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빛을 그대로 맞아버린 후, 눈이 부셔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주변 환경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같은 장소였지만 원래 있었던 건물이 다른 새로운 건물로 바뀌었다든지,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조금 낡아진 느낌이었다.
새롭지만 익숙한 풍경들. 그렇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길을 걸어본다. 미묘하게 좋아진 듯한 자동차, 그리고 길을 걷는 사람마다 들고 있는 손바닥만 한 액정기계. 말이 되지는 않지만 이건……
"미래에 왔구나!"
라고 공상과학 소설에서 있을 법한 생각을 해본다.
02.
조금 길을 걷다 보니 내 생각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새로 생긴 동네 미용실, 그리고 그 안에서 틀어진 뉴스를 보니 현재는 2020년으로 보인다. 얇아진 텔레비전은 이제 벽에 붙어있었으며 화질이 실제로 보는 듯 엄청나게 좋아진 느낌이다. 이것이 10년 뒤의 과학 기술인가, 괜히 하늘을 나는 무언가가 있을까 봐 하늘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약간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미래 여행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만약에 미래의 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면……
"아"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어떤 여성과 눈이 마주친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녀는 한눈에 봐도 그녀가 10년 전의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야 저 왼쪽 눈의 눈물점과 저렇게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눈을 가진 사람은 이 동네에 한 사람뿐이니까. 그리고 누구보다 잘 아는걸?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또다시 마음이 울적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나를 정말로 싫어하니까. 아무리 쫓아다니고 좋아해도 그녀는 나를 질색하며 오히려 괴롭혔으니까. 왠지 아직도 나를 싫어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황급히 눈을 돌린다.
"저……"
"으으으……"
다리가 떨린다. 정말로 좋아하지만 나를 경멸하는듯한 눈으로 보는 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과거의 나겠지만, 10년 뒤에도 나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버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모른 척하고 지나가 줘……
"미래……?"
미래, 그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역시 눈치챘던 것일까. 10년 뒤의 한층 더 멋있어진 그녀의 모습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느껴지는 두려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아직 그녀의 눈을 다시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나의 앞에 서 있었다.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고, 언제나 그랬듯이 용기 내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어느새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잘라버린 그녀. 물론 저 숏컷도 엄청나게 멋있었으며 정장의 핏을 살리는 굴곡지고 여성스러워진 그녀의 몸매 역시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일그러진 표정과 놀란듯한 두 눈. 싫어하는 아이가 과거에서 찾아온 게 역시 싫었던 걸까. 그녀가 화내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저항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끌려가 품 안에 안겨버린다. 어째 설까?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얼떨떨하면서도 동시에 기뻤다. 이렇게 가까이 있게 된 건 처음이니까.
"저기…… 미…미안해……"
습관처럼 사과하였다. 하지만 그러자 나를 더 꼬옥 끌어안던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는 걸까? 우는 거야?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내 머리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걸 느낄 수가 있었다.
03.
"내가!? 그…… 너랑!? 정말!?"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있을까. 잠시 후, 가까운 그녀의 집으로 초대받은 나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야 미래의 나는 그녀와 사귀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놀라우면서도 숨길 수 없는 기쁨에 나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말을 하는 그녀, 은혜의 표정은 왠지 썩 좋지가 않았다.
"그…… 미래의 나는 여전히 머저리구나."
머저리, 언제나 그녀가 나를 욕하며 부르던 말. 그녀의 좋지 않은 표정에서 지레 겁먹은 나는 머쓱해 하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야! 넌 머저리가 아니야!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은혜는 말을 하다가 또다시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 도중에 입을 꼬옥 다물었다. 왜 그러는 걸까?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슬퍼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0년 후니까…… 28살이야?"
"응, 그럼 역시 18살의 미래구나?"
그녀는 나의 말에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한 번도 나를 향해 지어주지 않았던 미소를 보니 또다시 감동을 하게 되었다. 10년 뒤의 나는 미움받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 나와 애인 관계라는 사실은 나에게 꿈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미래로 오게 된 것 자체가 꿈같지만 말이다.
