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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무협] 오월동침(吳越同寢) - 上

synara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8.29 23:56:28
조회 430 추천 18 댓글 14
														

무림인은 성벽을 타넘고 철문을 찢어발긴다. 그렇기에 무림인이 수십 명만 모여도 그 자리는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피로 피를 씻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날카로운 꽃이 피웠다. 잎은 은빛으로 번뜩이는 묘도였고, 뿌리와 줄기는 그것을 휘두르는 여자였다.


키는 유난히 컸지만 몸은 말랐고, 고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면서도 아이 같은 장난기가 서렸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공기에 스미듯 춤을 추었다. 칼날이 적을 홀리고 칼끝은 그들의 목숨을 후볐다.


흐르는 피를 받아 마시며 그녀가 피우는 꽃은 더 크고 화려해졌다.


천마를 떠받치는 마교의 네 기둥[四魔楹] 중 하나, 화유설(花柔雪)은 피의 화단 한가운데서 생각했다.


'심심해.'


고리타분하고 나이 먹은 남정네들 따위 백 명을 죽인들 의미가 없다. 차라리 화단의 잡초를 뽑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과 도법은 적을 홀렸지만, 반대로 적들은 그녀를 홀리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다른 곳에서 교도를 이끌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유설과 같은 하늘 아래 있었다.


그녀은 그 한 명, 남궁영인(南宮永仁)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하긴, 영인쯤 되는 검사를 상대하려면 마교도 한두 명으로는 모자랐다. 적어도 다섯 명 정도가 영인에게 달라붙어 있을 테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설은 영인을 끌어들일 미끼를 찾았다. 같은 가문 출신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 사람은 혈육의 정에 얽메이지 않지만, 그런 모습을 연기해야 하니까.


그러던 유설의 눈에 남궁세가 가주의 아들이 보였다. 이름은 모른다. 기억하려고 했던 적도 없다. 유설은 그에게 덤벼들었고 오십 초만에 그의 오른팔과 검을 빼앗았다.


영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남궁가 사람을 찾아 베었다. 두 명을 죽이고 명을 불구로 만들자 영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홀린 듯 영인을 바라보며 유설은 생각했다.


'난 여자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장을 한다. 아무리 강하고 잘생겼던들 남자에게 이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영인은 아름다워 보였다.


영인은 유설보다 키가 작았다. 딱히 책 잡을 일은 아니다. 유설은 유난히 키가 큰 편이니까.


영인은 몸이 가늘었다. 역시 책 잡을 일은 아니었다. 유설은 근육 넘치는 남자가 싫었다.


옷을 잘 입지도 않는다. 적당히 예스럽고 정갈한, 남궁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을 뿐이었다. 유설은 신경쓰지 않았다. 옷을 잘 입지만 실력이 모자란 사람보다는 옷을 못 입어도 강한 사람이 좋았다.


그리고 영인은 강하다. 어쩌면 유설보다도.


유설은 재차 생각했다.


'정말로, 여자만 좋아하는데…….'


어쩐지 영인이 싫지는 않았다. 유설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그 순간 영인의 검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유설의 눈앞을 채웠다. 그 사이에 날카로운 검광이 번갯불처럼 꽂혔다.


유설도 칼날의 꽃을 피웠다. 소나기가 꽃을 적시듯 유설의 묘도와 영인의 검이 한데 뒤섞였다.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에 유설은 몸을 떨었다. 적을 홀리고 목숨을 취하는 그녀가, 오히려 영인에게 홀렸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그 속에서 의문이 피처럼 흘렀다. 이 사람의 검은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영인에게 배를 뚫리는 순간까지도, 유설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내장을 헤집는 아픔 속에서 유설은 영인과 눈을 마주쳤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제 알겠네."


유설은 입술을 핥았다.


"여자였군요."


영인의 눈이 다시 단호해졌다. 그가……. 그녀가 손목을 비틀었다. 내장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 좋아하고."


