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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다.
새하얀 도화지에 그려진 푹신한 정맥. 그 감촉과 옅은 열기가 너무나 황홀했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상적인 팔뚝을 만지고 쓰다듬었다. 행복이란 이런것일까?
그러나 사람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주변의 다른 것들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흥미진진한 야구 경기를 보는 동안 누가 불러도, 앞에 곰이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광맥을 마구 파헤치다 보니 이미 끝나버린 영화와 나를 향한 여자의 검은 눈빛을 깨닫지 못했다.
백색소음처럼 들려오던 영화의 소리가 사라진 것을 문득 느끼고 고개를 들자 여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입가는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아주 살짝 파여 들어간 보조개가 마르고 가는 얼굴 선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무언가 치명적인 것을 감추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내 시야가 갑자기 변했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라지고 새하얀 천장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어깨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고 나서야 내가 바닥에 눕혀졌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내가 눕혀졌다고?
상체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려 했지만 가느다란 손이 내 가슴을 지그시 눌러 제지했다. 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절묘한 각도로 누르는 바람에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내 가슴을 누르고 반대쪽 손으로는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한가닥으로 모으고 있었다. 어느새 여자는 가냘픈 몸으로 내 몸 위로 타올랐다.
"가만히 있어요."
감미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집 밖에서 들은 다소 저음이 섞인 목소리가 아닌, 목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농후함을 잔뜩 담은 끈적한 울림으로 내 정신을 앗아갔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내 가슴 둔덕에 올라간 여자의 새하얀 손등에 약간 상기된 정맥들이 내 눈길을 뺏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침대에 놓여있던 싸구려 머리띠로 머리를 묶었다. 목덜미를 드러내는 매혹적인 포니테일이 완성되었다. 도화지처럼 하얀 목 옆으로 살짝 흘러내리는 삐뚤한 포니테일이 관능미를 뽐내고 있었다.
한낮의 햇빛이 여자의 등 뒤로 내리쬐면서 드리운 그림자가 압도적인 밤을 연출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터인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금붕어 마냥 뻐끔거리며 여자의 야살스러운 손길에 그저 내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여자가 옅은 분홍 빛 립스틱을 바른 자신의 입술을 햝으며 허리를 굽혀 내게로 다가왔다.
난생 처음으로 여자에게 깔려버린 순간이었다.
거울이 없어 내 표정과 얼굴빛을 알 수 없었지만 불타오르고 있으리라고는 짐작이 되었다. 아마 지금 사람 많은 곳에서 체온 측정을 하면 열이 있다고 쫓겨나겠지.
"긴장 풀어요.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요."
수십번은 족히 해봤을 행위지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까는 쪽이지 깔리는 쪽은 아니었으니까. 첫 경험이라면 첫경험이라 부를 수 있었다.
깔린 채로 보는 경치는 이런거였구나.
내 앞의 깡마른 여자가 너무 크게 보였다. 태양의 역광도 짙었고, 사람은 보기보다 무겁다는 조금 실례되는 생각도 했다.
생각들이 한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고 뒤죽박죽이 되었다. 예쁜 여자에게 깔려버리면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구나.
여자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열기를 지우는 차가운 손가락의 냉기가 역으로 나를 더더욱 불태우고 있었다.
여자의 자그마한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끔 감았다. 시야가 암전되어 두근거리는 고동과 여자의 무게감만이 느껴졌다. 짙은 장미 향기도 내 코를 간질였다. 점점 다가올 여자의 입술을 생각하며 손으로 숫자를 세었다.
1, 2, 3, 4 ......
의미 없는 정수의 나열을 계속 하던 나는 50정도를 세고 나서 이변을 느꼈다. 당장 키스할 기세로 다가오던 여자의 입술이 느껴지지 않는다. 짙어지던 장미향도 더이상 짙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올려본다. 점점 넓어지는 시야의 틈으로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다시 봐도 너무나 예쁜 그 얼굴에 미소가 번져있다. 올라간 입꼬리가 날카로웠다. 마치 악마처럼 여자는 웃고 있었다.
"갑자기 눈은 왜 감아요? 무슨 상상을 했길래."