"그럼 미래의 나도 어딘가에 있겠네? 미래의 나는 어때? 더 예뻐졌어? 가슴은 커졌어? 무슨 일을 해? 나 무슨 대학에 갔어!?"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가득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 하나로도 족했으니까.
나의 질문에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그 사람들이 들고 다녔던 손바닥만 한 액정기계를 보여준다. 미래의 휴대전화일까, 그곳에서 화면에서 미래의 나로 추정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묘한 느낌. 분명히 더 예뻐졌다는 느낌이었지만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본다는 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음…… 그냥 묘하다.
"이거 말고 더 많아. 휴대전화에 엄청."
그녀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여러 사진을 보여주었다. 같이 사이좋게 찍은 사진과 심지어 속옷 차림으로 함께 침대에 누워서 찍은 사진도 보였다. 사진 속의 그녀는 과거와 같이 머리가 길었으며, 역시 그 누구보다도 멋있고 예뻤다.
"정말로 우리 사이가 좋아졌구나…… 기뻐……"
"미안, 미래에서 내가 사과할게. 그땐 괴롭혀서 미안해……"
"아냐~ 괜찮아~ 그래도 지금의 나에겐 무척 희망적이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친해진 거야?"
"그냥,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믿지 않을 때가 있었거든. 그때 함께 욕을 먹으며 혼자 나를 믿어주고 내 곁을 지켜주는 걸 보고 조금 감동먹어서……"
"그렇구나~ 그럼 언제부터?"
"음~ 사이가 좋아진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고, 사귀게 된 건 그로부터 1년 정도 더 뒤야."
"으음…… 그럼 앞으로 1년 넘게 미움받아야 하는구나."
그녀에게서 미움을 받던 일들을 떠올리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래도 나의 미래에는 행복해질 일들만 남았다는 뜻이니까. 3년을 따라다녔는데, 고작 1년 정도는 쉬울 것이다. 이전보다 더.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지은 것을 들켰는지 그녀는 다시 한번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포옹, 따뜻한 그녀의 품 안에서 두려움 때문에 아까 느끼지 못한 그녀를 다시 한번 느껴본다.
"왠지 미래의 나와 만나면 어색해질 거 같아……"
"응?"
"그냥~ 그럴 것 같은 기분이……"
철컥!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나와 그녀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현관 쪽을 쳐다본다. 혹시 미래의 나인걸까? 숨어야 하는 걸까? 어쩌지? 그보다 미래의 나는 동거를 하는 건가? 그런 그거대로 기뻐!
"야아 박은혜!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여기 죽 사 왔으니……까아……?"
마치 날라리처럼 보이는 잔뜩 치장한 외모. 연한 갈색으로 염색을 한 긴 웨이브 머리에 귀에 커다란 링 형태의 귀걸이를 하고 있던 한 여성은 나와 은혜를 보고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그리곤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양손으로 입을 가린다.
"세상에! 강미래!? 뭐야!? 이게 어떻게……!"
익숙한 목소리다. 그러니까 분명 고등학교에 은혜와 항상 붙어 다니던 여자아이, 예인의 목소리다. 그녀도 은혜와 함께 나를 괴롭히며 싫어했었는데, 외모가 너무 바뀌어서 못 알아볼 뻔 했다. 생각해보니 10년이면 엄청 오랜 시간이니까 그게 당연한 걸까? 아무튼, 그녀는 한 몇 초 정도 나를 보며 굳어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은혜 쪽으로 돌린다.
"예인아 잠깐만……"
은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바로 옆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곤 잠시 후, 함께 방에서 나온 그녀는 다짜고짜 나에게 달려와 거칠게 나를 양팔로 안아버린다.
"정말로 미래다~ 나야나~ 이예인~ 18살이면 너가 한참 은혜를 따라다니고 우리가 괴롭혔던 때구나~"
"으으……"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나저나 미래의 나는 예인과도 친한 모양이다. 아주 조금 거북하지만, 나를 싫어했던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로 온 거야? 돌아가는 거야?"
"그게 하늘에 커다란 빛이 보이길래 그냥 그걸 멍하니 쳐다봤거든? 그런데 갑자기 그 빛이 나한테 오더니 나를 덮쳤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미래에 와있었어."
