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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토모히마치사카오] 마음 두드리기 10.txt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6.28 14:24:32
조회 782 추천 42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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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 편 들 모 음.


 10. 마음 속여보기


 조금 새삼스럽지만, 야마토 마야는 연극부의 부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배우로 극에 참여하는 것보단, 무대 뒤서 극의 배우들을 보조해주는 걸 더 좋아했다. 그녀의 큰 장기인 드럼에 빗대면 이런 느낌이다. 드럼을 직접 연주하는 것과 드럼자체에 하악대는 것의 차이 정도. 


 연극부의 일은 그토록 좋아하는 악기들을 만질 때완 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야마토 마야에게 연극은 일종의 큰 인형놀이였다. 제 손으로 직접 연출하고, 소품이나 메이크업, 그리고 갖가지 의상들을 제 손으로 만지고 배우들에게 입히는 걸 그녀는 좋아했다. 


 이번엔 비록 조감독의 자리에서 머물었지만, 다음 문화제 때는 직접 연출을 할 생각도 충만했다. 그녀도 은근 일 욕심이 많아서, 만족이란 것을 잘 몰랐다.  


 “와... 이건.” 


 그런 마야도 차마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있었다. 특히 오늘은 세타 카오루와 시라사기 치사토를 갈아입힌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사’ 당할 상황이건만. 


 “우다가와 씨, 객원도 좋으니 혹시 연기 일 년만 더 해주실 생각 없슴까?”


 제 앞에 있는 후배는 마치 셰익스피어가 조각가라도 된 냥 완벽한 모습이었다. 막연히 머릿속에 그리기만 했던, 그렇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던 파리스 백작의 모습이 제 눈앞에 서있었다. 제 머리카락과 똑같은,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옛 복식이 토모에에겐 참 잘 어울렸다.  


 “네?”


 마야의 갑작스럽고도 진지한 어투에, 토모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마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경이 살짝 삐뚤어지자, 마야는 테를 살짝 올려 다시 제 눈을 가렸다. 


 “아니, 어울리실 줄은 알았는데... 제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리셔서, 좀 감탄했슴다.”


 그러면서도 흘끔, 흘끔 몸태를 바라보는 게 마야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아 토모에는 멋쩍었다. 본인은 그저 소품부 분들의 코디를 따라 입었을 뿐인데. 


 “과찬이에요.”


 “아뇨, 아뇨. 솔직히, 조금 흥분했슴다.... 후헤헤.”


 전체적인 합을 맞춰보는 날 이전에, 만들어진 의상을 한번 시착해보는 날이기도 했다. 옷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다시 손을 봐야 되니까. 유럽풍의 복식이 그렇듯 어느 정도 펑퍼짐한 부분이 있긴 하였으나, 은근히 보이는 라인들이 마야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가령 힐끗 보이는 하얀 목덜미라거나, 그런 부분들 말이다. 


 마야의 음흉한 시선에 토모에가 흠칫 떨었다. 좋은 사람이란 건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점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특히 저 웃음소리가 좀 많이 깼다. 


 “그보다 내년까진 진짜 안하시는 검까. 주연이 부담되신다면, 조연이나 특별출연도 상관없는데...” 


 “저도 이번엔 치사토 선배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거라...”


 “아쉽슴다. 그래도 이번 연극은 주연이시니까, 그걸로 만족하겠슴다. 우다가와 씨도 충분히 잘 해낼 거라 믿슴다.”


 후헤헤, 하는 웃음은 여전히 거두지 않은 채다. 마야의 말을 들은 토모에는 시선을 흘깃 무대로 옮겼다. 무대에선 세타 선배가 청색 의상을 입고 막 연기에 나서는 중이었다. 


 “아침이 길어? 사촌, 무엇 때문에 시간이 길어진 거야?”


 “가지면 짧아지게 되는 걸 못 가져서.”


 “사랑을?”


 “못 얻어서.”


 무대 위의 세타 선배는 사랑을 얻지 못했다며 낙심했다. 정작 저 시점에서 로미오는 아직 줄리엣과 만나지도 못했고, 현실의 세타 선배는 이미 제 사랑을 찾은 상태였지만.


 “마야 선배, 절 믿으세요?”


 문득 든 어두운 생각에, 토모에는 그것을 털어내려 제 옆에 있던 마야에게 질문했다. 막상 무대에 서려니 긴장도 되거니와, 세타 카오루란 존재에게 밀릴까봐 걱정도 되었다. 토모에의 불안한 목소리에, 무대를 향해있던 마야의 시선도 다시 토모에에게로 향했다.  


 “우문이네, 토모에.”


 마야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나섰다. 두 사람의 시선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파리스 백작과 컬러를 맞춘 영향인지, 붉은 드레스를 두른 치사토의 모습이 토모에하고도 잘 녹아들었다. 


