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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팬대] 단어의 고뇌앱에서 작성

유카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4.24 02:31:07
조회 844 추천 12 댓글 7
														





봐, 메리. 언어에서 보랏빛 제비꽃은 보랏빛이라는 술어와 제비꽃이라는 주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세계에는 여기, 보랏빛 제비꽃 한 송이, 단 하나의 사물만 있을 뿐이라구.

부정하는 말도 그래. ‘렌코는 오늘 지각을 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어떤 현실에 대응할까? ‘렌코는 어제 지각을 했다’? ‘렌코는 오늘 결석을 했다’? ‘메리는 오늘 지각을 했다’? 부정하는 말은 다만 그것을 나타낼 뿐, 그 어떤 사건과도 필연적으로 대응되지 않아..

그러니 메리, 집중해 봐. 말이, 생각이 세계를 온전히 나타낼 순 없어. 사건의 총합인 세계는, 말의 총합보다 분명히 크다구. 알아 듣겠어?


***


유감이지만, 렌코. 너는 틀렸어.
우리가 사는 이 현실, 그 모든 것은 결국 현재의 단어들, 말들, 생각들 위에 있기에 실재할 수 있는 거야.
모든 것은 단어의 실체 그 자체야. 단어가 있음으로서 실존을 얻는 거야. 심지어 단어를 설명할 때도 단어가 필요해. 모든 개념과 우리의 사고 하나 하나까지 단어 위에 존재해.

모든 사물은 단어를 필요로 해. 단어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존재한다고 해도 보이지 않아. 보인다고 해도 느껴지지 않아. 물론, 그런 것 마저도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 우린 그런 것을 ‘증명 불가능’ 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알고 있잖아?

모든 사건은 단어 위에 존재하고, 사건의 총합은 단어 안에 존재할 뿐이야.
절대 그것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어.
말은 곧 단어. 단어는 생각. 생각은 말이야.
단어가 실체가 아닌, 실체가 단어야. 실재하는 모든 것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이를테면 말야..




***




사랑, 집착, 욕구 불만, 애정 결핍


저를 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누군가는 제 어릴적 트라우마를 운운할 테고
무슨 콤플렉스니 뭐니 하면서 여러 단어로 저를 설명하겠지요.


좋아. 아아, 그래. 다 상관 없어.
나를 이해하는 건 나일 뿐이야.



“메리 집 오랜만이네! 그래서, 할 얘기가 뭐야?”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잠깐 따라와볼래?”


“응? 뭐야?”


“...”


“아..”


“미안해. 렌코. 미안해. 미안해..”



방문을 잠그고, 닫혀 있던 너의 문을 열어젖히며.



“미안해..”




*** 다음




“렌코, 나 왔어.”


“제발, 왜 이러는 거야..”


“후.. 오셨어요, 주인님.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 인사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데. 너무 큰 기대였으려나?”


“무서워.. 흐윽.. 너무하잖아, 메리.. 이런 거. 제발, 풀어 줘..”


“아직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못한 모양인데.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고통은 쾌락이 될 거야.”


“싫어..”


“그럼, 잘 있어. 렌코.”


“메리! 가지 마!”




*** 다음




“렌코, 나 왔어.”


“...”


“접시를 깨끗이 비웠네. 배고팠구나?”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야.”


“무슨 소리야 렌코, 너였기 때문이야. 정말 모르겠어? 너와 나였기 때문이야. 우리 비봉구락부의 존재 의의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아직도 모르겠어?”


“이해를 못하겠어, 이상해.. 메리, 넌 뭔가 잘못됐어..”


“아..”


“...”


“...미안해, 렌코. 내가 실수하고 있었구나.”


“그래, 메리! 어서 이것 좀 풀어 줘.”


“너를 사람 취급 해줬던 것이 잘못이었어.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되겠지?”


“뭐?”


“음, 그래. 고양이는 어떨까? 렌코, 넌 이제부터 고양이가 되는 거야. 아주 사랑스러운. 고양이. 어때?”




***




“잠깐! 잠깐! 메리! 스탑!”

“왜? 이제 막 조교 파트에 들어가려는 참에.”

“아니아니, 우리 단어와 실체에 대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았어? 근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책은 대체 뭐야?”

“아아, 저번에 같이 썼던 박물지. 우리 체험담을 쓰다보니 말야. 그.. 차마 담지 못할 내용을 따로 편집해놨던 건데..”

“그런 말도 안되는 체험담 같은거 없었어!”