"와…… 믿기지 않아…… 그보다 넌 모르겠네~ 쟤 있잖아, 너 엄청엄청 좋아한다? 첫키스 한날에 나한테 전화로 엄청나게 자랑했는데~"
"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나 키스도 했어!? 은혜랑!?"
키스라는 말에 반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예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방문 앞에 있던 은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나의 시선을 피한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키스라니, 나랑 은혜랑 키스? 생각해보면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랍다. 여자끼리의 연애, 그리고 여자끼리의 키스.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후후~ 키스뿐만이겠어? 들어보니 섹……읍!?"
다급하게 달려와서 예인의 입을 막아버리는 은혜.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그나저나 섹이라니? 섹……섹……섹……?
"아으으으……!"
순간 야한 생각을 해버려서 얼굴과 귀 끝까지 달아오른다. 설마 그건가? 상상할수록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다.
"아직 미래는 미성년자라고!"
"하하하~ 알 거 다 알잖아? 부끄러워 하는 거 보니까~"
그랬지. 이 두 사람, 항상 이런 식으로 재밌게 장난으로 싸우기도 했었지. 부러웠어. 은혜랑 친하던 그 아이가. 하지만 미래의 나는 셋이서 함께 구나. 분명 행복하겠지? 미래의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그녀를 사랑하며 상처받은 것들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우는 거야?"
"아니 그냥~ 기뻐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생각을 할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눈물을 보인 탓일까. 그렇게 은혜는 미래에서 과거의 나에게 세 번째로 안아주었다.
04.
예인은 나와 은혜의 사이를 방해하기 싫다며 아쉬움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둘이 된 지금, 왠지 모를 어색함이 그녀의 집 안 거실에서 흐른다. 내가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난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기회에 대화하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까웠기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있잖아."
"응?"
"왜 두 사람 모두 나를 보고 그렇게 기뻐한 거야?"
겨우 과거의 나를 본 것만으로 그렇게 기뻐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그 질문을 하자 그녀는 갑자기 당황한 듯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냥…… 보고 싶었으니까."
"흐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피하면서 얼버무리는 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를 반겨준다는 건 기쁘니까.
"과거의 나 때문에 많이 괴로워?"
"괴롭다면 괴로운 걸까. 글쎄,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거든. 좋아하니까 상처받아도 어쩔 수가 없나 봐."
"그런 순수한 마음이 좋았어. 그걸 알게 된 게 조금 늦었지만……"
"헤헤~ 그럼 나 앞으로 계속 좋아해도 돼?"
"당연하지. 물론 과거의 나는 또 너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일찍 너를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의 나, 정말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의 어깨에 조용히 기대었다. 사실상 10살이나 차이 나는 것인데, 하지만 어리광을 부리듯 내 어깨에 기댄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지금 미래의 나였다면, 분명 이대로 이 고운 머리를 쓰다듬어 줬겠지. 하지만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기 있잖아."
"응?"
"과거의 난 왜 싫었어?"
내 말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때는 같은 여자끼리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 그런데 그 대상이 나라고 생각하니 혐오감이 들어서"
"으윽…… 혐오했구나……"
"물론 조금 더 미래의 나는 바보처럼 똑같이 여자에게 빠져버렸지만."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미소. 고등학생의 그녀도 분명 이렇게 웃었었다. 미래의 그녀와 과거의 그녀가 겹쳐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도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게 왠지 묘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고개를 들면서 천천히 나에게 입술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살짝 밀어내 버렸다. 살짝 놀란듯한 그녀,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와 키스는 할 수 없었다. 그건 당연하다. 나와 그녀의 첫키스는, 평생 잊을 수 없을 첫키스는 조금 더 미래의 나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미안, 첫키스는 과거의 너에게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고 싶어서."
"아……"
나의 대답에 그녀는 섭섭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닐까,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역시 그 손은 도중에 멈춰버린다. 바보 같은 난 아직도 그녀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 이 시대의 나에게 부탁하면 키스를 해줄 거야! 그러니까 나 말고 10년 후의 나에게 부탁하는 거야! 아닌가? 지금의 나는 부탁 같은 거 안 해도 해줄까?"
