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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문학] 소세지야채볶음

ㅇㅇ(58.124) 2023.06.22 21:05:56
조회 3387 추천 101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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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부터 김 일병의 기분은 들뜨기 시작한다.



낮의 일과시간에는 말수가 적고 조용히 자신의 일만 하던 김 일병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들뜸과 기대는 평소 표정의 변화가 적은 그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초저녁부터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약간의 경박스러움이 가미된 그의 언행은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A 병장님!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잖습니까? 소세지 야채볶음이란 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지 말입니다!"



가뜩이나 둥글둥글한 눈매를 한껏 치켜뜨며 웃음을 가득 띈채 분대의 최고 선임 A 병장을 붙잡고 유쾌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김 일병의 언행은 오늘도 보는 이들에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오글거림과 함께 낯마저 뜨거워지는 창피함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불과 한달 전, 그러니까 김 일병이 이 기이한 언행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의 A 병장이었으면 여느 때처럼 가슴팍이라도 걷어차고 귀싸대기라도 올려붙이고도 남았을 위인이었지만, 매번 쥐잡듯 패도 기죽거나 지칠 기미도 없이 언제 그랬냐라는 듯 쪼르르 달려와 A 병장을 붙잡고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던 탓에 그 사납고도 난폭하던 A 병장조차도 김 일병의 기이한 언행에 질렸다는 듯 난처한 기색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햐... 저 새끼는 진짜 특이하게 쏘야 나오는 날에만 저 지랄발작이네."



입이 귀에까지 걸리다시피 웃고 있는 김 일병과 그런 그를 애써 외면하려는 A 병장을 번갈아보던 B 상병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보면 볼 수록 이상하지 않냐? 다른 고참들한테는 저렇게 안 엥기면서 저 미친새끼는 A한테 무슨 깡다구로 저러는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B 상병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김 일병은 유독 소세지야채볶음이 메뉴로 나오는 날에 유난히 A 병장만을 붙잡고 저러는 것이었으니까.



김 일병과 A 병장은 비록 같은 분대 소속의 선후임 관계이긴 했으나 소대 내 최고선임이자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난폭한 성격과 폭력성을 감안할 때, 김 일병의 입장에서의 A 병장은 감히 눈도 제대로 못맞추고 말도 못 섞을 까마득한 짬의 차이를 떠나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 A 병장에게 그 날 석식메뉴가 어떻다는 둥 따위의 실없는 허언을 늘어놓는다라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건만, 김 일병은 그 발상을 뛰어넘어 감히 선임의 몸에까지 함부로 손을 대며 주절대는 상상을 뛰어넘은 사실상의 자살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이었다.



"저 새끼 신병전입 왔을 때부터 지가 신기가 있다는 둥 그러더니 그게 마냥 개소리는 아니었나봐. 어떻게 쏘야 나오는 날에만 사람이 돌변하냐 이 말이야. 봐봐, 저 표정이 어딜봐서 평소의 쥐죽은 듯 찌그러져 있는 김XX 새끼의 표정이냐? 저건 아무리봐도 뭔가에 씌인거야."



이 또한 그의 말대로였다. 단순 기분의 높낮이에 따른 표정이나 언행의 변화가 아닌, 초저녁과 소세지야채볶음이라는 두가지의 트리거가 만족되는 날에만 김 일병의 기괴한 행동이 시작되었는데다 그 기괴함이란 상술한 바와 같이 이건 다른 사람이다 싶을만큼 돌변하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라면, A 병장의 태도였다. 평소 후임들을 쥐잡듯 하는 것은 다반사요,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과 발길질도 마다않던 그가 김 일병의 그러한 선넘는 행동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계속해서 달려드는 김 일병에게 질려 포기한 것 같은 상태라고는 하지만 평소 그의 난폭한 성정에 미루어 볼때, 마냥 그렇게 꾹 참을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A 병장은 그 날의 메뉴에 소세지야채볶음이라도 있는 날에는 중식이든 석식이든 이를 기피하거나 만약에 석식에 나온다라고 하면 자진하여 야간 초번 근무를 서는 등, 확연히 김 일병을 피하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김 일병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수준의 위치에 있는데다 그럴 만한 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과거 C 이병을 보내버린 전적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정XX 그 새끼... 갑자기 그 새끼가 생각나네. A 저 새끼한테 쏘야로 악기바리 당하다가 기도가 막혀서 죽은 그 놈.. 너무 공교롭지 않냐?"



C 이병. B 상병의 말대로 그는 몇달 전 A 병장에 의해 이른바 악기바리, 이른바 식고문을 당하다가 기도에 음식물이 걸려 죽은 녀석이었다. 물론, 우리 부대 내에서는 쉬쉬하며 묻혀져 단순 사고사로 치부되었고 또한 외부에도 뜻하지 않은 비극적인 사고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진실은 A 병장과 B 상병, 그리고 나만이 알 뿐이었다. 그리고 기억하건대, 그 날은 초저녁이었다. 왜냐면 주계장 뒷편에 진실을 묻은 날에는 어스푸름한 하늘에 붉은 초승달이 높이 떠있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C 이병이 그렇게 단순 사고사로 오판되고 순직으로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되어 그의 봉분에 덮힌 흙에 풀이 싹드기도 전에 김 일병의 저러한 발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A 병장은 물론이고 B 상병과 내가 C 이병을 연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B 상병과 나는 애써 특이하지만 기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애써 치부하며 외면할 따름이었다.



아니, 솔직히는 A 병장에게만 저러는 것이니 어쩌면 우리는 비껴갔을 것이라는 내심 비겁하고도 안일한 안심이 드는 것이 더 컸다랄까. 그렇게 해서라도 이 불안하고도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A 병장의 전역날이기도 한 그 날에는 부대를 들썩이게 할 비보가 날아왔다.


과거 구타 및 가혹행위로 만창을 꼬박 살고 왔던 A 병장이었기에 동기 기수들은 이미 떠나고 없는 부대를 홀로 떠나는 날이었다.


홀로 전역신고를 마치고 위병소 정문을 나서던 그에게 웬 시골 노인의 주폭어린 포터 트럭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시골 노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아마도 막걸리라도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호기롭게 운전대를 잡았을 그 노인은 경찰서에서 진술하기를 저 군인을 당장 들이박으라는 환청을 들었다라고 했고 그로 인한 정신질환을 호소하였다. 그런 턱없는 핑계와 진술이 얼마나 먹혔을지는 안봐도 훤하지만 A 병장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역날 부대 앞 위병소 정문에서 그 목숨을 다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날의 석식에는 소세지야채볶음이 나왔다.



그리고, 김 일병은 오늘 따라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그리고 그는 아무래도 이미 떠나고 없는 A 병장 대신 새로운 말상대를 찾은 듯 했다. 자신의 입담을 자랑할만한 상대를 찾은 기쁨과 즐거움에 겨운 나머지 그의 동글동글한 눈매는 오늘따라 더욱 둥글어보였다.



"최XX 상병님!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잖습니까? 소세지 야채볶음이란 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지 말입니다!"



오늘부터 A 병장을 대체할 이는 최XX 상병, B 상병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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