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작가지망생 백붕이 버터롤빵이야.
지난 시간동안 백갤에 총 다섯 편의 창작백합을 올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 주셨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단편이 아닌 정식 연재로 바꾸게 되었어.
믿음직하고 포용력있는 OL 엘 퀸
마음 약하고 소심하지만 사랑스러운 앤 하우스
다소 성격 있지만 그만큼 강하고 굳건한 아이비 프로스트
장난끼 가득하지만 친구를 위한 마음만은 진실된 루시 데자이어까지.
이 네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 분량은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하고 싶어.
정식으로 바꾼 다음에도 내용이나 등장인물 등의 변경은 없을 거고 대신 앞으로 초커(Choker) 라는 이름으로 연재될 거야.
연재처는 정하지 못했으니 일단 계속 백갤에다가 올리려고 해.
항상 꾸준한 사랑 보내주고 내 글을 읽어주서 고마워. 궁금한 점이나 피드백 등은 댓글로 달아주면 작중 스포일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실히 답변해줄게.
하술할 링크는 가장 최신작이자 모든 단편의 링크가 있는 ' 앤, 내 사랑 ' 편이야.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ilyfever&no=567383&exception_mode=recommend&search_head=20&page=1
그럼 긴 글은 각설하고 내용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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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커, 자신이 선택한 달콤한 독, 그럼에도 여자는 웃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그 무엇이라도 쓰디쓴 독일지니. ]
엘 퀸의 아침은 번쩍이는 휴대폰의 알림으로 시작된다.
엘은 알람이 세 번 반복되도록 맞춰놓지만 그녀가 설정한 두 번째 알람이 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언제나 첫 알람에 눈을 뜬 엘은 부스스하게나마 머리를 들고 팔을 쭉 폈다.
그리고 침대 측면으로 몸을 틀어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곱슬곱슬한 금발이 은은한 새벽빛에 반사되었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새벽 05시 30분이었다.
다소 이른 기상이었지만 엘은 잠이 적은 편인 데다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어 감기는 눈을 비벼 정신차렸다.
블라우스와 몸에 딱 맞는 정장용 바지라는 수면에 적합하지 못한 복장을 입고 잠들었지만 어젯밤엔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약한 앤이었다.
앤은 상의를 벗고 시선을 벽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전날 밤에 앤과 지금까지의 관계보다 한 발자국 나아간 관계를 맺긴 했지만 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반쯤 나체인 것은 아직 붕대를 새로 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퍼런 멍 자국이 왼쪽 팔목부근부터 오른쪽 등허리까지 광범위하게 나 있고 특히 낙하물을 직접적으로 맞았던 목 아래 부분과 어깨는 차마 맨 눈으로 보기 괴로울 만큼 심한 상처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 가본 봐로는 그 안쪽까지 피해를 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도 며칠은 앓아누울 일을, 앤은 꿋꿋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 우움... "
앤은 엘이 일어난 탓에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눈꺼풀이 흔들리려 하기에 엘은 그녀가 곧 같이 일어나려다보다 했지만 앤은 눈꺼풀은 가늘게 떨리기만 할 뿐 벌어지지 않았다.
일렁이는 표정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
앤의 입술이 웅얼거렸다. 정확한 발음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앤은 꿈 속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엘은 가슴 한 구석이 시렸다.
이 작은 소녀는 자신을 낮추고 또 꿈 속 누군가에게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엘이 앤을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단순히 과하게 직원 교육이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심하게 떨리는 두 손, 그녀의 허리 아래로 내려간 몸과 흐르는 한 줄기의 눈물을 보자 엘은 교육으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절에 대한 그녀의 개념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 작은 강아지의 눈물을 그치게 하고 일어서게 만들고 싶었다.
동정심?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값싼 동정이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단지 엘은 이대로 무릎 꿇고 자신을 낮추며 눈물로 사죄하는 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엘은 갈비뼈 부근에서부터 손을 대어 서서히 올라가 그녀의 몸을 쓸어올렸다.
어깨와 등은 매우 세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되어서야 손가락이 멈추었다.
엘은 잠시 동안 앤의 머리칼 사이에 손을 넣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계속 사과하던 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앤의 목소리는 점점 웅얼거림이 심해지더니 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색색거리는 숨은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엘은 그제야 손을 떼어냈다.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 걱정하지 않고 잠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엘에게는 이제 큰 행복이 되었다.
앤이 다시 잠들자 엘은 침대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몇 시간 뒤에는 그녀도 출근해야 했다.
다행히 여분의 옷을 가져왔기에 엘은 아침 세안을 마치고 하얀색 블라우스를 볼륨이 넉넉한 분홍색 핀턱덱 블라우스로 바꾸었고 정장 바지는 긴 베이지색 스커트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같은 베이지색 조끼를 걸쳤다.
