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1년 함대 계획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전열 배치에 관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미국과 기타 연합국은 가장 체급이 큰 전함을 제외한 모든 함급에서 일본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킴멜 제독은 전함 9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은 전함 6척과 순양전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싱가포르로 접근하는 영국 주력함 2척에 대응해야 했고, 나머지는 민다나오-셀레베스 지역 작전에 투입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오렌지측의 전함들은 더 빨랐고, 승무원들 또한 야간 전투에 더 훈련되어있었다. 블루측의 전함들은 항속 거리가 더 길고 장갑이 더 두꺼웠다. 16인치 함포(18인치 초대형 전함이 취역하기 전까지 이는 일본의 가장 강력한 함포였다)의 수로 따지면 킴멜 제독은 3대 2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태평양 함대는 결정적인 함포전, 즉 오렌지 계획의 전설적인 목표인 함대결전에서 순간적인 우위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었다.
...
1941년에 함대결전이 벌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오렌지측 해군은 태평양 함대에 비해 항공모함 수에서 10대 3으로 우위를 점했다. 500대의 항공기는 2대 1의 우위를 의미했다! (만약 홀시 제독이 손실을 입었다면 그 차이는 더 컸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공모함이 전함보다 우월했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라면 블루 해군의 계획이 자살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1941년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생각되었다. 그 해 여름, 해군 총참모부는 미 해군 항공기가 "현대적인 항공 작전에 쓸모가 없다"고 평가했고, 일본의 항공 전력은 커다란 물음표였다. 킴멜 제독의 공군력에 대한 인식은 다소 원시적이었다. 킴멜은 항공모함의 장거리 정찰 능력은 높게 평가했으나, 대체로는 항공모함을 보조적인 역할로 여겼다. 킴멜은 항공모함은 소규모 습격 작전 등을 위해 분리될 수 있었지만, 함대전에서의 주된 역할은 전열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킴멜은 이것이 "매우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견해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
몇
년 후, 킴멜은 만약 두 함대가 충돌했다면 "꽤 재미있는 난장판"이었을 것이며, 절대로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Miller, Edward S. War Plan Orange: The US Strategy to
Defeat Japan, 1897-1945. Annopolis: Naval Institute Press, 2013. p.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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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Edward S. Miller가 쓴 War Plan Orange라고 미 해군의 대일본전 작계(오렌지 계획) 변천사를 정리한 서적 읽어보는데 재밌는 내용 있어서 제목으로 어그로 끌어봤다....
대충 책 내용 큰 흐름을 요약하면
요약하면:
원래 1906년에 미 해군이 처음 대일본전 작계를 수립했을 때는 미국도 함대결전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음 (이땐 머핸이 아직 살아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함). 고로 원래 미국의
대일본전 작계는 간단했음:
1. 일본(오렌지)이 필리핀을 공격해 전쟁이
발발
2. 있는 전함 없는 전함 싹 다 긁어 모아 "일본을 조질 영끌 대함대"를 결성
3. 그대로 일본으로 돌격
4. 이 대함대를 막으러 오는 일본의 주력함대와 함대결전 (미개한 똥양인들 상대로 미 해군이 3:2 이상 수적
우위도 있으니 질리가 없음)
5. 결전에서 이기면 전쟁에서 이김
6. 개전 이후 3개월-6개월 내에 승전!
당연하지만
미해군내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 했음.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 이렇게 무지성 닥돌하면 "점감요격" 이후 "쓰시마" 당하는 거 아님? 일본은 본토 근해에서 싸우고 우리는 세계
반 바퀴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장거리 항해 후 결전에서 이길 수 있음?
둘째, 결전 이길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세계 반 바퀴 돌아서 일본 근해에서 함대 결전 하려면 필리핀 언저리 어딘가에 중간해상보급기지가 무조건 병참상 이유로 필요한데, 이런 대규모 해상 기지를 지을 만한 장소가 서태평양 미국령 제도 중에 있음?
이런
비판점을 계기로 앞서 말한 "결전파(Thruster)" 작계에 반대해 미 해군 내에서 "신중파(Cautionary)" 작계가 1910년대 부터 거론되기 시작함.
