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마이너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정보] 카를 뤼거와 게오르크 폰 쇠네러,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6.12 21:44:58
조회 697 추천 7 댓글 8
														



출처: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2. 역설의 도시, 합스부르크 빈)
세기말 빈; 칼 쇼르스케 (제3장 새로운 조성의 정치: 오스트리아 삼총사)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da3ef1c3ac14273a0a2d1cf2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dd6bfe9ca41d246b0acbb665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8f6dffc6a9182c6c0a89b792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2de64d029b1c9618d3c5ab271fab1a2f75719922f196b4c6

1904년 카를 뤼거가 빈 시청사에서 주최한 무도회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2de64d029b1c9618d3c5ab2748ae10272120cc7ff1962ba4

1910년 카를 뤼거의 장례식 행렬



뤼거와 기독사회당
빅토어 아들러가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정력을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목표에 쏟아부었다면, 기독사회당의 지도자였던 카를 뤼거는 자신의 힘을 민중 선동과 기회주의에 활용하였다. 빈의 시장이었던 뤼거는 당대의 경쟁자들보다 그러한 자질이 훨씬 출중했다. '멋쟁이 카를'은 매력적인 빈 말투를 능란하게 구사하였고, 세례식, 결혼식, 기념일 등과 같은 자리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그러한 능력 덕분에 프티부르주아인 숙련공, 사무원 및 도시 공무원들에게 사랑받았고, 바로 그 부류의 사람들이 그를 이중군주국에서 가장 강력한 선출직 관리로 만들어 주었다. 아들러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열망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던 것처럼, 뤼거는 거대 기업과 조직화된 노동자 사이에서 점점 생활이 짓눌려 간다고 느끼던 이 '소시민들'을 위해 유사한 활동을 하였다.
뤼거는 1888년에 기독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고, 같은 해에 아들러도 하인펠트에서 사회민주당을 재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가톨릭 정치 시상은 반자유주의적인 봉건적 귀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생산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이상화된 인간적 특성을 자본주의 시대의 산업화가 프롤레타리아에 짊어지운 비인간적인 처우와 대비시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이 사상의 주요한 후원자들로는 알로이스 리히텐슈타인과 알프레트 리히텐슈타인 왕자가 있었고, 그 운동의 이념적 창도자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이주해 온 프로이센 출신의 전향자 카를 폰 포겔장이었다. (포겔장은 또한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인 노동헌장Renum Novanum에 담긴 기본적인 사회사상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공로로 현대 가톨릭 사회사상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뤼거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빈 기술 연구소 수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만의 노력으로 법률가가 되고 도시 평의회 의원의 자리에도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소시민들'이 쉽게 존경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뤼거는 도시 평의회에서 좋은 평판을 쌓았는데, 거기서 그는 '유대인 자본가'의 비리를 무자비하게 폭로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선거 제도의 개혁을 주창하였고, 시장이 된 뒤에는 거창한 공공 토목공사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한층 높여 나갔다.

합스부르크 제국만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뒤섞인 나라는 없었다. 1873년 주가 대폭락에 뒤이은 23년 간의 경기 침제기 동안 희생양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유대인, 그리고 유대계 금융가와 사업가들이 상당수 연루된 수많은 자유주의 대의원들의 부정부패에서 그 확실한 후보감을 찾아냈다. 한 역사가는 "반유대주의는 주식시장이 붕괴하면서 생겨났다"라고 적기도 했다. 젊은 좌파 자유주의자였던 뤼거는 이미 1870년대 중반에 시정 업무에서 빚어지는 부정부패와 부적절한 조치, 부당 이득 등의 문제를 폭로한 적이 있었고, 그 후로도 거대 기업의 부도덕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비난해왔다. 그러나 그의 반유대주의는 광신적이고 교조적인 측면보다 기회주의적이고 선동적인 측면이 더 컸다. 그리고 인종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것이었다. 소매상들은 거기에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저잣거리를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유대인' 중에 그들의 경쟁 상대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튼튼하게 권력을 다지고 나자(황제는 그의 선동적인 수법들이 공복으로서는 불명예스럽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다섯 차례나 시장에 선출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임명을 마지못해 추인해 주었다) '유대계 헝가리인'에 대한 뤼거의 공세는 점점 약화되었고 그 날카로움도 훨씬 무뎌졌다. 실제로 그는 시종일관 대중 연설에서는 유대 자본가들에 대한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지만, 정작 그들이 초대하는 만찬 자리를 거절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태도는 그가 했던 비열하기 짝이 없는 다음의 언급 속에 가장 잘 힘축되어 있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Wer ein Jud ist, bestimme ich." 