거울을 보면서 매무새를 다잡고 옷에 구김이나 틀어짐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특별한 복장 규정이 있는 회사는 아니지만 단정함은 최고로 치는 회사이기에 엘은 거듭 외모를 단장했다.
화장실 밖을 나가자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따스한 태양이 내려앉아 앤이 누워 있는 곳을 덥혀 주었다.
엘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본 뒤 간단히 아침을 준비했다.
식빵 두 조각을 토스터기에 넣고 달걀을 깨트려 달걀프라이를 준비하는 사이 포트기의 물을 끓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 앤을 위해 엘은 어떻게 하면 앤이 아침을 많이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했는데 그 해결법은 역시 고기였다.
앤은 소시지나 스팸 등의 가공 육류를 좋아했고 이따금씩 신선한 과일이나 풍미를 더해줄 치킨 수프와 함께라면 그녀치고는 꽤 많은 양을 먹는 것을 보았다.
스프를 끓이는 것이 장기인 엘은 앤의 집에 항상 일정량의 치킨 수프를 만들어 두는 것을 일과로 정했다.
프라이팬의 왼쪽에는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치킨 수프가 끓고 있었다.
엘은 찬장에서 커다란 접시를 꺼내어 토스트 두 쪽을 올려놨고 그 옆에 달걀프라이와 앤이 좋아하는 스팸을 두었다.
그럼 다음 사과 파이를 만들고 남은 사과 몇 쪽을 썰어 별도의 그릇에 담아두었고 마지막으로 감자와 당근 등을 넣고 묽게 끓여낸 치킨 수프까지 올려두었다.
이로써 앤의 아침 식사는 모두 준비되었다.
남은 것은 엘의 아침 식사로 하면 되니 뒤처리도 깔끔했다.
두 개의 식빵 조각이 토스터기로 들어갔다.
토스터기가 다시 열선을 올려 빵을 입혀갈 때쯤 엘의 핸드폰이 진동을 냈다.
엘은 휴대폰을 밀어 앤이 깰세라 목소리를 낮추어 받았다.
" 퀸입니다. "
앤에게는 들려준 적 없는 사무적인 어조가 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이른 아침부터 미안하네. 퀸 씨, 혹시 전화 받고 깬 건가? "
무겁고 규칙적인 발성을 내는 엘의 상사였다. 사뭇 배려심이 느껴지는 아침 멘트였다.
평소 일할 때도 이렇게만 해주면 좋으련만. 엘은 생각했다.
" 아닙니다. 아침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 그래? 부지런하구만. 요즘 사람들은 아침 잘 안 챙겨 먹던데. "
" 아침잠이 별로 없어서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상대방은 엘이 묻자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 그렇지, 엘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 그......자네가 처리해준 예산안 있잖나? 그거 좀 잘못된 것 같아. "
상사는 말을 무척이나 넘기기 어려워 했다.
엘은 위화감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잘못이 맞다면 이렇게 굳이 아침에 전화로 할 필요 없이 회사에서 자신을 문책하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굳이 이런 전화를 한다는 것은 엘의 잘못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 무슨 말씀이시죠? 제 자료에 하자가 있었나요? "
엘은 아닌 것을 알아도 한번 되물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까 상대방은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아니 자네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야. 자네는 정말 정리를 잘했어. 그런데...아무래도 타 부서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은 예산이 추가된 것 같아. 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이대로는 넘길 수 없다더군. 단순히 수치가 나왔으면 합계하면 될 일이지만 그쪽 과장과 통화해 봤는데 그쪽도 액수 파악은 못한 것 같아. "
엘은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만약 여기가 엘의 집이고 앤이 없었다면 진작에 뮤트 버튼을 누르고 쓴소리란 쓴소리는 다 내뱉었을 것이었다.
엘은 최대한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다시 전화를 받았다.
"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
" 미안한 이야기지만 예산안을 처음부터 다시 편성해서 결재올려 주겠나? 자료는 내가 첨부해뒀네. 확인하고 합산만 하면 될거야. 간단한 일이니 이거 하나때문에 야근하거나 그러진 말게. "
네, 당신이 빨리 결재를 올리라고 막내직원 세 명을 질책하지 않는다면요, 그리고 합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면 직접 하셨겠지요.
"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끝내서 드리겠습니다. "
엘은 마음 속의 소리를 죽이고 정중하게 전화를 받았다.
" 정말 고맙네! 내가 항상 퀸 씨를 긍정적이게 평가하는 거 알지? 부장님께도 잘 말씀드려 줄게. "
한껏 펴진 상사의 행복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 감사합니다. 그럼 승진소식 기대해도 되는 거죠? "
" 물론이지! 자네 오래 일했잖아? 이제 슬슬 선임사원 자리 벗어나야지. 응? "
" 그러네요. 이따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
" 그래~이따 보자구! "
전화는 끊어졌다.