"응, 그럴게."
뭔가 분위기가 다운된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래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나저나 이 집안, 혼자 사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꽤 넓었다. 소파에서 일어선 나는 주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구경했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 액자, 그곳엔 나와 은혜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사진 속 나는 행복해 보였고, 사진 속 은혜도 행복해 보인다.
"그거 우리 1주년 때 찍었던 사진이야. 대학생이었지?"
"흐음~ 왠지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사귀기 시작한 날부터 1년이 될 때마다 그걸 기념해서 함께 사진 찍고 액자에 보관했거든."
내가 사진을 둘러볼 때 그녀는 사진마다 언제 찍은 것인지 다 말해주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작년 겨울, 일본에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우와아~ 우리 둘이서 해외여행도 갔구나!"
"응, 밤마다 꽤 고생했지만……"
그녀는 볼을 긁적이며 왠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밤에 고생했다는 건 뭘까. 잘은 모르겠지만 부끄러워하는 은혜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미래의 너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었어. 나는 그냥 적당한 회사에 다니고 있고."
"선생님인가~ 그게 내 두 번째 꿈이었는데 그것도 이뤘구나?"
"첫 번째는 나랑 사이좋게 되는 거고?"
"어떻게 알았어?"
"너에 대한 건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엉덩이에 점이 있는 것도."
"으응!?"
왠지 부끄러워져서는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고 있던 치마 위로 엉덩이를 가렸다. 물론 보일 리는 없지만 그런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역시 할 건 다 한 사이라는 거겠지……
아무튼 나는 집안을 둘러보면서 나와 그녀의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물론 사진 말고는 별 다르게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녀에게 미움받은 시간보다 사랑받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면서도 부러웠다. 분명 나도 사랑받고 있지만, 10년 후의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부러웠다. 그리고 집안을 다 둘러보았을 때, 그녀는 내 눈치를 몇 번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외출하지 않을래?"
"응? 외출?"
"응, 데이트 하는 거야."
"데이트!? 나 할래! 할 거야!"
데이트라니! 물론 그녀와의 첫 데이트도 미래의 나에게 양보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새치기해도 되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의 대답에, 그녀는 기쁜 듯 미소를 지어주었다.
05.
10년 후의 은혜와의 10년 후의 번화가 데이트.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걸으면서 길거리 음식도 먹어봤고, 오락실에 들려 게임도 잠깐 하였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근사한 양식집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기도 했다. 그녀가 소개해준 음식점은 미래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스타 요릿집이라고 했는데 미래의 내 입맛은 역시 지금과 똑같았다. 짧은 시간에 궁금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즐기고, 어느샌가 밤이 되었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지친 우리는 잠깐 근처 쉼터에서 쉬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한숨을 돌렸다.
"하아~ 재밌었다~ 미래는 꽤 많이 바뀌었구나?"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보다 내가 좋아하던 김밥집이 사라져서 조금 아쉬웠지만~"
"아, 거기? 그거 없어진 지 꽤 오래됐는데?"
"정말!? 과거로 돌아가면 더 많이 먹어야겠다."
"…………"
은혜는 내 말에 아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서 아쉬운 걸까? 물론 정말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도 아쉽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너는, 이제 미래의 나에게 양보해야 하니까."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푸욱 숙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직도 아쉬워하는 것 같은 그녀의 왼손에 손을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쥔 그녀의 손.
"가지 마……"
"응?"
"가지 말아 줘……"
가늘게 몸을 떨던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렇게나 아쉬웠던 걸까. 아니, 조금 달랐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나를 절대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살짝 속인 그녀의 고개에 맞춰 몸을 숙인 뒤에 그녀와 눈을 보았다.
"저기 있잖아. 숨기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줄래?"
나의 한마디에 눈물이 맺힌 양쪽 눈이 나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면서 입을 열었다.
"미래의 너는…… 존재하지 않아……"
"어? 내가…… 없다고?"