실제로 주변 상황이 적절할 때면 그는 적어도 빈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관해서만큼은 그들이 들어도 그다지 불쾌하게 여길 것 없는 얘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나는 헝가리인들보다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훨씬 더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 빈의 유대인들에게는 적대감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나의 빈 시민들은 언제나 멋진 휴식을 즐기고 싶어 한다. 반면 유대인들은 언제나 활동하고 싶어 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뤼거를 재평가하게 만드는 특징은, 그가 비록 선동적인 정치가이기는 했어도 자신의 모든 역량을 '소시민들'을 위한다는 대의에 바쳤고, 프티부르주아의 몫을 남겨 주었으며, 도시 전반의 여건을 확실히 개선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정치적인 영역에서 그는 슈메를링이 고안한 '선거 기하학' 체계에서 추잡한 부정이 벌어지자 선거 개혁을 요구하는 투쟁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가 착수한 대규모 공공사업안 중에는 그때까지 빈에 연료를 공급해 온 영국 회사를 대체할 자국 가스 회사의 설립, 대중교통 시설의 개선, 새로운 수도 공급 체계 설립, 교량 개선, 고아원과 병원 시설의 확충, 운하 건설, 공원과 놀이 시설 확충, 빈민층 어린이를 위한 무료 점심 급식,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수많은 사회 복지 사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뤼거를 향해 드러내는 것처럼 단지 히틀러가 뤼거의 정책을 자신의 공공사업 계획의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무작정 뤼거를 비난하는 태도는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뤼거 광장을 빛내고 있는 그의 훌륭한 동상이 1차 대전 직후에 사회민주당 행정부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반추하는 것이 훨씬 더 공평한 일이다. 정작 뤼거의 고유한 행적을 들여다보면, 그를 그토록 경멸했던 황제만큼이나 뤼거 역시 우리가 적절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진정으로 칭찬받아 마땅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들이 관여하고 영향을 미친 사건과 그에 뒤이은 전개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왜곡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카를 뤼거는 로제나우 기사와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자유주의자로 출발했으며, 둘 다 자유주의를 처음에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관점에서 비판했고, 둘 다 결국에는 반자유주의 신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배교자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반유대주의를 이용해 주민들 가운데서 똑같이 불안정한 분자인 장인 집단과 학생층을 동원했다. 그리고-우리의 논의 목적에는 이것이 결정적인데-두 사람 모두 의회 바깥에서의 정치 기술, 폭도와 오합지졸을 조종하는 정치 기술을 개발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유사점은 여기까지다.
쇠네러-오스트리아 정치가. 처음에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였으나 중소기업의 몰락, 유대인·슬라브인의 대두라는 정세에 반발하여 반(反)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그 중에서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제국에의 병합을 주장하여 A.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가톨릭교회의 ‘국제주의’에 반대하는 ‘반로마 운동’의 선두에 섰었다. 유럽 문명과 풍속을 배척하고 게르만의 옛 풍속을 존중하는 등 독일민족주의운동에 헌신하여 그 자신이 루터파()로 개종까지 하였으나, 운동방침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지지를 잃고 말았다. 히틀러는 그를 숭배하였으나, 대중운동을 가볍게 여기는 점에서는 비판적이었다.-의 긍정적인 업적 가운데 핵심은 구좌익의 전통을 변형시켜 신우익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점이었다. 그는 민주적이고 대독일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인종적 범게르만주의로 변형시켰다. 뤼거는 정반대의 일을 했다. 그는 구우익-오스트리아 정치적 가톨릭교-의 이데올로기를 변형시켜 신좌익인 기독교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쇠네러는 처음 시작할 때는 시골의 지지자를 조직하는 일의 대가였지만 나중에는 도시에서 소규모 광신적 추종자들을 거느리는 선동가가 되있다. 반면에 뤼거는 도시의 신동가로 시작해 도시를 정복한 뒤, 시골 지역을 안정적인 기반으로 삼는 거대 정당을 조직했다.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승리한 뤼거가 아니라 전투적 뤼거다. 1900년 이후에는 이 민족주의 정치가가 원숙해져서 한때 무질서했던 자신의 양떼를 이끌어 호프부르크의 아늑한 축사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그런 뤼거보다는 호민관 뤼거, 파트너 뤼거, 새로운 조성으로 작곡하는 작곡가로서 쇠네러와 경쟁하는 뤼거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왜냐하면 고금을 불문하고 자유주의의 적들을 한꺼번에 데려와서 빈이라는 도시, 자유주의의 중심 거점인 이 도시에 정치적 공격을 성공적으로 퍼부은 인물이 바로 이 뤼거,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얽어매는 뤼거이기 때문이다. 1897년에 황제가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뤼거의 시장 선출을 인준했을 때 오스트리아에서 고전적 자유주의가 주도권을 갖던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지식이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될 때인 1861년에 영웅적인 리터 폰 슈멜링Ritter von Schmerling은 이 자신감 넘치는 말로써 정치적 발전에 대한 합리주의적 기대를 표명했다. 그 시대가 끝났을 때 교양 있는 중산계급 가문의 상속자인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 그와 다른 공식을 제시했다. “정치는 마술이다. 사람들은 심연에서 힘을 깨워 일으킬 줄 아는 자를 따를 것이다Politik ist Magie. Welcher die Mächte aufzurufen weiss, dem gehorchen sie." 뤼거는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전통적인 자유주의 방식으로 '뤼거 박사'였지만 자신에게 맞는 보폭을 발견하자 아름다운 카를, 웅변가 카를이 되었다. 그는 라이벌인 쇠네러보다도 더 성공적으로 슈멜링에서 호프만슈탈로, 이성의 정치에서 환상의 정치로 나이가는 길을 가로질러갔다.