쿡쿡대면서 여자가 배를 잡고 웃었다. 소녀의 순정을 가지고 놀다니. 농락당했다는 언짢음과 웃는 모습이 깜찍하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늘진 여자의 얼굴에 도는 청량감이 새로웠다.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여자의 손가락이 슬금슬슴 아래로 내려온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이 물방울이 흘러내리듯 목덜미에서 쇄골로, 가슴 둔덕으로, 명치로 내려갔다. 10월의 애매하게 두꺼운 옷이 싫어졌다. 얇은 여름옷처럼 손가락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도, 두꺼운 겨울 스웨터처럼 아무 느낌 없이 보기만 할 수도 없는, 느껴지지만 느껴지지 않는 애달픈 감각이 나를 괴롭혔다. 여자는 절대 옷 속으로 손을 넣지 않았다. 잘 다듬어진 뭉뚝한 손톱과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나를 농락했다.
어느새 배꼽 근처까지 간 손가락의 냉기가 빙글빙글 돌면서 열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내려간다면 꼼짝없이 그렇게 되는 걸까.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자신을 생각하자 수치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때, 숨소리만이 지배하던 방에 이질적인 고동이 들려왔다.
'꼬르륵......'
정적이 찾아왔다. 여자도, 나도 순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듯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소리의 의미를 시간차로 알아차린 나는 엄청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불타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보다 한박자 늦게 여자가 폭발했다. 풋 하는 비웃음 같은 소리에 뒤이어 폭소가 터져나왔다.
여자는 배꼽을 잡고 허리를 구부린 채로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내 위에 올라탄 채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예의도 없이 웃어댔다. 약하게 흔들리는 검정 포니테일이 시선을 끌었다.
경박하게 웃는 모습마저도 그림이 되는 사람이었다.
한참 웃는 동안 수치심으로 덮여있던 얼굴의 열도 조금 식고 여자의 웃음도 잦아들어갔다.
"그러고보니 그 쪽, 아까 식당에서 아무것도 안시켰죠? 배고팠겠다."
보석같은 눈물을 훔치면서 여자가 오랜 침묵을 깼다. 뭐 웃음 소리가 채우고 있었으니 침묵은 아니었나. 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놀림 거리로 만든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너무 제 생각만 했나보네요. 간단하게 카페라도 들를 걸 그랬네요."
"아니에요. 먼저 권했던 건 저니까요. 게다가 그쪽은 이미 밥을 먹기도 했으니까."
여자가 내 위에서 떨어진다. 일어선 그는 바닥에 꼴사납게 누워있는 내게 가느다란 손목을 내민다. 일어나려고 힘껏 잡으면 부러져버릴 것만 같은 손목. 나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잡은 손목을 슬쩍 손가락으로 쓸자 정맥의 통통함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 했다.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놀란 듯 했지만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전 괜찮으니까 뭐라도 먹을래요?"
"배 부르지 않아요? 배부른 사람 앞에서 막 먹어대는 것도 그런데."
괜한 자존심을 세우며 거절했지만, 낮이 될 때까지 방금 여자가 준 커피 외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위장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정적을 만든 것 또한 위장의 마지막 발악이었으리라.
"그럼, 먼저 권한 쪽이 책임지고 저를 맛있는 식당으로 데려가주세요. 그정도 계획은 있었죠?"
여자의 얼굴에 다시금 치명적인 미소가 드리웠다. 쿨해보이던 첫 인상과 달리 잘 웃는 성격인가 보구나. 여러가지로 반전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름답다는 점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네, 그럼 가실래요? 생각해둔 곳이 있는데 혹시 가리는 음식 있으세요?"
"없어요. 다 좋아하니까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행선지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과연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샐러드? 고기? 술?
뭐든 상관없으니 우물거리며 음식을 먹는 여자의 모습도 그림이 될 것 같다 생각하며 여자의 집을 나섰다. 아까는 먹는 모습은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
지글거리는 지방의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붉은 육즙이 사라지기 전에 아직 신선한 핏기가 남아있는 고기를 집어서 먹었다. 입안에서 새빨간 육즙이 퍼져나가면서 고소하면서 짭짤한 맛을 풍겼다.
여자가 나를 데려간 곳은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정육 식당이었다. 가격대가 꽤 쎄서 고민되었지만 생각해보니 주중에는 일하느라 밥도 거르고 있었기에 월급은 차곡차곡 쌓여 갔었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주말에 사치를 부려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자기가 좀 더 낼테니 많이 먹으라고 선심을 써줬다. 분위기를 깬 것에 대한 사과의 뜻이라면서.
후회하지 않겠냐고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물어보았다. 마른 여자가 먹어봤자 알마나 먹겠냐는 생각이겠지.
