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이 작품의 DC 알바는 한국어를 읽을 수 있고 일도 하거든요.
1.
인생 첫 알바를 DC에서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적어도 백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방학 중에 할 만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는데 사촌 언니의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말이 좋아 사촌 언니 친구지 그냥 남이나 마찬가지인데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아서 놀랐는데, 그게 아르바이트 알선이라 처음에는 뭔가 사기인가 싶었을 정도다.
그러나 면접 장소는 DC 서비스 운영 센터가 맞았고, 모처럼 만난 사촌 언니 친구는 여전히 입이 떡 벌어지는 미인이었다. 몇 살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목에 매단 직원 카드의 ‘총괄 팀장’ 문구가 알바생 입장에선 너무 눈부셔 보였다.
사촌 언니 친구, 예영은 백하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손을 잡고 센터를 일주했다. 사람들에게 백하를 소개해 주는 한편, 이 부서는 뭐 하는 곳 뭐 하는 곳 하는 소개를 들었지만 솔직히 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입장에서는 하나도 모를 내용이었다.
“그런데 백하 너 DC질은 좀 해 봤어?”
“아, 아뇨….”
사실 이전에 모 걸그룹 덕질할 때 카페와 DC갤러리에서 나름 네임드 취급을 받은 적도 있긴 했다. 해당 그룹이 멤버 간 연애 스캔들로 해산할 때 멘붕해서 다 탈퇴했지만.
“그래…? 음. 그럼 당분간은 얌전한 갤러리 위주로 관리하면서 여기 분위기 좀 익숙해지는 게 좋겠네. 너 사수에게 신경 써서 말해 둘 테니까, 한두 주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지내.”
“고, 고마워요, 언… 아니 팀장님.”
“아냐아냐. 갑자기 부탁한 건데 와 줘서 내가 더 고맙지. 부탁이 있긴 한데….”
부탁.
백하는 움찔했다. 예영이 딱히 자신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 있나?
“제발 길게 좀 해 줘. 방학 끝나면 야간으로 돌려도 되고, 적성에 맞는 것 같으면 정규직 입사도 할 수 있게 도와 줄 테니까.”
정규직이란 말에 귀가 쫑긋했다.
“너, 너무 잘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조, 좋긴 한데….”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심복? 이중간첩? 사내 정치 다툼? 회유? 배반?
머릿속에서 스쳐간 키워드들은 화려한 기업 드라마였지만, 예영이 토로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백하 너는 DC 잘 모른다니까 잘 모르겠지만 여기 게시물 관리라는 게 되게 징그러운 일이라 오래 가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그리고 관리 권한 이용해서 사고 치는 녀석들이 적지 않고….”
전자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익명 위주로 운영되는 사이트에서 관리 권한을 이용해서 무슨 사고를 친다는 걸까?
…백하는 얼마 후, 그 의미를 매우 잘 깨닫게 되었다.
2.
첫 업무는 운영진의 관리 툴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DC라는 사이트 자체가 오래된 게시판 서비스를 기반으로 수정을 거듭한 것이라 사실 기능이 그다지 많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 어렵거나 복잡한 툴은 아니어도, IT라곤 전혀 모르는 백하에게는 다 생소한 것이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1차적으로 알아야 할 일은 그저 게시판의 글을 보고 부적절한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문제시 되는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을 추적해서 차단 조치.
그와 동시에 몇 개의 게시판 리스트가 주어졌다.
“이건 백하 씨가 전담으로 관리하실 게시판 리스트예요. 백하 씨의 운영자 페이지 보면 이 게시판들의 신고 글들 올라오니까 보고 처리하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신고 글 게시판에 올라온 것들만 찾아서 확인하면 돼요. 아마 그것도 처음엔 좀 까다로울 테지만.”
얌전한 갤러리 위주로 관리하게 한다던 예영의 말대로, 백하가 받은 게시판들은 DC를 떠나 한국 인터넷 전체를 따져도 청정지역이라고 할 만한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름 DC질 경력이 오래된 백하는 갤러리 목록만 보고도 일이 쉽겠다는 생각에 입가를 관리하느라 애써야 했다.
다만 개중에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대세는 백합」? 이건 무슨 게시판인가요? 식물 관련?”
“아….”
사수가 목록을 보더니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저게 왜 저기 들어갔지…. 뭐, 괜찮…을 거예요…. 아마….”