 “치사토 씨! 역시, 다시 봐도 잘 어울리는 복장이에요!” 


 “덕분에, 마야쨩.” 


 마야의 환대에 치사토가 슬며시 눈인사를 했다. 치사토의 등장 순서는 바로 다음이었으니, 나갈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치사토는 토모에의 옆에 나란히 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선 로미오가 저의 사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타 카오루란 사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극본 속 로미오가 숨 쉬고 말하는 듯 했다. 


 “연극 무대는 일반적인 연기와는 다르게, 네가 직접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 많아.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할지를, 네가 다 생각해야 해. 그렇게 하라고, 옥상에서 배웠잖아?” 


 요 몇 일간 계속해서 들어왔던 말이었고, 그 시간동안 미칠 듯이 해왔던 연습이기도 했다. 토모에는 치사토를 보았다. 


 “그러니까 토모에, 넌 너 자신을 좀 더 믿어.”


 그 말과 동시에 1장이 끝났다는 신호를 부장이 주었다. 오늘은 2장의 연기는 스킵하고, 줄리엣이 등장하는 바로 3장으로 넘어갈 계획이라, 줄리엣 역을 맡은 치사토의 차례가 바로 돌아왔다. 치사토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무대에 나서려 했다. 


 “잘할 거야, 누구한테 배웠는데.”


 그러나 그녀는 무대에 나서기 전에, 토모에를 한번 뒤돌아봐주었다.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힘내라는 뜻이 고스란히 담긴 그런 미소. 부디 토모에의 긴장이 풀리길,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빌었다.


 “줄리엣인가! 아아, 치사토 너의 그 모습은 역시나 잘 어울리는군. 내 안목도 아직 죽진 않았어.”


 살짝 치마를 잡아 든 치사토가 무대로 나가자마자 카오루가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주접을 다 떨어댔다. 카오루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에는 치사토도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카오루. 집중 하고 있으니까.”


 “알겠다, 치사토. 나는 여기 부장 옆에서 꼼짝 앉아 너의 연기를 감상하고 있으마.”


 그렇게 말한 카오루가 무대 밑으로 껑충 뛰어, 부장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치사토와 연기를 하는 게 여간 신나는 일인지, 무대를 바라보는 두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런 카오루를 내려다보던 치사토는 문득 든 생각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개같네.”


 하필 얼굴에 음영이 져, 평소 화를 낼 때보다 더욱 오싹한 얼굴이 되었다. 치사토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심상찮은 치사토의 모습에 부장도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럼 3장부터 바로 가겠습니다, 시라사기 씨.”


 “네.”


 시라사기 치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무대가 제 안방이라는 것처럼, 익숙한 모습이었다. 치사토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오루의 눈에도 이채를 띠었다. 유명 연출가의 연극을 따냈다는 이야기를 듣긴 들었는데, 이렇게나 발전했을 줄이야. 역시 치사토다. 


 마야와 토모에는 치사토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연기의 합을 맞춰 보는 날이지만, 토모에는 오늘 참관만 하기로 결정했다. 연극이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아직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했고, 모든 장면을 다 연기하기엔 제 연기력에 무리가 있다 생각하기도 했다.


 “보고 정분이 난다면 정분이 나도록 잘 보겠어요. 그렇지만 제 눈은 엄마가 승낙하신 곳까지만 보고, 그 이상은 보지 않겠어요.” 


 치사토의 대사가 끝나자, 하인이 시간을 맞춰 등장했다. 그러자 치사토도 자연스레 포커스를 하인에게 가도록 몸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카오루도, 마야도 치사토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극의 흐름을 존중한 원숙한 몸놀림이었다. 


 “우리가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옷이 주인을 고르는 법이라고들 하죠.”


 마야가 슬며시 옆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평소와는 선명히 다른 어투에 토모에도 눈이 갔지만, 그건 거짓이라는 듯 마야의 어투는 다시 돌아왔다.  


 “제가 막 입부했을 때 들어온 선배가 그런 말을 하지 않겠슴까. 옷이 주인 고르듯, 역은 배우를 고른다고.”  


 흔한 말이라면 흔한 말이지만, 지금 제 옆에 있는 상대는 그 흔한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 마야는 그러한 말을 꺼냈다. 


 “지금 우다가와 씨는, 제가 지금껏 본 파리스 백작 중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지 말입니다.”


 그 흔한 말로, 이 크지만 작은 후배가 자신감을 찾길 바라며.


 “마야 선배.”


 “네?”


 “로미오와 줄리엣, 몇 번 보셨어요?”


 장난스런 목소리였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세 번 봤슴다. 심지어 한번은 어레인지 된 걸 본 터라, 파리스 백작도 안 나왔지만!”