“렌코, 우리의 추억들을..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 땐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신형주였는데? 게다가 우리 조금밖에 안마셨구..”

“아, 아무튼! 갑자기 이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그게, 실제 체험담이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 안에선 결국 단어가 실체를 갖고, 단어가 아니면 절대 존재할 수가 없잖아?”

“그렇지. 그 이야기에 실제 체험담은 1할 쯤이지만.”

“그래서 예를 들어 말해 본 건데.. 으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뭐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뭐가?”

“사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 그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

“푸핫. 정말 메리다운 이야기네.”

“하지만, 하지만 렌코. 잘 생각해 봐. 우리가 정말 어떤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라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면?”

“그러니까, 이 모든 현실이, 그냥 어떤 인위적인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거야?”

“그래.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여기서 대화를 하는 것과, 우리가 겪었던 과거, 우리가 겪을 미래.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의지라고 믿는 생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것이 그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어떤 이야기였다는 얘기야.”

“아니, 잠깐만. 이해가 좀 안 되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를 쓴 건 누구지? 신이라도 있다는 거야?”

“응. 신.. 그것 이상으로 그 존재를 표현할 방법이 딱히 없네.”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만약, 그래. 우리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을 만든 건 누구지? 태초에 신이 있었다. 라는 걸론 설명이 안 되잖아.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순적이야.”

“렌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전지전능한 무언가의 존재 이유가 아냐. 중요한 건, 바로 우리들의 존재 이유라구.”

“철학적인 이야기?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고 싶은 거야?”

“그래. 우리의 신은, 어째서 이런 현실,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너와 나를, 등장 인물을 만들어 낸 걸까? 더군다나,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까지 하잖아. 이야기로 치면 그저 단순한 단어의 조합일 뿐인 우리가, 대체 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메리, 일단 신이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그 전제는 마음에 안 드는데. 정말 이 모든 게 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아마도..”

“아마도?”

“음..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뭐, 정말 심심했다거나, 무언가 만들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에 그랬는지도 모르지. 우리가 박물지를 만들었듯이 말야.”

“렌코. 식상한데.”

“어, 어쩔 수 없잖아! 네 말대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다른 차원을 인식하는 문제니까, 우리는 그것의 의도는 커녕 존재 유무조차 절대로 알 수 없다고.”

“뭐어, 그렇긴 해. 사소한 상식조차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테니. 철학의 문제로 접어들게 되겠구나.”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야.”

“뭔데?”

“네가 말한대로, 실체가 단어를 필요로 한다면,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생각하는 존재가 없었을 때. 아주 오래 전. 가령 몇 억년 전의 지구라던가. 모든 것의 시작인 빅뱅 직후라던가. 아무튼, 그런 때에 단어 밖에서 존재했던 모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으응, 렌코 네 말대로 그 때엔 생각이나 말은 존재하지 않았지. 사고나 단어도 없었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현재에 존재하는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모든 것을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 바로 지금, 그 때의 모든 사건을 단어로 설명할 수 있어. 결국, 단어가 있기에 그 사건이 실존하게 되는 거지.”

“메리, 단어는 그런 초월적 존재가 아냐.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야.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단어에 앞서 존재해왔어.”

“실재하는 모든 것들? 그런 것도 결국 인간이 사고하고 만든 개념일 뿐이잖아. 실존하는 모든 것은 생각과 사고. 즉, 단어에 기초하게 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단어가 실체. 과거도 단어로 실재하게 했었고. 미래 또한 단어로 실재를 얻게 되는 거지.”

“...메리, 너 정말 이 모든 게 어떤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거야? 누군가가 만들어낸?”

“글쎄, 신의 존재, 그건 결국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겠지. 그래도, 우리가 그저 빅뱅 이후로 우연에 의해 생겨난 의미없는 존재라고 믿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아?”

“하지만 메리, 너와 나, 비봉구락부가 그저 누군가 만들어낸 단어일 뿐이고, 누군가 만들어낸 설정, 그리고 관계일 뿐이라면, 그게 더 슬픈 일 아닐까?”

“흐응,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신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네 말 대로라면, 신이라는 존재는 지금 우리를 슬프게 하려고 이런 대화를 나누게 한 거겠네.”

“글쎄. 어쩌면 우리가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싶었을 수도 있고. 뭐어,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우리는, 영원히 그 해답을 알 수 없겠지.”

“그래, 영원히 말야.”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자구. 렌코가 천천히 쾌락에 조교되는 심리 묘사, 정말 공들여 썼으니까.”

“메리, 좋게 말 할때 그거 당장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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