* * * * * *
사수에게 속았다.
며칠이 지난 후, 백하는 그렇게 확신했다.
일단 처음에 안심했던 청정지역들이 전혀 청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소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야짤과 혐짤, 알바를 동원해 내부 다툼에서 승리하려는 놈들은 그런 곳에도 잔뜩 있었다. 다중이 짓으로 공작하는 놈들을 보고 있다 보면 인류애를 상실한다.
스포일러도 웃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루 만에 백하는 개봉 중인 모든 영화의 스포일러를 당했고,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게임의 엔딩까지 볼 수 있었다.
DC질 경력이 나름 되니 그런 것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고 생각한 백하였지만, 세상에는 아예 알바를 노리고 야짤이나 혐짤을 올려대는 놈도 있었다. 덕분에 사용자 차단 기능만은 금세 익힐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백하에게 더 골치가 아팠던 건 「대세는 백합」이라는 게시판이었다.
세상에! 백합이라는 게 뭔가 했는데 레즈비언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게시판을 전전하던 난민들이 예전의 웹 드라마 게시판에 정착했다는 것이었다.
여자끼리 커플이라니 말도 안 된다. 고작해야 사춘기의 일시적인 감정.
딱히 죄악시하지는 않아도 백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었다. 덕질하던 걸그룹이 그룹 내 연애 문제로 해산했다는 경력이 있었으니 영 곱게 볼 수 없기도 하고.
물론 마이너 갤러리라 완장이 관리를 하고 있어서 백하까지 손댈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업무 시간 동안은 담당한 게시판들을 확인해야 하고, 일이 쉽다는 데에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중이라 눈팅만은 착실히 했다. 담당한 갤러리 대부분이 글이 잘 안 올라오는 곳이라 더더욱 그랬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백갤이 딱히 다른 곳보다 더 유해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뭔가 이상한 공기가 흐르는 공간이었다.
여자 둘이 숨만 쉬어도 커플이라느니, 키스를 했으니 애가 나온다느니, 모녀 커플이야말로 근본이라느니, 초등학생에게 상냥한 학대를 하는 만화가가 갤주라느니.
역겨워 쓰레기 같은 놈들만 가득하잖아? 이 사람들 제정신인가?.png
백갤을 살피는 백하는 늘 이런 심경이었다.
그렇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3.
‘그녀’, 정확히 말하면 ‘ㅇㅇㅇ’은 종종 백갤에 단편 소설을 올리는 유동닉 갤러였다.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면 추천이 다다다닥 박히고 몇 페이지가 단편 이야기로 도배되는, 상업작에서도 보기 드물 듯한 인기를 자랑하는 글쟁이였다.
이 정도가 되면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게시물을 클릭해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백하의 세상이 뒤집혔다.
시리어스, 개그, 순애, 다크, 피폐물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데다가, 그 하나하나가 완성도가 높았다. 잘 정련된 문장은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그저 한 줄만으로도 백하의 심장을 멈췄다 뛰었다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백합’이기에 의미가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행간에 숨겨진 텍스트의 양이 풍성하고, 그걸 통해 설득력을 얻은 인물들이 교류하고 엇갈리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감정은 너무나도 진했다.
‘ㅇㅇㅇ’의 신작을 기다리는 자신을 깨달았을 때, 백하는 백갤을 관리하는 자신의 심경이 변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그렇다. 소녀가 둘 있으면 커플! 눈 맞으면 임신! 텅 빈 공간은 부재의 백합! 이토 하치는 갤주! …아니, 마지막 건 제외하고.
그리고 마치 백하를 저격이라도 하듯이, ‘ㅇㅇㅇ’은 첫 연작 단편을 내놓았다. 어떤 걸 그룹 내부에서 생겨난 연애 스캔들을 다룬 그 단편은, 각각 네 명의 주인공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충돌하였으며 어떻게 파국을 맞이했는가를 담담하면서도 격렬하게 그려냈다. 공감하고, 비통해하면서도,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게 만드는 걸작이었다.
백하는 울었다.
울음이 그치지 않아서 그날은 조퇴를 해야만 했다.
그 단편에는 평소와 달리 「이전에 덕질했던 걸그룹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라는 짤막한 후기가 있었는데, 즉 ‘ㅇㅇㅇ’과 백하는 한때 같은 덕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뭔가 흐뭇했다.