 마야가 조금 난처해하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토모에의 표정이 풀려가는 걸 본 마야도 끝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그럼 의미 없지 않아요?”


 “아님다! 가장 잘 어울린다는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의미가.”


 장난기가 가득한 토모에의 얼굴을 보고 마야도 표정을 풀었다. 후배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려서, 마야에게도 다행이었다. 마야는 이번 연극을 꼭 성공 시키고 싶었다. 처음으로 직접 연출에 참가한 것도 있었지만, 선배들에게도 후배들에게도 중요한 연극이니까. 


 

 “약속하겠소, 저 하늘에 떠 있는 휘영청한 달을 걸고.”


 “안돼요, 하늘에 떠 있는 것은 아니 되어요. 태양은 저물고, 별은 사라지고, 달은 둥글어졌다가도 가늘어지는 것. 그렇다면 당신의 사랑도 변하기 쉬운 것이 되고 말 거야.”


 “그렇다면 내 무엇을 걸고, 당신께 맹세하면 되겠소?”


 “행여 맹세는 하지 마세요. 그래도 기어코 맹세를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세요. 당신은 저에게 우상이며 신같은 존재, 저는 당신을 믿겠어요.”


 치사토와 카오루가 주거니 받거니 넘긴 대사가 앙상블을 이뤄냈다. 카오루는 무대, 치사토는 카메라로. 서로 수년만의 호흡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호흡은 찰떡같았고 손발이 딱딱 맞았다. 거의 뭐 델마와 루이스 저리 가라였다. 


 “두 분 모두 대단해, 한 폭의 그림 같아.”


 “역시 다져진 내공이 있으니까, 카오루 님도 치사토 님도 대단한 걸.”


 연극부의 부원들이 두 사람의 연기를 보고 쑥덕거렸다. 부장도 마음에 든 듯, 다리를 한껏 꼬다가 박수를 몇 번 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단 내일 더 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연극부원들 모두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직 최종 상연까진 여유가 꽤 있고, 오늘은 부원도 적게 모인 터라 빠르게 해산할 예정이었다. 


 사실 그 모든 건 핑계에 불과했고, 물론 부장이 가장 먼저 도망갔다. 윗대가리 주제에 도망가는 거 하나는 빠르다. 그래도 진학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터라, 참가해주는 것도 고맙긴 했다. 


 “이야, 두 분 다 멋졌슴다! 이미 다 완성됐다는 생각까지 들었슴다!”


 마야가 부장에게 오디션 참관을 물어보려다가, 이내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부장의 모습에 치사토와 카오루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과찬이다, 마야.”


 “그러게, 마야쨩은 띄워주는 걸 너무 잘해.”


 카오루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치사토가 덧붙였다. 그러자 역시 그렇지, 그렇지? 하며 카오루가 빛나는 눈빛으로 치사토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카오루의 키가 워낙 큰 탓에, 치사토는 그녀가 많이 거추장스러웠다. 


 “메인이벤트가 아직 남았군. 즐겁다, 이 즐거움마저 덧없어지겠지만, 나는 지금 즐겁구나. 너도 그렇지, 치사토?”


 “더워, 좀 떨어져줄래? 카오루.”


 치사토의 말에 카오루가 우스꽝스럽게 두 손을 들고 무대 정 가운데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살짝 끌리는 소리를 냈다. 치사토도 한숨을 푹 쉬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연극부의 부원들도 해산 준비를 하다가, 토모에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모두 하는 일을 멈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치사토마저 긴장이 되는 느낌이었다. 토모에의 긴장을 대신 풀어주듯, 치사토는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잘 해야 될 텐데, 잘 할 수 있으려나. 토모에. 그래도 어느 정도 틀은 잡아뒀으니,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어느 정도 평타까진...


 “우, 우다가와 토모에입니다.”


 아니, 그렇게 긴장하면 될 것도 안 된다니까. 


 치사토가 난감하다는 듯, 엄지와 검지로 제 턱을 한번 쓸었다. 그래도 일단 오늘 할 장면은 저가 케어해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시선을 끌어 올 수 있다면, 이쪽으로 최대한 끌어와야. 


 “그래, 토모에 쨩. 넌 어떠한 장면을, 할 생각이지?”


 토모에의 안색을 바라본 카오루의 표정이 매섭다. 연극에 대한 열정이 있는 만큼, 정에 휘둘리지 않고 칼같이 냉정한 면도 충분히 있었다. 무대 위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세타 카오루란 배우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이미 프로의 영역에 한 발 걸치고 있는 배우다웠다. 


