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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2년전 소종갤에 올렸던 글

ㅇㅇ(175.123) 2020.07.29 23:41:21
조회 779 추천 2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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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빛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일렁이는 빛의 덩어리 안에는 네가 앉아있다

나는 말 없는 너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책을 읽는 거야? 하고 물어봐도, 이제 너는 간단한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너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의 온기를 느껴보고 싶지만, 손끝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다

유일무이하게 소중한 네가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는 게 많은 너에게 물어보고 싶다.

 

   

책으로 쌓아 올려진 성과 같던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는 너를 보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던 것을 후회한다

남아 있는 식량과 연료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너에게 조금 쉬었다 가자고 했던 것을 후회한다

무작위로 집어 든 책의 그림을 훑어보는 것이 지겨워져 멍하니 너를 바라보고 있을 때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했던 것을 후회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너의 모습은 나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후회하지만, 이곳이 네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기에 이제와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기억한다

책은 기억의 기록이라고 네가 말했었다

그렇다면 치토에겐 그동안 여행을 하던 우리의 기억보다 책의 기억이 더 소중해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나간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나에게 기대 잠이 들던 것도, 내 품속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것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냐고 속삭였던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가득 차올라서 펑, 하고 터질 것만 같다

이곳에 있는 모든 책을 빠짐없이 케텐크라트에 담아 우주로 나가고 싶다

태양의 표면에서 책들을 불태우는 상상을 한다

씩씩거리는 너의 앞에서 나는 배를 잡고 깔깔대고 있다.

너는 나의 이런 점이 어린애 같다고 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너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책을 손에 쥐고 있다

읽던 책을 끝마치면 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책을 찾으러 일어났다

오늘도 그런 너를 내버려 두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터덜터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 기억났다.

너는 책을 읽으며 커피를 홀짝이는 것을 좋아했다

마지막 커피 믹스를 뜯으며 아쉬워하는 너를 보고 네가 잠들었을 때 몰래 로켓 안으로 돌아갔던 날을 떠올린다

다리를 절며 커피 상자를 들고 돌아온 나를 보며 네가 고맙다고 말했던 것이, 너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밧줄을 풀어 삐걱거리는 난간에 단단히 묶는다

반대편을 허리춤에 묶고 조심스럽게 로켓의 잔해를 향해 하강한다.

    

 

고철 더미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뒤적거린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커피 봉지들이 발에 차였다

반쯤 부숴져 있는 철문 사이로 못이 박혀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네가 없으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문틈 사이를 비집고 상자를 끌고 나왔지만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상자에 적혀있는 검은색 글자들이 꾸불꾸불 몸을 뒤틀린다

점점 몸집을 키우더니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위협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 있는 장벽은 글자가 아닐까 싶다

네가 너의 세계에서 나를 추방한 이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겨우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는 바닥의 쇠파이프를 집어 상자를 향해 내리치기 시작한다

쇳덩이가 상자에 부딪힐 때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작은 나무 조각들이 이리저리 튀어 오르고 그러잡은 손으로는 짜릿한 충격이 전해진다

글자들이 사라지자 나는 파이프를 떨어트렸다

어지럽다

뺨따귀가 아리다

땀방울이 피와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자 속의 통조림 따위가 뭉개져 있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치토, 네가 밉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 생각에 스스로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였는지 기억하기도 힘든 지나간 나날 중, 너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케텐크라트의 리듬에 맞춰 덜컹거리고 있을 때였다

너는 사랑이란 두 사람이 좋아하는 감정이 있을 때 시작되는 거라고, 그렇게 읽은 적이 있다고 종알거렸다

그 말에 바보같이 그거 나랑 하면 안 되는 거야?’, 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궤도가 눈 위를 지나가는 소리나 엔진이 연료를 태우는 소리 따위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 말이 없던 네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내 눈을 응시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볼 따귀는 추위 때문인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른손에는 기름 램프가 들려있었다

우주같이 어둡던 도서관은 오렌지빛을 내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내가 저지른 일인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불태운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불태웠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태양과 같은 불구덩이 속 네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하늘하늘 흩어지는 불씨들이 우리 사이의 공간을 떠다닌다.

너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드디어. 

너는 나를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았으면 진작에 할 것이지, 그동안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몇 분간 입을 뻐끔거리던 너는 슬프게 웃어 보이고 이내 일렁이는 불길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차오르는 연기 속에서 나는 콜록이며 네가 사라진 곳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왼손은 네가 쓴 우리의 일기를 쥐고 있었다.

   

 

내게 남은 기억은 그 일기뿐이었다

그것은 분명, 이 세상의 유일한 책이리라

나는 그 책을 읽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읽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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