그리고 그때 문득,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리자는 게시글의 ip를 마스킹 없이 전부 확인할 수 있다. ‘ㅇㅇㅇ’은 유동닉이지만 ip는 늘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걸그룹 갤러리로 가서 ip를 확인해 보니 2년 전까지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ㅇㅇㅇ’은 얌전한 갤러였다. 특별한 활동은 하지 않고 멤버들 근황이나 UCC에 댓글을 다는 게 전부였다. 개인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기본 규칙을 지키고 있었지만, 종종 있는 게시판 내의 나눔 이벤트에 자신의 e-mail 주소를 적은 적이 있었다. adnakiel6886@gmail.com
(아마도 집의) ip와 e-mail 주소를 얻으면 단서는 확 늘어나는 셈이다. ‘ㅇㅇㅇ’은 DC에서 자신의 신상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기다 보면 개중에는 깊게 찍힌 발자국도 있는 법이다.
DC 게시판 전체에서 ip와 e-mail을 확인해 본 결과, ‘ㅇㅇㅇ’의 신상이 좀 더 선명해졌다.
‘ㅇㅇㅇ’이 아닌 ‘ㅇㅇ’으로 백갤에 글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직접 글을 쓰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 게시물에 대한 감상 정도였는데, 유독 납치/감금/조교 키워드에 꺄꺄 하는 모습이 많았다. 작가님 취향 이쪽이었구나?! 어쩐지 그런 쪽 쓰면 밀도가 장난 아니더라니?! 하고 깜짝 놀랐다.
XX여대 갤러리에 종종 글을 남겼다. 대학 근처 가게에 대한 소감이었는데 짤막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평가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작년에 1학년 필수 교양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고 있었으니 19학번이다.
플룻 갤러리에는 4년 전부터 글을 남기고 있었다. 종종 녹음한 걸 올리기도 했는데 문외한인 백하가 들어도 딱히 잘 분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몇 달 전 사용하던 플룻을 싸게 처분했다는 글이 눈길을 끌었다. 새 플룻이 곧 오겠지만 시원섭섭한 심경이라고. 쿨매라고 자기에게 팔지 그랬느냐는 댓글도 있었다.
백하는 네이버 중고나라로 달려갔다. 악기 판매 게시판을 확인하고 해당 날짜를 확인. 그 시기에 올라온 플룻 판매글을 확인했다. 있었다. 판매자 아이디 ‘아드나키엘’ 전화번호 뒷자리는 9889. adnakiel6886이라는 e-mail은 전화번호 뒷자리를 뒤집은 것이었다. 백하는 ‘ㅇㅇㅇ’의 휴대폰 번호를 획득했다!
휴대폰 번호와 ‘아드나키엘’/‘adnakiel’, 학교에 대한 단서가 추가되자 구글 검색으로 조금 더 많은 정보가 나왔다. 어떤 고등학교 홈페이지의 졸업생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그대로 찍혀 있었던 것이다.
허인영. ‘ㅇㅇㅇ’의 이름이었다.
백하는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이름과 휴대폰 번호로 이용자 검색을 돌려 보자 해당하는 고닉이 있었다. 해당 아이디는 성인 인증을 해야 하는 게시판 위주로 활동했고, 늘 통신사 ip였기 때문에 ‘ㅇㅇㅇ’의 ip를 조사했을 때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고닉을 이용하는 인영은 관련 게시판에서 연애 문제를 꽤 심각하게 상담하곤 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거나, 변태 같은 취향이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냐거나. 본인이 직접 삭제한 셀카 인증글에는 가슴이 꽤 드러나는 선정적인 것도 있었는데, 사진 한 쪽에 플룻 케이스가 찍혀 있어서 백하를 다시 한 번 안심시켰다.
게시판을 관리하는 일개 알바에게 주어진 권한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다각도로 흔적을 남기고, 개인 정보 관리를 게을리하는 서비스가 합쳐지면 그 부족한 권한으로도 꽤 많은 걸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백하는 처음 알바하러 온 날 예영이 걱정한 게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실천했다.
백하는 우선 인영에게 메일을 보냈다.
프록시를 쓰고 해외의 메일 서버에 새 계정을 만들고 어쩌고 하는 과정을 거쳤다. 알바 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뭔가 IT 지식이 엄청 늘어난 것 같다고 자신에게 약간 감탄하면서.
