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현실이 반대인 경우가 가끔 있다. 게임에서는 방어력 수치만 올리는 방패가 실전에서는 막고 때리고 돌진도 할 수 있는 만능 무기인 것, 대공포로 전차를 격파하고 전차로 항공기를 격파하는 플레이어, 저격용 소총으로 달리면서 쏘는 플레이어 등등이 예시.
그리고 야구 시합보다는 선수 육성이 중심인 게임에서 이상한 점이 보인다. 일상시에는 기본적인 스탯만 올라가다가 합숙 등의 이벤트 상황에서 특별한 스킬을 장착하는 것.
하지만 반대다. 스킬은 그것을 매일 거듭하면서 완성되는 것이고, 스탯은 합숙 등의 단기강화훈련에서 끌어올리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아침, 부터...! 마라톤이라니...!”
정확히는 5km다. 일단 가장 작은 규격이지만 마라톤은 마라톤. 그라운드 2개를 지은 학교인 만큼 산속이나 마찬가지라서 지형도 거칠다.
“끝나면 오후 내내 펑고래...”
-반복적이며 체력을 심히 깍아먹는 훈련이 중심일 것이라는 얘기다. 보다 직설적이고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아주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는 거다.
“설마 그거 하는거야?!”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선배들조차 경악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절로 스피드가 떨어지는 아이나. 달리기는 투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훈련인 만큼 아이나가 선두인데, 거기서 속도를 줄이면 당연히 충돌할 위험이 생기는 법. 뒤에서 다급히 제동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아, 죄송해요!”
돌아보지 않고 가속하며 말하자 뒤에서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작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아니...”
그 주인은 혹시라도 시선이 맞을까 고개 숙이며 달리는 리에. 그녀는 지금 달리기가 죽도록 싫었다.
‘계속 뛰고 있으면 생각할 여유가 생겨버리니까.’
그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 하고 하루. 하지만 아직 리에가 먼저 아이나에게 말을 건 바가 없다.
‘뭘 말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는걸.’
그 원인은 순수한 의문. 주변은 물론 자기 모습조차 모르니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아이나는 짚이는 곳이 없으니 답답할 뿐.
“이제 슬슬 끝이야! 빠르게 가자!”
주장의 외침에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한다.
2학년들이 말하길, 사쿠타의 일정표에 빈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간을 참 알차게 사용한다 같은 훈훈한 레벨이 아니다. 정말로 단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는다는 의미.
그리고 그것은 러닝이 끝나고 식당에서 증명되었다.
“식사도 훈련입니다. 전원 3공기 이상 싹 비우셔야 해요.”
일단 메뉴는 전 국대답게 단기간의 훈련에 적합한 스테미나에 초점이 맞춰저 있다. 대량으로 만든 것 치고는 비주얼도 좋다.
문제는...방금 막 언급했다.
“이, 이건...”
“사실상 9공기인데요...”
“이런 건 만화에만 있는 거 아니었어?”
대량이라는 귀여운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쌀밥의 산. 도데체 어떻게 그릇에 담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양을 무려 3번이나 처리해야 한다.
물론 반찬과 국도 그에 걸맞는 양. 청소년으로서는 환영할만한 육식 위주의 차림이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참고로 남자부는 이걸 매일 먹는다고 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적합한 말도 아니다. 정확히는 남자부원도 2학년 정도는 되야 3공기 완식 가능. 시라사키 야구부에서는 매년 신입생의 기숙사 입주때마다 누가 토하고 누가 완식을 해낼지 내기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특히 160cm 미만인 분들. 아직 선천적인 체격 차이는 운동량과 식사량으로 커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먹는다를 넘어서 해치워버린다는 기세로 덤비세요.”
콕 집어주는 저격에 인상을 찌푸리는 3명. 안 그래도 후배보다 작은 걸 신경쓰는데 지적까지 하니까 불이 붙을 수 밖에.
“조, 좋아. 해주겠어.”
야구부원보다는 결사대에 가까운 표정으로 카에데가 의자에 앉는다. 그녀에게는 이번 합숙에 있어서 명확한 목표가 있으니까다.
‘누가 내야의 쐐기에 어울리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거야.’
보란 듯이 당당하게 젓가락을 집어들며 카나를 바라본다. 날씬한 것이 먼저 눈에 띄어서 그렇지 카나도 상당히 큰 편. 즉 카에데로서는 ‘피지컬’이라는 이름의 적이다.