쇠네러가 빈 남역 역장 사택에서 자란 반면 어린 카를 뤼거는 그보다 훨씬 더 낮은 계층인 시 공무원의 구역, 즉 빈 폴리테크닉의 학교 관리인 사택에서 성장했다. 뤼거는 아버지 레오폴트에 대한 자부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레오폴트는 시골 출신으로 빈에 올라와서 "사전 교육적 배경이 없이도 (관리인이 된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카를의 어머니가 그 가정의 진정한 실력자였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녀의 두 딸과 아들은 모두 결혼하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의 권력이 극단적으로 강했음을 뜻한다. 한 역사가의 말에 따르면 뤼거 부인은 임종 직전에 마흔네 살 난 아들에게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또 남편이 죽은 뒤에는 검소하게 살기 위해 담뱃가게를 운영하면서 딸들과 계속 함께 살았다. 아들이 급속도로 출세했다고 해서 그 가족의 단순한 생활양식이 바뀌었다거나 그 아들이 의지력 강한 어머니에게 보내는 원초적인 충성심에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강력한 벼락부자 아버지가 로제나우의 기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장래의 “빈의 신"을 만든 것은 강인한 프티부르주아 어머니였다.
뤼거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아들에게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더 높이라고 격려했다. 그녀의 아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전한다. "단순한 평민 여성이었지만 그녀는 (나와 함께) 키케로의 연설문을 읽었다. 그 내용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아주 꼼꼼하게 집중해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들었다. 내가 한 문장이라도 잘못 암송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 덕분에 나는 아주 철저하게 공부했다." 어머니의 훈련에 힘입어 어린 카를은 빈의 가장 배타적인 예비학교인 테레지아눔에 입학할 수 있었다. (혈연 귀족과 직무 귀족의 고위층에서 이 아카데미가 어느 정도 중요한 위치를 점했는지는 1867년에 이중 제국이 수립되고 난 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고위층 행정 협상에서 저명한 형가리 가문 후계자들을 이 학교에 입학시킬 자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문제가 중요 안건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에서 헤아릴 수 있다. 테레지아눔 교장의 직위는 미국 학교에서의 이사회 의장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국적인 저명 인사에게만 주어진다. 뤼거가 1854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장은 타페 백작이었는데, 그의 아들이 총리로 재임하는 농안 뤼거가 명성을 얻게 된다. 또 한 명의 정부 수장인 안톤 리터 폰 슈멜링도 1865년에서 1893년까지 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며, 그의 선임자인 파울 가우치 폰 프랑켄투른 남작은 1897년에 오스트리아 총리가 되었고, 뤼거는 그해에 마침내 빈 시장이 되는 꿈을 실현했다.)
테레지아눔에서 보낸 6년 동안 카를이 훨씬 더 높은 신분의 아들들과 대등하게 교제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사관후보생이 아니라 통학생일 뿐이었다. 통학생이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거의 이 학교가 소재했던 빈의 비덴구 거주자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상류 부르주아 가문의 아들들이 통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몇몇 부르주아 가문은 자부심이 워낙 커서 자기 아들들을 테레지아눔의 속물적인 귀족적 환경에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세속적 자유주의자-및 유대인-가 가장 좋아하는 김나지움은 아카데미셰 김나지움이었다.) “그 외에도 완전한 평민의 자녀들...... 예컨대 폴리테크닉 고등학교 감독관의 아들인 카를 뤼거 박사와 같은 이도 언제나 있었다"며 그 학교의 역사가가 말한다. 통학생은 사관후보생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제복은 입지 않았다.
통학생이 정규 학생과의 차별 대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뤼거처럼 낮은 계층 출신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카를은 테레지아눔에 다닌 경험을 오로지 유리한 쪽으로만 활용한 것 같다. 그가 쇠네러처럼 귀족 계급을 조금이라도 질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지배계급을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고 항상 그런 태도를 유지했다. 나중에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아름다운 카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스타일에는 항상 어딘가 우아함이 드러났고, 거의 아름다움이라고까지 할 만한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빈에서 몰락하는 귀족과 억압받은 '소인'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기묘한 침묵 속의 이해공동체, 즉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가 빈의 즐거운 묵시록의 '젤라틴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에 속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시만, 뤼거는 테레지아눔에 다니면서 사회적 차별에 대한 선천적인 느낌을 다듬어나갔고, 미래의 적인 완고한 부르주아 종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출신은 더 낮은데도 사회적으로 더 우월한 듯한 미묘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감각은 잘 훈련된 하인, 즉 주인 계급과 자신의 계급 사이에 있는 중간 계급보다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더 잘 아는 종족들의 감수성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자유주의 중산계급에 대항하는 귀족계급과 대중적 연정을 구성할 때 하나의 자산이 된다.