메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번에 쓰셨던 단편의 속편을 써 주세요!」
사랑하는 작가의 약점을 잡은 팬이 그럼 무슨 부탁을 하겠는가…?
4.
답장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백갤에 올라와 있던 ‘ㅇㅇㅇ’의 글들이 모두 지워졌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백하가 알아낸 정보가 사실인 걸 확인시켜 주는 근거가 될 뿐이었다.
백하는 ‘ㅇㅇㅇ’라는 유동닉을 써서 삭제된 글들을 다시 올렸다. 다시 찾아보기 편하도록 링크 모음도 함께 올리자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백갤러들도 ‘아, 게시물 정리하려고 다시 올린 거구나’하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백하는 다시 메일을 보냈다.
「지난번에 쓰셨던 단편의 속편을 써 주세요!」
나름대로는 엄청나게 고민해서 정한 문장이었다. 이 정도면 스토킹이나 협박으로는 보이지 않겠지. 설령 신고를 한다 해도 무시할 것이다. 백하는 한국 경찰의 게으름을 믿었다.
이번에는 답장이 왔다.
「너 뭐야? 뭐 하는 거야?」
「팬이에요! 지난번에 쓰셨던 단편의 속편을 써 주세요! 모두 좋아할 거예요!」
답장은 없었다.
12시간 후에 다시 한 번 메일을 보내려고 했지만, 없는 메일 주소라며 반송되어 왔다.
백하는 인영의 고닉 갤로그를 찾아가서 비밀글로 왜 메일 주소를 삭제했는지 묻고 제발 속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10분 후에는 해당 고닉이 회원 탈퇴를 시도했다.
이렇게 되면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귀가한 백하는 미리 사 둔 선불 유심과 중고 폰을 꺼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스토커로 판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집을 나와서 한참 떨어진 한강까지 갔다.
인영의 톡을 추가한 다음, 그녀가 쓴 상담글과 인증글을 메시지로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속편을 써 주세요.」
범죄성이 있을까? 협박이 될까?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하는 답변이 나오면 곧장 한강에 폰을 던져버리고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잘 거라고 맹세하면서.
5분 정도 후에 대답이 왔다.
「알았어.」
백하는 비명을 질렀다.
* * * * * *
‘ㅇㅇㅇ’은 다음 날 저녁에 약속한 속편을 써 주었다.
혹시 억지로 쓰느라 이상한 내용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인영의 글은 완벽했다. 애틋했던 결말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승화되어 보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ㅇㅇㅇ에게 노벨상을!’로 대동단결해 백갤 10 페이지가 채워졌다. 완장은 피를 토했을 것이다.
백하는 덜덜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감상평을 썼다. 적어도 인영이 쓴 글보다 한 글자라도 더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감상문을 받은 인영의 대답은 이랬지만.
「이제 됐죠?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하, 한 편만 더요! 이번엔 신작으로! 가근페 납감조 한 편만!!! 선생님도 좋아하시잖아요!!!」
* * * * * *
백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영은 손이 엄청나게 빨라서 단편을 요청하면 늦어도 이틀 내에는 한 편을 써 주었다. 모유플도 산란플도 자연스럽게 납득시키는 필력은 급한 일정에도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백갤러들은 ‘ㅇㅇㅇ’의 작품 러시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절대다수의 완벽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불쑥, 이게 인영에게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저기, 기말고사 기간이시죠? 힘드시면 안 쓰셔도 되는데….」
「정말 안 써도 돼?」
「…써 주시면 좋긴 한데….」
「쓰라는 거잖아.」
「그, 그런 게 아니라요…. 저에겐 작가님이 너무너무 소중하니까 무리하시지 않았으면 해서….」
답장은 한참 후에 왔다.
「됐어. 쓸 테니까 소재나 줘. 뭘로 쓰면 되는데?」
백하는 감동해서 울 것만 같았다.
기말고사 기간인데도 써 준다고 한다. 소재까지 적극적으로 요구할 정도다.
백하는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인영에게 흠뻑 반했음을 알고 있었다. 인영의 작품이 아니다. 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인영의 내면에 완전히 빠지고 만 것이다.
살짝 휴대폰의 앨범을 열어 인영이 보내 준 사진들을 보았다. 이전에 인영이 게시판에 올렸던 한 장만으로는 부족해서, 절대절대 유포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며 얻은 인증 사진들. 얼굴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신 상반신은 속옷 차림으로 찍었다.