 “치사토 선... 아니, 줄리엣과 파리스가 가장 무도회서 대화를 나누는 부분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토모에가 치사토를 흘끔 바라보았다. 드레스자락을 정리하던 치사토와 토모에의 시선이 딱 맞았다. 치사토는 일부로 토모에의 옆에 한 발 더 다가가 섰다. 


 “그동안 준비했던 걸,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해.”


 토모에의 귓가에만 들리게끔, 치사토는 작고,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에 토모에도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나고, 심장은 제어장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폭발하려 하고, 눈썹이 부르르 떨리던 게 조금씩 멎어 들어갔다. 


 “노력했잖아?”


 뒤를 이은 노력이란 단어에 토모에의 마음도 동했다. 정확한 뜻은 잘 알 수 없지만, 언제나 내 멋대로 해왔던 것. 그리고 어떠한 것이든 항상 모든 것에 전력을 해왔던 자신.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토모에는 긴장 따윈 넘겨버리겠다는 듯 침을 삼키고 말했다. 


 “하겠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 사이 기구한 사랑을 한 남자가 있었다.  


 캐퓰렛 家 당주의 청을 받아, 남자는 가장 무도회에 참여한다. 가장무도회 같은 허울뿐인 모임 따위 남자는 딱 질색이었으나, 캐퓰렛은 베로나에서도 세력 있는 귀족집안이었기에 남자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배우라지만, 이렇게 가면을 쓰면 그것조차 덧없다. 베로나의 여성들은 모두 꽃이라지만, 이다지도 가려버린다면 꽃의 미 또한 죽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도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그것에 위화감조차 느끼지 않고. 


 환멸감을 느낀 남자는 벽에 기대 눈먼 사람들의 혀를 대신 차주었지만, 이윽고 자신도 그러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이란 것을 마음속에서 깊이 체감하게 된다. 


 에로스 신이 잠시 무도회장을 다녀갔나 보다. 캐퓰렛의 영애 줄리엣을 본 남자는 황금화살을 맞은 것처럼,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다.


 절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보답 받지 못할 마음. 그리고 머나먼 신화 속 ‘파리스’처럼 저를 파멸로 이끌 사랑. 아이러니하게도, 그 남자의 이름 또한 파리스였다. 


 “추시겠습니까?”


 파리스 백작은 줄리엣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 손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그대로 거둔다.


 “몸을 쓰는 것엔 약한 터라, 춤은 잘 추지 못해요.”


 “...결례를 범했군요.”


 잠시 정적. 이윽고 흘끔, 흘끔 줄리엣을 바라보던 파리스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캐퓰렛의 당주께서 영애와 나를 하느님의 맹세 앞에 세울 거라 하였소.”


 또 다시 정적. 줄리엣이 서글픈 눈으로 파리스를 본다. 여전히 감정이 동하지 않은, 그러한 눈으로.


 “보고 정이 든다면, 그리 하겠다고 아버님께 말했습니다.”


 극의 몰입감을 주기 위해 짧은 정적. 은은한 스포트라이트가 파리스에게 쏟아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말이 툭, 끊겼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갔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다. 파리스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물통에 새하얀 물감을 푼 것처럼, 퓨즈가 나가버린 기계처럼 파리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우다가와 토모에로 돌아왔다.

 


 “아........... 다시 갈게요, 죄송합니다. 진짜,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 했던 토모에와 구경을 하고 있던 연극부의 부원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서로 섞여 들어갔다. 뭐야, 얼굴만 살았네. 아니야, 그래도 까먹기 전 까지는.... 본연에선 망할 것 같은데. 시라사기 씨 추천이었지? 시라사기 씨는 좋지만 미숙한 배우는 이쪽에서도 좀. 이번엔 규모 엄청 클 거라 들었는데. 토모에는 예쁘니까 상관없지 않아? 뭐래 가장 중요한 걸 못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주 좋은 흐름이었어. 토모에 쨩.”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카오루가 박수를 몇 번 쳤다. 했던 말과는 다르게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재구성 된 시나리오를 보니 파리스의 비중이 상당한데, 이렇게 준비한 장면마저 막혀버리면 연극부원들 사이에서도 말이 계속 나올 것이다.


 “과찬이야, 카오루.”


 치사토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하필이면 대사를 잇지 못하다니, 최악 중에 최악이다. 이게 만약 실제 연극 오디션이었다면 바로 떨어졌을 거다.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겠지? 토모에 쨩.”