엘은 휴대폰을 노려보며 온갖 말을 삼켰다.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잠깐이지만 곧 엘은 평온하게 화를 거두었다.
금방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어차피 굽신거리는 건 상사의 일이니 엘은 서둘러서 전수조사를 다시 한 다음 그걸 토대로 붙이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부하 직원 - 이래봤자 3명 - 들도 함께하면 퇴근시간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것이었다.
엘은 때로는 약자였지만 때로는 강자였다.
굳이 불필요한 이빨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확실하게 이득을 취하고 그 다음 자신이 유리한 입장일 때 아쉬운 티를 내 주는 게 가장 좋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앤을 만나러 올 시간이 마뜩잖다는 것이었다.
엘과 앤의 집 거리는 가깝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리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몇십 분 안에 가긴 하지만 회사를 생각하면 퇴근하고 나면 앤의 집을 찾아가기에도 쉽지 않았다.
" 집을 이쪽으로 옮길까? "
엘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사는 집은 그녀 혼자가 살기엔 너무 넓었다.
앤에게 같이 살까 권유할 마음도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이번엔 앤이 출근해야 할 거리가 길어진다.
하지만 엘은 루트가 달라질 뿐 출근하는 거리는 비슷해지기에 노선만 바꾸면 될 것 같았다.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침대의 이불이 움직였다.
" 일어났어요?... "
부시시한 모습의 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엘은 방금 전까지 머리를 채우던 고민이나 기억하기도 싫은 예산안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앤에게 다가갔다.
앤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리고 아직은 약간 부끄러운 양 팔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 미안해요 혹시 전화 때문에 깼어요? "
엘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 아뇨...맛있는 냄새가 나서 깼어요. "
앤이 대답했다.
엘은 침대 위로 비스듬하게 몸을 걸터앉아 앤에게 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 앤이 좋아하는 거 많이 해놨으니까 꼭 다 먹고 출근해요. 알았죠? "
" 엘은 벌써 출근해요? "
앤은 아직 7시도 되지 않은 시계를 보고 물었다.
" 어...잠깐 회사에 문제가 있어서요. 상사가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세요. 그분은 자잘한 일은 잘 못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도와 드려야 해요. "
앤에게 맞춰진 설명이었다. 앤은 엘과 상사의 관계나 그 상사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 그렇구나...힘들겠네요. 어떻게 해요 잠도 별로 못잔 거 같은데. "
" 전 원래 잠이 별로 없어서 괜찮아요. 알죠? "
싱그러운 미소가 앤의 마음을 안심시키길 바랬다.
엘은 앤의 마음에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말해야 했다.
" 그래서...아마 당분간은 오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일단 확실히 안되고 길어지면 내일이나 모레까지도 그럴 수 있어요. "
" 그렇게나 바빠요?... "
앤이 걱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만은 거짓이 없는 소리였다.
" 우리 회사가 좀 그러네요. "
엘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잠깐 동안 앤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먼 곳을 보았다.
" 어쩔 수 없죠. 엘은 저랑 달라서 정식으로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잖아요. "
별거 아닌 거 같은 말인데도 앤의 입에서 나오니 씁쓸하게 들렸다.
앤의 나이에 시간제 근무를 하는 것이 흠은 아니지만 앤은 엘과 있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 부분을 매우 신경쓰고 있었다.
" 앤도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요. 금방 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엘은 앤의 머리칼을 흔들어 주었다.
앤은 그녀의 어깨와 머리 사이에 손이 불쑥 들어오자 눈동자가 커졌지만 이내 고개를 손쪽으로 젖혔다.
그리고 느리게 그녀의 볼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보고 전날 밤에 식혀뒀던 엘의 마음이 다시 불씨를 드러내고 있었다.
엘은 기울어진 앤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엘의 혀는 일어난 마당인 앤의 구벽을 쓸고 앞니를 가볍게 건드려 주었다.
앤은 숨을 참다가 엘의 혀를 받아들이고 살포시 그녀의 혀를 내렸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기 쉽도록.
엘은 조금 늦게 입술을 떼어냈다.
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며 한껏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이틀 사이에 그녀는 처음을 두 번이나 갱신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대로 앤을 눕히고 싶지만 전날 밤에 자신이 맹세했던 걸 깨는 꼴사나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를 타서 앤이 키스를 허락하였을 뿐 앤은 아직까지 다른 사람의 손길을 다소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엘은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
" 네...잘 다녀오세요. "
" 나 없다고 외롭거나 그런 거 아니죠? "
" 아니에요...... "
앤은 이불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엘은 지금처럼 출근하기 싫었던 적은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상사에게 된통 깨졌을 때 이후로 없었다.