백하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가슴골 위에 ‘백하 거’라고 매직으로 쓴 사진이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몸 중앙이 뜨거워지고 호흡하기가 힘들어진다.
진짜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에게 닿고 싶다…고.
「???」
인영의 메시지가 백하를 깨웠다.
백하는 굳게 결심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했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님을 만나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나는 팬이, 정체를 숨기고 작가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써 주세요.」
5.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마다 백하의 심장은 몇 배로 뛰었다. 일주일 전에 인영이 써 준 단편이 오늘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백하야.”
“네?!!”
멍하니 컴퓨터의 시계만 바라보던 백하가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하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도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예영 언… 아, 아니, 나 팀장님….”
“뭐 급한 일 있어? 5분 정도 남았는데 그냥 보내 줄까?”
“아, 아뇨….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일 잘하고 있다면서? 권 대리가 칭찬하던데. 백하 너 일 엄청 열심히 배운다고.”
인영을 스토킹하기 위해서였다곤 죽어도 말할 수 없기에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약속 있는 거 아니면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밥 먹으러 갈래?”
“아, 아뇨…. 죄송해요. 약속이 있어서….”
“데이트?”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예영은 피식 하고 웃더니 사무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 낮 타임 멤버들은 6시 되면 다 튀어나갈 수 있게 미리 준비하세요. 저도 오늘은 칼퇴할 거랍니다~.”
백하는 예영에게 감사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퇴근까지 7분 남은 시계는 죽을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듯했다.
* * * * * *
45분 후.
백하는 어떤 2층 카페의 창가 좌석에 앉아 있었다.
길 건너편으로 작은 카페가 있는 작은 상가 건물이 보였다. 낮 시간에는 잠깐 반짝하지만 오후부터는 손님이 전혀 없는 곳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1.5층에 있는 화장실 도어가 키패드식이라는 점이었다.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카페를 지나쳐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서 백하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상 확실할 것이다.
「말한 곳에 도착했어.」
「좋아요. 쓰레기통 뒤에 보면 작은 쇼핑백이 있어요. 거기 휴대폰 꺼내서 화장실 문에 붙이고, 이 번호로 영상 통화 신청하세요.」
3분 정도 지나자 영상 통화 요청이 왔다. 이쪽 화면은 비추지 않게 설정되어 있기에 안심하고 받았다. 뚜껑을 덮은 변좌 위에 앉아 있는 여성이 보였다.
「백에서 이어폰 꺼내서 끼고, 아이마스크 쓰세요.」
「미쳤어?!」
「이상한 짓 안 해요. 그냥 작가님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저 믿으시죠? 이미 인증도 많이 해 줬잖아요.」
영상 속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이어폰을 끼고 아이마스크를 썼다.
백하는 카페를 나와 인영이 기다리는 건물로 향했다. 핸즈프리로 바꾸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좋아요. 작가님 휴대폰은 바닥에 내려놓고, 백에 있던 수갑을 차 주세요.》
《당신 이거 범죄인 거 알아?》
《알아요! 알지만… 알지만 작가님이 좋단 말이에요! 나쁜 짓 안 할 게요. 여자끼리잖아요.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여자끼리 어떻게 하는 것만 써 달라고 했으면서….》
역시 또 긴 망설임.
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한순간 마음이 죄여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빨리 하세요. 없던 걸로 하기엔 너무 늦었잖아요.》
인영이 끝내 복종했다. 수갑을 양손에 차고, 불안한 듯 고개를 떨궜다.
이걸로 최악의 경우라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백하는 약간 안심하고서 화장실의 키패드를 눌러 문을 열었다. 움찔하는 인영을 향해 작게 소근거렸다.
“괜찮아요. 저예요.”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절부절못하는 인영이 보였다.
전신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크고, 길게 뻗은 다리가 고혹적이었다.
화장실 문을 닫고 그녀의 앞에 무릎으로 섰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것과 달리 가늘고 길어서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긴장했기 때문인지 극히 차가워서, 자기도 모르게 품에 안고 녹여주고 싶어졌다.
이것으로 목적은 달성했다고 해도 좋다. 손만 잡아 볼 수 있다면 충분했고, 그러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손은 떨리면서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가슴께에 손이 닿자 인영이 숨죽인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그냥 보는 거예요.”
블라우스 단추를 셋 풀어 가슴을 드러내자, 약속했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백하 꺼」.