대학생이 된 뤼거는 법학을 공부했다. 법학과 정지학 과목의 최종 구술시험에서 이 젊은이는 자신의 오스트리아 민주주의자 성향, 그러니까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및 보편적 참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달리 뤼거는 민족 지향적 태도를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성이라는 이념은 인류 발전에 파괴적인 요소이며 장애물이다." 뤼거가 시험을 치르던 보불 전쟁 직전(1870년 1월 14일)의 분위기에서 이렇게 근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테제를 옹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학생들의 태도가 아니었다. 전쟁이 벌어진 뒤 독일 민족주의의 열정이 빈 대학의 학생 공동체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젊은 뤼거 박사는 모교로 돌아와서 친프로이센 민족주의와 싸우게 되었다. 검정, 하양, 빨강의 깃발 아래에서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어느 학생 시위에서 뤼거가 그 북독일적인 색깔을 '전제적 자의성의 산물'이라고 비난하는 바람에 그 시위는 거의 폭동에 가까운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지자들에게서는 갈채를 받았지만 뤼거는 분노한 민족주의자들의 폭력을 피해 회의장에서 달아나야 했다. 정치에서의 날카로운 조성을 희생자 입장에서 처음 맛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가 정치활동을 한 기간 내내 변함없이 지지했던 유일한 사안, 즉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통합이라는 소독일주의 이념에 대한 반대 때문에 겪은 희생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당시의 전형적인 민주당원이 아니라 테레지아눔의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북독일에 대한 적대감만으로는 1870년대 초반의 빈에서 정치 경력을 쌓기에 충분치 않았다. 노조 입회증과 법학 학위를 가진 뤼거는 가장 확실한 통로를 통해, 즉 그 자신의 구역인 빈 시 제3구역의 자유주의 시민클럽Liberal Bürgerklub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그곳의 지도자인 리터 폰 쿤Ritter von Khunn은 1848년 혁명에 참가했던 원로로서, 이 젊은이를 '소인들', 즉 아직 참정권은 없지만 민주적 급진파의 기동타격대가 되겠다고 위협하는 세력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길러냈다. 1876년에 빈 시의회에 들어간 지 겨우 1년 만에 뤼거는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지로부터 '좌파에 반대하는 중도 정당의 흉갑'이라는 갈채를 받았다. 그 갈채는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해에 뤼거는 유대계 민주당원인 이그나츠 만들Ignaz Mandl과 연대하여 좌파로 기울었다. 만들은 도시를 장악한 자유주의 과두 체제에서의 독점과 부패를 통렬하게 매도한 평민 권리의 옹호자였다. 만들-뤼거 진영의 주 과녁은 자수성가형 변호사이자 곤충학자인 시장 카예탄 펠더Kajetan Felder였다. 두 파트너는 정치적 문제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얻고자 하는 소규모 점포주 세력인 '양복공과 야채상 연합'의 의견을 대변했다. 이 지지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소액 납세자들, 즉 도시 정부의 낭비와 자기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관직임명권의 이해관계에 유달리 민감한 제3의 투표권자 계층인 '10굴덴 납세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계급에 따른 선거권으로 인해 시 정부 내의 특권 계층에게 인정되던 관리권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뤼거와 만들은 시의 정치에 새로운 스타일을 도입했다. 예전에는 동질적 인물들로 구성되던 "지식인들의 시의회"의 살롱 같은 분위기는, 펠더의 표현에 의하면, 선동적인 민주당원들의 "셔츠 소매 바람의 예절"에 밀려났다. 고지식한 시장은 갈수록 민주화되어가는 시의회에 자신의 행정 행위에 대한 검열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가 1878년에 사임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빈의 중하층 계급이 거둔 중요한 승리였다. 뤼거와 만들은 그동안 시의회 내에서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그룹을 이끌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가 분열하는 계기가 된 개혁 과제였는데, 5굴덴 납세자들이 참정권을 얻은 1884년까지도 달성되지 못했다. 참정권 확대에 반대하는 일부 자유주의자의 저항-펠더 시장을 우두머리로 하는-은 하층계급의 반자유주의 분위기를 증폭시키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상충하는 용어가 되었다.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뤼거가 민주당의 선동가로서 거둔 성공은 거의 표시도 나지 않게, 자유주의 질서 전반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반대 속으로 그를 더 깊이 끌고 들어갔다. 그는 사회적 분노가 극대화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안을 포착해 경제적 질투심을 부추기고 민주주의자들의 원망을 강화했다. 그는 정치에서의 적인 자유주의자들을 고위급 금융계 인사들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분노가 쏟아질 과녁을 손쉽게 마련했다. 그리하여 뤼거는 시의 운송 시스템 건설 계약을 따기로 예정된 영국 국적의 한 제조업체에 대한 반대 운동을 개시했다. 뤼거는 이 회사의 지지자들이 자신 및 시의회의 다른 의원들을 매수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뒤이은 명예훼손 소송을 거치면서 그의 대중적 인지도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제 그도 쇠네러처럼 '국제 자본'이라는 거대한 골리앗에 대항하는 다윗 같은 역할로 나섰다. 1882년 3월 2차 소송에서 명예훼손에 관해 무죄선고를 받은 뒤, 그는 "이런 금융계 파벌과 화폐 권력은 (...) 공공 생활을 부패시키며 해친다"고 말했다. 또 그는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스스로 서약했다.
1882년에서 1887년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뤼거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규정했고, 의회에서는 좌파와 연대했다. 그는 선거구민의 태도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것을 최고의 장기로 삼는 시 정치가였으니, 그런 '소인들의' 입장이 점점 더 급진화해가자 그도 그들을 따라, 반부패에서 반자본주의로, 반자본주의에서 반유대주의로 입장을 바꿔가지 않을 수 없었다.