확실하게 그것을 물리치고 사쿠타에게 ‘역시 유격수는 혼죠군요.’ 라는 뉘양스의 말을 듣는 것. 그것이 목표다.
‘뭐. 감독님은 정말로 안될 것 같으면 봐주겠지.’
되면 빡세게, 한계면 수위를 낮춘다. 사쿠타의 그런 미 해병식 느낌을 알기에 다른 부원들도 뒤따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설픈 생각이었다.
유우키를 시작으로 마야, 그리고 운동경력 있는 1학년들 순서로 그릇을 돌려놓았다. 그리고 의자라는 이름의 지팡이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가누는 그녀들.
“마, 지막 하나...부탁합니다...!”
속도에서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 온 부원들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어찌어찌 근성을 쥐어짜내 마지막 한 공기에 다다른 카나. 사쿠타가 밥을 퍼주는 동안 숨을 고르며 주위를 본다.
‘카에데 선배는 굉장하네. 힘든 기색이 전혀 없어.’
감탄하기도 잠시. 다시 코앞에 산이 돌아온다.
“으아악...”
그것은 카나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거의 동시. 이제 두 공기 시작인 카에데는 태연한게 아니라 안색이 안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카에데가 마침내 마지막 한 공기를 먹기 시작할 때였다.
“식사가 끝나신 분들은 그라운드에서 휴식을.”
사쿠타의 지령에 밖으로 향한 부원들. 하지만 2학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아. 분명 휴식=멘손체조였죠...”
쉬는동안 몸이 굳거나 감각이 무뎌져서는 안되기 때문.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로 1초조차 허투루 쓰게 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오후 훈련.
“캐치볼이 끝났으면 전원 메인 포지션에. 오늘은 6시 까지 할겁니다.”
“에?”
“시간?”
근본적으로 사쿠타는 펑고를 쳐 줄때 정확한 공 개수 혹은 시간 언급을 하지 않는다. 매번 각 포지션에 균등하게 뿌리고 상태를 봐서 정하는 느낌.
하지만 오후 1시 30분인 지금. 사쿠타는 확실히 6시 까지라고 선언했다. 즉.
“4시간 30분 동안 죽일거라는 거구나.”
가장 먼저 깨달은 료의 말과 함께 알루미늄이 울었다. 곧바로 날아오는 라인드라이브 외야 타구.
정면의 낙하지점을 향해 달려나가 슬라이딩. 간신히 글러브 그물로 건져낸다. 그리고 제자리에 돌아가기 무섭게.
“좌중간!”
앞에 이어서 이번에는 뒤로 뛰어야 하는 료였다.
“2유간!”
아이나의 키를 넘기는 빠른 타구. 2루 베이스 근처에 튕긴다. 그리고 높게 바운드.
‘이 망할 팔!’
길이를 원망하면서도 최대한 손을 뻗어보는 카에데. 닿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앗.”
카에데보다 한발 늦게 날아오른 카나의 글러브가 공을 가로챘다. 착지하자 마자 노스텝으로 송구. 의심할 여지 없이 아웃일 거다.
“선배. 괜찮아요?”
부딪혔을까 걱정도 받지만.
‘아웃카운트 하나 뺐겼어...’
그런 생각이 앞선다.
4월 초에는 강습 타구더라도 간단한 플레이가 많았지만, 요즘은 갈수록 지시가 늘어난다.
“주자 1루! 병살!”
카나의 정면으로 향한 타구. 무릎이 닿기 직전까지 자세를 낮춰서 확실하게 포구. 직후 2루로 뿌린다.
“!”
하지만 카에데가 들어오는 타이밍과 맞물리지 못해 공이 떨어진다. 순간적으로 받아냈지만 1루에 던지는 동작이 메끄럽지 못하고 송구도 불안정했다.
“제가 너무 빨랐죠?”
어쩐지 여유있게 들어온 자신을 탓하는 것 같은 카에데였다.
“라이트!”
1루를 넘어 높이 뜬 타구. 곧 휘어져 파울지역을 향한다. 전력으로 달렸다간 펜스에 부딪힐지도 모르는 위치. 하지만 카렌은 끝까지 쫒아가서 잡아낸다.
“레프트!”
각도만 좋으면 홈런일, 아주 높이 뜬 타구. 얼핏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바람에 휘어서 낙하점이 불안하다. 하지만 메이는 몇걸음만에 정확하게 포구한다.