신중파의 작계 제안을 요약하면:
1. 일본이 필리핀을 공격해 전쟁이 발발
2. 처음 6개월-2년 (이
기간에 대해선 어느정도 신중파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음) 동안 일본이 맘대로 서태평양을 휘젓게 놔두며, 이 동안은 일본과 대규모 수상전을 되도록 회피
3. 일본이 그럼 필리핀과 서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싹다 점령할거임
4. 일본 해군이 서서히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
일본의 보급 능력의 한계에 있는 최외곽섬들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1-3년에 걸쳐서 재점령
5. 이런 최외곽의 위치한 작은 섬들을 지키기 위해 일본 주력 함대가 출동 할리 없으므로 큰 함대전 없이 서서히 일본 해군의
소형함들에 대해 소모전을 강요할 수 있음
6. 이렇게 몇 년 동안 전쟁 질질 끌다 아마 필리핀을 되찾을 때쯤 되면 일본 해군도 조급해져서 결전을 위해 출동할거임
7. 그러나 이 상황에선 우리 해군도 서태평양에 섬들을 하나씩 점령해 가면서 전초기지/보급기지
잔뜩 세워놨을 테니 점감요격/쓰시마 당할 걱정 없음
8. 후방 병참 지원도 빵빵한 상태로 결전에 임할 수 있고, 몇 년 짜리 장기전이면 새로 건조된 전투함들로 인해 우리 전력은 오히려 보강되었을꺼임
9. 이때 결전에서 이기면 전쟁에서 이김
10. 개전 이후 2년-4년 내에 승전!
문제는
당시 미 해군 수뇌부의 주류였던 결전파가 이 작계 제안에 대해 개거품 물며 발작하며 반대함. 그 주된
이유를 대충 요약하면:
"개전 이후 6개월-2년 동안 계속
지기만 하고 필리핀/서태평양 섬들 다 뺏기고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 국민이 그걸 납득할 것 같음? 전쟁 그딴 식으로 하면 일본이 공세종말점 도달하기 전에 정치/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일본이 행정부랑 적당히 평화 협정 맺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전쟁 진거임"
라는
논리였음.
좀
더 자세히 파고 들자면, 당시 미 해군은 미국 국민과 정부의 장기전 감수 능력에 굉장히 회의적이었음.
고작
태평양의 별볼일 없는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미국 국민이 2-4년, 어쩌면
더 긴 장기전을 이해해줄까? 심지어 개전 이후 6개월-2년 동안 일본을 상대로 후퇴만 하고 태평양 함대가 출동 안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면?
국민이나
정치인들이 보기엔 이런 상황이 납득 가능할까?
장기전에서
전쟁 수행 의지를 유지시키기 위해선 명분이 중요한데, "필리핀 지키기"가 충분할까? 일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 국민이 장기전을
납득할 만한 명분을 우리를 위해 만들어줄 리는 없잖아? 그런 명분이 생기려면 일본이 미국 전국민을 상대로
뭔가 엄청난 광역 도발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일본이 병신도 아니고 그렇게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반면
일본 국민은 천황이 전쟁 계속 하자면 끝까지 싸울 족속들 아님? 설사 국민성을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일본한테 서태평양은 핵심적인 전략구 이지만 우리 미국에겐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 아님. 일본의 전쟁 수행 의지가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은 명백함.
그럼
전쟁이 장기화되면 우리의 전쟁 수행 의지가 먼저 바닥나는 거 아님? 장기전으로 가면 일본이 유리하고
우리 미국이 불리한 거 아님?
대충
이런 논리로 신중파는 굉장히 비판을 많이 받으며 1920년대 중반까지 미 해군에선 결전파가 압도적 주류
였음.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중파가 급부상을 하게 됨. 이는 앞서 말한
결전파 작계의 필수 조건인 "필리핀 근처 적절한 대규모 중간해상보급기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실패했기 때문임.
이
중간보급기지의 위치와 가능성을 두고 미해군내에서 결전파와 신중파가 한동안 싸우게 되는데, 보급기지
확보 시도가 번번이 계속 실패하면서 신중파가 서서히 우세해지다가, 결국 1933년 완전히 폐기되고 신중파 작계가 결전파 작계를 대체하게 됨.