1883년에 뤼거는 로트실트 가문이 이윤이 두둑한 노르트반 운영 계약을 갱신하지 못하게 저지하려는 쇠네러의 십자군 운동에 가담했다. 쇠네러가 의사당 내에서 철도 국영화를 위한 싸움을 이끄는 동안 뤼거는 시의회와 빈 대중 가운데서 그를 위한 여론적 지지를 조직했다. 뤼거는 민주당의 도시 개혁가로서 '이권 소유자'와 맞서 싸우면서 하급 장인 계층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커가고 있었다. 그는 또 1882년에 쇠네러가 창립 회의에서 활약한 바 있는 바로 그 오스트리아 개혁 조합과도 관계를 맺었다.
뤼거는 쇠네러보다는 더 기회주의적이며 자신의 강렬한 감정의 속박을 덜받는 사람이었으므로 좀더 천천히 반유대주의적 입장에 다가갔다. 뤼거의 공식적인 입장은 1880년대의 유동적인 민주주의에서 원조 파시스트로 나아가는 불분명한 이행 과정에 반영되어 있다. 1884년까지도 그는 여전히 '모든 구성원의 평등성 원리'를 주장하는 민주당 당 강령의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5굴덴 납세자들이 참여한 첫 선거인 1885년의 의회 선거에서 뤼거는 여전히 민주당원으로 출마했다. 의회 의석을 놓고 경쟁하는 그의 경쟁자도 민주당원으로 출마했다는 것이 그가 나선 빈의 선거구(마르가레텐)와 투표 계급 모두의 특징이었다. 이 두 입후보자의 차이는 곧 그들을 보증하는 외부 세력의 차이였다. 반유대주의적 개혁 조합은 뤼거를 지지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경쟁자를 지지했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쇠퇴하는 자유주의와 상승 물결에 올라탄 반유대주의 모두를 위한 공통의 기반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뤼거는 '이권 소유자들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십자군 운동을 더 강조하고 반유대주의는 부수적으로만 추구했기 때문에 개혁 조합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민주주의자의 표가 충분했기 때문에 85표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뤼거는 페르디난트 크로나베터 박사 Dr. Ferdinand Kronawetter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민주당과 함께 1885년에 의회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당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과거와 같은 확고함이 부족했다. "우리는 민주주의 운동인지 반유대주의 운동인지, 어느 운동이 강력해지는지 볼 것입니다"라고 그는 크로나베터에게 말했다. "그에 따라 태도를 결정해야겠지요."
쇠네러가 1887년 5월에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자는 법안을 제안했을 때 뤼거는 마음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쇠네러의 법안을 지지했다. 크로나베터와의 최종 결별이 뒤따랐다. 뤼거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두 사조, 즉 민주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한데 합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범게르만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지만 뤼거는 유행에 뒤진 크로나베터에 대한 헌신보다는 쇠네러와의 연대를 더 가망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1887년에 뤼거는 쇠네러가 5년 전에 거친 것과 동일한 진화 과정을 완성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해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을 거쳐 반유대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뤼거는 빈의 정치인이며, 따라서 제국의 수도인 그 도시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국에 대한 근본적인 충성심을 지녔고, 따라서 쇠네러가 가진 무한한 증오심의 실체, 적극적이고 유동적인 실체인 게르만 민족주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뤼거는 자신의 이념을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를 다른 곳에서 찾아내야 했다.
뤼거가 하층 중산계급과 장인 집단이라는 지지자에 의해 쇠네러 편으로 밀려가던 중에도 이보다는 덜 민족주의적인 대중정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구역인 가톨릭 공동체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가톨릭은 뤼거에게 민주주의, 사회 개혁, 반유대주의, 합스부르크 충성심이라는 제각기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서로 이질적인 반자유주의 요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반대로, 뤼거는 그 산산이 부서진 구성 요소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대의 세속세계에서 제 갈 길을 찾을 만큼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지도력을 가톨릭교에 줄 수 있었다.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2de64d029b1c9618d3c5ab274df54b287420c82ff19653b8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8a68fc9ca44b213b0a56f471



뤼거의 기독사회당이 1889년경에 등장하기 전,(새로운 운동을 구성하는 집단이 재집결하는 데 여러 해가 소요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다.) 오스트리아 가톨릭교는 시대착오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시들어가고 있었다. 지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가톨릭교의 지도력은 자유주의 주도권이 영원히 파괴해버린 어떤 질서에 매여 있었다. 가톨릭교의 주요 정치적 지도자들은 연방주의자인 보헤미아 귀족들과 알프스 지역 출신의 지방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의회 클럽은 유명 인사들의 의회 내 소그룹Honoratiorenparteien이었다. 그들은 현대성과 현대적 작품 및 그 허세에 경각심을 느꼈다. 