 카오루는 등받이에 허리를 깊이 기댔다. 카오루의 말에 주변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들도 그쳤다. 치사토와 토모에에겐, 카오루 본인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배려였다. 오디션의 원칙대로라면, 대사를 잇지 못한 그 순간부터 가차 없이 떨어트리는 게 맞는 일이었다.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카오루의 자비로 목숨 하나가 늘어났다. 그것에 수치심을 느낀 토모에의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헛기침을 하며, 극은 다시 이어졌다. 끊긴 부분까지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쉽게, 쉽게 흘러갔다. 그러나 역시 끊긴 부분이, 토모에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 


 시라사기 치사토는 말했다. 단순히 대본만 읽는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해달라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토모에 본인이 생각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사. 그래서 그 대사가 그렇게 그녀는 어려웠다. 파리스의 대사가 다시 한 번 끊겼다. 주먹 쥔 토모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치사토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토모에의 손과 맞춰 조용히 흔들렸다.


 “저를 사랑하세요?”


 갑자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날카로운 애드리브였다. 저가 할 차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리엣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켜보던 카오루의 눈도 조금 더 매서워졌다.


 토모에는 줄리엣으로서 저를 바라보는 치사토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녀가 눈동자 안에서 ‘빨리 대사쳐!’ 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토모에도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옷을 곱게 갖춰 입었으면서도, 치사토 선배는 여전히 호랑이 선배다, 호랑이 선배.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토모에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을 때, 체육관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극에 집중하던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해 쏠렸다. 역광을 받아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눈에 부셨다. 


 “아, 일들 보세요.”


 그러나 토모에에게는 익숙한 인영 네 개였다. 


 “오오, 내 사랑 히마리 아닌가! 


 들뜬 카오루의 목소리가 토모에의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애프터 글로우의 모두! 혹시 토모에 쨩을 위해 응원이라도 온 건가?!”


 카오루가 난데없이 방문한 애프터 글로우를 환대해주었다. 저번에 헤어지기 전, 토모에의 응원을 꼭 와주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다. 


 “네, 세타 선배! 그... 토모에를 응원하러 왔어요!”


 카오루의 눈짓에 츠구미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츠구미도 그때 꼭 와주겠다고 답을 주었다. 무엇보다, 토모에가 많이 걱정되기도 했고.


 “어쩌면 이리 빛나는 우정이 있을 수가. 정말 덧없구나...”


 “모카 쨩은 딱히 오기 싫었는데~”


 “모카, 조용히 해.”


 네 사람은 제각각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투덜투덜거리던 모카의 말을 란이 도끼눈을 뜬 채 끊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오루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아, 아오바 씨에겐 요즘 나도 신세지고 있지.”


 “천재소녀인 모카쨩에겐 별 거 아니라구요~? 아, 사례는~ 야마부키 베이커리 빵 오천엔 어치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그 정도나? 너의 칼로리 또한 덧없구나...”


 “괜찮아요~ 괜찮아요~ 모카가 먹은 것들은 모두 히이쨩한테 가니까~”


 “모카!”


 난데없는 모카의 발언에 히마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얼굴도 한껏 붉어진 게, 카오루 앞에서의 짓궂은 농담이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카오루가 생글생글 웃었다. 굳었던 연극부의 분위기도 다시 온화하게 풀어졌다. 카오루가 그것에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이 풀어진 분위기를 발판 삼아, 토모에 쨩도 긴장을 좀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세타 선배.”


 무대에 서있던 토모에가 카오루를 불렀다. 좀 더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카오루는 토모에를 그저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토모에가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까맣게 죽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가 왔는데도, 전혀 반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장면, 혹시 바꿔도 괜찮을까요?”


 치사토가 놀란 눈빛으로 토모에를 바라보았지만, 토모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표정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뭔가에 짓눌리면서 힘이 부친 듯, 힘겨운 모습이었다. 치사토가 토모에의 손을 잡아주려다가, 극 속의 줄리엣처럼 손을 거뒀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많았고, 아직은 토모에의 손을 잡아줄 때가 아니었다. 오디션이 끝나야지만, 무대위에서 싸운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치사토는 토모에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가, 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토모에.


 “다, 당연하지. 어떠한 장면이든, 연극부가 도와줄 수 있는 장면이라면 성심을 다해 도와주겠다.” 


 보통 연기를 할 때, 배우는 다른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표정에 굉장히 민감했다. 그것은 무대 배우인 카오루 또한 마찬가지여서, 카오루는 토모에가 지금 어떠한 표정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마침, 잘 됐네요.”


 분명 잘 됐다면서, 토모에는 전혀 잘 된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장면... 세타 선배 아니, 로미오가 좀 도와줘야 되거든요.”


 “어떤 장면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오루는 본능적으로 토모에가 어떠한 장면을 골랐는지 알았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로미오와 파리스가 만나는 씬은 총 두 번. 그러나 한 번은 이벤트 성이 짙은 장면이라 제외한다면, 남은 장면은 그 장면밖에 없었다.


 “5막 3장, 로미오와 파리스의 결투 장면을 하고 싶어요.”


