손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지금 유키나 선배의 말을 더 들으면, 정말 저도 화를 내 버릴 것 같아요.”
“…카스미.”
“나가주세요.”
“카스미, 나는….”
“나가주세요! 제발…. 지금은 아리사와 저 둘이 있게 해 주세요…….”

난간을 움켜쥔 카스미가 오열하듯 외쳤다.
 
울지 마.
나는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 작은 꿈 하나조차 이룰 수 없는 거야.

왜 이러는 걸까. 정말.

아리사는 천천히 돌아서서 병실 문을 열었다.


“미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20
우울 증세로 인한 자기비하가 극단에 달한 아리사의 내면을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만큼 자연스럽게 되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음..
개인 사정으로 아마 3화는 며칠 정도 후에 올라올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안에 올리도록 노력은 해 보도록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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