" 꼭꼭 전화해요. "
엘은 앤의 귓가에 속삭이고 마무리로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앤의 목 살갖을 끌어당겼다.
가벼운 마찰이 앤의 입에서 비음을 흐르게 만들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앤은 가늘게 눈을 떨면서 엘의 손을 붙잡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엘은 자신의 손길이 제대로 닿는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 먼 곳까지 밀어두어야 했다.
" 네...전화할게요. "
앤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엘은 침대를 벗어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다잡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이제 나갈 시간이었다.
메시지를 보려고 잠금해제한 화면에 지도가 떠올랐다.
앤과 엘의 집 위치, 그리고 회사의 위치가 찍힌 지도였다.
" 저기 앤, 내가 이쪽으로 이사 오면 어때요? "
현관문을 열고 멍하니 서 있던 엘은 앤을 뒤돌아 보며 물었다.
" 이사요? "
" 네. 지금 있는 집 계약이 얼마 안 남았거든요. 어차피 집을 새로 알아봐야 하는데 이왕 그럴거면 앤이랑 가까운 쪽이 좋을 것 같아서요. 회사 거리는 어차피 저는 거기서 거기에요. 버스 노선만 다른 걸 타면 되거든요. "
반은 거짓말, 반은 진실이었다.
다른 것은 다 진실이지만 집 계약은 아직 좀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다소 사정을 한다면 인심 좋은 집주인이 그 정도는 허락해 줄 거라 믿었다.
제대로 말한다면 앤이 반려할 거라 생각하기에 만들어 낸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 ......저는 정말 좋아요. "
앤은 잠시 동안 생각하다 대답했다.
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앤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서둘러서 방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지만이 회사를 다녀오면 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지금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밥을 많이 해줄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질 수 있었다.
" 그럼 이 근처 쪽으로 - "
" 이 집에서 같이 살면 안 될까요? "
엘은 가슴이 철렁했다.
무거운 철문이 자신을 누른다는 것도 잊은 채 앤의 붉어진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말보다 더 큰 무게감이 되돌아왔다.
" 이 동네는...집이 다 낡아서...엄청 더러워요. 그나마 깨끗한 곳이 이 곳인데...다른 곳은 다 가족용 방이라서.....그러니까 제 말은..... "
갈 곳 잃은 시선과 어순이 안맞는 횡설수설이 교차했다.
앤은 무엇인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엘과 앤이 있는 좁은 방을 향했다.
어긋난 사고회로와 붉어진 얼굴은 반 나신인 앤의 모습과 겹쳐서 엘로 하여금 무한한 마력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말을 계속하던 앤은 아침이라 조금 늦은 사고회로가 뒤늦게 작동했다.
" 아...아니에요 지금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이 좁은 집에 같이 살자니...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미안해요. "
아주 작은 일말의 욕심을 표출하고 그 말의 댓가를 이해한 앤은 눈을 꼭 감고 잊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또 사과했다.
곱게 손을 모으는 모습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던 앤의 사과가 떠올랐다.
엘은 문을 벗어나다 말고 문이 쾅 닫히건 말건 힐을 재빨리 벗어버리고 앤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엘의 모습에 놀랐는지 앤은 이불을 밀쳐내어 버렸다.
목 아래 뽀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제 옷 위로는 자세히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성인 여성치고도 작긴 하지만 붉은 과실 한 쌍 품에 가슴에 안고 있는 앤은 가슴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곡선과 탄력있는 복부, 그리고 슬쩍 드러난 치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그 곳은 아마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 안될 건 없죠. "
엘은 다소 거칠게 앤의 어깨를 붙잡고 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어제 앤이 자신에게 해 준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 가족용 방으로 들어가면 되죠, 우리가. "
엘 혼자도 아니고 앤 혼자만은 더더욱 아니었다. 엘은 ' 우리 ' 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앤의 순흑색 눈동자에 빠질 것 같은 엘은 어째서 자신이 그녀에게 흔들리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 자세한 건 이따가 이야기해요 내 사랑, 출근 잘하구요. "
엘은 구두를 고쳐신고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이번에야말로 현관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앤의 얼굴이 어때었는지는 황급히 나가느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관문에 기대어 연약하고 보드라운 앤의 가슴을 세게 움켜쥘 뻔한 자신의 이성을 탓했다.
엘은 자신이 자제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나 방금처럼 앤이 돌발행동을 할 때면 그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해지고 마음이 위태로워졌다.
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엘은 이제 그만 아름다운 행복한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지독한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나 잔인하지만 이래야지만이 엘의 지갑이 채워진다. 엘이 지갑이 얇다면 앤에게 신경쓸 시간도 줄어들 게 뻔했다.
엘은 부하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돌리면서 막대한 양의 숫자와 전쟁을 치룰 출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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