그들은 토지 소유 귀족이 지배하던 시절, 종교가 존경스러운 사회의 토대가 되어주던 사라진 나날을 그리워하며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현재에 보호받기 위해 그들은 요제프 황제의 방식대로 황제에게 의지했다. 1860년 이후에는 황제 자신이 자유주의자들의 포로가 되었음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성직의 최고위직은 대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채워지곤 했지만, 이런 성직자 계급 역시 교회의 전통적 권위가 해체되는 데 거의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바티칸 자체가 그랬듯이 주교와 사제들도 신절대주의의 와해에 압도되었다. 가톨릭교회의 맏아들이자 최후의 보호자이던 오스트리아 황제는 1860년에는 피에몬테의 배교자들과, 1866년에는 프로이센의 개신교도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오스트리아가 쾨니히그레츠(지금은 체코의 흐라데츠크랄로베)에서 패배한 소식을 들었을 때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의 비서관은 “카스카 일 몬도Casca il mondo!(세계가 멸망하는구나!)"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공포에 질린 편협한 성직자들의 세계관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바로크식 가톨릭교가 자유주의 시대에 처한 운명의 예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제 자유주의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둔 승리에는 입헌 정부의 수립뿐만 아니라 제국과 교황령이 맺은 화약에 대한 비난과 학교 개혁의 도입, 교황이 로마를 잃고 바티칸에 칩거하자 환호를 올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카스카 일 몬도!" 낡은 세계가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교회는 그 요제프식 행동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난파선이 올라앉은 바위이기나 한 것처럼 제국의 시스템에 매달렸으며, 의회 내 소그룹과 궁정을 통해 작업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 지도자들의 출신지인 귀족 그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했다. 교회는 불가피한 것에 굴복했고, 인내심 있는 희생자로서 고통을 견뎠으며, 자기 검열을 한다거나 자기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런 체념적인 자세에서 쇄신이 일어날 리 없었다. 유럽의 다른 곳들도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에서도 가톨릭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활력은 신도들이 현대 사회의 가능성을 재검토하고 그와 동시에 현대 교회의 잘못을 비판할 때에만 생겨날 수 있었다. 평신도나 성직자 모두 방향의 재검토와 재설정 과정에 서서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사회적 영역을 한참 넘어선 교회의 복잡한 발전 과정은 우리가 다룰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적인 정신은 세속적 자유주의 세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 정신은 1887년에 열린 제1차 전 오스트리아 가톨릭 총회에서 명료하게 나타났다. 그 예비 위원회는 레오 교황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새로운 분위기를 전달했다.

우리 나라에서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성실한 가톨릭 신자는 상황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새로운 여건 하에서 필요한 전투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톨릭 군주와 그가 마음대로 믿을 만하다고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통치되는 데 길들여진 가톨릭 평신도의 절대 다수는 이제 어느 곳을 지향해야 할지 더 이상 알고 있지 못합니다.

이 발언에는 가톨릭 정치 쇄신이 따르게 될 프로그램의 요소들이 담겨 있다. 가톨릭 공동체를 군주와 그의 자문관들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킬 것, 그리고 새로운 여건에 적절한 새로운 전투 방법과 조직 기술을 찾을 것이 그것이다.
1875년에서 1888년 사이에 뤼거가 자유주의의 출발점에서 멀어지고 세속적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을 때, 그런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가톨릭교 내에서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운동의 참가자들은 귀족과 가톨릭 지식인, 기업가, 성직자, 장인 등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저마다 나름대로 상처 입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이루는 새롭고도 복합적인 진영에 대해 말해주는 패러다임이라 할 사례가 바로 가톨릭 보수주의자의 온건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레오 툰 백작Count Leo Thun이 프라이허 카를 폰 포겔장Freiherr Karl von Vogelsang을 자신의 정치적, 이론적 도구인<조국Das Vaterland>의 편집장으로 임명한 행동이었다. 포겔장은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무관심이 자유주의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보았다. 이 신봉건주의 이론가는 자신이 보유한 최고의 치명적인 무기를 그곳에 겨누었다. 1789년의 정신과 자본주의를 연대시킨 포겔장은 중산계급을 건너뛰어 자유방임제의 압력에 맞서는 반란을 점점 더 강화해가던 장인층과 노동자 양쪽에 접근할 수 있었다. 위에 있는 종족, 즉 귀족계급의 일부가 아래에 있는 종족, 즉 자유방임의 하층계급 희생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변형된 형태로서의 강력한 선례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포겔장의 고국인 독일에서 찾을 수 있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이데올로기가 성공한 민주적 정당의 프로그램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사회적 입법 영역에서 일부 귀족은 포겔장이 내세운 이데올로기의 실용적인 유사물을 개발했다. 적들에게 '붉은 공작'으로 알려진 알로이스 폰 리히테슈타인 공작Prince Alois von Liechtenstein은 1880년 하원의 우익을 압박해 사회 입법을 얻어내는 선봉에 섰다. 카를 뤼거는 좌익에서 그의 노력을 지원했다. 귀족계급의 일탈자와 민주적 선동가가 서로 만난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두 세력이 이 느슨한 연정에 가담하여 기독사회당 구성원의 윤곽이 그려졌다. 