먼저 말을 걸고 내 휴식을 뺏은 건 저쪽이니까 이정도는 받아가도 될거라는 생각으로 마음껏 먹기로 했다.
"저희 등심 구이 1인분이랑 살치살 1인분 더 주세요."
마주 앉은 여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는게 보였다. 난 쉬운 여자가 아니니까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벌써 많이 드신거 같은데...... 굉장히 배고프셨나봐요."
"전 항상 배고파요."
사실 마주 앉은 여자야 말로 점심도 거르고 나의 영화 감상(을 빙자한 스킨쉽)에 어울려주었으니 훨씬 배가 고팠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양이 적은지 안심 1인분을 먹고는 배가 부르다며 젓가락을 놓았다. 첫 만남이라 일부러 자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을 보니 정말로 양이 적은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치 안보고 천천히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로 했다. 공기밥도 한그릇 시켜서 탄수화물 밸런스도 맞췄다. 어차피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니 잔뜩 즐기는 거다.
먹어도 먹어도 사람 피를 먹지 않으면 순식간에 거덜나버린다.
먹는 그 순간에도 영양분은 몸속에서 증발해 버리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흡혈귀의 불편한 점 중 하나다. 경제적으로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까싶다. 몸이 아픈 것보다 통장 잔고가 0으로 가까워지는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불편하고 더 무서운 법이다.
등심과 살치살이 새빨간 빛깔을 뽐내며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집게를 집어 두꺼운 등심을 통채로 올려 구웠다.
"고기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가 체념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머릿속에서 통장 잔고와 이번달의 가계부를 생각하고 있겠지.
"맛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살찌는 거라든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만 먹으라는 걸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것이었을까? 흡혈귀라 해도 사람 마음을 읽을 수는 없어서 여자의 의중은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왕 정말로 제대로 관계를 만들어 갈 거라면, 나도 조금은 양보를 해야겠지. 이거만 먹고 그만 먹어야겠다. 그 대신으로 나는 여자의 손가락을 끝을 탐내듯이 바라보았다.
"어차피 평일에는 굶으니까 자동 다이어트죠."
"바쁘신가 봐요."
여자의 목소리에 약간 씁쓸함이 감돌았다. 갈색 눈동자에는 그리운 듯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잘못 본 것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먹고 살려고 하는 거니까."
어느새 갈색으로 변한 등심을 뒤집고 맥주를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연비가 나빠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허기를 달랠 겸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예쁜 얼굴. 화장법도 세련되었고, 패션 감각도 좋다. 나처럼 타고나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외모와 다른, 약간의 타고난 외형에 끊임 없는 연구를 더한 느낌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모와 분위기라면 이런 거겠지.
나처럼 반칙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게 아닌 순수한 매력이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네? 아, 아니요. 그냥 무심코"
"고기 다 타요."
여자의 말에 불판을 보자 이미 웰던을 넘어 탄소가 되기 직전인 등심이 있었다. 허겁지겁 가위와 집게를 들고 구석으로 등심을 몰았다.
여자가 한층 더 싱그러운 미소를 만들었다.
"무심코 고기도 태울 정도로 제가 예쁜가요?"
부끄러워져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나물만 뒤적였다.
"레어 스테이크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웰던도 좋아하시나봐요?"
마치 나를 떠보는 듯한 유도심문 같은 질문들. 아까 덮쳤을 때 반응과 달리 연애경험이 풍부한 걸까. 하긴 자연스럽게 모두를 끌어들이는 사람이니까 이런 저런 관계도 많았겠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오늘 처음 만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다녔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 싫은 기준이 들었다. 단순히 동족일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동족애일까?
잘게 자른 등심을 씹었다. 질겼다. 육즙도 거의 말라버렸고. 그나마 좋은 고기라서 고소한 향은 살아있다는 게 위안일까.
"무리하게 먹지 말아요. 저 웰던 좋아하니까 제가 먹을게요."
여자가 젓가락을 들고 반쯤 탄소가 된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치아 한번 보이지 않고 오물오물 귀엽게 씹는 모습이 깜찍하다.
'정말로 괜찮을까.'
살치살을 불판 위에 올리면서 나는 여자를 드문드문 쳐다봤다.
동족이라도 동족이 아니라도
왠지 이 여자랑은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생각보다 엄청난 가격이 나와서 한바탕 계산대에서 짧은 실랑이를 한 끝에 내가 먹은 건 내가 내기로 했다. 그 대신으로 나는 여자에게 요구할 게 있었으니까 남는 장사였다.