칼날이 옆구리를 찢으며 빠져나왔다. 유설은 울컥 피를 토하며 무릎 꿇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영인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알아차린 너는 여기서 죽을 텐데. 내 알 바인가? 그렇게 말하는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쁘다.'


유설은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영인의 차가운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그쪽으로 뻗으며 유설은 상상해보았다. 저 낙낙한 옷 아래 숨겨진 옷은 어떤 모습일지.


나중에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 * *



그리고 한 시진 뒤, 시체 더미 속에서 눈을 떴다.


'죽는 줄 알았다아…….'


불사신이 아니었다면 즉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목과 머리를 분리하지 않는 한 불사신이었지만, 아무튼 살아남았으니 세세한 것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가까운 데서 확 파고드는 탄내가 더 중요했다. 누가 불이라도 지른 듯했지만 유설은 꾹꾹 참았다. 당장 움직이기는 부담스럽다. 주변 상황도 모른다. 주변에 정파의 고수들이 잔뜩 있기라도 하면 애써 되살아난 목숨도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움직여가며 시체 더미를 파고 내려갔다. 꼼지락꼼지락 땅을 파 그 아래로 숨으며 유설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남궁영인을 남자로 알고 있다. 방계 출신이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 가주가 될지도 모르는 천재라고 검사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여자였다. 스무 해 넘게 잘도 숨기고 있었지만 비밀은 언제고 밝혀지는 법이다.


그러고 나면 영인도 지금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서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타오르는 시체 아래서 유설은 말갛게 웃었다.



* * *



정의는 승리한다. 정파의 무인들은 곧잘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기는 사람이 정의라고. 정파는 올바르기 때문에 정파가 아니라 강하기에 정파인 것이라고.


올바르기 때문이든 강하기 때문이든, 어쨌든 정파 연맹은 마교에게 승리했다. 천마는 큰 상처를 입고 모습을 감췄고 네 명의 마영 중 둘이 죽었다.


그래서 남궁영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겼고 앞으로도 이기는 쪽에 설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혈도마녀(血刀魔女) 화유설을 베었다는 이름값은 귀하고도 무겁다.


무림맹 이곳저곳에 불려가며 인맥을 쌓는 동안 영인은 유설에게 감사했다. 제 손에 죽어 주어서. 그리고 친척의 팔을 잘라서.


오른팔을 잃은 친척, 남궁윤은 가주의 아들이다. 영인보다 실력은 몇 수 떨어졌지만 그 배경 탓에 무시할 수 없는 가주 후보였다. 하지만 오른팔 없는 검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넓디 넓은 중원 어딘가에는 잘린 팔다리를 대신할 수 있는 기물(奇物)이 있다고 하지만 금방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주가 아들의 팔을 되찾아주려 애쓰는 동안 영인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리를 굳힐 생각이었다. 짧지 않은 외유 끝에 본가로 돌아온 영인은 멀찍이 보이는 대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겼다. 방계로 태어난 내가. 여자로 태어난 내가. 남장으로 정체를 숨겨가며 무림을 떠돌고 실력을 키운 끝에.


"하."


웃음이 반짝 터졌다. 영인은 남궁세가 본가로 다가갔다. 문지기가 일찍이 그녀를 알아보고 문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일 때는 이러지 않았다. 이름이 무어냐. 신분패는 있느냐. 이것이 네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지?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날 수 없다. 영인이 가주가 될 테니까. 앞으로 평생 남자인 척하며 살아가야겠지만, 그래도 가주가 될 테니까.


영인은 문을 넘었다. 단단한 석판이 깔린 넓다란 전원(前園) 양옆으로 남궁세가의 검사들이 줄지어 섰다. 그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으며 영인은 전원을 가로질렀다. 입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린 채.



* * *



그 날 밤, 돌아온 영웅을 환영하는 주연이 열렸다. 가주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영인은 그가 직접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가주의 얼굴에 도로 뱉어버렸다.


며칠 뒤, 흑운신검 남궁영인이 병상에 누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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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예전에 쓴 거 문장 살짝 다듬고 제목 바꿔서 재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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