열성적인 젊은 사제와 신학자들의 그룹은 교회와 민중 사이에서 더 필수적인 연대를 맺으려 애썼고, 반유대주의 장인 운동은 이미 쇠네러와 뤼거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교회와 정치 영역 모두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의 행동 프로그램은 더 신중한 연장자 세대의 반대에 부딪혔다. 새로운 프로그램에는 주류 사회에 대한 도전도 들어 있었기에 가톨릭 세계의 정숙한 지도자들은 그런 위험 부담을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만들과 뤼거가 민주주의 입장에서 반대를 제기했을 때 자유주의 빈 시의회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쇠네러가 의회 내에서 유대인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을 시작했을 때처럼.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의 가톨릭 내부에서는 더 날카로운 조성이 무자비하게 설쳤다. 급진적 가톨릭교도는 범게르만주의, 사회민주당원, 시오니스트들의 특징인 문화적 소외의 징후를 여러모로 보였다. 자신들만의 언론을 설립했고 자신들만의 운동 클럽을 조직했으며, 범게르만주의 민족주의자들처럼 자신들의 공동체를 국립 교육기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학교연합을 추진했다. 또 그들은 거리에서 폭력적인 대중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에게나 구식 가톨릭 계층 질서에나 똑같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스타일을 따르는 젊은 가톨릭교도는 젊은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이 기존 주류 질서에서 소외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을 구원의 전주곡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국가에서 물러나는 것이든, 아니면 그것을 정복하는 것이든 간에, 그들이 성공하기 위한 심리적 전제는 자신들이 소수파임을 분명하게 털어놓고 억압받은 사회적 준집단임을 솔직하게 규정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로운 가톨릭교도에서든 신민족주의자와 시오니스트들에서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톨릭교도의 사회적 불평불만이라는 요소를 일급의 조직으로 흡수한 정치적 연금술사는 카를 뤼거였다. 뤼거는 별반 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가톨릭 사회 이론을 자신의 정치적 경험에서의 촉매로 사용할 줄 알았다. 자신이 반유대주의자임을 털어놓음으로써 쇠네러 세력의 지원을 확보한 그는 쇠네러가 투옥된 덕분에 빈의 장인계층 대부분을 기독사회당의 골짜기 안으로 끌어갈 수 있었다.
빈 시에서 뤼거의 추종자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늘어났고, 1895년에는 시의회에서 시장으로 선출되기에 충분한 다수표를 얻었다. 그의 대중적 페르소나는 그의 다양한 지지자가 가진 온갖 색깔을 모두 담고 있었다. '아름다운 카를'은 그 세련되고 멋쟁이 같은 존재, 보들레르가 주장했듯이, “민주주의가 아직 전능하지 못하고 귀족계급의 불안정이 부분적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 이행기”의 정치 지도자에게서 효과적으로 작용한 그런 특질을 구사했다. 그의 우아하고 거의 냉담하기까지 한 태도는 대중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한편, 빈의 다정한 대중적 방언으로 대중과 말할 수 있는 재능은 그들의 마음을 얻게 했다. 귀족적 외피를 걸친 민중의 인물인 뤼거는 또한 빈 중산계급을 자기 쪽으로 끌어올 수 있는 특징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 도시를 진심으로 열정을 다해 사랑했으며, 그것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선임자들의 쓸데없는 낭비를 비판했고, 낭비의 낌새만 보여도 언제나 비판의 포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뤼거는 자유주의자들의 노선에서도 꾸준히 점수를 쌓아갔다. 마침내 1895년 3월에는 세력이 막강한 제2투표소가 그의 편으로 넘어왔다. 자유주의 진영에 남은 것은 부동산 소유자 가운데서도 최고의 부유층뿐이었다.
1895년 선거에서 얻은 뤼거의 승리는 빈 자유주의의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할 만한 2년간의 교착 상태의 시작이었다. 뤼거가 시의회에서 필요조건인 다수표를 얻어 합법적으로 시장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의 취임 승인을 거부했다. 그를 반대하는 압력이 사방팔방에서 황제에게 가해진 탓이었다. 주된 반대자는 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및 고위 성직자였다. 정부는 프란츠 추기경 쇤보른Franz Cardinal Schönborn의 개인적 중재를 통해 교황을 개입시켜 뤼거 지지 운동을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빈 시민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선거에 호소했고, 황제는 1897년까지 끈질기게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동안 대의제 정부를 옹호해오던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극히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에른스트 폰 플레너가 말했듯이, 정치 생활의 급진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명백하게 프로그램에 집어넣은 연정 정부는 황제가 거의 혁명이나 마찬가지인 운동의 “대변인”, “우리 의사당 내 분위기를 야만스럽게 만든" 책임이 있는 “공동체적 선동가"를 인준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사실은 납득했다. 그러나 플레너의 논리가 제아무리 납득할만한 것이었더라도 그의 반성직주의 정당은 이제, 우선 자유주의 헌정 질서가 초래한 결과를 피하려면 교회 주교들-심지어는 교황-에게 의존해야 하며, 그다음으로는 선거권자들의 의지가 달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의 지시에 기대야 한다는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진보적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젊은 시절에는 베토벤처럼 황제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는 행동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뤼거와 다수파의 의지를 막는 프란츠 요제프의 전제적인 거부권 행사를 찬양했다.