“3유간!”
3유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카에데와 마야 사이의 애매한 타구. 바운드 후 속도가 줄어들자 마야가 달려나와 처리한다.
“1루!”
평범한 타구-였지만 어디 잘못 튕겼는지 높은 불규칙 바운드가 된다. 유우키와 카나의 키를 넘긴다.
순간 고민하는 카나. 그리고 유우키가 뛰어올라 포구. 베이스 커버로 달려온 아이나에게 던진다.
“선배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적극적이야.”
망설이기 보다는 자기가 해결한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특히 유우키는 장거리 송구와 주력이 문제일 뿐 순발력은 뒤처지지 않는다.
“캐처!”
아이나와 말을 맞춘 듯 중얼거리던 리에의 머리 위에 뜬 타구. 거의 홈플레이트 수직에 높다.
‘훈련은 망설이면 안되니-’
지금은 정오에서 약 1시간 50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 포수 마스크를 벗고 올려다보자 태양의 빛이 눈을 직격한다.
“-까!”
순간적으로 놀라서 뇌속의 말이 흘러나오고, 공은 곧 리에의 옆에 떨어진다.
“10분 추가입니다.”
이게 2학년들이 말하던 그거, ‘7시간이 되는 4시간’이다.
에러가 나올때마다 시간이 늘어나서 한 명이라도 집중력이 안 좋으면 7시간까지 가는 무한 펑고.
“다시 한번, 캐처!”
이번에야말로 리에는 포구에 성공했지만, 아까의 빛이 눈에 남아 살짝 휘청거렸다.
“......”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건가 생각하는 아이나.
“피처!”
빠르지만, 사실 아이나는 이런 타구는 무섭지 않다. 이미 중학교에서부터 괴물이라 불렸던 스파이커들의 스파이크를 봤으니까.
[어중간한 각오로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마.]
정말 무서운 건 사람이다.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
대화하지 않으면 속내를 모르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베터리라면서요.’
솔직하게 말해서 서운하다. 평소에는 베터리를 들먹이며 항상 곁에 있었으면서.
“주자 3루! 스퀴즈!”
그 마음을 담아 홈으로 던져본다.
4월 29일. 이날의 펑고는 다행히 6시 40분에 끝났다. 마무리 운동 겸 근력 운동을 마친 것이 7시 3분.
“오늘부터 3일동안은 욕탕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씻고 ‘진짜’ 휴식 뒤에 8시가 되면 식당에 오세요.”
보통 2군은 학교를 지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올해 시라사키 남자 야구부는 전원이 원정행이다. 듣자하니 다른 학교가 스케줄 문제로 거절한 외국 팀과도 시합을 한다고.
“아야나미, 타카하시. 두 분은 잠시 조정 좀 하겠습니다.”
아무리 피지컬이 있다고 한들 아이나는 아직 급조 투수다. 급하게 만들었다면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사쿠타는 두 사람을 불펜으로 부른다.
진정시킨 어깨를 다시 풀어주고, 연습 투구 시작.
“음. 스트라이크는 잡히는군요.”
사실 스트라이크를 넣지 못한다는 것과 탄착군이 랜덤인 것은 근본적인 투구폼의 문제거나 구력이 짧은 경우다.
“아야나미. 제가 시킨 건 하고있죠?”
“네.”
축구만화를 보면 감독이 드리블로 등하교 하라고 말하듯이. 사쿠타도 아이나에게 항상 야구공을 가지고 다닐 것을 명했다. 공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다루기 쉬워지고, 항상 딱딱한 경식구를 꽉 쥐고 다니면 자연스럽게 악력이 증가한다. 구속은 몰라도 공의 회전수는 결국 손가락의 악력이 핵심이다. 회전수는 곧 구위가 되니까 결국 제구와 구위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것.
“하지만 아직 필살기가 가다듬어지지 않았네요.”
필살기라 말할 것 같으면 예전에 료에게 던졌던 인 하이의 얘기다. 존을 완전히 벗어나는 높은 볼이라면 실력있는 팀에선 거른다. 하지만 그때 그 공은 완전히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찌르는 인 하이였다. 눈에 가까운 공일수록 빠르게 보이는 만큼 구위와 구속이 있는 아이나에게 있어서 그 코스는 좋은 무기다.
그렇지만 좌우로 제구를 시도하면 열에 여섯은 존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무슨 생각으로 던집니까?”
