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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단편, 소설] AI-1

시르(220.78) 2017.11.23 23:38:22
조회 817 추천 35 댓글 14
														

 현대 사회라고 하면, 급감하는 생산 가능 인구수에 비해 커져만 가는 인간의 욕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수많은 기계와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단순한 생산뿐만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의 친구나 전문직의 보조까지 하게 된 시대라는 사전적 정의가 따라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대 속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약간 뒤처진 사고를 하는, 어디에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왠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기계를 믿고, 신뢰하고, 심지어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잔뜩 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내가 한 초등학교 5학년 쯤 됐을 때의 일이었다.


 일어난 일을 짧게 요약하자면, 수업에 쓰이던 도우미 로봇이 갑작스럽게 폭주해서 반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책상 아래에 기어들어가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폭주하던 그 로봇은 회로가 과부하 된 것인지 연기를 내며 멈췄고, 뒤늦게 소란을 들은 다른 반 교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왔지만, 내가 목격한 것을 뇌리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이런 일을 떠올리고 있는 이유는, 오늘이 쉬는 날이라는 이유 하나로 어제 너무나 많은 양의 술을 마셔 버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첫 번째고-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두 번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억에도 없고 추억에도 없는 처자 하나가 내 방 거실에서 검은색과 하얀색의 색 배합을 가진 메이드 복을 입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가 입은 옷이 메이드 복장인지는 조금 긴가민가했다.


 다소 짧은 치마에는 주름도 없고. 머리에는 프릴이 달린 머리띠 대신에 LED 머리띠 하나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대체 뭘까. 설마...”


 누군가 쓰다 버린... 그, 육욕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AI 바디를 내가 주워버린 건가? 그도 그럴게, 입고 있는 옷의 선정적인 정도나, 의도적으로 인간과 매우 비슷하게 조형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AI 주제에 나보다 더 야한 속옷을 입고 있잖아.”


 나는 생각했다. 내 술버릇이 얌전한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도, 이런 걸 주워오는 고물 수집가 같은 면은 정말 예상치도 못하고 있었다.


 “AI인가... 나 참, 인간이란 대체.”


 한숨이 다 나왔다. 내가 여자라서 이런 성욕 해소용 로봇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봤을 때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 자신의 욕망을 풀어내는 것이 즐거운 건가. 자신의 의사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저 프로그래밍 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내 앞의 그 로봇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와중, 갑자기 머리띠의 LED 등이 형광 초록색으로 반짝이더니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어, 뭐야. 충전 중이었던 거였어?”


 자세히 보니, 그녀의 등 쪽 날갯죽지 부분에서 전선이 튀어나와 있었다. 저기로 충전하는 거구나. 이런 로봇을 써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초기 사용자 등록을 시작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의 여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미성 속에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가지고 있을 감정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뭐야. 초기 사용자...?”


 “―데이터 수신 확인. 정보 등록. 사용자 이름 이비. 기동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이비. 그건 다름이 아니라.


 “뭐?! 잠깐만. 너, 어떻게 내 이름을...”


 “...이비 주인님.”


 그녀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두고 벌떡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아직 기동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차가운 인공 피부가 내 뺨에 살짝 닿았고, 그것 때문에 화들짝 놀란 나는 살짝 움찔하며 그녀가 뻗은 손을 쳐다봤다.


 ―주인님. 제가... 사랑하는 주인님.


 내 눈 앞의 AI는,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겠지만.


 무릎 위의 내 손이, 그 말이 들려오기 무섭게 살짝 경련했다.

 

*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 술 먹고 필름이 끊겼다. 거기까지는 여느 휴가 날과 다르지 않은데, 이 로봇은, 이 여자 AI 바디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뭐? 사랑?”


 기계는 감정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나 제스처, 그리고 말투와 억양을 조잡하게 흉내 낸 데드카피에 불과하다.


 “...갑작스러우시죠?”


 “당연하잖아. 아니, 뭐 나도 동성애가 합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그리고 내가 평소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 점이었나요.”


 “그럼 뭐라고 생각한 건데?”


 AI는 어느새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다시 봐도 예쁜 얼굴이다. 커다란 눈동자에 감도는 오묘한 빛이나, 상처 하나 없이 백옥같이 빛나는 피부,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들.


 ...아냐, 그녀는 단순히 예쁠 수밖에 없는 거야. 왜냐면, 그렇게 만들어졌잖아. 당연한 일이야. 고작 기계 따위에겐 말이지.


 “주인님은... 그러니까. 지금 제 앞의 주인님은 기계나, 저 같은 AI를 싫어하다 못해 무서워하시잖습니까.”


 “...티 났어?”


 “하지만 괜찮습니다. 곧 저를 좋아하게 되실 거니까요.”


 거 당찬 처자네. 성별의 벽은 둘째 치고, 이 AI는 인간과 기계의 벽마저 거리낌 없이 넘어 서 있었다. 나 같은 뒤처진 사람은 여러모로 이해조차 하지 못 할 수준이구만.


 “말뼈다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래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이미 주인님이 제게 빠지는 모습을 한 번 봤습니다.”


