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의 보빔임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마주치긴 하나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 보빔 아님?

나는 덜그럭 소리를 내며 앞을 향해 나아간다.

조금 바퀴가 헛도는 듯한 미세한 고주파음이 귀를 스친다.

저 맞은 편에서 바람을 찢어가며 달려오는 게 '그 열차임을 나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지만 헛기침 두 어번 하고는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다듬는 척을 한다.

그렇게 머리를 다듬은 인간 여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아마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2초 남짓.

말 한 마디 겨우 나눌 정도의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말보다는 눈짓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약속을 한 적은 없었으나

우리는 암묵적으로 눈을 맞추고는 웃거나 위로하거나 그리 했다.

잘 잤어요? 아침(기름)은 챙겨 먹었어요?

나는 그 시간만 못내 그리워하며 멍을 때리다 혼나기 일쑤였다.

스쳐지나가는 너에게서 철이 부딪치며 나는 탄내가 아니라 낯선 꽃향기가 난다.

이질적이지만 싫지 않은 그 향은 코로 들어와 온 몸을 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기다가

뇌에 다다르면

아, 온전히 너를 느낀다.

이런 나날들이 계속 이어진다면, 벗어날 수 없는 기계의 슬픈 반복에도 꽃이 핀다면

그런 삶에도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게 너였다.

그런데 41054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지옥같이 반복되는 일상, 무채색에 빛이라고는 무심하게 점멸하는 인공 전등뿐인 삶에

유일하게 마음을 덥히는 네가 사라졌다.

기계에 욕망은 없다.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몸을 바쳐 일하다

수명이 다하면 잠들 거나 뜨거운 열에 녹아 새로 태어나 거나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기계의 운명이었다.

보러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 나는 두 눈을 꾹감은 채 묵묵히 일에 열중했다.

머리를 비우고 달리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기를 몇날

41504호가 폐차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예상한 것만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외롭겠구나 싶었다.

41504가 떠난 후에 대대적으로 예방 정비가 있었다.

아마 예방 정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더 쓸 수 있었던 부품을 공연히 내버려서일 것이다.

어찌 되든 상관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기계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의 인생을 위한 부품이었고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스스로가 정할 수 없는 비참한 미물이었기에

나는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앞다투어 튀어나오는 도중에

점점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익숙한 향이 코를 스친다.

나는 직감했다. 이제 더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객실에 달린 알록달록한 꽃들과 푸른 초원들이 그려진 그림들.

내가 가보지 않았고 갈 수도 없는 아름다운 장소.

기름냄새가 몸에 잔뜩 배고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추한 나보다는 웃는 게 아름다웠던 그 아이에게 더 어울릴 그곳.

나는 41504의 포근한 품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다시는 잊지 않게

나의 이름은 2102임

틀딱들은 뭔지 알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