그러나 대중정치 시대에 황제의 거부권 행사가 계속 유지될 수는 없었다. 1897년의 성금요일에 황제는 굴복했고, 아름다운 카를은 의기양양하게 시청사에 입성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체코 땅에서의 언어 문제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말려들어갔다.(바데니 위기Badeni Crisis) 그리하여 오래된 자유주의의 거점이 반유대주의자 기독교도에게 함락되는 바로 그때, 의회는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불화에 빠져들어서, 황제가 의회를 해산하고 칙령을 내려 내각을 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땅을 치고 한탄할 일이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 변화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구원될 길은 이제 요제프주의로 퇴각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대의제 정부에 대한 기피이기도 했다.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전반적인 혼란이거나, 반자유주의 세력의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쇠네러와 뤼거, 각자는 자기만의 방식에 따라 자유주의와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선양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 모두 자유주의의 적들을 통합한 이데올로기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귀족적인 스타일과 몸짓과 행세를 활용해, 합리적 논쟁과 경험적인 증거의 힘보다는 뭔가 더 오래되고 더 깊이 들어가 있는 것에 기초한 권위를 가진 지도력을 여전히 갈구하는 추종자 대중을 동원했다. 두 지도자 가운데 쇠네러는 파괴적 본능을 풀어놓는 데 더 무자비하고 강력한 개척자였다. 그는 강력한 반유대주의 호소로써 벽을 깨뜨렸지만 뤼거는 그들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승리와 전리품을 얻었다.
뤼거는 로제나우의 좌절한 부르주아 기사보다는 덜 소외되었고 더 전통적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면에서도 뤼거는 쇠네러만큼 증오나 확신이나 일관성이 크지 않았다. 쇠네러가 유대인 공동체의 초민족적 성격을 이용해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서의 모든 통합 원리를 공격했다면, 뤼거는 반유대주의를 상대적인 수단으로 활용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데 썼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뤼거의 유명한 말은 군주제와 가톨릭교회, 심지어는 그가 투쟁의 대상으로 맹세한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반유대주의의 폭발적이고 전복적인 잠재력을 둔화시킬 여지를 그에게 주었다. 연정을 수립한 사람은 원칙적으로 행동하기 힘들다. 뤼거는 따라서 가장 악랄한 반유대주의자까지도 부하로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이데올로기로서 보다는 조정자와 기계 제작자 입장에서, 반유대주의를 즐기기보다는 그것을 고용한 것이다. 새로운 조성의 정치에서도 뤼거는 대중정치 시대를 위해 합스부르크 원리를 응용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호전적 경쟁자인 쇠네러를 희생시켜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라고 하지.
그대,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하고 자손을 낳을 테니까......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그는 인종주의라는 독을 제한적으로 사용해 자유주의자라는 적을 공격함으로써 귀족계급과 민주당원, 수공업자, 교회 일원의 연대를 만드는 일을 더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dc68f090fe4e23680a8b2804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408a4906991c0e3df2738d6081de6ea997a84c21610a9d2f76


viewimage.php?id=2ca8c332f7db39&no=24b0d769e1d32ca73fed8efa11d02831f03ea6d0e55e4594cd11f5d00de0424ceb8c6d1210d4299110602de64d029b1c9618d3c5ab2719a91c7f74719879f18c0a44


추천 비추천

7

고정닉 5

2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61 설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갑 절대 안 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20 - -
4917 정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내 슬로바키아의 경제적 발전: 역사적 고찰 1) [3] kriegsmarin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21 190 1
4817 일반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스탈린의 죽음이 없었다면 [2]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6.01 222 3
4588 일반 오헝의 남북분단 고찰 [2] Österreich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1.13 219 3
4539 정보 1688년 동구 문제의 시작 [3] ㅇㅇ(121.155) 20.12.21 218 5
4387 정보 레오폴트 1세가 오스만에게 요구한 영토 [3] ㅇㅇ(175.205) 20.11.07 402 11
4228 정보 알바니아-오스트리아 양자관계: 1900년대 초중반을 중심으로 [6]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23 382 6
4220 정보 대전의 서막- 사라예보의 반세르비아 폭동 (일부혐오주의)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16 270 1
4162 정보 이보 안드리치, 그리고 히틀러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21 181 0
4148 정보 마리아 테레지아와 폴란드 분할 [2]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11 422 9
4134 정보 오스트리아도 조선에 포함외교를 시도했음.story [5] AYAS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04 929 13
4095 정보 조선 주재 공사관의 설립을 역설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문서 [5]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25 260 3
정보 카를 뤼거와 게오르크 폰 쇠네러,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 [8]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6.12 697 7
4033 정보 체코 시민 사회의 발전 (1860~1914년) [2]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5.29 294 6
4032 일반 계몽주의민족주의 영향받은 지역에 설립된 왕조들은 좀 너무 어이없음 [3] ㅇㅇ(106.253) 20.05.29 88 0
4017 일반 전력량으로 보는 세계 교류현황(미주 제외) [2] ㅇㅇ(112.171) 20.05.25 66 0
3975 일반 북대서양 태평양 벵골만으로 가는 땅, 강이 없는 [1] ㅇㅇ(61.75) 20.05.19 39 1
3962 정보 제2차 베르기젤 전투: 바이에른-작센 연합군을 대파한 티롤의 반군 [12]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5.15 284 5
3837 일반 유럽의 여러 산업 벨트들 [17] 오스트리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4.03 427 7
3812 정보 DNA 테스트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4]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3.26 125 2
3783 정보 옛날 옛적 유고슬라비아에: 오스트리아 군정국경지대 [5] 제국의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3.16 163 3
12345

게시물은 1만 개 단위로 검색됩니다.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