 저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굳은 목소리였다. 토모에를 바라보던 치사토의 눈빛도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이야, 설마 설마했는데 오늘 이거까지 꺼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슴다.”


 마야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품엔 소품실에서 꺼낸 연극용 레이피어 소품이 잔뜩 들려 있었다. 마야는 품에 안았던 레이피어를 바닥에 잔뜩 쏟아부었다. 


 “생각보다 끝이 날카롭네요.”


 그 중 하나를 손에 든 토모에가 말했다. 분명 연극용 소품인데도 끝은 진검처럼 날카로웠다. 자칫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푹, 찌르면 되지 말입니다. 여기 이 가슴 부근을 푸욱 하고... 아, 옷에 장치는 다 준비 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하셔도 됨다.”


 “마야는 이런 곳에서 철저하니까, 항상 믿고 있다.”


 카오루도 그렇게 말하며 레이피어 하나를 들었다. 이전 이벤트성 연극으로 ‘삼총사’를 공연했을 때 썼던 레이피어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카오루는 그대로 허리춤에 레이피어를 찼다. 전신거울을 보니 본인의 긴 기럭지와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먼저 나갈 테니 천천히 나오렴, 토모에 쨩.”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카오루는 곧바로 무대로 나섰다. 레이피어를 찬 모습이 제법 멋있었는지, 함성 소리가 체육관 곳곳에서 들려왔다. 토모에도 허리춤에 검을 찼다. 카오루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듯 했다. 


 “마야 선배.” 


 “네, 우다가와 씨.”


 토모에의 목소리와 마야의 목소리가 서로를 겹쳐 들어갔다. 무대를 바라보던 토모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어졌다. 


 “옷이 사람을 고르듯, 역은 배우를 고른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슴다.”


 마야는 장갑을 끼고 레이피어들을 다시 제 품에 안았다. 연극용 소품이라해도 일단은 날붙이인지라, 마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마야의 온 신경이 레이피어들을 향해 가 있었다.


 “저, 파리스가 제 몸에 꼭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야는 토모에의 말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넘겼다. 만약 평소의 마야였다면 지금의 토모에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그것 참 다행임다.”


 마야는 그렇게 말하며 소품실로 사라졌다.

 


 토모에는 저보다 앞선 카오루를 뒤따라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토모에의 모습을 본 연극부의 무리에서도 웅성웅성 목소리가 뒤따랐다. 청색 복식과 적색 복식이 대비되는 터라, 토모에도 카오루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서로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로미오와 대비되는 파리스 백작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바로 하겠습니다. 대사는 다 기억하고 계신가요?”


 “아아, 대본은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터다. 토모에 쨩이야 말로 이번에는 잊지 않고 잘 해줬으면 좋겠군.”


 무대 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평소의 유들유들한 분위기와 달리 카오루도 로미오에 이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토모에는 그게 되려, 편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먼저 대사를 하기 전에, 토모에는 힐끗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냐며, 저를 노려보는 치사토 선배의 눈이 북풍한설처럼 차갑다. 그게 두려워 다른 쪽으로 돌렸더니, 이번엔 히마리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히마리의 둥그런 눈. 그 눈이 향한 곳은 어디일까. 확실한 건, 저는 아니었다. 시선의 출처가 저였다면 이미 눈이 한번 마주쳤으리라. 그래서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따라가 보았더니, 그녀는 역시나 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또 다시 아려왔다. 


 “당신은 추방당한 몬태규 사람이 아니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토모에는 그 감정을 담아 한껏 대사를 꺼내기 시작했다.


 5막 3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줄리엣의 가짜 죽음 이후 로미오는 줄리엣의 잠든 몸을 부여잡고 슬퍼한다. 그리고 줄리엣을 잃은 슬픔에 그녀의 무덤을 찾아온 파리스와 조우한다.  


 “그대도 사람이라면, 이제 그러한 짓을 그만두시오. 당신 덕에 피를 흘린 사람이 하나가 아닌 둘이나 되었소. 게다가 그대는 살인한 죄 뿐만 아니라, 고관대작들의 금은보화를 턴 죄까지 지고 있을 터. 죄를 두 개나 이고 있는데, 시체에 그런 몹쓸 짓을 더 하다니. 제발 당신도 이제 그러한 천인공노할 짓은 멈추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잠자코 따라오시오. 그리스도가 못 박힐 때 양 옆에 있었던 사람들도 도둑이오. 지금 멈춘다면 당신도 충분히 회개할 수 있소.”


 연극부의 무리에서, 누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 호흡에 그 긴 대사를 모두 끝마쳤다. 치사토도 놀란 표정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이번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라, 오디션 장면으론 생각지도 않았는데. 토모에의 연기는 생각 이상으로 치사토를 놀라게 했다. 파리스를 이해하라고 말한 건 저였지만, 이해한 것도 모자라 그냥 파리스가 그 자체가 된 느낌이었다.