종지부를 찍은 마지막 사유는 1933년에 진행된 미 해군 내 워게임 결과였음. 항공력의
발전, 미 구축함 전력의 고갈, 기타등등 여러가지 요인 덕분에 설사 중간보급기지가 확보 된다 하더라도 영끌 함대를 모아 태평양을 건너 항해할 경우 신중파가 말한대로 "점감요격" 당해서 일본 근해에 도달할 때쯤 되면 전함 수에서 오히려 수적 열세가 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임.
그렇게
미 해군 수뇌부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과감히 결전파 작계를 폐기, 이후 신중파 작계를 골자로 오렌지 계획을 재수립하게 되는데....
태평양전사
빠삭한 군붕이들은 이미 알겠지만 실제 2차대전은 신중파가 처음 세워놓은 작계랑 거의 비슷하게 흘러감. 세부적인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골자는 다 들어 맞음. 고로 어떻게
보면 태평양 전쟁은 미 해군이 1910년대-1930년대에
걸쳐 그려놓은 작계 시나리오 거의 그대로 흘러갔다 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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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게 다였으면 제목을 저렇게 안 해놨겠지?
1933년 신중파의 승리로 대일본전 작계가 장기전으로 확정되었지만, 하루 아침 만에
미 해군내 결전파가 사라진 게 아님. 오히려 미 해군내 상당수의 제독들은 마음속 깊이 아직 결전파였고, 항모회의론은 물론 거함거포주의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음.
킴멜(Kimmel)이랑 킴멜의 작전과장 맥모리슨(McMorrison)도
그런 결전파 쁘락치 중 하나였음.
1941년 2월 킴멜은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됨. 신중파적 대전략에 따라, 미 해군 작전부는 킴멜한테 구체적인 작계를
만들 때 지켜야 할 지침 몇개를 통보함. 이 중 일부를 요약하자면:
1. 개전 이후 최소 6개월 동안은 동경 155도보다 서쪽에서의 대규모 수상 작전을 금지함 (이것도 원래는 동경 180도로 아예
"진주만에서 나가지 마" 였는데 육군이 항의 하니까 155도로 마셜 제도랑 동 캐롤라인 제도는 포함하도록 타협한거)
2. 일본이 석유 확보를 위해 말레이 제도를 공격할테니 이를 방해하기 위한 양동작전을 위 범위 내에서 공격적으로 펼칠 것.
즉 한마디로 "어그로 끌기 위해 간보면서 얕게 찌르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마" 임.
하지만 항모 회의론자, 거함거포주의자, 함대결전파였던 킴멜은
이 지침을 이렇게 받아드림:
1. 오 그럼 동경 155도 보다 동쪽이면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
2. 소규모 양동작전 정도로 일본이 말레이 제도 먹는걸 막을 수 있겠음? 일본 주력함대를
마셜 제도로 유인해서 큰 피해를 입혀야 말레이 제도를 지킬 수 있는거 아님?
이래서
탄생한 결과가 바로 War Plan Pacific-46/WPPac-46, 이 글
맨 위에 있는 지도에서 그려져 있고 발췌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킴멜과 작전과장 맥모리슨이
작성한 미 태평양 함대의 작계임.
당연하지만
이건 해군 수뇌부의 신중파 대전략의 의도와 정반대 되는 작계임.
킴멜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이걸 인가 받을 때는 대놓고 함대 결전을 추구할 것이다 라고 적어놓지는 않음. 그냥 "무력 정찰"을
위해 태평양 함대의 모든 전함과 구축함을 출동시켜서 마셜 제도 북쪽에 대기(?) 시켜 놓을 뿐임.
그래서인지 미 해군 작전부에선 킴멜의 함대 배치나 의도를 딱히 자세히 따지지 않고 일단 킴멜의 작계를 인가
함.
하지만 Miller에 의하면 킴멜이 실제로는 함대 결전을 추구했다는 무수한 정황적 증거가 있음. 킴멜 본인도 "ㅎㅎ 함대 결전 했으면 해볼만 했을지도" 이런 얘기를 함. 애초에 함대 결전이 아니면 태평양 수상 주력
전열을 통째로 출동 시킬 이유가 뭐임?