 그러니까, 틀림없어요. 메이드 복장 차림의 그녀는 말했다. 미래? 정해져? 그런 것보다도,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안드로이드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내가? 참 나, 퍽이나.


 “너에게 반할 것 같아?”


 “...저도, 지금의 주인님을 다시 보니, 그 미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말이나 행동은 살아있는 인간의 그것이었지만, 얼굴만은, 나를 향해 곧바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그 눈동자만은 어떠한 감

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깡통 주제에 주제 넘는 말을 하네.”


 “예.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분한 삶을 살았습니다.”


 삶.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도 생명과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도 그냥 프로그래밍 된 어떤 반응에 불과한 것일까.


 “당신이 저에게 주었던 그 과분한 사랑을. 『데이터 수신―』 저는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발신 일자, 이천, 이백, 이십, 이, 이, 이, 이―』 미래에서 왔습니다.”

『모듈 활성화. 데이터 소자 수신 완료. 올 시스템, 온라인.』


 “사랑하는... 사랑해 마지않는, 제, 주인님.”


 그녀는, 눈에서 뭔지 모를 액체를 한 방울 또르륵,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앞에서 얼어붙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과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기계와 인공 가죽에 불과하던 그녀가, 어째선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이해를 할 수도 없는데.


 “...너, 안드로이드, 맞...지?”


 사람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인간같이 울음 울고 있었다.

 


 *


 “주인님, 집 안을 조금 정리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개판이군요.”


 그녀는 눈물을 그치고, 마치 사람같이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감았던 눈을 부릅뜬 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 기계덩어리는 말이야.


 “AI주제에 입이 험한데.”


 나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맥주 캔, 옷과 속옷들,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과자 포장지. 하긴 이 공간을 개판 말고 어떤 단어로 형용해야 할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역시 AI. 현명한데?


 “혼자 사는데 이 정도는 양반이잖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72%의 혼자 사는 사람들이 주인님보다 훨씬 깨끗한 방에서 생활하며, 나머지 28%는 저소득층, 거지, 혹은 정신 이상자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인님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그에 맞는 생활수준을-”


 “아, 알았어! 치우면 되잖아, 어?!”


 “좋은 자세입니다. 얼른 큰 쓰레기부터 집어서 쓰레기봉투에 넣으십시오.”


 아까의 그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녀가 하는 말은 상투적이고, 다소 기계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있던 커다란 쓰레기통을 들었다. 그래, 뭐. 마침 적적한 참이기도 했고, 안드로이드 하나쯤은 같이 살아도 괜찮겠지.


 ‘근데, 연애는 진짜 좀 아니다.’


 “주인님, 이쪽입니다. 이 쓰레기를 먼저 치우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는 휴지가 뭉쳐져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는 쓰레기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어? 진짜인가?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는 이미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청소는 간단했다. 그녀가 지목하는 목표물을 들어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방바닥을 살짝 쓸고 닦으니 내 원룸은 어느새 거짓말같이 깨끗해져 있었다.


 “대단하네. 역시... 가 아니라. 잠깐만, 너, 가사 기능은 없는 거야?”


 “당연하죠. 저는 고성능 안드로이드입니다. 제가 가사 기능을 장착하는 것은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야... 그건 아니지.”


 청소를 열심히 할 때는 눈치 못 챘는데, 막상 일을 끝내고 보니 모든 일은 내가 해 놓은 상태였고,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지시만 하고 있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적어도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저는 주인님에게 더 나은 삶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밥값은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제 한 말 기억 안 나십니까?”


 “...아, 잠깐. 시간 좀 줘봐.”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이마를 짚은 채로 기억 속의 암막을 걷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굳어버린 머리는 아무리 돌리려 애를 써 봐도 삐걱거리기만 했고, 나는 몇 분 동안 내 머리에 든 돌덩이와 씨름을 한 뒤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분명, ‘어이 거기 예쁜 아가씨, 우리 집 같이 안 갈래?’ 라고... 뭐, 애초에 같이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주인님이 절 반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기, 미안한데.”


 그녀는 여전히 처음의 그 표정 그대로, 내 말을 상쾌하게 무시하고는 입을 열어 독백을 이었다.


 “외모가 꽤 도움이 되는군요. 확실히, 제가 봐도 저는 미형이긴 합니다.”


 “아, 미안하다고! 미치겠네!!”


 “그러나보니 인사가 늦었군요. 주인님이 꼬신, 외모로 밥값 하는 이 안드로이드의 이름은 이브. 성씨는 없습니다.”


 “...이브.”


 “잘 부탁드립니다. 얼빠 주인님.”


 “아니,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건데? 아오, 진짜......”


 그렇게, 기계 혐오자인 나와 그녀의 동거 이야기는 다소 소란스럽게, 적절한 정도의 마찰을 빚으며 시작되었다.


 *

 원래 한 편으로 끝나는 단편인데,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져서 나눴어요. 아마 3편 정도로 올리지 않을까 싶네요. 읽어주시고 감상이라도 남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질문 같은 거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최대한 답변해드릴게요! 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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