“에...그야 미트를 겨냥하는데요.”
“그런가요.”
과거엔 멀티플레이어였지만 결국 사쿠타도 전문 투수는 아니다. 제구를 설명하려 해도 이론을 벗어나는 부분에서는 납득 가능한 설명이 어렵다.
“일단 구위는 여전하네요.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조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사쿠타.
“타카하시 양.”
사쿠타는 괜찮다고 했지만 여름까지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다. 4월이 거의 끝났으니까 2~3개월 정도. 그 전까지 몸쪽 제구만큼은 잡고싶다.
그래서 좀 더 조정하고자 불렀지만, 리에는 또 무슨 생각인지 듣지 못한 듯하다.
“저기.”
“어? 응.”
크기를 높이자 그제서야 돌아보는 리에.
“식사 후에는 10시까지 자율 훈련을 허가한다니까, 나중에 좀 더 받아주시지 않겠어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피칭은 더 이상 안 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조금만 어울려주세요.”
톤을 조금 낮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는 리에. 그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식히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 욕탕을 향한다.
제 2그라운드를 나서서 기숙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이나.”
료가 음료수 자판기 앞에서 아이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머리가 조금 젖은 것을 보아 샤워만 하고 나온 모양이다.
“스즈키 양? 모처럼인데 왜 목욕을 안 하시고...”
“너랑 얘기가 좀 하고싶어서.”
그러고는 엄지로 등을 기댄 자판기를 가리킨다.
“그럼 사과주스로.”
동전소리와 함께 말을 건다.
“최근 리 짱,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지?”
“네.”
“혹시 짚이는 곳이 있어?”
“아뇨.”
가볍게 토스한 주스 캔을 받는다.
“저도...걱정이에요.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도 말이 없어서.”
“적어도 그건 아닐거야.”
늦은 시간이라 좀 더 크게 들리는 탄산의 소리.
“나도 뭐 지금 상황의 이유는 모르지만...리에는 확실히 너라는 인간을 좋아해. 옛날 친구였던 나보다도.”
문자로 아이나 얘기를 할때면 솔직하게 질리는 료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달라붙었을 때처럼 밀어붙여. 야구 빼고는 죄다 서투르니까 도망도 못 칠거야.”
“알겠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나의 표정을 보자, 료는 리에가 어째서 아이나에게 빠져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럼, 너만이 쓸 수 있을 비장의 카드를 줄게.”
“네?”
딱 한 문장. 그리고 료는 떠났다.
공중 목욕탕 마냥 벽에 후지산이 그려진 욕탕.
“실례하겠습니다.”
머리를 감은 리에가 들어오고, 물이 또다시 조금 넘친다.
그 직후의 일이었다.
“꺄악!”
“오오. 크기는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감촉이네.”
야생의 유우키에게 붙잡혀 가슴을 만져진 것은.
“나, 나카무라 선배?!”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쥐락펴락하며 쥐는 강도도 조절하고 있다.
“이건, 무슨...!”
“포기하는게 좋을거야. 우리 학년도 작년에 10명 다 당했고, 스즈키랑 오오토리도 이미 당했어.”
마야의 말이 끝나고 몇십 초 뒤에야 해방된 리에.
‘크기는 안 그래도 신경쓰고 있는데!’
만져졌다는 것보다는 평가당했다는 수치감에 얼굴이 붉어진다.
“리에 짱~. 이제야 표정이 좀 풀렸다고? 난 최근에 리에 짱이 안면 경련에 걸린 줄 알았단 말이야.”
“이유 따위 상관없으면서.”
마야는 무시하고 리에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유우키.
“나는 야구랑 관련된 것 정도밖에 못 도와주겠지만, 뭔가 고민이 있으면 다른 애들한테 털어놓아.”
“네? 저기...”
유우키의 말이 신호탄이 된 듯 어느샌가 2학년조와 카나가 물 속에서 리에를 포위했다.
“타카하시. 너 감정 숨기는 거 엄청 서투르다고.”
“말은 안 해도 다들 알았거든. 베터리가 흔들리면 우리가 손해니까, 빨리 얘기하고 화해해!”
결국 전부 털어놓았다. 아이나가 ‘왕자님’인 것을 알아차린 것과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모르겠다는 것을.
‘그거 들었구나.’
“흠...”
“이건...”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나 싶던 그때.