이를
바탕으로 킴멜의 작계를 재구성 하면:
1. 개전 9일차 내에 태평양 함대의 항모 3척을
전부 이끌고 마셜 제도에 시끄럽게 공습을 가해 일본 해군의 "주의를 끔" (미끼 역할)
2. 태평양 함대의 순양함들이랑 잠수함들은 일본 근해로 가서 연합함대가 출동하는지, 출동한다면
어디로 가는지 추적 및 마셜제도 쪽으로 유도함
3. 태평양 함대의 나머지 전함들이랑 구축함은 하나의 대함대로 뭉쳐서 웨이크-미드웨이
사이에서 대기 탐
4. 만약 연합함대가 미끼를 물고 항모를 잡기 위해 마셜 제도로 출동 시, 항모들은 북상해서 주력 함대와 합류함
5. 그대로 마셜 제도 북쪽, 웨이크섬 언저리에서 개전 16일차 쯤에 함대 결전
이런
식의 계획을 세웠다 볼 수 있고, 이를 정리한게 글 상단에 있는 지도들임.
발췌문에서
알 수 있다시피, Miller는 이런 킴멜의 함대 결전 작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임.
킴멜이
주포 갯수상으론 유리한게 맞긴 한데, 41년 12월이면 미 항모들은
아직 버팔로를 현역 함재기로 굴릴 때임. 이 상태로 수적으로도 압도적 열세인데다 제로센 탑재한 1기동함대를 상대로 항모 전력을 전부 다 미끼로 내놓는다고? 그렇고
나선 전함을 끌고 가서 함대 결전을 걸어온다고? 이런식의 전함 대 전함 결전을 위해서 죽어라 훈련해오고
장비를 갈고 닦은 일본 해군을 상대로? 이게 맞음? 님 정신나감?
더
나아가, WPPac-46이 실행되었다는건 진주만 공습이 없었고, 그럼
일본 해군이 남방작전만 개시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킴멜이 무리하게 함대 결전을
걸어오다 제로센/산소어뢰 웨이브 개같이 뚜들겨 맞고 태평양 함대 수상전력의 상당 부분이 수장 당한다? 그럼
실제로 미 해군이 제일 두려워하던 "국민/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 조기상실" 가능성이 있는거 아님?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식민지 및 기타 듣보잡 태평양 식민지들 지키기" 라는 명분을 위해 미국 국민과 민간 정부가 이런 엄청난 패전을 감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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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만약 설사 일본 해군의 내부 정치가 다르게 흘러가서 진주만 작전이 채택되지 않았더라도, 아마 킴멜이
기획했던 함대 결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난 낮다고 봄.
만약
진주만 작전이 취소됐더라도, 일본 연합함대의 구축/순양함
전력 대부분은 남방작전에 투입되느라 일본 주력 전열을 호위할 구축함/순양함들이 부족했을테고, 고로 여유전력이 없으므로 일본이 이런 킴멜의
함대결전 도발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됨.
하지만
일본 측 남방작전 작계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일본도 구상단계에서 인도네시아/필리핀/싱가포르 동시 공세가 아니라 순차 공세를 고려했던 적이 있긴 함.
예를 들어 1940년 일본 육군이 제시한 남방작전 작계안에선, 필리핀을 완전히 우회해서 인도차이나->싱가포르->말레이 제도 루트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 유전을 직접 차지하는, 즉 아예 필리핀을 공격 안하고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도록 유도하는 안이 제시되었었음.
만약 이런 식의
동시 공세가 아니라 순차 공세로 남방작전이 구상되었더라면 일본 연합함대에 여유 전력이 어느정도 있었을테고, 그러면
일본 함대가 킴멜의 도발에 응했을 가능성도 있었을지도?
만약
그랬으면 웨이크 섬 근처에서 태평양의 유틀란트를 볼 수 있었던 거임.
설사 그렇게 되다 하더라도 미 해군 결전파가 걱정했고 일본이 희망했던 강화 엔딩이 가능했을지는 몰?루.
그래도 대역소설
하나쯤 쓰기엔 괜찮은 시나리오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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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vans, David C., and Mark Peattie.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1887-1941. New York: Naval Institute Press, 2015.
Miller, Edward S. War Plan Orange: The US Strategy to Defeat Japan, 1897-1945. Annopolis: Naval Institute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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