"응…… 2020년의 강미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이 머릿속으로 가해졌다.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말을 꺼낸 은혜. 나는 그 말이 분명하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째선지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내가 죽어서 슬퍼하는 은혜의 모습이 더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분명 미래의 나, 그리고 죽은 이후의 나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나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라고. 나 때문에 아파하지 말라고……
나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내가 들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어느샌가 소리 내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그녀에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일으킨 뒤에 그대로 그녀를 내 품으로 안았다.
"미안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들어서 나 말이야……!"
"응"
"나…… 너를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 평생 함께하자고 약속했는데…… 너가 아프다는 것도 모르고 나 너에게 화를 냈고…… 그것도 아직 사과하지 못했는데……미안해…… 정말…… 내가 전부 잘못했어……"
"그랬구나. 괜찮아."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하나씩 모두 털어버리던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나는 그녀의 말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그렇게 그녀가 울음이 그칠 때까지 나는 계속 그녀를 안아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남아있던 모든 눈물을 쏟아냈는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다시 나의 품에서 벗어나 양손으로 눈물 자국을 닦아내며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살짝 웃음을 짓는다.
"미안해…… 죽는다는 건 무섭지……? 그래서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발을 구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에 잔뜩 보이는 별, 예쁘게 빛나는 별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거 알아? 나한테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나를 가장 싫어하는 여자아이였는데, 그래도 언젠가 나를 봐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너에게 미움받는 시간보다, 너에게 사랑받는 시간이 더 길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 그래도 넌 아직도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걸? 그리고 사실은 내가 죽는다는 걸 알게 돼서 무척 다행이야."
"어……?"
"왜냐하면……"
나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어서 사랑해주지 못한 만큼,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너를 더 사랑해줄 테니까."
내 말에 그녀는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리려는 듯 이를 악물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빛이 나타난다. 내가 미래로 오기 전에 보았던 커다란 빛. 그 빛을 은혜도 봤는지 크게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나를 강하게 붙잡듯 안았다.
"나 절대 너를 잊지 않을 테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너를 계속 사랑할 테니까! 그러니까……"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어?"
그녀의 부탁에 나는 생긋 웃었다. 그리곤 빛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나도 사……"
00.
"랑……"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풍경이 주위에 보였다. 그렇다.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미래의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었는데…… 나는 고작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못한 채 미래에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과거로 와버렸다.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팠다. 고작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니…… 이렇게 좋아하고,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수백 번 수천 번 말해줄 수 있는데……
나는 미래에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야 머저리! 시X 너 길거리에서 우냐? 재수 없게……"
"아하하하~ 애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질질 짜기는~ 재수 없으니까 빨리 꺼져~"
은혜다. 나에게 차가운 그녀다. 나를 머저리라고 부르는 그녀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그녀다. 나는 경멸하는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절친 예인과 함께 지나가는 그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99.
[그래서, 미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구나……]
"응……"
[괜찮아? 어디야? 내가 지금 가줄까?]
"괜찮아, 한가지 아쉬운 게 있지만……"
[아쉬운 거?]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거든."
[못 들었어!? 저런……]
"괜찮아~ 그래도 다시 한번 만났으니까."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안 되겠다! 오늘 언니가 한턱 쏜다! 어디야! 지금 갈게!]
"괜찮다니까~ 그래도 홀가분해졌어. 적어도 그날 화냈던 건 사과할 수 있었으니까."
[아! 잠깐만! 너 혹시 기억나!?]
"응?"
[10년 전쯤? 아무튼! 미래가 혼자서 길에서 울고 있었을 때!]
"어……?"
[그때 있잖아! 그때는 머리가 돌아버린 줄 알았는데!]
생각이 났다.
그랬구나.
나는 듣지 못한 게 아니었구나.
너는 나에게 말해주었구나.
10년 전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그때
00.
"은혜야!"
"엥?"
나는 지나가려던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어떤 싫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지 상관없이
어떤 싫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지 상관없이
너에게 전한다.
지금의 너에게
그리고 10년 후의 너에게.
"나도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10년만 더 사랑할게!"
나의 말이 너에게 닿을 때까지는 앞으로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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