편의점에서 새빨간 사과 몇개를 사들고 방으로 향했다. 술이나 안주거리는 방에 많이 있으니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과라 하셔서 좀 놀랐어요."
내 계획은 전혀 상상도 못한 듯 여자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미소를 숨기며 여자에게 슬쩍 달라붙은 뒤 말했다.
"그냥 사과를 먹고 싶은데 아니에요."
"네? 그럼 어떤 사과를?"
"그쪽이 깍아주는 사과가 먹고 싶어요."
이쯤에서 미소를 내보였다. 어깨에 얼굴도 기대면서 몸을 밀착했다. 슬쩍 올려다본 여자의 얼굴이 붉었다.
"저, 요리 같은 거 하나도 못하는데."
"사과 깍는게 요리에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려보았다. 여자는 눈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먹은 만큼 돈을 낸거니까 여자가 빚을 진 것도 없는데 이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듯 보였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로 마음먹으며 검푸른 밤의 거리를 함께 거닐며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여자는 싱크대에 사과를 씻고 떨리는 손으로 커다란 야채칼을 들었다. 요리 유튜브에 빠진 시절에 구비해뒀던 육중한 직사각형 칼이 여자의 손에 잡힌채로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저 칼은 나도 1번 밖에 안써봤다.
"그걸로 깍으시게요?"
"크...크고 날카로워 보이니까요. 잘 들지 않을까요?"
"과도 밑에 서랍에 있어요."
웃으면서 과도를 꺼내 건넸다. 심호흡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아요. 제가 할테니까."
"아뇨! 그래도 먹고 싶다고 하는 걸 주는게 좋을거 같아요!"
쓸데 없는 곳에서 자존심은 쎈지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칼을 붉은 사과에 대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먹었던 안심마냥 사과 껍질이 두껍게 썰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힘이 잔뜩 들어간 온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손 끝은 덜덜 떨렸지만.
즉,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두꺼운 나선을 이룬 껍질이 점점 길게 뻗어나가고 있는 순간 여자의 어깨를 살짝 쳤다.
"괜찮게 깍고 있어요?"
"아얏!"
성공했다. 샛노란 사과의 과육에 붉은 피가 몇방울 묻었다. 통증 때문인지 여자는 사과를 싱크대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 베였어요? 어떡해..... 죄송해요!"
꽤 깊게 배였는지 새하얀 집게 손가락에서 붉은 액체가 살금살금 베어 나왔다.
내 허기를 채워줄 생명의 액체가.
"잠시만요. 치료해드릴게요."
고통에 눈을 찡그리고 있는 여자의 손가락을 입으로 물었다. 찡그렸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상처 주위의 빨간 액체를 혀로 핥아 올렸다. 너무 강하게 핥으면 아플테니 최대한 부드럽게 손가락을 쓸었다. 이윽고 입술로 손가락을 살짝 베어 물었다. 여자의 옅은 신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비릿하면서 달콤한 여자의 피맛이 혀끝을 타고 올라왔다. 입 안에 들어온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혀에서 느껴진다. 슬쩍 혀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칼에 베인 상처가 만든 기다란 균열을 발견했다. 주변을 집중적으로 햝으며 새어나오는 피를 받아 마셨다.
피가 주는 황홀한 고양감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내 뱃속을 채우던 허기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상처가 쓰라린지 여자가 눈을 약간 찡그리고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자꾸만 양 다리를 오므리는 모습이 관능적이었다. 심장 뿐만 아니라 아랫배까지 열기가 올라왔다. 이대로면 조금 위험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스며나오는 피를 빨아낸 뒤 손가락을 빼냈다. 옅은 침끈이 손가락 끝으로 이어지다 끊어졌다.
얼굴을 살짝 기울이면서 여자를 보고 최대한 감미롭게 말했다.
"소독은 끝났고, 반창고 드릴까요?"
여자가 눈을 피했다. 여자를 다치게 한 죄책감이 있었기에 눈을 피해주는 여자가 나는 고마웠다.
잔뜩 붉어진 여자는 얼마간 고민을 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 소독 더 필요할 거 같은데, 해주시겠어요?"
어딘가 안달이 나있는,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곤란한 환자분이시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짝 넘기고 여자의 집게 손가락을 다시 물었다.
달콤함이 내 육체를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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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왠지 사부로우타 센세의 심정을 알 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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