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번역글들 정리글: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641103
전편이랑 마찬가지로 Nu-Anh Tran 교수의 논문을 번역한 건데, 사실 전편이 챕터 2고 이번글이 챕터 1의 결론 부분임. 챕터 하나가 너무 길어서 다 번역하기 귀찮아서 결말만 번역한 거니까 저번만큼 길 일은 없을거임.
아, 그리고, 내가 새 번역을 올리기 전에, 몇가지 내 전 번역글의 오역에 대해 수정할 게 있음.
1. Dai Viet은 대월제국 잔존세력이 아님. 내가 전에 글 올릴 때 피곤해서 뒷조사를 얼마 못해서 Dai Viet(대월)이라고 보자마자 레 왕조 및 서산왕조의 잔존세력이라고 착각함. 근데 알고보니 거기서 이름만 딴 거지 별로 관련이 없더라.(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병신같이 생각한게, 광남 응우옌 왕조가 수십년을 통치하고 프랑스 식민지배까지 있었는데 서산조 잔존세력이 1950년대까지 남아있는 게 이상하잖아?) 이건 사실 베트남 반공 독립운동 정당 중 하나임. 앞으로 전 번역글을 볼 때 대월 잔존세력이라고 내가 써놓은 부분은 '대월당'이라고 뇌내치환해서 읽어주면 고맙겠음.
2. Emigre라는 단어의 번역 문제. 이건 프랑스어로 '이주민'이라는 단어인데, 이건 앞 번역 1편에선 베트남에 살았던 프랑스계 이민자를 말하는 거 같지만, 나머지 부분이랑 이 번역글에선 사실 프랑스계가 아니라 50년대에 월남한 북베트남인들을 가르키는 말이었음. 이 오역은 단어 치환만으론 안될 거 같으니까 내가 나중에 전 번역글들을 수정할게.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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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반공 내셔널리즘에 대한 분석은 세가지 중요한 이슈를 나타낸다.
첫째, 베트남 공화국의 반공주의는 베트남 공산주의에 대한 토착적인 반응이었다. 배신 행위의 맥락들은 소련이나 중국 본토가 아닌 북쪽 베트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이나 개입과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역주: 베트남의 토착 반공주의는 미국이 억지로 꾸며낸 행위들이 아니라는 뜻 같음) 냉전 시대의 염려들이 반공주의 언어들에 특정한 영향력을 끼치긴 했으나, 두 베트남인들의 교전단체, 베트민과 베트남국의 전쟁은 새로운 담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즉 베트콩과 국가 사이의 이분법을 자아냈다. 1950년대에 월남한 지식인들은 비슷하게 193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의 잔혹함과 독재에 대한 비판론을 공유했다. 연구가 더 필요하긴 하나, 두 시기(역주: 30년대와 50년대를 말하는듯)의 반공주의의 유사성과, 저항 전쟁의 중요성은 베트남 공화국이 공화국 자신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베트남 반공주의 역사의 일부이며, 베트남 전쟁 또한 베트남인들간의 충돌로써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둘째, 반공주의 내셔널리즘의 세속적인 근원은 이런 질문을 자아낸다: 카톨릭 교도들이 월남인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에도, 어째서 비종교적 지식인들이 반공 담론들을 지배했는가? 이 질문은 공화국 정부 내각에서 북쪽 카톨릭인들이 불균형하게 많이 대변되었음을 생각해보면 특히나 더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한 가지 가능성 있는 설명은, 사이공 정부가 다양한 종교들보다는 세속주의에 기반한 반공주의를 신중하게 밀어줬다는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확실히 월남민들의 카톨릭적 일면을 경시했으나, 사실 공화국 정부가 카톨릭인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공산주의자들에게 탄압받았음을 말하는 것을 막았다거나, 카톨릭 반공주의를 명시적으로 표방하는 것을 막았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더 나은 설명은 월남인 지식인들의 사회적 배경에 기반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고학력 중산층에 속해 있어 일반적인 다른 월남민들보다 더 글을 잘 쓰고 자신들의 경험을 잘 출판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작가들은 중산층계 저항운동 전사들로 분류되거나, 혹은 대다수가 중산층으로 이뤄졌던 대월 및 베트남 국민당의 운명에 대해 조사하기를 선택했다.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카톨릭 월남민들은 하층민들이었고 중산층은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았다. 따라서, 카톨릭인들은 대부분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월남민 지식인으로써 논문들을 내기 어려웠다. 또 다른 가능성 있는 이유는 고학력이었던 카톨릭 월남민들은 주류 세속 언론보다는 종교 저널에 출판하기를 선호했고, 카톨릭 반공주의는 국가의 지원을 받던 세속 반공주의와는 평행선을 달렸다는 것이다. 남쪽 카톨릭과 다르게, 북쪽 카톨릭인들은 북쪽 비카톨릭인들로부터 분리된 카톨릭 마을에 모여살았으며 남쪽에서도 분리된 커뮤니티로써 정착했다.
세번째 이슈는 월남민들 바깥으로 확장된다: 왜 북쪽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보다 (남베트남에서)숫적으로 훨씬 적었는데도, (베트남 공화국의)새 내셔널리즘에서 이들의 기여가 훨씬 컸는가? 왜 남쪽 반공 내서널리즘은 문학과 학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못했는가? 다음 챕터가 이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역주: 다음 챕터가 내가 맨 위에 링크 건 전편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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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름의 정리.
1. 꺼라위키나 이런 데서 흔히 퍼진 오해와 달리, 응오딘지엠은 카톨릭 편애 정치를 한 게 아닌 거 같음. 이 글에 따르면 베트남 제1공화국 내내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담론의 주력은 종교보다는 세속주의에 기반했다고 하네. 즉 지엠의 의도건 아니건, 북쪽 이주민의 카톨릭과 남쪽의 종교파 쪽 반공주의, 즉 종교계 반공주의는 베트남 공화국 주류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음. 응오딘지엠이 월남민들의 카톨릭적 성향을 경시했다는 건 처음 알았네.
2. 그럼 그 세속 반공 담론들이 어디서 왔느냐? 에 대한 답변은 "대월당이나 베트남 국민당 같은 세속주의 반공 독립운동 정당들"이라고 답할 수 있겠네. 베트남 국민당의 원래 본거지는 하노이였음. 하지만 빨갱이들의 독재와 배신, 탄압에 못 이겨서 사이공으로 내려온거고, 이쪽은 주 구성성분이 중산층 및 지식인이라서, 세속주의자들은 월남민들 인구의 극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월남민 대다수 대신 베트남 공화국의 주류 담론에 접근할 수 있던 거.(하지만 결국 이들도 응오딘지엠의 미친 권력욕 때문에 탄압당했긴 마찬가지)
3. 이건 이전 글 내용인데, 대월당이랑 베트남 국민당이라는 세속적인 기반도 있던 북쪽 반공주의랑 달리, 남쪽 반공주의는 종교가 가장 강력한 기반이었음. 하지만 이들도 응오딘지엠의 독재 때문에 모조리 숙청당해 힘을 잃어버렸고, 결국 북쪽 카톨릭은 특유의 폐쇄성 및 지식인층 부재라는 복잡한 이유로, 남쪽의 까오다이, 호아하오 같은 토착 종교들은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탄압이라는 이유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남쪽 반공주의에서 종교는 남베트남인들 대다수가 지지하던 세력이었음에도 결국 남베트남에서 주류세력에 접근하지 못했던 걸로 보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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