 정말 슬플 때는 울음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러나 어딘가 서글픔이 뚝뚝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토모에는 그렇게 파리스가 되었다. 


 “하! 회개라니요! 당치도 않소. 난 죽어야 마땅한 놈이기에 무덤으로 찾아온 것뿐이오. 나는 나 자신을 죽이러 이곳에 온 것뿐이오! 그러니 여보소, 젊은 나리. 제발 나를 성나게 하여 더 이상의 죄악을 잇게 하지 마시오! 나를 그냥 이곳에서 사랑을 하게 내버려두란 말이...!”


 “그 입 닥치시오! 로미오!”


 토모에가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체육관이 울렸다.


 “로미오, 로미오! 그대가, 그대가 모든 걸 다 망쳤다! 캐퓰렛의 영애는 죽고, 이젠 내 마음까지 그대가 다 죽여버렸다고! 그런 주제에 당신이, 당신이 내 앞에서 사랑을 말해?!” 


 파리스도 슬펐겠지, 분명. 마음을 제대로 전해지도 못했으면서, 멋진 척, 쿨한 척, 폼만 다 잡다가 정작 진짜 멋있는 로미오한테 놓쳐버렸으니까. 


 “아아, 하느님이시여 나를 용서하소서. 이제 나도 더 이상 못 참을 것 같으이, 내 당장 그대를 체포하겠다! 이젠 설령 시체라고 해도 상관없소! 살아있든, 죽었든 그대를 무덤이 아닌 형장으로 이 내가 이끌겠단 말이오!”


 몰랐는데, 분명 몰랐었는데,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기어코 끝을 봐야겠소? 백작, 그대도 사내라면 주절주절 떠들지만 말고 검으로 대답하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소!”


 원래라면 막을 잠시 내리고 무대 효과를 줄 타이밍이었지만, 연습이었기에 그런 것도 없어 토모에는 그대로 카오루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헉, 하고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야 선배가 말한 장치가 작동해, 그대로 옷에서 칼날로 피가 흘러들었다. 카오루 선배의 하얀 장갑이 적색 색소로 물들었다. 진짜 피로 보이게끔, 정교한 장치였다.  


 카오루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무대의 시선이 엇나가게끔 대사를 마무리 했다. 


 “그대가 없는 이 세상, 살아서 무엇 하리. 아아, 스틱스 강이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다시 봅시다. 내 마음, 나의 이유, 나의 사랑. 줄리엣 캐퓰렛...”


 대사를 끝마친 카오루는 풀썩 쓰러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세타 카오루는 양보할 수 없는 로미오란 사람 그 자체였다. 토모에도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놓쳤다. 두 사람의 레이피어가 맞닿아 쨍강,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그녀의 귀에도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치사토와 애프터글로우의 모두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카오루 선배!”


 그보다 안절부절 눈치를 보던 히마리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눈꼬리에 눈물을 한 아름 매달고 있었다. 카오루의 죽는 연기에 압도당해, 그녀가 진짜로 죽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히마리, 괜찮아. 괜찮아.”


 “저는, 선배가 진짜 죽는 줄 알아서...”


 카오루가 히마리를 계속 달래주었지만, 그녀는 그녀를 품에 안고 계속 엉엉 울었다. 눈물이 많은 그녀였기에, 제 아무리 연기라 할지라도 연인이 죽는 모습은 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합격이야, 토모에 쨩. 정말 덧없고, 멋진 명연기였다.”


 카오루가 히마리에게 짓눌려 일어나지도 못한 채 말했다. 토모에의 연기엔 합을 맞춘 카오루도 놀랐다. 1막을 연기했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토모에의 연기는 대단했다. 분명 바로 5막부터 들어간 터라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굉장한 연기였다.


 “세타 선배도요.”


 토모에가 카오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색소가 묻지 않은 하얀 장갑에, 색소가 묻어 붉은 장갑이 엮어 들어갔다. 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다시 생각해도,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강렬한 연기였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 갑자기 이런 연기가 가능할 리가? 으음.


 “덥네요, 땀도 나고... 빨리 옷 갈아입어야겠다. 아, 카오루 선배 저 먼저 소품실 좀 쓸게요.”


 “으, 응. 먼저 쓰게나, 토모에 쨩.”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터라, 카오루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버렸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봐.”


 무대 밑으로 내려가려던 토모에가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애프터글로우의 모두가 토모에를 저마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카도, 란도, 츠구미도, 히마리도 저마다의 감정을 싣고 토모에를 바라보았다. 


 “토모에.”


 “...오늘은 와줘서 고마워.”