“사랑이네.”
“뭐?!”
유우키가 단언하자 전원이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건 너무 간 거 아닐까.”
“그, 그래! 사, 사사 사랑이라니!”
“아니에요. 절대 아닐거에요. 리에, 아니라고 말해줘.”
여러모로 온도차가 다른 반응. 카나는 걱정하던 표정이 자취를 감추고 싸늘한 시선이 터를 잡았다.
“다들 왜 그렇게 부끄러워 해~. 인류애 같은 것도 엄연히 사랑이라고?”
할 말은 많지만 일단 리에의 답을 듣고자 조용히 한다.
“저기, 그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움찔거리는 리에.
“좋아하기는...해요.”
“오?”
“친구로서요.”
“뭐야.”
어째서인지 근처의 목욕 바구니를 던져버리려는 제스처를 취하는 유우키.
“그런데, 아이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두번 빼고는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고 부르는 것도 뭔가 거리감이 있고. 의무감 때문에 야구를 하고 저를 만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서.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점점 더 제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서.”
본인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나, 주위에서는 아는 분위기였다.
“그럼, 결국 그런 거 아닐까?”
여기선 주장답게 정리하려는 마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했던 사람이어서 기쁘지?”
“네.”
“베터리라서 좋지?”
“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거지?”
“네.”
그러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간단하네. 몇마디만 하면 충분해.”
“네?”
그 말을 전해들은 리에는 자신의 미숙함을 깨달은 종교인처럼 탕을 나섰다.
저녁을 먹는 동안 시라사키의 베터리는 조용했다. 사실 식사의 양 때문에 대화 같은 걸 할 틈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불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캐치볼로 어깨를 데우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강하게 던지고, 받을때마다 표정이 일렁인다. 그 모습은 마치 간식을 앞에 둔 어린아이 혹은 강아지. 달려나가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는 얼굴이다.
인내심이 먼저 다한 건 아이나였다.
“리, 리 짱?”
아무래도 료에게서 받은 카드란 시간을 멈추는 주문이었던 모양이다. 리에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에. 그. 어. 그게. 여, 역시 갑자기 이러는 건 실례였나요?!”
당황하여 말하자 공마저 떨어트리고 멍해진 리에가 정신을 차린다.
“바, 방금. 뭐라고?”
“저기...료 씨가 이렇게 부르면 반응할거라고 하셔서...”
“됐으니까.”
결국 한 번 더 입에 담는다.
“리...짱.”
작지만, 들리지 않을리는 없었다. 리에는 붉어진 얼굴을 가린다.
“아이나가 편하면 그걸로 되긴 한데...”
그러자 생각하기를 잠시.
“그럼, 리에.”
“응.”
“저, 서운했어요.”
“응?”
의미가 다른 두 ‘응’.
“리에를 돕기로 한 건 제 의지이지만, 리에가 없었다면 선택할 일이 없었을 거에요. 리에가 저한테 하고싶은 것과 동료들과 친구를 준 거에요. 과장하자면 제가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전부 리에의 덕분이죠. 항상 베터리로서 함께하고자 하셔서 정말로 기뻤어요.”
“......”
“그런데 갑자기 말도 없이 피하니까. 저, 너무 불안하고 섭섭했어요.”
그 말을 듣고, 눈가가 촉촉해진 아이나를 보자. 리에의 입은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야. 좀 고민해서 피하긴 했지만 아무튼 아니야.”
일단 숨을 고른다. 그리고 리에 또한 주문을 외웠다.
“고마워. 약속, 지켜줘서.”
“아.”
“아이나가 그 애인지는 전혀 몰랐거든. 그래서 처음에 알고는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어. 그래도 알게됐어. 같이 야구를 하기로 해서 고맙고, 친구라고 말해줘서 기뻐.”
그러고는 다가와 손을 뻗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직후, 손은 닿았다.
“네!”
이윽고 언제나의 연습투구가 시작되었다.
말은 들리지 않아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는 곳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유우키와 마야.
“역시 친구 이상인 것 같은데.”
“유우가 그렇게 만들고 싶은게 아니고?”
“음...다른 사람은 몰라도 먀 짱은 여자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잠시 몸이 떨렸지만.
“농담은.”
남은 것은 밤공기를 가르는 배트 뿐.
합숙 1일차는 다행히 무사하고 성과있는 날이었다.
*정보)목욕은 2일차와 3일차에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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