자기도 모르게 인영의 마스크를 벗겨냈다. 이어폰 한쪽이 마스크 벗겨내는 서슬에 밀려 바닥을 굴렀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드러난 그 입술에 있는 힘껏 달려들어서, 정열적이라기보다는 자살하듯이 입맞춤을 했다. 도리질하며 피하려는 그녀를 꼭 붙들고, 실로 첫 번째다운 마구잡이 입맞춤을 계속했다.
“그래. 없던 걸로 하기엔 너무 늦었지.”
자신이 아까 했던 말이 되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리고, 부드러운 것이 백하의 혀와 얽혔다. 자신의 혀와 같은 기관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달콤한 것이 백하를 한껏 농락했다.
한순간에 주도권을 빼앗긴 백하가 영문 모를 오싹함을 느끼고 몸을 떼려 했지만, 인영은 백하의 상반신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가늘지만 힘 있는 양팔이 백하를 완벽하게 구속했다.
팔…?
수갑은…?
당연한 의혹에 얼어붙자 인영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장난감 수갑은 살짝만 비틀어도 열려. 백하 너, 아무것도 몰랐구나?”
그 목소리가, 놀랍도록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어서 백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앞에서 인영이, 아니, 인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이마스크를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예영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백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예영 언니…?”
“너도 참, 관리 권한 이용해서 사고치는 애들 때문에 걱정이랬잖니. 왜 언니 부탁을 안 듣고 그래.”
“어, 언니가 왜 여기에…? 자, 작가님은…?”
“그야 물론 나지. 설마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거니?”
예영은 천천히 자신이 한 일을 알려 주었다.
이전부터 몹시 사랑스럽던 백하를 노리고 준비한 트랩. 회사로 불러들여 백갤을 관리시킴으로써 백합 맛을 보게 하고, ‘ㅇㅇㅇ’의 뒤를 추적하게 하고, 그 와중에 얻어낸 사실들로 ‘ㅇㅇㅇ’을 협박하게 하는….
“왜, 왜 그런 짓을….”
“번거롭기 그지없는 짓이라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말이지, 너에게 되돌릴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단다?”
백하에게 그런 소질이 있다는 걸 예영은 눈치채고 있었다. 자각이 없었을 뿐이다. 자고로 ‘여자끼리 커플이라니 말도 안 돼!’라고 외치는 사람 중에서 레즈 아닌 이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해야 할 갤러리 목록에 백갤을 넣은 건 물론 예영이지만, 백하가 백갤을 정말로 혐오하고 피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ㅇㅇㅇ’의 글에 매혹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신상 추적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협박과 스토킹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글만이 아닌 작가까지 건드리고자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손만 잡고 돌아갔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그 무수한 기회를 차 버리고 여기까지 왔잖니? 그건 다시 말해서 이런 뜻인 거지.”
백하는 여기까지 올 운명이었다.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스스로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자, 백하야. 생각해 볼까? 네가 저지른 일은 하나같이 중죄란다? 개인 정보 보호법 위반에다 협박, 성추행…. 증거는 친절하게도 너와 내 휴대폰에 모두 남아 있고.”
“자, 작가님은 없잖아요….”
“무슨 소리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썼는데…. 아, 인영이를 말하는 거구나. 아쉽지만 실존 인물 맞단다. 내 조카거든. 이거 경찰서에 가져다주면 다 자기가 당한 일이라고 끄덕일 만큼 날 좋아하기도 하고.”
백하는 침을 삼켰다.
“자, 백하야. 이렇게 약점을 많이 잡혔고, 죄도 많이 저질렀으면, 무슨 일을 당해도 불평은 못 하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납치.
감금.
조교.
세 단어가 백하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뒤따르듯 찾아온 것은 공포와, 환희.
작가님은 실존한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ㅇㅇㅇ’의 글을 볼 수 있다. 바라던 접촉도 완료했다. 앞으로는 설령 싫다고 해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뭐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잖아…?
백갤문학 完.
---------------------------------------
※ 본작의 인터넷, DC 운영에 대한 묘사는 사실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 백하=백갤 하이, 나 팀장&예영 언니=나예영=범인, 허인영=噓人影=응 가짜.
※ 이전에 백갤문학 대회인가 했을 때 생각했던 건데 바빠서 못 쓰다가 문득 생각난 김에 마무리.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