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7.13-8.31)
여름밤에 그리는 축제의 선율
스위스 자연을 채운 율리아 피셔(바이올린)와 임윤찬(피아노)의 선율
예후디 메뉴인(1916-1999)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세계를 떠도는 여행자였다. 뉴욕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프랑스, 영국 등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겼고, 종종 인도를 찾았다. 그런 그가 '집처럼 느낀다'고 말한 곳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그슈타트(Gstaad)였다. 굴곡진 능선이 안온한 조화를 이루는 그슈타트를 거닐고 있으면 그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이곳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또 다른 마을 자넨(Saanen)은 시간이 멈춘 듯한 소박한 정취가 풍긴다. 이 일대의 모습은 메뉴인이 첫 여름을 보낸 1954년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은 1956년 이곳의 관광청장이 여름 관광 활성화를 위해 메뉴인에게 공연을 제안하며 시작됐다. 메뉴인은 이듬해 자넨에서 축제의 첫선을 보민 후, 무려 40년 동안 감독을 맡았다. 제오르제 에네스쿠(1881~1955)와 아돌프 부슈(1891-1952) 문하에서 배우고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초연하는 등 당대 전설적인 음악가들과 교류한 메뉴인 덕분에 축제를 찾는 연주자들의 명성도 대단했다.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은 세계 최고의 여름음악 축제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2002년부터는 크리스토프 뮐러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시간의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곳
을해 축제의 주제는 '변화(Transformation)다. 현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에너지를 담은 작품들로 구성했다. 지난해 시작한 'change' 사이클 중 두 번째로, 축제들이 점차 주제를 생략하는 것에 반해 3년의 거대한 음악적 장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을해의 상주 음악가인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 피셔(1983-)도 주제에 맞춰 4회의 공연을 기획했다. 피셔는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에 대해 "그슈타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치, 그러니까 시간의 사치를 부리게 합니다. 인내를 통해서만 완성할 수 있는 까다로운 작품을 올릴 수 있어요. 세심한 프로그래밍에도 도전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예술 감독이 요청한 R.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 포젠'은 어떤 작품과 엮어야 할까요?" 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끝없는 슬픔이 스며드는 '메타모르 포젠'에 견고한 베토벤 작품들을 매치했다.
(중략)
임윤찬의 데뷔 무대, 그가 증폭한 풍경들
7월 17일 자넨교회에는 젊은 한국 여성들이 객석 곳곳을 채운 신선한 풍경이 펼쳐졌다. '임윤찬 효과'였다. 공연은 임윤찬의 데뷔라는 희소성과 함께 먼 길을 온 팬들도 많았던 만큼, 집중도와 반응이 아주 좋았다. 홍보 담당자조차 "자넨교회에서 이렇게 큰 호응이 나온 건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현지인들도 새로운 보석의 발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프로그램은 국내 무대에도 선보였던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Op.19-1과 Op.85-4, 차이콥스키의 '사계', 그리고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다. 무대에 오른 임윤찬은 잠시 시간을 가진 뒤 '무언가'를 시작했다. 자유로운 루바토와 타건의 감도가 선율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노래의 성질보다는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피아노적인 접근이 돋보였다.
휴지 없이 이어진 '사계'에서는 무한히 확장되는 색깔의 팔레트를 펼쳤다. '무언가'의 잔상이 남은 1월 '난롯가에서'부터 페달을 풍부히 쓴 6월의 '뱃노래'나 쫓고 쫓기는 긴장감이 대단했던 9월의 '사냥', 그리고 텅 빈 우수로 완벽히 분위기를 전환한 10월 '가을의 노래' 등. 작품마다 다채롭고 입체적인 뉘앙스가 흘러넘쳤다.
무엇보다 그슈타트를 열광케 한 건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임윤찬은 그 자신도 전람회를 거닐 듯, 때때로 무대를 둘러싼 프레스코화를 응시하며 연주했다. 그의 유명한 말마따나 "심장을 강타"한 방식으로 원본 악보를 조금씩 수정한 연주였다. 덕분에 관객은 이 작품이 묘사한 빅토르 하트만 (1834-1873)의 그림을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예컨대, 시장에서 다투는 여자들을 묘사한 '리모주의 시장'에서 펼침화음을 하나의 스포르찬도 화음으로 내리꽂는 해석은 따박따박 삿대질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외에도 급격한 다이내믹, 자유로운 스타카토와 마르카토, 트릴,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쉼표, 자연스러운 아타카를 위해 덧붙인 음, 혹은 호로비츠의 편곡본에서 따온 짧은 변형 패시지 등 그림 속 풍경을 증폭할 장치가 넘쳐났다. 이 장치들은 '예측할 수 없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고 악보를 찾아본다. 임윤찬처럼 관객에게 악보를 들여다보게 하고, 원본과 편곡본까지 비교하게 만드는 연주자가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이 피아니스트의 존재는 아이코닉하다. 다만, 본능에 충실한 뉘앙스의 조각들로 앞으로 어떤 큰 그림을 그려나갈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임윤찬이 보여준 해석들은 충분히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설득력이 있다. 그것이 임윤찬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부분임은 틀림없다.
앙코르는 쇼팽의 '녹턴'(Op.9-2)이었다. '무언가'의 아름다운 선율이 본능의 폭풍을 거쳐 다시 낭만적인 선율로 돌아와 마무리됐다. 마치 최면에 빠졌다가 돌아온 듯한 아름다운 데뷔 무대였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사진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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