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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엘.컴플렉스05

우드포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02 11:39:43
조회 270 추천 19 댓글 3
														

유신은 계속 걸었다. 머리 속이 하얗다. 깨질 뻔한 관계가 이제 잘 붙어서 예쁜 그림 그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행복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자 속상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번 일은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잡고 얘기하고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목적지는 플레저였다. 빈 자리를 찾아 바에 앉았다. 레이가 다가왔다.


"오늘은 많이 취하고 싶어. 독한 걸로 줘." 

"스트레이트 버번으로 줄까? 높은 도수지만 목넘김이 부드러운 게 있어." 


레이가 술병을 열고 한 잔 따라 줬다. 술잔을 건네받아 한 입에 털어 넣고 얼굴을 찡그렸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이 아프다. 


"그렇게 마시면 어떡해? 술 잘 못 마시면서. 이거 먹어."


레이가 치즈와 프레첼을 건네줬다. 유신은 그걸 얼른 집어 먹었다.


"한 잔 더 줘." 

"그렇게 마시면 속 버려. 하이볼 만들어 줄게."


잔에 얼음을 가득 넣고 버번을 채운다. 그 위에 토닉 워터를 붓고 레몬을 얹어서 건네줬다. 유신은 레이가 하이볼을 만드는 걸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한 잔 마시고 벌써 취기가 올라오나 보다. 


"사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들어?"

"아마 그럴 걸." 

"산 하나 넘으면 또 산이야." 

"일 때문에?" 

"아니. 사랑하는 게 힘들어."

"한 사람과 오래 사귀는 거 따분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한 사람하고 성실하게 교제한다는 건 대단한 거야."  

"수민에게만 집중하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많이 좋아해." 

"네가 더 좋아하는구나? 더 좋아하는 쪽이 대개 더 힘든 거 같아." 

"...임신했어. 사실... 수민이가 얼마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났어. 나도 홧김에 바람 피웠어. 그냥 서로 실수한 셈치고 덮었어. 그리고 나서 더 사랑하게 됐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겨 버렸어. 이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유신은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임신한 사람은 뭐라고 하는데?"  

"나랑 같이 키우고 싶대." 

"감당할 수 있겠어?" 

"못 할 거 같아." 


다시 한숨을 크게 쉰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얘기하고 싶었어. 너무 답답해서...너라면 해도 될 거 같았어... 휴...바쁜데 나 그만 신경쓰고 일해. 혼자 마실게." 


같이 키우자는 건 선을 넘은 거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기라니... 그것도 바람피운 상대와의 아기라니... 선을 넘어도 심하게 넘었다. 

하지만 본인이 혼란스러운 것처럼 수민이도 지금 많이 혼란스럽고 힘들 걸 생각하니 그곳에 혼자 두고 나온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지금 수민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얼굴 보고 얘기하다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해 버릴 거 같아서였다. 

설득당해 원하지 않은 걸 약속할 지도 모른다. 약속을 하면 지켜야 한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만 아기를 키울 자신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유신은 생각에 빠져 옆에 누가 앉은 줄도 몰랐다. 


"아뇨." 

"그럼 같이 마실까요? 저도 혼잔데."


같이 마시기로 했다. 뭐라뭐라 얘길 하는데 유신은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지금 수민이는 뭐하고 있을까? 집에 잘 들어갔을까?' 


유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해요. 다음에 봐요." 


===========================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수민이 집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크게 불렀다. 방문을 열고 수민이 나온다. 


"아까 널 혼자 두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해."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같이 키운다는 건... 나로서는 힘들어." 

"왜? 그 사람 아이라서?" 

"응. 그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만약 너를 닮지 않고 그 사람을 닮았다면 아기를 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날 거야. 근데 그게 전부는 아냐.  난 아이가 싫어. 너와 나의 미래에 아이를 넣어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어." 

"내가 아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알아. 네가 아기를 보고 좋아할 때마다 기분 별로였어." 

"네가 이렇게 싫어하는지 몰랐어." 

"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야. 하루 정도는 아이와 놀아 줄 수 있어. 하지만 부모 자식 관계로 얽히는 건 싫어. 우리 사이에 아이가 끼어든다는 생각만으로도 불편해."

"지금은 싫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너도 변할 거야. 개나 고양이 싫다고 난리치다가도 막상 데려 오면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너도 그럴 거야." 

"무섭다고. 자신없어. 별 거 아닌 것처럼, 쉽게 말하지 마. 절대 안 되는 사람도 있어." 

"좋아하지 않는 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그럼 어떻게 해? 이미 생긴 아기를 지워?" 

"그럴 수 있다면." 

"싫어. 절대 못 해."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 

"어떻게 뱃속에 있는 아기를 죽이라는 얘길 할 수가 있어?"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양보해 줘. 그럼 평생 너하자는 대로 다 할게. 아기를 원한다는 거 이해했어.. 지금 말고 나중에, 천천히, 계획 세우고 가지면 안 될까?" 

"낙태를 쉽게 얘기하지 마. 나도 알아 봤어. 잘못되면 다신 아이를 못 가질 수도 있어."  


둘 다 단호했다. 


"다시 생각해 봐. 오늘은 작은 방에서 잘게."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럽고 두려워. 같이 있어죠."

"혼자 있고 싶어."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없다면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 줄 수 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싫었다. 그래서 수민이가 엄마가 되는 게 싫었다.  자신도 절대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병적으로 이상해서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않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모성에 대해 평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자꾸 구역질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한 우유를 마시는 것 같은 역한 느낌이다. 


======================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에게 이번 일은 절대 물러 설 수 없는 것이었다. 수민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침묵하면서 시간만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몇 시에 와?"


일하고 있는데 수민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일찍 들어갈게. 같이 저녁 먹자." 


집에 돌아오니 현관에 가방이 하나 놓여 있다. 


"이게 뭐야?"

"네가 오길 기다렸어. 얼굴은 보고 가야 할 거 같아서." 

"어디 가는데?" 

"부모님 집에 있을 거야." 

"이렇게까지 해야 해? 가지 마. 우리 얘기하자."

"얘기할 거였으면 빨리 했어야지. 생각이 바뀐 거야?" 


유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대로구나. 그럼 갈게." 


수민은 그렇게 나갔고 문은 닫혔다. 유신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명치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이 아팠다. 

조용히 냉장고로 가서 차갑게 식은 맥주를 꺼내 어둠 속에서 마셨다. 처음에 엄청난 아픔이었는데 한 캔 다 마실 때쯤 되자 아픔이 사라졌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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