 란이 토모에를 불렀지만, 늘 그렇듯 송곳니를 보이는 쾌활한 웃음만을 보여준 채 그녀는 무대를 떠나갔다. 얼른 가라는 손 인사는 덤이었다. 토모에의 손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란은 그것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좋은 연기였어, 토모에.”


 소품실로 가는 길목에 시라사기 치사토가 서있었고, 재빠르게 걷던 토모에도 그녀와 서서히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보폭이 좀 더 느려지기 시작했다.


 “선배도 멋졌어요. 아, 줄리엣이니까 멋지다보다는 예쁘다고 해야 되나?”


 토모에는 괜히 실없는 소리를 한번 했다. 그럼에도 치사토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괜찮아?”


 “뭐가요, 또.”


 “괜찮냐고, 물었어.”


 치사토가 말에 살짝 악센트를 주었다. 치사토의 눈빛이 토모에의 얼굴에 딱 고정되어있었다. 그래서 실실 웃던 토모에도 표정을 고쳤다. 갑작스레 장면을 변경해 화가 난 걸까. 세타 선배한테도 칭찬 받았고, 연기도 잘했으니 상관없지 않나. 차라리 칭찬이나 좀 더 해주지.


 “괜찮아요, 저 완전 멀쩡한데.”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소품실에 도착했다. 함께 들어가려던 치사토였지만, 토모에가 한 발자국 떨어졌다.


 “선배 먼저 피팅룸 써요.”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치사토. 그런 치사토에게 토모에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기 시작했다. 


 “치사토 선배가 무대 올라가기 전에 왜 화장실 가는지, 좀 알 것 같네요. 엄청 긴장되네, 이거.”


 “까불지 마, 토모에.”


 그 모습이 퍽 웃겨서, 치사토도 슬며시 웃어보였다. 암튼 들어가시라며, 토모에는 치사토를 소품실 안으로 밀었다. 그러자 치사토의 눈빛이 다시 가늘어졌지만, 그보다 빨리 토모에가 문을 닫았다. 


 토모에는 옷도 채 갈아입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신은 신발 때문인지 저벅, 저벅 걷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체육관에서 사람이 하나 둘씩 빠져나오는 게 토모에의 눈에 띄었다. 저 멀리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같이 보였다. 어느덧 가을이었다. 


 끼익, 쾅. 하고 문을 열고, 다시 쾅,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을 벌컥 잠갔다. 청소를 한건지, 안 한 건지 모를 변기에 살짝 몸을 기댄 토모에는 하지 못했던 대사를 그제야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구걸하지 않을 거요. 그것이 내가 택한 길이자,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오.”


 하지 못한 대사를 마무리 하고, 괜히 신경질이 나 머리를 한번 헝클어트렸다. 긴 머리가 눈을 가리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해묵은 감정이 깊은 곳에서 그대로 흘러나와 저를 괴롭혔다. 몇 년 동안이나 괴롭혔던 그 감정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깊어서 저의 목을 계속해서 졸라댔다. 그걸 떨쳐내려 토모에는 다짐하듯 목소리를 냈다. 


 “난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끝까지 그렇게 자기를 기만해봤는데. 


 “하나도... 안 괜찮네.”


 잘한 거라곤 요만큼도 없으면서, 오늘도 치사토 선배한테 폐나 끼치고 마지막에 겨우 살아났으면서, 뭘 잘했다고 눈물이 나는 거야. 네가 뭘 잘했길래, 질질 짜는 거냐고.


 병신처럼. 


 란은 항상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있을 수는 없다. 변하는 것이 두려워도, 제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고 해봐도, 이제는 변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란이 마주하고 변했듯, 나 또한 변해야했다. 


 “괜찮다면서.”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모에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그대로 턱까지 흘러내렸다.  


 “누가 나한테 거짓말 하라고 했니?”


 저와 같은 붉은 옷. 모든 걸 태워버릴 듯, 빨간 다홍색 드레스. 온화해보이지만 은근히 뜨거운 면을 가진 그녀. 현실의 줄리엣이 아닌, 극 속의 줄리엣이 저의 눈앞에 나타났다. 줄리엣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러나 이면 어딘가에는 확연히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지... 않아요.”


 줄리엣이 제 앞에 나타나자, 그녀도 다시 파리스가 되었다. 우다가와 토모에가 아닌, 파리스 백작이 된 그녀는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 대신 열이 섞인 숨을 토해냈다. 눈물은 숨겼는데, 슬픈 감정까진 채 숨기지 못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파리스는 그렇게, 줄리엣의 앞에서 처절히 무너졌다. 무너져버렸다.


 -


 흐름을 위해서 그냥 한 화로 몰아 넣었더니 17000자 넘었다 wwwwwww 죽고싶어 wwwwww


 좀 더 굴러라, 토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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